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동성당

[사순 제1주일]유혹 (마르 1,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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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8-02-18 ㅣ No.86

 

 

[사순 제1주일]유혹 (마르 1,12-15)

 

하느님께서는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다시는 땅을 파멸시키지 않겠다며,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라고 하신다. (창세 9,8-15)
8 하느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말씀하셨다.
9 “이제 내가 너희와 너희 뒤에 오는 자손들과 내 계약을 세운다.
10 그리고 너희와 함께 있는 모든 생물, 곧 방주에서 나와, 너희와 함께 있는 새와 집짐승과 땅의 모든 들짐승과 내 계약을 세운다.
11 내가 너희와 내 계약을 세우니, 다시는 홍수로 모든 살덩어리들이 멸망하지 않고, 다시는 땅을 파멸시키는 홍수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12 하느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미래의 모든 세대를 위하여, 나와 너희, 그리고 너희와 함께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은 이것이다.
13 내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
14 내가 땅 위로 구름을 모아들일 때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나타나면,
15 나는 나와 너희 사이에, 그리고 온갖 몸을 지닌 모든 생물 사이에 세워진 내 계약을 기억하고, 다시는 물이 홍수가 되어 모든 살덩어리들을 파멸시키지 못하게 하겠다.”


베드로 사도는 세례가 여러분을 구원한다며, 세례는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이라고 한다. (1베드 3,18-22)
사랑하는 여러분, 18 그리스도께서는 죄 때문에 단 한 번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여러분을 하느님께 이끌어 주시려고, 의로우신 분께서 불의한 자들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육으로는 살해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습니다.
19 그리하여 감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가시어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20 옛날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하느님께서는 참고 기다리셨지만  그들은 끝내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몇몇 사람 곧 여덟 명만 방주에 들어가 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21 이제는 그것이 가리키는 본형인 세례가 여러분을 구원합니다.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
2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오르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계시는데, 그분께 천사들과 권력들과 권능들이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시고 나서,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신다. (마르 1,12-15)
그때에 12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13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15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사순 제1주일 제1독서(창세9,8~15)

 

"내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 내가 땅 위로 구름을 모아들일 때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나타나면,  나는 나와 너희 사이에, 그리고 온갖 몸을 지닌 모든 생물 사이에 세워진 내 계약을 기억하고, 다시는 물이 홍수가 되어 모든 살덩어리들을 파멸시키지 못하게 하겠다. (13~15)


본문에 언급된 계약은 홍수 이전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약속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너와는 내 계약을 세우겠다.  너는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 들어가거라.'(창세6,18) 이제 그 약속이 현실이 되어 체결되고 있는 것이다(창세9,9).

이처럼 신실하신 하느님께서는 대홍수 심판 가운데서 노아와 그와 함께 한 가족들을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황폐해진 세상의 모습에서부터 다시 살아가야 할 앞날을 우려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이들에게 재차 찾아 오셔서 장래를 보장해주는 계약을 맺으신 것이다.


창세기 9장12절에 보면, '내가 미래의 모든 세대를 위하여, 나와 너희, 그리고 너희와 함께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라는 말이 나온다. '표징'으로 번역된 '오트'(oth)'징조', '기호', '증거'로도 번역되는 단어로서 누구나 알 수 있도록 객관적으로 뚜렷이 드러나는 어떤 물증을 가리킨다. 

하느님께서는 계약을 맺으시되, 의심많고 변덕스러운 인간이라도 이 계약을 굳게 신뢰할 수 있도록 너무나 뚜렷한 증거물로서 무지개를 세우셨다. 러나 '계약'(berit) 그 자체는 계약을 보증하는 '표징'(오트)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따라서 계약은 그 증거물에 의해 보증된다기 보다는 그 자체로서 절대적 권위를 지닌다. 

'무지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케쉐트'(qesheth)는 일차적으로 '활'(1사무2,4)이란 뜻도 있다.  활의 모양이 무지개와 비슷하기 때문에 동일한 단어가 활에도 사용된 것인지, 아니면 활의 모양을 본따서 동일한 이름을 무지개에 적용했는지 그 순서는 확실치 않다.  


어쨌든 자연의 세계와 인간의 도구의 이름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무지개가 활로 비유된 사례는 고대 근동 지방의 신화에도 나온다. 

