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한가위 (다해) 루카 12,15-21; ’25/10/06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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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5-09-27 ㅣ No.6268

한가위 (다해) 루카 12,15-21; ’25/10/06 월요일

 

 

 

 

 

합동 위령미사를 봉헌하며 기억하는 분들

 

우리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들과 조상님들, 대부 대모님들,

우리의 오늘이 있기까지, 우리에게 영향을 끼쳤던 가족과 친척, 친지들,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지도자들, 선생님들, 은인들, 후원자들, 이웃사촌들, 수호천사들,

우리나라의 국토와 민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졌던 순국선열들, 독립투사들, 의사들, 호국 열사들, 무도인들, 드러나지 않아 이름조차 모르는 의인들,

일본 제국주의의 대동아 침략 전쟁에 끌려가고 억울하게 징용된 남녀 민간인들, 6.25 남북전쟁과 외국에 파병 나가 생을 마감해야 했던 무명용사들과 화학 전쟁 등의 참여 폐해로 한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상이군인들과 남녀 피해자들과 유가족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우리와 우리 사회와 문화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애쓰신 선열들, 순교자들, 신비가들, 영성가들, 사상가들, 군자들, 철학자들, 예술가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우리 사회의 질서와 유지를 위해, 남보다 이렇다 할 큰 소득이 없어도, 대대손손이 이어오는 작업을 통해 우리 사회와 인류의 존속과 유지와 발전을 위해 희생해온 공직자들, 사회복지사들, 자원봉사자들,

우리 사회의 설립과 재건을 위해 장시간 과로하며 안전장비도 제대로 없는 산업현장에서 애쓰는 주역이면서도 이렇다 할 임금이나 적절한 치료나 의료혜택이나 보상도 충분히 받지 못한 채 어렵게 살아가는 노동자들,

농어촌과 광업 등지에서 큰 소득이 없어도 사회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꾸준하고 묵묵히 수행해 왔던 우리 사회의 숨은 일꾼들,

어찌 보면, 우리나라의 산업화와 더불어 알게 모르게 사회의 문제와 병고와 아픔을 우리 대신 짊어지고 희생하며 살아야 했던 장애우들,

이러저러한 차별과 박대를 당하며 우리 사회에서 밀려난 난치병 환우들, 철거민들과 도시 빈민들,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사람들,

다른 사람과 다르게 생기고,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한다는 이유로 사회에서 떠밀려 나 간 소외된 사람들,

우리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열악한 노동 조건에서 일하면서도 존경과 칭찬은커녕 무시를 받으면서 불평등한 조건에서 살아야 하는 외국인 노동자들과 다문화 가정들,

그리고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서 합동 위령미사를 드리며 기억하는 모든 사람을 주님께서 무한하신 자비로 품어 안아 주시고, 그 고통과 아픔을 다 씻어주시고, 위로해 주시며, 주님 사랑으로 갚아 주시고 채워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명절 때면 어김없이 가족들이 모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가족이 뭐가 좋다고 그렇게 때마다 일거리를 뒤로하고 수만 거리를 마다하며 가족끼리 모일까 싶습니다. 가족이 뭐가 좋습니까? 무엇보다 가족은 허물이 없어 좋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내가 무슨 말을, 무슨 일을 해도 다 들어줄 것 같고, 늘 내 편이 되어줄 것 같고, 늘 나를 편하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 한 사람 따지고 보면 우리 일가족, 친척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렇게 다 내게 잘 해주고, 편안하게 해주고, 다 받아주지는 않습니다. 나 자신도 가족 중 어느 누구는 반갑고 잘 대해주는데 다른 어느 누구는 그렇게 썩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가족이 아름답게만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꿈꾸는 가정보다는, 그야말로 지지고 볶고, 아주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인간 공동체를 보여줍니다. 창세기 4장에서 아담과 하와는 첫째 아들 카인과 둘째 아들 아벨을 낳습니다. 그런데 첫째 아들 카인이 둘째 아들 아벨을 죽입니다. 카인은 왜 아벨을 죽였습니까? 카인은 아벨이 싫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의 봉헌물은 받아주시지 않고, 아벨의 봉헌물을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카인은 세상 많은 남자가 그렇듯이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가 그 누구에게 뒤처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카인은 자기가 선택받지 못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화가 났습니다. 거기다가 카인은 다른 사람 아닌 동생이 선택되고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 더 괴로웠습니다. 자신이 동생과 비교하여 뭐가 모자라서 선택받지 못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자기 말고 아벨을 선택하신 것은 잘못되었고 부당한 처사라고 여겼습니다. 아벨이 미웠고, 하느님과 아벨을 원망했습니다. 결국 자기 이외에 다른 사람을 인정할 수 없었던 카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고 맙니다. 카인은 자신만이 선택받아야 하고, 자신만이 사랑받아야 하는 사람이기에, 다른 사람과는 같이 살 수 없었고, 다른 사람을 없애서라도 세상천지에서 자기 혼자만이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카인에게 가족은 무엇입니까? 카인에게 부모님인 하느님은 편애주의자였고, 형제는 자신의 길을 방해하여 제거해야만 자신이 살 수 있는 걸림돌이었습니다. 카인은 가족과 인류사회가 자신을 부당하게 처우하는 세상이었고, 가족과 세상은 카인이 자기밖에 모르는 문제아였습니다. 카인은 자신이 사랑받지 못했다고 여기는 불평불만자였고, 부당한 세상에 항거하는 방랑자였습니다. 세상은 카인을 따돌렸고, 살인자로 내몰았습니다.

