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레지오

2007년 4월호 [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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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마리애 [legio] 쪽지 캡슐

2007-04-05 ㅣ No.81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우리 성당에서 5-60미터쯤 떨어진 곳에

자그마한 개신교회 건물이 있었습니다.

떨어져 있는 거리는 그쯤 되는데 성당 마당에 서서 바라보면

아주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몇 개월 전부터 작은 건물을 철거하고

새 건물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철거할 때 소음이며 터 파기와 다른 작업들을 하는 동안

들려오는 소음을 참아야 하는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에 다니는 신자들이 많아 보이지도 않는데 저런 큰 건물을

어떻게 신축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높아만 가는 건물을 보면서

제 마음속에 자신도 모르는 시샘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지막에는 대형 십자가를 세우는데, 십자가가 얼마나 크고 높은지

고개를 쳐들고 보아야 볼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십자가를 세웠습니다. 


제가 사목하는 곳은 아파트가 밀집되어 있는 지역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지역이기 때문에 당연히 󰡐먹자, 놀자, 자자󰡑라는

󰡐3자 동네󰡑로 배불리 먹어대는 식당들이 많고,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며 노는 유흥업소가 많으며,

나뒹굴어 잠을 자는 모텔들도 많은 지역입니다. 

밤이 되면 네온사인으로 현란한 곳,

그런데 거기에 질세라 십자가 또한 얼마나 많고 얼마나 높이

밤하늘을 수놓고 있는지,

거짓말을 조금 더하면 식당과 유흥업소와 모텔의

화려한 광고판만큼이나 십자가 역시 많은 지역입니다.


󰡐저렇게 많은 교회가 세상의 밤을 밝히는 십자가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저렇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유흥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이 되어준다면 또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성당에 들어가 성당 정면에 걸려있는 십자가를 바라보았습니다.

십자가는 무엇인가?

그렇게도 많고 그렇게도 반짝이고 그렇게도 높이 걸려있는

십자가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십자가는 나를 비방하고 모함하는 사람들을 용서하겠다는 표시입니다.

십자가는 어렵게 살아가는 내 이웃에게

손을 내밀어 위로하겠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다른 사람들이 싫어하는 일을

내가 먼저 희생하는 마음으로 앞장서겠다는 결심이요

부정과 부패로 물든 세상에 진리의 빛을 비추어

밝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다짐입니다. 


십자가는 희생과 봉사의 삶입니다.  십자가는 화해와 용서의 삶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사랑의 삶입니다.

결국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사셨던 삶이자

우리 신앙인이 살아야 할 삶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삶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높이 세우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아름답게 꾸미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이곳에 교회가 있으니 사람들은 여기에 모이라󰡑는

안내표시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이곳에 성당이 있으니 사람들은 여기에 모여 오라󰡑는

광고판도 아닙니다.


우리 성당에 조진영 마리아라는 자매님이 있습니다.

자매님은 레지오 마리애 󰡐구세주의 모친󰡑 쁘레시디움 단장을 맡고 있으면서

다른 단원들과 신자들에게 귀감이 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분입니다.

나이가 40대 초반이기 때문에 아이들 등하교와 다른 뒷바라지를 하느라

바쁘게 사는 분입니다.

개인 사업을 하는 남편에게도 무관심하지 않고 집안 살림도 충실히 하면서

이웃에게 좋은 표양을 보이는 분입니다.

마리아 자매님은 정연옥이라는 1급 장애인 청년을 말없이 돌보십니다.

정연옥이라는 형제는 자기 혼자서는 일어설 수도 없고

앉을 수도 없이 홀로 사는 청년입니다.

하반신이 마비되어버렸기 때문에 자기 혼자서는 대소변을 해결할 수 없고

휠체어에 오를 수도 내릴 수도 없는 형제,

이런 형제를 5년 동안이나 드러나지 않게 도와주고 있는 마리아 자매님.


두서너 번 활동을 하다가 그만두는 사람들과는 달리

마리아 자매님은 대소변을 도와주고 휠체어에 몸을 싣고 내리는 일을 도와주며

집안 청소는 물론이요 정성스럽게 밥을 하여 먹여주고 씻어주며

양치까지 해주는 헌신적인 봉사와 사랑의 삶을 살고 있는 분입니다.

내 가족 내 친인척에게도 그렇게 하는 것이 어려운데

마지못해 억지로 하거나 어떤 대가를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으로 정성껏 성실히 봉사와 사랑의 삶을 살고 있는 마리아 자매님.

