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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편지
1. 데살로니카 교회의 창건 바오로가 로마 제국의 속주(屬州)인 마케도니아의 주도(州都) 데살로니카에 도착한 것은 제2차 선교 여행을 하고 있던 50년이다. 이로써 데살로니카는 바오로 사도가 발을 들여 놓은 유럽 대륙의 첫 대도시가 된다. 기원전 4세기 말엽 마케도니아 임금 필리포스 2세의 사위 카산드로스가 건설하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누이인 자기 부인의 이름을 따서 데살로니케라고 명명한 이 도시는 곧바로 중요성을 띠게 된다(오늘날의 이름은 살로니카이고 데살로니카는 라틴 말식 표기이다). 에게 해의 테르마이 만(灣) 가장 안쪽에 자리잡은 이 곳은 그 지리적 위치 덕분에 항구로서도 안전성이 보장된 곳이었다. 로마인들은 현대로 치면 고속도로라고 할 수 있는 가도(街道)들을 제국 내에 많이 건설하였다. 데살로니카는 그 가운데 하나로서 마케도니아 지방을 가로질러 아드리아 해와 에게 해를, 달리 말해서 로마와 아시아를 잇는 에냐티아 가도(Via Egnatia)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이 곳은 바다만이 아니라 육지 쪽으로도 교통의 요충지가 된다. 이러한 데살로니카는 비단 마케도니아 왕국 시대만이 아니라, 로마 제국 시대에도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이 곳은 특히 기원전 149년, 점점 더 심해지는 로마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마케도니아인들이 들고일어났을 때 반란의 중심지가 된다. 일 년 뒤에 마케도니아는 로마의 속주가 되고, 마케도니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데살로니카는 주도가 된다. 기원전 42년에는 제국 내 자유 도시의 지위를 획득하여, 지방 총독이 임명된다. 이에 따라 마케도니아는 더욱 발전하고 항만 시설도 확장된다. 바오로가 데살로니카에 갔을 때, 그 곳은 번창한 상업 도시로서 이방인들이 많이 살았다. 거기에는 유다인들의 중요한 집단 거주지도 있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오로는 실바노와 디모테오를 데리고 필립비를 떠나 데살로니카로 간다(사도 17,1-10). 사도행전에서는 사도가 안식일을 세 번 지낼 정도로만 데살로니카에 머무른 듯이 이야기하는 것으로 들리는데(2절), 그의 체류 기간이 그렇게 짧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그는 자기 생업인 천막 만드는 일을 하였고(1데살 2,9) 필립비 신자들에게서 여러 차례에 걸쳐 도움을 받았으며(필립 4,16), 유다인들과 유다교로 개종한 이들, 특히 이방 민족 사람들을 복음을 중심으로 한데 모은다(1데살 1,9 참조).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면, 바오로가 짧지 않은 기간을 데살로니카에서 보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곳에 사는 유다인들이 거세게 반발하는 바람에, 바오로는 활동을 멈추고 서둘러 그 곳을 떠나게 된다. 유다인들은 군중을 선동하여 소란을 일으키면서, 몇몇 신자들을 고을 수령들에게 끌고 가 그들이 황제의 법령을 어긴다고 고발한다(사도 17,5-9). 그리하여 데살로니카 신자들은 밤을 틈타 바오로와 실바노를 베레아로 떠나 보낸다. 그러나 데살로니카의 유다인들은 그 곳까지 쫓아가 바오로의 설교를 방해한다. 사도는 이렇게 갓 태어난 공동체를 떠난다. 이러한 사정을 생각하면, 박해 중에 혼자 버려진 이 새 신자들에 대한 그의 불안을 이해하게 된다. 또한 이들에게 격렬한 어조를 사용하며 유다인들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도 납득이 간다(1데살 2,15-16 각주).