창세기 27장부터 36장까지 보면, 야곱과 에사우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적극적이고 활달한 첫째 아들 에사우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고, 소극적이고 얌전한 둘째 야곱은 어머니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에사우와 야곱은 태어나면서부터 서로 경쟁 관계가 됩니다. 둘째 야곱은 아버지의 지위와 재산이 탐이나 첫째인 에사우가 받을 축복을 부정한 방법으로 가로챕니다. 그러나 야곱이 형이 이어받을 지위와 재산을 가로챘다고 여기는 순간, 그는 첫째인 에사우의 보복을 피해 근 20여년 동안 알거지가 되어 남의 종살이를 하며 도피생활을 하게 됩니다. 에사우는 에사우대로 동생과 결탁하여 장자권 이임 질서를 문란케 한 어머니와 그에 속아 넘어간 아버지를 원망하며 삐뚤어진 삶을 살게 됩니다.

 

야곱과 에사우에게 가족은 무엇입니까? 야곱과 에사우는 세상에 둘도 없는 쌍둥이 형제였지만, 평생 견원지간으로 지냈고, 서로 사이좋게 살기는커녕 평화 속에서 공존하지 못했습니다. 나눔이 아닌 독점적 탐욕으로 서로를 배제하고자 했고, 서로를 쫓아내기에 바빴습니다. 재산과 권력에 눈이 먼 형제는 가족을 자기 생애의 둘도 없는 동반자가 아니라, 자신의 몫을 극대화하려는 탐욕의 경쟁자였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보호하고 보호받으며 살아나갈 수 있는 혈연의 가족관계를 파괴하고, 평생 서로를 피하며 원수처럼 공격하며 불행하게 살았습니다. 자신을 내어주거나 나누기보다는 자신을 챙기고 뺏고 뺏기며 살았습니다.

 

인간이 장단점을 가진 인격체라는 사실을 서로 인정하고, 서로의 장단점을 조화롭게 사용하여 자신들 인생의 풍요와 동반자들의 인류공동체에 평화로운 공존을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야곱과 에사우 형제는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상대를 부정한 방법으로 제거하고 남의 것을 탈취하며, 현세적인 경쟁과 물질적인 탐욕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서 일생을 긴장과 불안 그리고 적대관계로 살았습니다.

창세기 37장부터 50장까지 요셉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셉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잘난체를 하자, 나머지 열한 형제들은 요셉을 시기했고, 급기야는 이집트로 팔아버렸습니다. 똑똑하고 잘났던 요셉은 이집트에 팔려갔어도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자신의 소질을 발휘할 수 있었고 우여곡절 속에 이집트의 국무총리격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요셉을 팔아버린 형제들이 흉년으로 먹을 것이 없게 되자 이집트까지 찾아와 요셉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먹을 것을 팔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때야말로 요셉이 그렇게도 칼을 갈면서 절치부심하며 기다렸던 복수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마치 승자의 여유라도 부리듯 형들에게 말합니다.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시어, 여러분을 위하여 자손들을 이 땅에 일으켜 세우고, 구원받은 이들의 큰 무리가 되도록 여러분의 목숨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여러분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창세 45,5.7-8)

 

카인과 아벨, 야곱과 에사우는 인간사회의 약육강식을 따라 살아남기 위해 형제와 이웃을 원수로 대하고 싸웠지만, 요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눈 앞에 펼쳐진 자신의 현세적인 처지와 물질적인 핍박을 해결하기 위해 가족과 적대관계를 맺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먹고 살기 위해서는, 성공하기 위해서는,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라도 더 올라가고 하나라도 더 취득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비록 가족이라 하더라도 어떻게든 밟고 제거하면서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처지와 세상과 가족관계를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바라보고 재해석하며, 자신을 팔아버린 형제들의 가련한 처지를 바라보며 도움의 손길을 내밉니다. 형제들은 요셉을 제거하기 위해 이집트에 팔아버리는 죄악을 저질렀지만, 하느님께서는 인류의 죄악을 통해서라도 이스라엘 민족을 살리고자 섭리하셨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고, 하느님의 도우심을 믿고 의지하며 자신을 내어줍니다.

 

여러분에게 가족은 누구이며 무엇입니까? 여러분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기보다 그의 전체를 바라보기 위해, 그가 어릴 때부터 어떻게 자라왔고, 지금까지 어떤 경로를 통해 살아왔는지 되돌아보며, 그의 전인격을 이해하고 대하기로 합시다.

 

오늘 집에 가셔서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의 장점을 최소한 열 가지 이상씩 적어보며 가족간의 이해와 사랑의 첫걸음을 시작해 봅시다. 그 어느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나에게만 맡겨진 그 인격을 바라봅시다. 그를 낯설어하고 낙인찍고 경계하는 세상의 눈으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에게 선물로 내주신 그 사랑의 눈으로 바라봅시다.

 

나를 경쟁과 통제의 인격이 아니라 희생과 봉사의 선물로 가족에게 내줍시다. 그래서 내가 가정에 그렇게도 바라던,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이 어떻게 되던 나를 편안하게 받아주고 옹호해 주기를 바라던 그 모습 그대로 우리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렇게 하며 성가정을 이룹시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가족관계를 다시 정립하고 우리 성가정을 이룹시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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