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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레몬에게 보낸 편지
1. 바오로와 필레몬 우리에게까지 전해져 내려온 바오로의 서간들 가운데에서 필레몬에게 보낸 서신이 가장 짧다. 그렇다고 용무만 간략히 적어 보낸 쪽지는 아니다. 비록 짧기는 하지만 당시의 서한 서식을 전부 갖춘 어엿한 서신이다. 이러한 필레몬서는 또한 가장 개인적인 내용을 담은 서간이기는 하지만, 단순한 ‘사신(私信)’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사실 필레몬 개인만이 아니라 그의 “집에 모이는 교회”도 이 서신의 수신인이다(2절). 이러한 사실의 깊은 이유는, 교회 곧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는 개인적인 일도 더 이상 사사로운 일로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서간은 줄곧, 바오로 사도가 표현해 내는 섬세한 감정으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 왔다. 다른 어떠한 곳에서도 사도는 이처럼 자기의 권위가 제자들에게 중압감을 주지 않도록 애쓴 적이 없다. 그는 부탁하고 제안할 뿐 의무로 부과하지 않는다. 바오로가 이 서간을 언제 어디에서 썼느냐는 분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오로가 쓴 것으로 전해지는 다른 서간들과의 관계 때문에 복잡하기까지 하다. 예컨대, 언뜻 보기에 이 서간은 골로사이서와 같은 시기에 쓰인 것처럼 여겨진다. 두 서간에서 다 바오로는 감옥 생활을 하고(골로 4,3.10.18; 필레 9.10.13.18) 같은 동료들이 곁에서 그를 돌본다(골로 4,7-14; 필레 23-24).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골로사이서는 바오로가 직접 쓰지 않았을 가능성이 적지 않은 반면에(골로사이서 입문 157-160쪽 참조), 필레몬서의 친저성은 별로 문제시되지 않는다. 이 서간에서는 바로 바오로의 언어와 문체, 그리고 그의 마음을 읽게 된다. 서간의 발송지로는 에페소와 가이사리아와 로마가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떠오른다. 집필 시기는 에페소일 경우에는 55년경, 가이사리아일 경우에는 58-60년경, 로마일 경우에는 61-63년경이 된다. 이 가운데에서 (골로사이서가 바오로의 친저임을 받아들이는 쪽에서) 셋째 것이 주장되기도 하지만, 첫째 것의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볼 수 있다. 이 서간의 일차 수신인인 필레몬은 달리 알려져 있지 않다. 여러 정황을 살펴볼 때, 그는 골로사이 공동체의 주요 인사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가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사회적으로도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에,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공동체는 그의 덕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5-7절 참조). 사도 자신이 은근하게 밝히는 것처럼, 필레몬은 바오로의 인도로 복음을 받아들였다(19절). 그리고 바오로는 이러한 필레몬을 “사랑하는 우리의 협력자”라고 부를 정도로(1절) 높이 평가한다.
2. 집필 배경 이 서간의 집필 배경도 그렇게 명확하지는 않다. 그러나 바오로가 이 서간에서 내비치는 여러 가지 정황을 종합하면, 그런대로 상당히 개연성 있는 사실을 추측해 낼 수 있다. 필레몬의 노예인 오네시모는 아마도 어떤 부정을 저지른 끝에(18절), 주인집에서 도망쳐 나온다. 의도적이었는지 우연히 그리 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오네시모는 바오로를 만나 그를 따르게 되고 또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게 된다(10절). 바오로 자신도 오네시모에게 애정을 가지고 그를 자기의 협력자로 삼는다. “충실하고 사랑받는 형제 오네시모”라는 골로사이서의 표현이 이러한 사실을 반영한다(골로 4,9). 바오로는 이 오네시모를 자기 곁에 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오네시모를 둘러싼 상황이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 점점 뚜렷해진다. 주인에게서 동의를 얻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통지도 하지 않고서, 도망 중인 노예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받아들여 자기 곁에서 살게 하는 바오로를 보면서, 오네시모 자신부터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의 법에 따르면, 바오로 자신도 도망자를 은닉함으로써 개인 재산권 침해라는 중대한 범죄의 공범이 된다. 그리고 오네시모는 자기에게 엄한 벌을 가할 수 있는 주인에게 강제로 송환되기도 전에 붙잡혀 투옥될 위험이 있다. 그래서 바오로가 오네시모를 주인에게 돌려 보내기로 작정한 것이 충분히 이해된다. 그러나 바오로는 오네시모를 그냥 보내지 않는다. 필레몬에게 서신을 써 보내면서, 자기 노예를 “사랑하는 형제”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16절), 바오로 자신을 맞아들이듯이 오네시모를 맞아들여 달라고 부탁한다(17절). 