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좌신부님 말씀 & 강론

의인과 죄인?

인쇄

이정준 [6-hope] 쪽지 캡슐

2008-09-26 ㅣ No.13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Lk. 7,36-50)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의 집에서 식사를 하십니다.

그런데 바리사이의 집에 한 여인이 들어와서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씻고서는

젖은 발을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습니다.

뿐만 아니라 발에 입을 맞추고는 너무도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어 발랐지요.

바리사이는 이 여인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고을에서 죄인으로 낙인 찍힌 여자였기 때문입니다.

 

죄인과 어울리는 것 만으로도 죄가 옮겨간다고 생각했던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진짜 예언자라면 이 여인이 죄인인 것을

알아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리사이에게 중요한 것은 이 여인이 죄인임을 알아볼 능력을

예수님께서 지니셨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이 왜 눈물을 그토록 많이 흘리면서 예수님의 발을 씻겨주는지,

왜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리는지는 그의 머리 속에 전혀 들어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여인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냥 놓아두시는지

그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만함이 모든 죄의 가장 기본이 된다고 전에도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바리사이는 존경받던 이들이었지요. 늘 계명에 맞추어 살아왔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큰 죄가 없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모세가 내려준 계명을 잘 지키고 살아왔다고 하여

죄가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계명 안에 담긴 뜻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결코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오 복음 22장에서 혼인잔치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원래 초대된 이들이 바로 바리사이 율법학자, 그리고 유다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초대를 무시해버렸습니다.

그 초대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뜻하지요.

자신들이 알고 있는 계명이 하느님의 뜻 모두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던 교만함이

결국 그들뿐 아니라 유다인들까지도 하느님 나라로 향하지 못하게 하는

죄를 짓게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 말씀에서는 구원이 이루어지는 그 현장에 함께 있었으면서도

하느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기 보다 예수님을 비아냥 거리는 생각을 합니다.

그는 죄와 용서 가운데 죄만을 바라볼 줄 알았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용서의 은총을 바라볼 줄 아는 눈이 없었던 것이지요.

 

혹시 다른 사람에게 이런 생각을 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나는 잘 살고 있는데 너는 왜 그따위로 살고 있냐?”, “너는 그래서 안되는 거야.”

“기도문 하나 제대로 못 외우면서 무슨 본당 활동을 한다고 그러냐.”

만약 내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주위에 있는 이들을 판단하고

비아냥 거리는 말이나 생각을 했다면 오늘 바리사이와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서울 교구의 보좌 주교님 중 한분이신 조규만 주교님께서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실 때 자주 쓰셨던 표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표현이었습니다.

이 표현이 신앙인을 나타내지 않나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을 생각해보면, “여인아, 네가 비록 많은 죄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죄하는 너의 마음이 너를 깨끗하게 하는구나.”

라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셨지요.

또한 삶에서 만나는 이들을 생각해보면,

"비록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용서할 수 있어",

"비록 기도문은 못 외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실히 봉사하는 너의 모습이 아름답다. "

"아들아 비록 자주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나보다 더 사랑한단다. "

이것이 바로 용서이고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심을 그리고

나 역시 사랑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함을

기억하고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380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