예를 들어, 아라비아 신화에는 무지개가 쿠자(kuzah)神이 사용한 무기였으며, 싸움이 끝난 뒤에 이를 구름 사이에 걸어 둔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바빌론 신화에서도 무지개는 므로닥(Marduk; 예레50,2)신(神)이 악한 신(神) 티아맛(Tiamat)을 물리치는 활로 묘사되어 있다. 또한 이 신화들은 무지개, 즉 활을 하늘에 걸어 둔 것은 전쟁이 없는 평화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이 세상을 다시는 홍수로 심판치 않겠다는 하느님께서 주신 평화의 선언을 확증하는 증거로서 무지개를 하늘에 두셨다는 성경 말씀이 다소 와전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구름'에 해당하는 '아난'(anan)'모아 들이다'(덮다)에 해당하는 '아난'(anan)동일한 어근이며, 다만 '구름'의 모음이 장모음이란 점만 다르다.  본문에서 '모아들이다'(덮다)로 변역된 '아난'(anan)의 어원적인 의미는 '드러내다', '나타나다'이며, 특별히 '장애물로서 개입하다'라는 뜻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동사의 주어 '하느님'이란 사실로서 자연현상의 배후를 주관하시고 지배하시는 분창조주 하느님이심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래서 본문을 '하느님께서 하늘을 가리우기 위해 구름을 나타나게 하실 때'이해할 수 있다. 

한편 구름 고난과 위험을 비유적으로 나타낼 때에도 여러번 사용되었다 (에제30,3.18; 32,7; 34,12). 하지만, 먹구름 속에서도 인자하신 하느님께서 평화의 무지개를 준비해 주신 것을 기억하는 신앙인은, 고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짙게 하늘을 덮은 구름 속에도 찬란한 무지개가 감추어져 있음을 믿으며, 난관을 이겨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나와 너희 사이에, 그리고 온갖 몸을 지닌  모든 생물 사이에 세워진 내 계약을 기억하고' (15) 

본문의 '기억하다'에 해당하는 '자카르'(zakar)는 원래 '새기다','표시하다'는  말에서 유래하며 마음에 깊이 새겨 절대 잊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무지개란 표징을 주신 이유가 계약에 대한 하느님 자신의 기억을 위한 것이란 사실이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기억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라, 절대 불변하시는 하느님의 기억에 그 계약의 바탕을 둠으로써, 결단코 계약의 파기나 망각이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 만천하가 다 알수 있도록 확실하게 해 준 것이다.

따라서 무지개를 볼 떄마다 인간이 기억해야 할 것은, 오늘도 잊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계약을 신실히 지켜 가시는 하느님의 모습이며, 그 약속에 따라 새 하늘과 새 땅까지 우리를 인도해 가실 그분의 강력한 의지인 것이다(2베드 3,13).

마지막으로 우리가 본문을 통해 알아야 하는 것은 이 세상에 국지적인 홍수는 발생할 수 있지만, 바로 노아 홍수와 같은 이 세상 전체를 멸하는 그러한 홍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세상에 대한 심판 자체가 없을 것이란 의미는 절대 아니다. 


성경은 이 세상 마지막 날 사람들이 노아의 시대와 같이 먹고 마시며 향락에 젖어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불현듯 재림하셔서 홍수 심판보다도 훨씬 두려운 불의 심판으로써 모든 죄악된 것을 징벌하실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다(마태24,38.39; 2베드3,6.7).  그러므로 우리는 그 마지막 날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항상 깨어서 그 날을 준비해야 한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24,44)


 

  사순 제1주일 복음(마르1,12~15)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12~13)

 

마르코 복음 1장 12절과 13절은 예수님의 세례 사건(마르1,9~11)에 이어서 예수님의 또 다른 공생활 준비인 광야에서 유혹받으신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마태오 복음사가와 루카 복음사가가 비교적 길게 기록한 내용(마태4,1~11; 루카4,1~13)을 마르코 복음사가는 단지 두 절로 짧게 기록하고 있다.

마태오와 루카'예수님의 사탄에 대한 승리'라는 하나의 독립된 주제로 단락화시킨 반면에, 마르코는 앞으로 공생활 기간 동안 끊임없이 반복될 '사탄과의 대결의 시작'이라는 관점에서 기록했기 때문이다. 


