2025년 다해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착해지는 유일한 길> 복음: 루카 1,57-66.80

하느님의 아들이며 말씀이신 그리스도
(1540-1550), 모스크바 크레믈린 Cathedral of the Sleeper |
찬미 예수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한평생을 바친 위대한 예언자의 탄생을 기뻐하는 날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모두 한 아이, 요한의 탄생이 하느님의 위대한 계획 안에서 얼마나 특별한 사건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내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이사 49,1)고 외칩니다. 즈카르야는 아들의 이름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요한’이라 지음으로써 닫혔던 입이 열리고 주님을 찬미합니다. 요한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오실 그분’을 향한 삶, 그분께로 가는 ‘길’이 되는 삶을 사명으로 받았습니다. 오늘 저는 이 세례자 요한의 사명을 묵상하며, 우리가 어떻게 하면 ‘나쁜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는지, 그 근본적인 조건에 대해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1. ‘나쁜 사람’은 ‘나뿐인 사람’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나쁜 사람’은 아주 단순합니다. 바로 ‘나뿐인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이지요. 이런 사람은 선행을 하고, 착한 일을 하고, 다른 이들에게 친절을 베풀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선의의 중심에는 결국 ‘자기 자신’이 있습니다. 자기 평판, 자기 만족, 자기 이익이 그 뿌리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뿐인 사람’의 선함은 매우 위태롭습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성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손해가 되는 상황, 자존심이 상하는 상황, 억울한 상황을 만나면 그 안에 숨어 있던 이기심이 반드시 분노와 원망의 모습으로 터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왜 나만 이런 일을 당해야 해?”라며 세상을 탓하고 다른 사람을 원망하게 됩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결코 온전히 좋은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의 선함은 언제나 ‘상황’이라는 조건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 큰 상처를 남겼던 세월호 참사는 이 ‘나뿐인 사람’의 모습과 그 반대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수백 명의 승객을 책임져야 할 선장과 일부 선원들은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만 남긴 채 자신들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가장 먼저 탈출했습니다. 그 위급한 순간, 그들의 머릿속에는 오직 ‘나’라는 한 글자만 있었을 것입니다. 수많은 생명보다 ‘나뿐인’ 자신의 안위가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세상의 중심이 될 때, 인간은 이토록 비참하고 잔인한 선택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바로 그 지옥 같은 배 안에서, 우리는 정반대의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끝까지 남아 아이들을 구하려다 돌아오지 못한 선생님들이 계셨습니다. 구명조끼를 제자에게 벗어주고, 탈출하는 길을 알려주고, 마지막 순간까지 아이들을 다독이다 함께 스러져간 그분들은 자신의 생명보다 아이들의 생명으로 가는 ‘길’이 되기를 선택했습니다. 그분들에게 “왜 나만 희생해야 해?”라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오직 “어떻게 하면 이 아이들을 살릴 수 있을까?”라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던져, 아이들이 영원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준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자기중심성을 경고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저마다 남을 자기보다 훌륭한 사람으로 여기십시오.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 (필리 2,3-4) 자기 자신에게서 눈을 돌려 다른 이를 바라볼 때, 우리는 비로소 ‘나뿐인 사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2. 나는 누군가에게로 가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지독한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오늘 축일의 주인공인 세례자 요한이 그 답을 온몸으로 보여줍니다. 요한의 삶의 목적은 단 하나였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 사람들을 그분께로 이끄는 ‘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셨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마태 3,11)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요한 3,30) 이것이 바로 ‘나뿐인 사람’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내가 주인공이 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에게로 가는 ‘길’이 되는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내가 ‘길’이 될 때, 내 삶의 의미는 나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고, 내가 가리키는 그 ‘목적지’에서 나옵니다. 길은 스스로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길의 영광은 오직 그 길의 끝에 있는 목적지와 그 길을 걷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렇기에 ‘길’이 되기로 선택하는 순간, 우리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높아지려는 모든 욕망을 내려놓고, 오직 다른 이가 더 빛나기를 바라는 마음만 남기 때문입니다. 캘커타의 성녀 마더 데레사의 삶이 바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길’의 삶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하느님의 손에 들린 작은 몽당연필”이라고 불렀습니다. 연필은 스스로 무언가를 쓸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손에 들려 쓰일 때 비로소 의미를 갖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자신의 삶이, 자신의 모든 활동이, 오직 하느님께서 사랑의 메시지를 쓰는 도구, 즉 ‘길’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녀가 만난 가난하고 죽어가는 이들은 그녀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만났습니다. 만약 마더 데레사가 자신의 명예나 인정을 바랐다면, ‘나뿐인 사람’이었다면, 가장 더럽고 비참한 이들을 평생 끌어안을 수 있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그녀는 철저히 자신을 비우고 자신을 낮추어, 오직 그리스도만이 자신을 통해 드러나기를 바라는 ‘길’ 그 자체가 되었기에 그 모든 일이 가능했습니다. 그녀의 겸손은 그녀가 그리스도께 가는 ‘길’이었기에 필연적인 것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나쁜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바로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한 ‘길’이 되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가는 길이 되고, 남편은 아내에게 가는 길이 되어 주십시오. 부모는 자녀의 행복으로 가는 길이 되고, 자녀는 부모의 기쁨으로 가는 길이 되어 주십시오. 우리 본당의 모든 신자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우리 모두가 세상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길’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즈카르야는 아들 요한을 보며 이렇게 예언합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에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루카 1,76) 이 사명은 세례자 요한만의 것이 아닙니다.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자녀가 된 우리 모두의 사명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해봅시다. 나는 지금 누구를 위한 ‘길’이 되고 있습니까? 나의 말과 행동, 나의 삶은 누구를 향하고 있습니까? 혹시 나도 모르게 ‘나뿐인 사람’이 되어, 내 안의 상처와 이기심에 휘둘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억울한 마음이 들 때, 이기적인 마음이 고개를 들 때마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지금 누구에게로 가는 길인가?” 내가 길이 되어주고자 하는 그 사람, 그분을 떠올리십시오. 그분을 위해서라면, 그분이 빛나실 수만 있다면, 나의 이 감정쯤은 기꺼이 작아지게 만들 수 있는 힘을 청하십시오. 세례자 요한처럼, 우리도 기꺼이 작아짐으로써 그리스도를 크게 드러내는 삶, 나 자신이 목적지가 아니라 사랑하는 이들에게로 가는 겸손한 ‘길’이 되는 삶을 살아갑시다. 그럴 때 우리는 결코 ‘나쁜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이며, 우리를 통해 더 많은 사람이 주님께 이르는 복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