그분이야말로 예수님의 계명대로 이웃을 사랑하는 분이요

그분이야말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높이 드러내 보이는 분이며

그분이야말로 어두운 세상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빛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자매님은 십자가귀걸이를 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 자매님은 십자가목걸이를 걸고 다니지도 않았습니다.

조진영 마리아 자매님은 예수님께서 사셨던 십자가의 삶을 사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삶으로 보여주는 예수님의 십자가,

이렇게 몸으로 보여주는 예수님의 십자가,

이런 십자가야말로 가장 높고 가장 아름다운 십자가입니다.

바로 이런 십자가를 보여주는 것이 가장 확실한 복음 선포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이곳에는 하늘 높이 올라가는 십자가가 많이도 생깁니다.

제가 살고 있는 이곳의 밤은 십자가가 화려한 광고판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성당에 걸려있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조용히 기원해봅니다.

󰡐그렇게 많은 교회가 마리아 자매님처럼

사랑의 십자가를 보여준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게도 많은 신앙인이 마리아 자매님처럼

십자가의 삶을 산다면 이 세상은 또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_김양회․요한보스코 신부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살신성인]


사순절 40일을 살며 주님 부활 대축일을 준비하고 있는 우리들 앞에 다시 새 생명이 약동(躍動)하고 봄기운이 완연한 새로운 한 달이 펼쳐졌습니다. 4월이 열리는 첫날 주님 수난 성지주일을 시작으로 연중 52주간 가운데 가장 거룩하고 은총 충만한 한 주간 성주간(聖週間)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저희 본당에서는 - 대부분의 다른 본당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 매년 성지주일이 돌아오면 향로잡이가 - 꽃으로 아름답게 장식한 -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十字架)에 분향하는 가운데 본당기와 제 단체 및 레지오 쁘레시디움의 깃발을 세우고 본당 공동체의 모든 가족들이 성당 주위 동네 한 바퀴를 돌며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入城)을 성대하게 기념합니다. 새삼 󰡐살신성인(殺身成仁)󰡑의 뜻을 새기며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동시에 바라보며 묵상하게 됩니다.

1979년 3월 25일 경의선(京義線) 간이역 일산역장(一山驛長) 방사언(方士彦) 님의 순직 기사는 아직도 제 마음 깊은 데 크나큰 감동으로 남아있습니다. 역 구내 철길을 건너던 승객을 구하고 자신은 열차에 받혀 중상을 입고 서울대학병원에서 55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분의 순직은 바로 전해 8월 15일 그 일산역 구내에서 순직한 전임역장 최규명(崔奎明) 님의 장한 모습이 그대로 재현된 것이어서 더 애절하고 가슴 뭉클한 소식이었습니다.

또한 6․25 전쟁 당시, 아군과 적군이 고지(高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치열한 공방전을 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오로지 조국을 위해 폭탄을 짊어지고 적진 속에 깊숙이 뛰어든 육탄십용사(肉彈十勇士)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월남전이 한창 치열할 때 훈련 중 위기일발의 부하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져 산화한 육군의 강재구(姜在求) 소령, 해군의 이인호(李仁鎬) 소령을 생각하게 합니다. 제자를 위해 목숨을 바친 신영순 교사의 이야기, 2001년 1월 일본에서 유학하던 이수현 군이 자신을 던져 취객을 구한 영웅적인 행동은 국가의 장벽을 넘어 뜨거운 인류애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사실 주위를 살펴보면 장하고 아름다운 미담의 주인공들을 각계각층에서 만날 수 있으며 작년 연말 보건복지부는 살신성인의 용기와 행동을 실천한 12명을 의사상자(義死傷者)로 인정(의사자 10명, 의상자 2명)하여 포상한 바 있습니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이란 무엇입니까. 중국 춘추전국시대 노나라의 공자(孔子) 님이 제시하신 것인데 사람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德目)으로 인(仁)을 꼽았고, 이는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고 동정심을 가지는 따스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공자님은 제자들에게 지혜와 인격을 갖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옳은 일 앞에서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이 시대의 의사상자들은 평소에 그만한 인품과 덕망을 가지신 분들이기는 하지만 우발적인 사고에 자신을 초개같이 내던지며 살신성인의 모범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은 어떠합니까. 당신의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영광의 길이 아닌 죽음의 길, 형극(荊棘)의 길을 스스로 찾아 나서십니다.

