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연중 제28주일(다해) 루카 17,11-19; '2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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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5-09-27 ㅣ No.6274

연중 제28주일(다해) 루카 17,11-19; '25/10/12

 

 

 

 

 

우리 중에 누구 하나 어느 한 사람 잘 못살고 싶어서 못살고, 착하게 살고 싶지 않아서 악하게 살고, 실수하고 싶어서 실수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 하나 죄짓고 싶어서 죄 짓는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나 잘 살고 싶고, 모범적으로 살고 싶고, 착하게 살고 싶지만, 자기 몸 하나도 제대로 어떻게 못 하는 우리의 나약함이 우리를 어려움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자기의 노력과는 관계없이 사회의 환경이 자기 하나의 힘으로 해결하기에는 너무나 크기에 그 힘과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나병환자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나병환자들은 자기들이 원해서 걸리는 병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이 걸린 나병 때문에 고통스럽게 살아갑니다. 거기다가 하나 더, 나병 환자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의식 때문에 더 힘겹게 살아갑니다.

 

그 사회의식은 바로 낙인입니다. 낙인은 일반인들이 어떤 사람이나 어떤 집단에게 나타난 일시적인 현상을 그와 그 집단의 전부로 치부하고, 그 현상의 이름을 그나 그의 집단에게 명명하고, 그가 속한 전체 사회적인 차원에서 그들을 색다르게 바라보고 취급합니다. 결과적으로 낙인은 그와 그 집단을 실제로 그런 사람들로 비추게 합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다른 사람들이 낙인을 찍어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는 그들 스스로도 사람들이, 어처구니없게도 자신들에게 붙여준 이름이 나타나는 대로 변화된다는 것이 교육심리학적인 '낙인이론과 낙인효과'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의 일반 사람들은 나병환자들을 바라보면서, 나병 환자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나병에 걸렸다고 여겼습니다. 또 그들은 사회의식적으로 나병환자들에게 대중과 격리되어 한 평생 자기 병고를 통해 자기 죗값을 짊어지고 살도록 요구했습니다.

 

나병환자들을 돕고 아끼면서 치료해 주고, 비록 장애를 가지고 있어도 잘 살아가도록 해야 하는 것이 하느님 사랑의 근본인 반면, 당시 유다 사람들은 나병을 쉽게 제거하지 못하고, 그 병의 원인조차 합리적으로 밝혀내지 못하자, 나병에 걸린 사람이 죄를 지어 나병에 걸린 것으로 치부하고 저주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나병 환자들도 죄인으로 낙인을 찍어 격리시키고 도와주지 않자, 나병 환자들도 스스로의 힘으로 살기 위해서 죄를 짓게 되는 악순환이 거듭되었습니다. 그들 스스로도 자신들이 죄를 지어 나병에 걸린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래서 사람들 앞에 떳떳이 나설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죄인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하는 모든 행위를 다 죄로 인식하고, 또 그렇게 죄를 지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마치 자신들의 운명인 양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일반 환자들은 예수님께 달려들어 고쳐달라고 애원을 하는데 반해, 나병환자들은 자신들이 죄인이기 때문에 차마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고, "멀찍이 서서"(루가 17,12) 예수님께 청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감히 저희를 고쳐주십시오.’라고 청하지도 못하고,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13)라고 소리 높여 말합니다.

 

그들의 청을 들으시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더 이상 죄인이 아님을 밝혀주십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14)

그것은 그들을 죄인으로 낙인을 찍은 당시 사회의 일반인들과 또 그렇게 판정한 사제들에게 그들이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라는 의미입니다. 동시에 나병환자들에게도 '너희는 죄인이 아니다.' 내지는 '너희 죄는 씻어졌다.'라는 말씀을 해주심으로써, 그들의 병든 몸과 마음을 정상으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복음사가는 이 사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14)

 

예수님께서는 치유의 기적을 통해, 나병환자들을 나병에서 구해주십니다. 그리고 나병환자들을 나병을 가진 죄인이라는 스스로의 인식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사제에게 가서 깨끗해진 몸을 보이도록 함으로써, 사회의 정상적인 구성원으로 복구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감사드리려고 돌아온 열 사람 중의 한 사람에게,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8)라고 하시면서 돌려보내십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나병을 고쳐주시고 사회로 복귀시켜 주신 분이 사제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란 사실을 믿고 감사드리러 찾아온 이를 구원하십니다.

 

그런데 한가지 우리에게는 예수님께 감사드리러 돌아온 한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16)이라는 사실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유다인들은 하느님이 가르치는 대로 병자들을 사랑으로 치유하지도 않았습니다. 또 병자 중에서도 유다인 환자는 예수님이 고쳐준 것에 대해 감사드릴 줄조차 모릅니다. 오히려 유다인들이, 이방인이며 하느님을 제대로 믿지 않는다며 낙인을 찍었던 사마리아 사람만이 돌아와 감사드립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자신이 처한 처지와 우리 삶에 대해 불평하고 만족하지 못해 탐욕을 부리고, 자기 분수를 모르고 방황하는 우리를 한층 더 부끄럽게 하고, 우리 생애를 다시 한번 돌아보도록 합니다.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과 일들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오늘 이렇게 살게 해주시는 분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겸손되이 믿어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바라는 만큼은 아니어도, 오늘 이렇게 눈뜨고 살아서 먹고살게 해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구원되어 살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되돌아봅시다.

우리는 혹시 우리 주위의 사람들을 낙인찍고 있지는 않은지?

갖가지 별명으로 그를 낙인찍고, 그를 그런 상황에 몰아넣고, 그 안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막아 놓고 있지는 않은지?

심지어는 있지도 않은 사실을 만들어 내거나, 의심하거나, 오해하거나, 과장시키거나, 자기 이로운 대로 해석해서, 그나 그 사람들을 격리시키고 제거시키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지?

 

만일에 그가 그런 상황에 실제로 놓여있다면, 우리는 그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단점과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함께하고, 적극적으로 돕고 있는지도 자문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내 자신의 삶 속에서도,

우리가, 우리의 삶을 허락하시고, 살게 해주시는 분이 주님이라는 것을 믿는 사마리아 사람인지?

우리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펼쳐주신 나의 생과 일상에 감사드리며 사는 사마리아 사람인지?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를 향해 묻고 계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 17,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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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8주일 꽃꽂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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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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