2. 데살로니카 1서 데살로니카 1서를 읽을 때에 가장 먼저 받는 인상은 그 어조가 사도의 다른 서간들과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사도는 자기의 걱정을 토로하는데, 교리상의 무슨 큰 문제 때문에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가 설립해 놓고 바로 떠나야 했던 공동체와 자신을 잇는 강한 감정을 보여 주고 싶어한다. 그는 잠깐 동안 불안해 하지만, 마침내 좋은 소식을 듣고서는 행복감에 젖어든다. 이 어린 교회에서 갓 태어난 믿음이 빛을 발하는 것을 보는 기쁨은, 사도의 긴 감사 말씀에서도 잘 드러난다(1데살 1,2-10: 그리스 말에서는 이 아홉 개 절이 단 한 문장으로 되어 있다). 그는 다른 서간들에서와는 달리, 신도들의 오류를 바로잡을 필요가 없다. 사도는 데살로니카 신자들이 올바른 길을 걸어가고 있으며 시련도 훌륭히 견디어 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들에게 권고할 것은 딱 한 가지, 계속 그 길에 정진하고 성장해 나아가라는 것이다. 물론 바오로는 다시 데살로니카 신자들 곁으로 가서 그들의 믿음에 아직도 부족한 면을 채워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1데살 3,10). 그러나 걱정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충실할 뿐만 아니라,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다시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1데살 4,9; 5,1). 데살로니카 신자들은, 이미 여러 번 선포된 바와 같이(1데살 1,10; 2,19; 4,16), 그리스도께서 멀지 않은 시기에 영광스럽게 재림하시리라는 희망 속에 살아간다. 그래서 이 작고 어린 교회야말로, 복음이 온갖 장애에도 불구하고 활동을 계속한다는 생생한 본보기가 된다. 사도의 이러한 기쁨과 신뢰와 열정이 단순하고 직설적인 말로 표현된다. 그래서 데살로니카 1서는 자녀들에 대해 사려가 깊고 애정이 넘치며 또 그들이 어떠한 어려움을 극복해 가도록 해야 하는지 잘 아는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보내는 편지와 같다(1데살 2,11-12 참조). 이러한 데살로니카 1서를 통해서, 교회 역사의 여명기에 펼쳐진 첫 투쟁의 열기와 첫 승리의 감격을 생생히 느끼게 된다. 교회의 시작이라는 중대한 순간에 이루어진 이 주인공들의 헌신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사실 데살로니카 1서는 바오로가 쓴 최초의 서신일 뿐만 아니라, 신약성서 전체에서도 가장 오래 된 문서이다. 이 서간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스무 해쯤 지난 50년 초, 사도가 고린토에 도착하고 나서 조금 뒤 디모테오가 데살로니카의 소식을 가지고 왔을 때에 발송되었을 것이다. 이 때에는 복음과 관련된 여러 전통이 이미 꼴을 갖추었지만, 현재의 복음서들은 아직 저술되지 않았다. 물론 신약성서에는 데살로니카 1서보다 더욱 오래 된 전통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본문들이 있기는 하지만, 문학적인 관점에서는 이 서신이 그리스도교 최초의 문헌이 된다.
3. 데살로니카 2서 데살로니카 2서는 바오로 사도가 1서를 보내고 나서 조금 뒤에 썼다는 것이 상당히 공통된 견해이다. 사실 발신인과 수신인이 같음을 드러내는 동일한 인사말로 시작하는 이 두 서신은(1데살 1,1과 2데살 1,1-2), 초대 교회에서부터 아무런 이의 없이 바오로의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럼에도 데살로니카 2서를 바오로가 직접 집필하였느냐는 친저성(親著性)에 관해서는 몇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우선 여남은 낱말이 이 2서에만 나오고 바오로의 다른 저술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바오로의 친저성을 의심하게 할 정도로 심각한 사항이 되지는 못한다. 이보다는 데살로니카 1서와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 그리고 2서에서는 몇몇 낱말이 바오로의 다른 서신들에 나오는 것과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데, 그 사실도 바오로가 이 서신을 썼다는 것을 부정하는 데에는 더 이상 충분한 단서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이 두 서간을 주의 깊게 비교해 보면 두 가지 중요한 사항을 발견할 수 있다.