마르코 복음 1장 12절'곧'으로 번역된 '카이 유튀스'(kai euthys; and immediately; at once)는 직역하면 '그리고 곧'이다. 그러니까 '광야의 유혹'과 바로 이전의 '예수님 세례 사건'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고, '곧'이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쉴새없이 일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성령의 인도로(마태4,1) 사탄의 유혹을 받기 위해 광야로 가셨다는 사건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인들을 평탄한 길로만 인도하시는 분이 아니라, 때로는 고난이나 시험의 길로 인도하심을 알게 한다(요한16장 참조). 


마르코 복음 1장 12절'광야'에 해당하는 '에레모스'(eremos; wilderness; desert)가 팔레스티나 서북쪽의 콰란티니아(Quarantania)인지, 모세가 40일 동안 단식을 한 시나이 산인지, 타볼 산인지 불확실하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광야란, 사람들이 살지 않는 황폐한 곳이며, 사람들과의 접촉이 없는 고독한 곳, 그리고 의지할 아무 것도 없고 짐승들이나 악령들이 주로 거주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 1장 12절'내보내셨다'에 해당하는 '에크발레이' (ekballei; sent; driveth)직설법 현재 동사로서, 직역하면 '그가 내던지고 있다'이다.


특히 마르코가 사용한 단어 마태오가 사용한 '아네크테'(anechthe; '그가 이끌리어')루카가 사용한 '에게토'(egeto; '그가 이끌려')비해서 훨씬 역동적인 뉘앙스를 준다. 또한 '광야'에서 '~로'에 해당하는 '에이스'(eis; into)'안으로'이기 때문에, 본문은 '그가 그 광야 안으로 내던지고 있다'가 된다.

말하자면, 성령께서 예수님을 사람들과 단절된 고립된 상태로, 아무것도 의지할 수 없는 곳으로 강하게 내던져, 예수님으로 하여금 혼자 외롭게 시련과 더불어 공생활 준비 과정을 겪게 한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사십 일'에 해당하는 '텟세라콘타 헤메라스'(tesserakonta hemeras; forty days)는 유대인들이 '땅'의 숫자로 여기던 '4''하늘'의 숫자로 여기던 '10'곱한 수로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어떤 일을 준비하는 기간을 상징하는 수이다.

 

성경에서는 주로 '고난의 기간들'을 상징하는 숫자로 쓰였는데, 하느님께서 노아 시대에 모든 생물들을 없애기 위해 사십 주야 동안 세상에 비를 내리셨고 (창세7,12), 이스라엘 백성들 출애굽한 뒤광야에서 40년간 살았으며 (신명8,2), 모세가  단식하며 사십 주야를 시나이 산 위에서 있었고(탈출34,28; 신명9,9.11.18), 엘리야는 광야를 사십 주야 걸어서 호렙산에 도착했다(1열왕9,18).


마르코는 기록하지 않았지만, 마태오와 루카는 예수님께서 광야에 계시는 40일 동안 아무 것도 드시지 않으셨는데(마태4,2; 루카4,2), 이것은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받기 전 시나이 산에 올라가 40일 단식했던 모세의 모습과 동일하다. 따라서 이것은 예수님께서 모세 이상으로 하느님의 백성들을 하느님의 나라로 이끌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철저히 준비하셨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사탄'으로 번역된 '사타나'(satana)'적대자'(the Adversary)라는 뜻으로 구약의 '사탄'(satan)음역한 단어이다(욥2,7). 사탄은 신,구약에서 끊임없이 하느님과 그의 백성들을 적대하고 하느님 대전에 참소(고발)하는 영적 존재로 등장한다.

여기서 '유혹을 받으셨다'에 해당하는 '페이라조메노스'(peirazomenos; tempted)의 원형 '페이라조'(peirazo)'(넘어지게)시도하다', '증거를 진술하다'라는 뜻이다.다시 말해서 이것은 넘어지게 하는 유혹(temptation)의 의미와 인간을 더욱 성숙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단련(test)이라는 이중적인 뜻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받으신 유혹도 일차적으로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메시야로서의 사명을 포기하도록 하기 위한 사탄의 유혹이다. 그러나 이러한 단련은 단지 유혹에 불과한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계획 아래서 예수님의 인성을 단련시키는 과정이기도 했다.

 

마르코 복음사가광야와 들짐승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예수님깨서 받으신  외적인 시련(outer trial)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했고, 마태오나 루카예수님께서 유혹받으신 세 가지 내용을 기록하여 내적인 유혹(inner temptation)을 강조했다. 