눈을 들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님을 바라봅시다. 군중들은 열렬하게 팔마(Palma)가지를 흔들며 환호하고 영접하지만 며칠 만에 표변하고 맙니다. 주님은 영광 속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지만 바로 그곳에는 죄 없으신 주님을 극악무도한 죄인 바랍바(Barabba)보다도 더 못한 대죄인으로 십자가형에 처단하는 장로(長老)들과 대제관들, 그리고 적(敵) 그리스도 자(者)들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으로서 사람이 되어 오신 것도 기가 막힌 일인데, 당신의 생애 전체를 그렇게 준비하셨고 그것도 죽기까지 십자가상에 무참하게 못 박혀 죽으시기까지 철두철미 당신 자신을 온전히 다 내어놓으시고 다 부수시고 다 바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살신성인의 완전하고 탁월한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오늘의 신앙인 우리들 역시 그리스도처럼 - 그리스도 신자가 아닌 분 중에서도 살신성인의 의로운 이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데 - 적 그리스도 자들인 예루살렘 파들과 더불어 이 시대를 살며 지금 여기서 새롭고 틀림없는 살신성인의 길을 걸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주어진 일상(日常) 안에서 희생하고 보속하고 속죄하며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일에 게으르고 인색하면 되겠습니까. 더욱이 성주간을 참으로 잘 사는 의미와 정신을 깨우치며 주님의 십자가상 죽음 너머에 죽음을 쳐이긴 결정적인 부활 승리가 주어져 있음을 체득하는 것은 틀림없는 은혜로움이고 크나큰 축복이며 넘치는 기쁨이 될 것입니다.

_최홍길․레오 신부


[주님의 겸손한 일꾼으로]


우리는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은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의 방법을 찾습니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게 될 위험도 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변치 말아야 할 진리가 있음을 당신의 삶을 통해서 가르쳐주고 떠나셨습니다. 또한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도 세계 평화와 일치를 강조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 주님의 평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개인의 경우로 볼 때나 공동체를 볼 때나 평화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권력이나 재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 안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려는 갈망을 누구나 마음속에 품고 사는데, 그 생활 안에 평화가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준주성범(1권 11장)의 말씀은 자신의 내적 생활에 대한 관심과 노력을 강조합니다. 외적인 일에만 매달리다 보면 자신의 내적 생활, 영성생활에는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일에 매달리다 보면 하느님께 나아가는 성덕을 쌓기보다는 오히려 세속적인 욕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세속적인 욕심은 우리를 평화의 길로 이끌지 못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기심을 낳고, 공동체를 분열로 몰아갑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런 어리석은 삶의 모습을 보였습니까? 만약 교황님(요한 바오로 2세)께서 외적인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신 분이었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교황님을 존경했겠습니까? 우리 레지오 단원들은 이 점을 깊이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단체 활동을 하다 보면 때때로 단체원 수나 겉으로 드러난 결과에 마음을 빼앗길 위험이 많습니다. 󰡐어떤 교육을 몇 백 명이 받았다, 어떤 피정에 몇 백 명이 참석했다󰡑라고 하면서 겉으로 드러난 것을 자신의 업적인 양 착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흔아홉 마리 양은 그대로 둔 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마태 18,11)을 찾아 나서시는 주님의 모습을 떠올려보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의 겉모습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보시고 우리의 정성을 보신다󰡓(신명 13,4)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레지오 간부들은 자기 공동체의 다른 형제, 자매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분들입니다. 그러기에 외적인 유혹은 우리의 책임감을 자극하여 더 괴롭게 할 수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평화의 일꾼으로 불림받았습니다. 이 평화는 한 사람 한 사람의 희생과 노력이 없다면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힘을 믿으며 온갖 유혹과 역경에 맞서서 싸워야 합니다. 내 자신의 욕심과 싸워 이김으로써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에 마음을 빼앗길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안에서 평화를 누릴 때 우리는 은총 속에서 생활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주님은 우리를 사랑해 주시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당신의 길을 성실히 따르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임종 직전까지도 최선을 다한 뒤에 하느님 뜻에 의탁하는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시며 돌아가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성하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선출되신 후 자신을 󰡐보잘것없는 주님 포도밭의 일꾼󰡑이라 표현하신 베네딕토 16세 교황 성하를 보십시오. 우리들도 주님 앞에 겸손한 일꾼으로서 불림을 받았다는 것을 마음속에 새기도록 합시다. 여러분은 주님의 가장 소중한 자녀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자비와 은총이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영적 독서:평화를 찾고 덕에 나아가는 열정(준주성범 1권 11장)

1. 남의 말, 남의 일 참견 말고 우리에게 관계없는 일을 돌아보지 않으면 우리는 얼마나 마음의 평화를 누리겠는가. 우리가 남의 일에 간섭하고 바깥일에만 몰두하면서 안으로 회상함이 적고 또 별로 없으면 어떻게 마음의 평화를 누리겠는가. 스스로 자기 사정에만 몰두하는 사람은 평화를 누리겠으니 그런 사람은 행복할 것이다.