(1) 이 두 문서는 문학적으로 독특한 유사성을 드러내는데, 데살로니카 2서의 많은 표현, 때로는 절 전체가 1서에서 따온 것 같이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2데살 2,1-12의 특수한 가르침을 제외하고, 2서 처음부터 끝까지 세 장 전체에 걸쳐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좌우 구절들을 비교해 보면 여실히 드러난다. 1데살 1,2-3 ─ 2데살 1,3 1데살 2,12 ─ 2데살 1,5 1데살 3,13 ─ 2데살 1,7 1데살 3,11-13 ─ 2데살 2,16-17 1데살 2,9 ─ 2데살 3,8 1데살 5,23 ─ 2데살 3,16 1데살 5,28 ─ 2데살 3,18 이 두 서간이 이처럼 비슷하게 된 것은 사도가 1서를 발송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 바로 2서를 썼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처럼 연이어 서간을 보냈다면, 1서를 쓸 때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던 상황이 데살로니카에서 갑자기 벌어졌음을 전제해야 하는데, 2서에서는 그러한 상황의 급변을 엿볼 수가 없다. 또 1서의 어조는 열정적이고 감동적인데 2서의 어조는 상당히 장엄하며, 1서의 문체는 단순하고 직접적인데 2서의 문체는 상당한 손질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불과 몇 주 간격으로 같은 사람들에게 써 보낸 두 서신이 왜 이렇게 다른지도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2) 세상 종말에 벌어질 사건들에 관한 데살로니카 2서의 가르침은(다음 단락 참조), 주님의 날이 갑자기 들이닥친다는 1데살 5,1-6의 내용과 부합하지 않는다. 데살로니카 1서는, 사람들이 적어도 겉으로는 평화를 누리는데 아무런 중간 과정 없이 갑자기 파멸이 닥친다고 가르치는 반면에, 2서는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재림하시기 전에 인간 역사의 여러 단계가 이어지는 모습을 서술한다는 사실이 더욱 기이하게 여겨진다. 이러한 문제를 묵시 문학의 특성으로 해결하기도 한다. 복음서 자체에서도 볼 수 있듯이(마르 13장 참조), 묵시 문학에서는 종말이라는 사건의 돌연성과 종말의 사건을 예고하는 표징이라는 두 주제가 뒤섞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오로가 필요에 따라 세상 종말에 관해서 가르치기는 하지만(1데살 4,13─5,3; 1고린 15,20-24), 한동안 배교가 이루어진다거나 ‘그리스도의 적’이 등장한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데살로니카 2서의 본질적인 목적이 바로 이러한 묵시 문학적 장면들을 설명하려는 것임이 분명하다(2데살 2,1-12). 만일 이 서간의 목적이 기존의 가르침을 더욱 명확히 하거나 바로잡는 것이라면, 왜 문서로든 구두로든 주님의 날이 “밤도둑처럼”(1데살 5,2) 예상하지 않은 때에 들이닥치리라고 강조한 예전의 가르침을 단순히 상기시키는 형식으로 이루어지느냐 하는 의문이 생긴다(2데살 2,5). 이 문제는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지만, 옛 교회 전통에서도 중시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결정적인 문제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데살로니카 2서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일정한 상황에 응답하는 서신이다. 자기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주님의 날이 빨리 오지 않는 것을 보고 여기저기에서 신도들이 불안해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는 자세를 잘못 이해할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한 방식으로 해석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바오로의 가르침을 숙지하는 그리스도교 저술가, 어쩌면 어떤 공동체의 책임자가 이러한 오류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하고서는 사도의 이름을 빌려 이 둘째 서신을 집필하였으리라는 설명이 제시된다. 이러한 가설은 가능성이 큰 것으로, 데살로니카 1서와 2서의 내용이 잘 연결되지 않는 사실도 적절히 설명할 수가 있다. 오늘날에는 남의 이름으로 어떤 문서를 내놓는 것이 상당히 잘못된 일로 간주된다. 그러나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문학에서는 전통적 가르침을 더욱 명확히 밝히고 그 내용을 더욱 심화할 목적으로 이 방법을 자주 썼다. 그래서 위조나 왜곡과는 거리가 멀다. 언제 누가 집필하였든지 간에, 데살로니카 2서는 이후 교회 역사에서 큰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스도께서 곧 재림하시리라고 믿는 이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현실을 도외시하고 거부하려는 경향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이 서신은 그 모호한 묵시 문학적 표현들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치러 나아가야 하는 투쟁의 현실을 피하여 멀리 달아나려는 모든 시도를 차단하고,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은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향하여 늘 깨어 있는 자세와 분리될 수 없음을 신도들에게 상기시켜 온 것이다.
