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묵상

송영진 신부님_<주인공은 ‘예수님’과 ‘나’, 그리고 ‘우리’입니다.>

인쇄

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10:01 ㅣ No.183024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루카 1,57-66.80).”

1) 우리 교회가 ‘탄생’을 경축하는 날이 세 번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탄절(12월 25일), 성모님의 성탄절(9월 8일),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입니다.

성모님의 탄생 축일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대축일(12월 8일)’을 기준으로 해서 정한 날이고,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은 예수님의 성탄절을 기준으로

해서 여섯 달 앞으로 정한 날입니다(루카 1,26).

예수님의 성탄절을 기준으로 했다면 6월 25일이 되어야

하는데, 그날은 우리나라에서는 ‘6.25 전쟁일 -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과 겹치기 때문에

하루 앞당겨서 6월 24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성탄절을 기준으로 해서 정한 대축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3월 25일)’이 그날입니다.

이 모든 날들의 핵심 주제는 단 하나, ‘메시아 강생’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도

‘메시아 강생’을 경축하고 감사드리는 날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이 예수님의 탄생 외에

유일한 탄생 축일이라는 매일미사 책의 설명은

틀렸습니다(매일미사. 2025. 6. 오늘의 묵상).>

2) 가브리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한 일은(루카 1,13-17), 사실은 ‘메시아 강생’을

예고한 일이고, 세례자 요한의 출생 후에 즈카르야가

부른 찬미가인 ‘즈카르야의 노래’도 ‘메시아 강생’을

찬양하고 찬미하면서 감사드리는 노래입니다(루카 1,68-79).

이 모든 일의 주인공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이고,

예수님께서 구원하려고 하시는 ‘나’, 그리고 ‘우리’입니다.

<‘구원’은 ‘내가’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그런

‘나에게’ 오셨기 때문에 바로 내가 주인공이라는 것입니다.>

3) “구원이 도대체 무엇인가?” 라고 물으면,

사람마다 그 대답이 다를 것입니다.

각자 생각하는, 또는 원하는 ‘구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과 굶주림에서 벗어나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병고’에서 해방되는 것을,

또 어떤 사람은 정치적, 사회적 탄압에서 벗어나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생각들과 희망들이 있을 것입니다.

어떻든 그 생각들과 희망들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모두 ‘구원의 시작’일 뿐이고, ‘구원의 완성’은 종말의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가난, 굶주림, 병고, 정치적 억압 등에서 벗어나는 것,

또 죄와 죽음의 억압에서 해방되는 것까지 포함해서,

온갖 억압과 압박에서 완전히 해방되어서 참되고 영원한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것이 ‘궁극적인 구원’입니다.

그 구원이 완성되는 때가 종말이고, 그 구원을

완전하게 또 영원히 누리는 나라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그 구원을 우리에게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로

우리를 인도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길’과 ‘문’을 보여주는 것까지만

하시고, 그곳을 향해서 걸어가는 것은

우리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끝까지 우리와 함께 걸으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4) 사람들 가운데에는 현세의 복만, 즉 세속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만 바라면서, 내세, 구원,

하느님 나라, 영원한 생명 등에 대해서는 관심 갖지 않고,

그래서 예수님의 복음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인생은 먼지처럼 허무하게 끝날 것입니다.

또 그들 가운데에는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미신을 믿는 이들도 많은데, 바오로 사도는 그들을

‘바보’ 라고 부릅니다(로마 1,22).

‘참 지혜’의 반대쪽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신앙인들 가운데에도 예수님의

가르침은 듣지 않고 ‘현세의 복’만 찾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런 사람들을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1코린 15,19).

이미 ‘구원의 길’에 들어섰으면서도 구원은 보지 않고,

구원이 아닌 하찮고 허무한 것을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는 말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4 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