2. 많은 성인이 그처럼 완덕에 나아갔고 관상생활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 저 성인들은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세속 욕심을 물리치고, 마음속으로 하느님께 정을 붙여 자유스럽게 자기를 지배하게 됨으로 그런 성덕에 나아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우리 욕심만 채우려 하고 사라지는 세상사에 골몰해서 산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의 악습을 고쳐 나가지 못하고 날로 진보하기를 게을리 하여 항상 싸늘하고 미지근하게 지낸다.

-윤병길․세례자 요한 신부


[가경자 에델 퀸의 성모님에 대한 극진한 사랑]


오늘은 하느님의 어머니시며,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대한 에델의 사랑을 묵상하겠습니다.

에델이 레지오에 정진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성모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그의 친한 친구는 전해 주었고, 에델 자신도 먼저 성모님을 생각하지 않고 무슨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인정하였습니다. 임종하기 전에도 그녀는 또렷하게 󰡒성모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신다고 내가 믿은 것은 무엇이라도 한 번도 거부해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가 영적 지도자에게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 마리아께서 행하신 성모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의 서약을 자신이 할 수 있는지 물었던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에델의 시복 청원자이신 모이니한 신부는, 에델은 그에 대한 책을 읽고 또 읽어서 그 안의 가르침이 그의 영혼에 녹아들도록 하였다고 기술하였습니다.

에델은 성모님 안에서 성모님과 함께, 성모님을 위하여 모든 일을 할 때 몽포르의 성인이 하신 대로 수행해 나갔습니다. 에델이 적어 놓은 것을 다시 인용해 보면, 󰡒성모님을 대할 때 인간의 눈으로 판단하는 것을 포기하고 모든 일에 성모님의 정신을 따라가도록 하여라. 성모님의 모습과 생각에 맞추어 나가라. 완전히 우리들 영혼의 삶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나 자신을 바쳐라. 어떤 상황에서든지 성모님께 우리를 맡기면 성모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사랑하고, 아버지께 봉사하며, 어린이와 같은 자세로 결코 의심하지 않고 작은 일에도 사랑을 베풀도록 가르쳐주신다.󰡓 

우리들 삶에서 제일 어려운 일 중 하나는 다른 사람을 심판하면서 우리의 정신적인 삶 안에서 가질 수 있는 기쁨과 자유를 빼앗기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 에델의 가르침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것은 우리의 임무가 아닙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행위로 인해 우리 자신를 괴롭혀서는 안 됩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 안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고 - 그들을 나쁘게 말하면서 비판하지 않을 것입니다. 말을 조심하여 성모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십시오.󰡓

교본에 에델에 관해 서술한 부분이 바로 이것에 관계된 것이라는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판단하거나 비평하는 것은 레지오 단원의 역할이 아니다. 단원들은 성모님의 부드러운 눈길이 그러한 모든 종류의 환경과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실까 하는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에델 퀸은 남의 결점이 눈에 띄었을 때 반드시 성모님과 의논하는 것을 하나의 생활 습관으로 삼았다󰡓(교본 449쪽).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곧잘 정당하든 부당하든 크게 상처받게 되고, 그것 때문에 원망하고 복수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며, 우리의 정신이 불균형 상태에 놓이기도 합니다. 그럴 때가 바로 우리가 성모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실천할 때인 것입니다. 성모님의 도움을 받아 점차적으로 상처들을 다 태워버리고 우리 마음의 평화를 회복하고 나아가 더 성숙한 인간이 될 것입니다.

물론 가끔은 레지오의 정의를 위하여 어려운 결정을 하여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성모님의 정신에 따라, 또 성모님의 사랑 안에서 행하였다는 것을 거듭 확인해야 합니다. 그의 성모님에 대한 사랑은 그녀의 모든 생애를 전부 포함하고 있고, 언제나 성모님과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에델은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 마리아의 열렬한 추종자이긴 해도 그의 성격까지 전부를 사로잡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성인은 그녀의 발랄한 정신과 활달함에 너무 무거웠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녀가 걱정과 고민에서 자유롭고, 사랑스러운 평안함을 가지는 것은 성모님을 그녀의 어머니로, 그리고 친한 친구로 생각하며 온전하게 성모님을 사랑하고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우리 모든 레지오 단원들의 생활의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금년에 맞이하는 그녀 탄생 백주년이 전 세계 레지오 단원들이 몽포르에서 시작된 성모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의 실천을 재조명하고, 더 나아가 많은 훌륭한 레지오 단원들의 생활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_맥그리거  신부 / 강용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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