4. 바오로의 선교 체험 데살로니카 1서, 특히 앞의 세 장에서 바오로는 현재의 일을 이야기하면서도, 계속 과거의 일을 돌이켜 본다. 이러한 연유로 곳곳에서 ‘알다’와 ‘기억하다’ 같은 동사가 쓰인다(1데살1,3.4.5.; 2,1.2. 5.9.11; 3,3.4.6; 4,2; 5,2). 이는 사도와 이 서간 수신인들의 관계가, 몇 달 전까지 일정 기간 함께 지냈다는 사실 하나로 맺어졌음을 드러낸다. 이 관계는 곧 복음 선포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탄생하는 공동 체험에 근거한다. 바오로가 이러한 공동 체험을 회상하는 덕분에 우리는 매우 값진 증언을 얻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계기가 없었다면, 일단의 사람들이 파스카 신앙을 처음으로 받아들인 것에 대해서 사도가 지녔던 개인적인 속내를 그렇게 상세히 드러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복음이 선포되자 데살로니카 사람들은 자기들의 삶을 바꾼다. 그들은 이제 예수님, 곧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리신 성자의 재림을 기다리는 희망 속에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바오로는 이러한 그들의 믿음과 사랑과 인내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수가 있는 것이다(1데살 1,3). 이러한 근본적인 변화는 무엇보다도,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에게 일어났던 것과 똑같은 하느님의 주도적 작용 곧 사랑에 따른 선택에서 비롯된다(1데살 1,4; 2,12). 바오로는 자기의 인간적 말이나 언변이 그러한 회개를 일으킬 수 없음을 잘 안다. 게다가 그는 개인적인 성공을 추구하지도 않고 사람들에게 환심을 사려고 하지도 않았다(1데살 2,3). 사실 그의 말은 하느님 자신의 말씀이었고, 데살로니카의 이 그리스인들에게 “우상들을 버리고……살아 계신 참 하느님을 섬기게”(1데살 1,9) 해 준 것도 하느님 자신의 힘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은 하느님에 관하여 무엇인가 말할 것이 있는 한 인간의 단순한 연설이나 강연이 아니다. 그것은 바오로의 말을 듣는 이들을 위한 하느님의 말씀이다. 하느님의 말씀이면서 동시에 성령을 통하여 작용하시는 하느님의 개입이다. 그리고 신자들의 믿음이 바로 이 말씀 곧 개입의 효능을 드러낸다(1데살 2,13). 바오로는 이 말씀을 “(하느님의) 복음”이라고도 부른다(1데살 2,4.9). 이 “복음”이라는 용어는 바로 사도들이 전하는 메시지 곧 기쁜 소식이다. 바오로는 얼마 뒤에 고린토 신자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이 복음을 상기시킨다(1고린 15,1-11). 그리고 1데살 2,9-10이 복음과 관련해서 가장 오래 된 표현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함으로써 “하느님의 협력자”가(1데살 3,2) 된다. 바로 이 선포와 더불어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힘차게 개입하시기 때문이다(1데살 1,5). 바오로는 이러한 사실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불러 오는 시련과 박해 속에서도(1데살 2,14)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놀라운 사건을 설명한다(1데살 1,6). 이러한 작용은 신도들의 공동체가 탄생하는 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새 그리스도인들에게 늘 뒤따르는 그 모든 투쟁과 그 모든 시련의 한가운데에서도 더욱 적극적인 믿음, 더욱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랑, 결코 소멸되지 않는 희망을 일깨우는 부르심이 계속 울려 퍼진다. 예수님의 부활을 이루어 낸 하느님의 힘이 이제는 이렇게 사도들의 복음 선포에 작용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화한 선교사의 확신이나 화술이 자아내는 진술 내용이 아니다. 복음이 선포될 때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에 작용한 하느님의 그 힘이 재확인된다. 곧 죽음을 물리치고 되살아나게 하는 권능이다. 우상 숭배자들이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변화하는 데에도, 똑같은 하느님의 힘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 힘은 이미 예수님 안에서 실현한 바를 신자들에게서도 재현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바오로는 이 데살로니카 1서에서 자기의 확신과 만족, 그리고 자기 신앙의 확실성을 자유롭게 펼쳐 보인다(1데살 3,7 참조). 