그러면서 명확한 어조로 오네시모를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켜 주라고 요구하지는 않지만, 필레몬이 자기가 말한 것 이상으로 해 주리라고 의심하지 않는다(21절). 이 ‘이상(以上)’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필레몬 자신에게 달려 있다. 아무튼 바오로는, 오네시모가 노예 신분을 벗어나 자유인이 되든 되지 못하든 주인에게 돌아가서 복음을 위하여 봉사하리라고 생각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3. 바오로와 사회 제도 ‘사적’인 서신으로 별다른 교리를 담고 있지 않은 필레몬서가 어떻게 해서 성서의 경전으로 받아들여졌는지 더러 의아하게 생각해 왔다. 성서의 다른 곳에서는 노예 제도가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초대 교회에서, 필레몬서에서만큼은 이 제도에 대한 그리스도적 자세의 일단을 볼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경전으로 수용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가설은 그럴 듯하게 보인다. 그렇다고 이 간략한 서간의 주석이 곧바로 ‘복음의 관점에서 본 노예 제도’에 관한 논문이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바오로는 이 서간을 쓰면서, 구체적이고 특수한 한 경우만 고려한다. 그러나 바로 이 특수한 경우가 문제였기 때문에, 필레몬서가 많은 교리를 담고 있는 다른 서간들보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 대해서 더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바오로가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 접근하는 여러 서간의 구절들이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 조심스러운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1고린 7,20-24; 에페 6,5-9; 골로 3,22─4,1).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구절들을 읽은 고대 세계의 노예들은 틀림없이 자기들의 인간적 존엄성이 그야말로 충격적으로 확인됨을 보았을 것이다. 바오로는 노예 제도 자체를 근본적으로 반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분리의 벽이 허물어졌다고, 더 이상 “종도 자유인도 없다.”고 과감히 단언한다(갈라 3,28). 주인들도 있고 노예들도 있는 로마의 신자들에게 그는 권고한다: “형제애로 서로 깊이 아끼고, 서로 존경하는 일에 먼저 나서십시오”(로마 12,10). 그는 이렇게 “하느님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 집단 특히 전례 모임에서는 모든 이가 동등하며 서로 형제임을 확언한다. 그러면서도 외적이고 법적인 차원 곧 일반 사회 생활과 관련해서는 어떠한 결론도 끌어 내지 않는 것 같다. 바오로는 “하느님 앞”과 “사람들 앞”을 확연히 구분한다. 그래서 더러 바오로가 인간 세계를 둘로 나누는 일종의 이원론(二元論)을 제시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필레몬서에 따르면, 엄격한 이원론적 해석이 가능하지 않다. 사실 바오로는 당시 널리 퍼져 있던 노예 제도를 직접적으로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고 노예는 노예로 남아 있어야 하고, 자기가 현재 차지하고 있는 사회적 위치나 신분이 마치 하늘에서부터 최종적으로 결정된 것인 양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 바오로는 결코 두 가지를 그냥 나란히 배열하지 않는다. 곧 한쪽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는 형제애와 일치가 강조되고, 다른 쪽에서는 주인-노예 관계가 신앙과 관계 없이 기정 사실로 전제되는 것이 아니다. 앞의 것이 뒤의 것을 이를테면 사로잡아 그것을 깨뜨리고 다른 차원에서 완성시킨다. 이제 오네시모는 동등한 인간으로, 교회의 또 다른 구성원으로 여겨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필레몬 가정의 한 구성원으로, 온전한 형제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이렇듯 필레몬서를 비롯하여 신약성서 전체가 현대적 의미의 사회 제도 개혁을 혁명적으로 부르짖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기존의 사회 질서를 옹호하는 보수론을 펴는 것도 아니다. 당시에 노예 제도는 누구도 문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게 모든 사람이 당연시하는 비인간적 제도의 희생자인 노예들을 다른 눈으로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그러면서 강요하지는 않는다(8-9절, 14절). 다만 믿음과 사랑에 따라(5절) 내 자신부터 변화하고, 또 그러한 변화가 불의한 사회 제도 및 그 희생자와 관련하여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결론을 이끌어 내도록 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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