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묵상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우리 삶의 영원한 모델, “성 요한 세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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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경 [forgod] 쪽지 캡슐

07:39 ㅣ No.183016

2025.6.24.화요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이사49,1-6 사도13,22-26 루카1,57-66.80

 

 

 

우리 삶의 영원한 모델, “성 요한 세례자”

<성소, 광야, 겸손, 선포>

 

 

 

요즘 흰연분홍 자귀나무꽃 은은한 향기가 가득합니다. 꽃말은 ‘환희 또는 가슴 두근거림’입니다.

 

“향기맡고

 뒤돌아 찾아 내는 

 은은한

 자귀나무꽃 

 존재의 향기 

 겸손의 향기다”<2025.6.24.>

 

오늘 탄생 대축일을 지내는 성 요한의 겸손의 향기가 바로 이러합니다.새벽 교황청 홈페이지를 여는 순간 레오 14세 교황의 주일 삼종기도후 강론시 한 대목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어느때 보다 더욱 오늘날 인간성은 평화를 절규하고 호소합니다”

(Today more than ever, humanity cries out and pleads for peace)

깊이 마음에 새기고자 괄호안에 영어를 병기합니다. 인간성 대신 하느님을, 예수님을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절규하고 호소하십니다. 

 

지구촌 어디서나 유형 무형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정말 전쟁을 한다면 주님의 ‘평화의 전사’가 되어 영적전쟁만 해야 할 것입니다. 새삼 ‘그리스도 우리의 희망’이란 성구가 생각납니다. 우리의 희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태양처럼 모셨던 우리 삶의 영원한 모델 성 요한 세례자입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의 선구자,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을 빼놓고 유일한 탄생 대축일을 지내는 성 요한 세례자입니다.  역시 예수성심성월 6월 중심부에 자리 잡음으로 예수님과의 깊은 관련성을 보여줍니다.

 

얼마전 까지 왕성했던 수도원 원내 성모자상 주위의 금계국꽃들을 잊지 못합니다. 오전에서 오후까지 태양따라 가는 해바라기 모습들이 너무 신기하여 써놓았던 글입니다.

 

“참 눈부시다

 주님인 태양을 반사하니

 황금빛 얼굴

 성모자상곁 금계국꽃들

 주님인 

 태양을 닮았다

 주위가 환하다”<2025.6.5>

 

요즘 수도원 배밭은 자매들의 배봉지싸기가 한창입니다. 흡사 배밭 하늘에 별들이 달리듯 희봉지를 쌀 때마다 떠오르는 눈부시게 빛나는 희망의 별들, 사랑의 별들처럼 생각됩니다. 바라 볼 때마다 참 평화롭고 마음이 따뜻합니다.

 

마치 성모자상 곁의 금계국꽃들처럼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태양처럼 흠모(欽慕)했던 성 요한 세례자입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깨닫게 하는, 우리 삶의 영원한 모델이 성 요한 세례자입니다. 예수님 없는 성 요한 세례자를 상상할 수 없듯이 예수님 없는 우리도 상상할 수 없습니다. 결국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한 답을 줍니다. 네 측면에 걸친 답입니다.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에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첫째, 성소입니다. 

요한 세례자가 그렇듯 우리 믿는 이들은 결코 무명의 우연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느님께 불림받은 마치 ‘신의 한수’같은 귀한 성소자라는 것입니다. 우연처럼 보여도 지나고 보면 모두가 하느님의 은총이요 섭리였음을 깨닫습니다. 오늘 이사야서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는 예수님은 물론 요한 세례자 그리고 우리 모두에 해당됩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나를 부르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나의 영광이 드러나리라.’”

 

하느님께 주어진 요한이란 이름은 ‘주님은 자비로우시다’라는 뜻으로 즈카르야가 판에 ‘그의 이름은 요한’이 썼을 때 그는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자 하느님을 찬미했다 합니다. 결코 우연적 존재가 아니라 불림받은 존재임을 입증하는 복음입니다. 요한 세례자 뿐 아니라 우리 믿는 이들 하나하나가 이스라엘입니다. 주님께 불림 받음으로 비로소 존재감 충만한 존재로 주님의 자녀로 살 수 있게 된 우리들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둘째, 광야입니다.

인생 광야 여정이란 말도 있고, 도시의 광야라는 말도 있듯이 예나 이제나 광야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잘 들여다 보면 우리 삶의 본질은 함께 해도 내면은 외롭고 쓸쓸한 광야입니다. 예전 광야를 찾았던 사막의 수도자들의 목표는 둘이었으니 하나는 주님과 만나는 것, 하나는 악마와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굳이 광야를 찾을 필요는 없습니다. 바로 내 삶의 자리가 주님을 만날 자리요 악마와의 영적싸움터 광야이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것은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실 때 광야인생은 낙원인생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새롭게 탐구하며 배워야 할 광야의 영성입니다. 광야에서 메뚜기와 꿀을 먹으며 심신을 단련했던 요한 세례자는 광야에서 낙원을 살았음이 분명합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가 이를 입증합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셋째, 겸손입니다.

광야영성의 진정성은 겸손의 덕에서 드러납니다. 겸자무적입니다. 악마를 물리치는 최고의 무기는 겸손입니다. 악마가 다 모방해도 겸손을 모방하지 못합니다. 끝가지 주님을 앞세웠던 요한 세례자는 참으로 자기를 알았던 지혜와 겸손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오로 사도가 이를 언급합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이와 더불어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고백한 요한 세례자야 말로 겸손의 대가입니다. 자기를 모르는 무지에 대한 답도 겸손뿐임을 깨닫습니다. 요한 세례자가 물음이라면 예수님이 답이듯 우리도 똑같습니다. 

 

예수님을 떠나선 우리 존재의 신비는 해명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알고 나를 알게 하는 겸손이야 말로 무지의 병에 대한 최고의 치유제입니다. 흙(humus)에 어원을 둔 겸손(humilitas)과 사람(homo)입니다. 흙처럼 겸손하여 사람이니 겸손은 참사람의 표지입니다. 

 

넷째, 선포입니다.

성소도 광야도 겸손도 궁극의 목표가 아닙니다. 궁극의 목표는 하느님의 나라 복음의 선포요 이를 통해 완성되는 성소, 광야, 겸손입니다. 선포나 선교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타종교와의 결정적 차이입니다.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란 정의가 바로 선포를 함축합니다. 오늘 이사야서 마지막 구절은 믿는 모두에게 부여되는 사명입니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각자 세상의 중심인 삶의 제자리에서 주님의 빛으로 사는 복음 선포입니다. 이래서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 밖으로는 주님의 사도라 하고, 안으로는 수도승, 밖으로는 선교사라 칭하는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입니다. 수도공동체 자체가 세상의 빛이, 세상의 소금이 되어 존재론적 복음선포에 충실한 여기 정주의 요셉수도공동체입니다. 

 

중요한 것은 선교에서도 한결같음입니다. ‘느긋한 걸음이 가장 멀리 가니 먼 길을 앞당길 수 있는 방법은 지치지 않는 것입니다.’<다산>. 그러니 우보천리, 호시우행의 자세로 소처럼 사는 것입니다. 1949년생 소띠라는 사실에 저는 만족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성 요한 세례자를, 우리 예수님을 닮아 각자 삶의 자리 광야에서 충실히, 한결같이 복음 선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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