그리하여 그는 데살로니카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자기의 희망과 기쁨으로, 또 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그분 면전에서 받게 될 자랑스러운 화관으로 삼는다(1데살 2,19 참조). 사도는 다른 계기에 자기에게는 자랑의 근거가 하나뿐임을 고백한다.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또는 간단히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1고린 2,2 참조). 그런데 데살로니카 1서는, 희망 속에 살아가는 바오로가 그리스도께서 활동하시는 공동체와 그리스도 자신을 어떻게 동일시하는지 보여 준다. 바오로는 또한 미래의 하느님 나라에서 받으리라고 고대하는 영광을(1데살 2,12) 미리 맛본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믿음을 일으키심으로써, 어떤 형태로는 이미 당신의 협력자들을 영광스럽게 하신 것이다: “여러분이야말로 우리의 영광이며 기쁨입니다”(1데살 2,20). 바오로는 선교 활동을 하면서 이렇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신비의 현실을 체험하게 된다. 이는 단순히 과거에만 속한 사건이 아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사도 자신이 전에 예수님께서 겪으신 것과 같은 시련을 겪는다(1데살 1,6; 2,14). 그리하여 바오로는 죽음이 작용하는 이 역사 속에서, 부활하신 분의 생명과 영광이 솟아오르는 모습을 본다.
5. 종말론 (1) 데살로니카 1서: 이미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이 서신의 처음 세 장은 무엇보다도 신자들에게 과거를 회상시키는 구실을 하는데, 그 어조만 놓고 보면 별도의 독립된 서간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1데살 1─3에는 종말, 곧 세말(世末)에 벌어질 사건들에 관한 특이한 형태의 가르침도 들어 있다. 데살로니카 1서의 종말론은 4,13─5,11에서 명백히 드러나는 지침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희망은 이 서간 전체를 점철하는 확신이며(1데살 1,10; 2,19; 3,13 참조) 그리스도인의 행동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희망 속에 살아가는 사람이다. 구약성서에서 예고되는 주님의 날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의로운 이들과 불의한 자들의 심판자로 드러내시는 날이다. 바오로는 이를, 충실한 이들은 구원으로 이끌어들이시고 악인들은 멸망으로 몰아넣으시기 위하여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의 영광에 휩싸여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날로 이해한다. 바로 이 날에 그리스도인들은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드러나야 한다. 게다가 이 날은 상당히 빠른 시일 내에 다가오리라고 기대된다(1데살 4,15: “주님의 재림 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 바오로 자신을 비롯한 그리스도교 첫 세대 사람들은 주님께서 곧 재림하시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사도는 어떤 특정 질문과 관련하여 자기의 생각을 밝힌다. 곧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 죽은 그리스도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그리스도께서 영광 속에 재림하실 때 이 세상에 없는 이들은 그 때까지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비교하여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이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는 아주 일찍부터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언제 재림하실지 그 때를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신도들은 그토록 고대하는 날이 오기 전에 죽게 될 수도 있다는 위험을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사도는 데살로니카 신자들이 갖는 두려움을 없애 준다(1데살 4,13-18).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은 흔들림 없이 계속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예수님을 부활시킨 하느님의 힘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설사 죽었다 하더라도 아주 죽은 것은 아니다. 부활하신 분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을 하나도 잊지 않으신다. 그리하여 모두 그 큰 날과 영광에 동참할 것이다. 그 순간이 오면 먼저 죽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하여 살아 있는 신자들과 함께 주님께 나아가 그분과 영원히 살게 된다. 바오로는 주님의 말씀에 준거하여(1데살 4,15 첫째 각주 참조), 그리고 유다교 묵시 문학의 전통적 표상들을(예컨대, 하느님의 결정을 알리는 대천사의 목소리와 하느님의 나팔 소리) 이용하여 이렇게 가르친다. 사도가 그 날과 그 때를 명확히 하는 일에 매달리는 것은 소용이 없다고 판단한 사실은 의미가 깊다. 이는 밤도둑처럼 들이닥칠 그 날의 갑작스러움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은 태평을 누린다고 믿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파멸이 그들 위로 쏟아진다(1데살 5,2-3).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의 유일한 관심거리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항상 준비를 갖추고 있는 것, 늘 깨어 있는 것이다.
(2) 데살로니카 2서: 이 둘째 서신에서는 필자의 관심이 전혀 다르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하다는 사실에 얽매인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심지어 자기들이 잘못 알아들은 사도의 가르침까지 내세우면서 주님의 날이 이미 온 것처럼 행동하게 된 것이다(2데살 2,1-2). 공동체의 일부 구성원들이 무질서하게 살아간다(2데살 3,6). 일상 생활의 제약을 벗어 버리고 생계까지 내팽개친 채 그렇게 한 것 같다(2데살 3,10-12). 주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일어날 사건들에 관한 2데살 2장의 자세한 설명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 응답하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의 목적은 사람들을 오도하는 온갖 지레짐작을 예방하고 모든 환상을 없애는 데에 있다. 물론그리스도께서는 불신자들을 책벌하시고 믿는 이들을 당신의 영광에 동참시키기 위하여 오셔야 한다(2데살 1,8-10). 그러나 유다교의 묵시 문학이 종말과 관련하여 계속 확인해 온 것이나 복음서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일은 예수님께서도 직접 예고하신 대로(마르 13장 참조) 일련의 혼란이 있고 난 뒤에야 비로소 일어날 것이다. 이러한 사건들의 전개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요약할 수 있다.
가. 사탄은 이미 이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박해가 바로 그러한 활동을 가리키는 표징 가운데 하나이다. 이 세상은 우선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과 하느님을 반대하는 악인들로 양분된다. 그러나 하느님을 거스르는 이 악은 더욱 늘어나고 거짓과 불의는 더욱 퍼져 나간다. 그러는 가운데 유혹(또는, 환상)이 최악의 위험이 된다. 거짓을 진실로, 불의를 정의로 착각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나. 그 다음에는 배교의 시기가 온다. 그러면 정해진 순간에 “무법자”라고 불리는 인물, 말 그대로 ‘그리스도의 적’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악이 지닌 모든 힘의 화신과 같다. 그가 일으키는 기적과 이적들은 마침내 진리를 사랑함으로써 구원받는 것을 거부한 이들을 탈선시키게 된다(2데살 2,10). 자만에 빠진 그 “무법자”는 결국 하느님 행세까지 하며 하느님의 성전 안에 자리잡고 앉는다. 이 서간이 쓰여질 당시에 이 무법자가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은, 누가 또는 무엇이 그를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2데살 2,6-7 각주 참조). 서간에는 암시만 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일을 하도록 지정된 존재가 누구 또는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 서간의 수신인들은 틀림없이 이 암시를 알아듣는 것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필자는 자기가 이 서간을 쓰고 있는 시간과 무법자가 공공연히 자기의 악마적인 힘을 드러내는 시간이 언제까지인지는 알 수 없는 유예 기간으로 (그리고 이 신비스러운 장애물을 설치한 존재로) 갈라져 있다고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다. 이 무법자가 등장한 다음에야 주님께서 비로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어 이 적대자를 없애신다.
사정이 이러하기 때문에, 주님의 날이 이미 온 것처럼 살 수 있다고 믿는 데살로니카 사람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잊어버린 것이고(2데살 2,3), 이미 도취 상태에 빠져 오류를 저지르는 것이며, 마지막 시기에 일어나기로 미리 정해진 투쟁과 혼란을 왜곡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시기 전에 신자들이 벌여야 하는 투쟁은 더욱 힘들어지고, 그 어느 때보다도 주의와 분별력이 더 필요하게 된다. 물론 복음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하라고 그리스도인들을 부른다(2데살 2,14). 하지만 영광 앞에는 박해와 고통이 자리잡고 있다(2데살 1,4-5). 그리고 이것들은 사랑과 믿음과 인내 속에서 정진할 때에만 넘어설 수 있다. 데살로니카 1서에서는 세상 종말이 임박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1서와 비교할 때, 2서에서는 그 임박성이 상당히 완화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 2서에 따르면, 묵시 문학에서 말하는 마지막 시간이 시작되었음은 분명하고 또 그러한 사실을 알리는 모습이 여기저기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생계와 관련된 일을 거부하는 것과 같이) 공동체와 사회의 기존 질서가 급격히 전복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 바로 내일이라도 종말이 닥친다고 생각하여 무질서하게 사는 그릇된 종말론을 바로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 실현되지도 않은 겉모습뿐인 승리에 취해 살려고 하는 자들을 멀리해야 하고(2데살 3,6), 필요한 경우에는 그들과 관계를 끊어야 한다(2데살 3,14). 지금은 상황이 유동적인 마지막 단계이기는 하지만(위에서 말한 ‘가: 사탄의 활동 시대’에 해당된다.), 아직도 펼쳐져야 하는 단계가 두 개나 남아 있는 것이다(위에서 말한 ‘나: 그리스도의 적의 출현’과 ‘다: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초대 교회에서는 데살로니카 2서 이후로도 여러 세대에 걸쳐, 유다교에서 유래하는 이러한 묵시 문학적 표현 방식과 틀 속에서 자기들의 믿음과 희망을 생각하게 된다. 데살로니카 2서는 바로 이러한 용어로 종말의 문제를 제기하고 다루는 신약성서의 첫째 문서이다. 데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보낸 서신들은 둘 다 초대 교회와 그 신자들이 지녔던 희망을 보여 주는 중요한 문서이다. 여기에서는 예컨대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서처럼 교리 문제가 길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부차적인 문헌으로 치부할 수 있는 것들은 아니다. 이 두 서신이 단순한 말로,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공통 신앙과 초대 선교사들의 체험이 어떠하였는지를 낱낱이 보여 주기 때문이다. 곧 사람들을 당신께 부르시는 하느님의 사랑, 재림하시기를 신도들이 열렬히 기다리는 그리스도의 주권, 복음 선포 말씀과 공동체의 삶에서 드러나는 성령의 활발한 활동, 부활에 대한 확신, 박해를 이겨 내는 인내, 형제들과 공동체들을 굳게 결속해 주는 형제적 사랑 등이다. 이렇게 데살로니카 1서와 2서는 우리 신앙의 원천을 보여 준다. 그리하여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은 이 서신들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신앙의 원천으로 돌아갈 수가 있다. 그리고 자기가 서 있는 시간과 장소에서, 이 신앙의 선조들이 지녔던 것과 똑같은 열정을 가지고 같은 희망 속에 살아가라는 부르심을 늘 듣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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