마르코 복음 1장 13절'들짐승들'에 해당하는 '테리온'(therion; wild beasts)사나운 야생 짐승을 가리키는데, 예수님께서 유혹 받으신 유대 광야에는 실제로 표범이나 여우같은 들짐승들의 위협이 항상 존재했다.

원조 아담과 하와는 짐승의 위협도 없고 배고픔의 고통도 없는 에덴 동산에서도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하느님 대전에 죄를 지었지만, 제2의 아담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사십 일을 굶으시고 주변에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련을 이기셨다.

끝으로, 마르코 복음 1장 13절에서 타락한 천사인 사탄과 선한 천사(히브1,14; 탈출14,19; 33,2)의 대조가 이루어지고 있다. 사탄은 하느님을 섬기고 찬양하는 자신의 의무를 망각하고 오히려 하느님과 같이 되려고 했고 예수님을 유혹하고 있는 반면에, 선한 천사는 본래의 사명에 충실하여 예수님을 섬기고 있다.


"특별 광야피정 기간"

무지개를 세워라

유혹의 시작

인간이 지은 첫 번째 죄인 원죄를 창세기에서는 하와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은 것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이 원죄의 이야기를 두고 많은 사람들은 의문을 가집니다. 그리고 “왜, 하느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셨을까?” “선악과가 없었다면 죄를 짓지 않았을 텐데…” 등의 질문을 던집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에덴 동산의 모든 나무 열매를 먹어도 좋다고 하셨고 다만 동산 가운데 선과 악을 아는 그 나무 열매만 먹지 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저의 묵상은 이러합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 있었던 일입니다. 시골의 어느 아들이 공부를 잘해 아버지께서 아들을 도회지로 학교를 보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바람을 저버리지 않고 공부를 열심히 하여 좋은 대학을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유학까지 다녀옵니다. 그렇게 될 때까지 아버지는 아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해줍니다. 땅을 팔고 소를 팔아 아들의 뒷바라지를 합니다. 아들은 유학을 다녀와 대학 교수가 됩니다. 그리고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립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크고 더 큰 집으로 이사 가기 위하여 시골 아버지에게 내려가 하나 밖에 없는 땅을 팔아 달라고 떼를 씁니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다 주었으나 그 땅 만큼은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받고도 자신이 원하는 마지막 남은 땅을 갖지 못하게 되자 화가 난 아들은 아버지를 살해합니다. 비정하고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 끔찍한 일이 에덴동산의 원죄와 너무도 닮았습니다.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신 아버지 하느님과 마지막 열매까지 먹어 치우려는 인간의 욕심, 그것이 원죄의 시작이었습니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에덴동산을, 그 축복을 스스로 포기한 것입니다. 그 욕망의 원죄가 우리 스스로 인간이기를 거부하게 만듭니다. 아메리카 크리족 인디언 추장은 마지막 남은 모든 것까지도 해치우고 먹어치우려는 게걸스런 백인의 야만을 향하여 이 같은 분노의 말을 남깁니다.
마지막 나무가 베어져나가고, 마지막 강이 더럽혀지고, 마지막 물고기가 잡힌 뒤에야 그대들은 깨달으리라. 돈을 먹고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의 욕망에 의해 포기했던 축복의 무지개를 오늘 하느님께서는 다시 세워주십니다. “내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창세 9, 13).

축복의 시작인 회개
우리는 축복의 무지개를 다시 세워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끝없는 욕망의 포기와 하느님께로 향한 회개가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 참다운 회개의 신앙, 세례를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할 삶의 자세를 오늘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1베드 3, 21). 이것이 회개의 삶입니다. 언제나 바른 양심으로 사는 것, 자신의 양심에 부끄러운 삶이 아닌 모든 것을 뉘우치는 것이 회개입니다. 진정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문에 우리는 깊은 감동을 받고 많이 애송하지만 낭송할 때마다 마음 한 편으로 부담과 짐스러운 느낌을 받는 윤동주 시인의 ‘서시’는 회개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

우리가 진정 부끄러워해야 할 참다운 회개는 나의 오만, 편견, 욕망, 욕심, 이기심, 교만 등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같은 세속의 무게로는 결코 날아갈 수 없는 곳입니다. 그 같은 얼룩으로는 그 은총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비록 실천적인 삶의 모습은 어렵지만, 인간으로서 부끄러워 할 줄은 알아야합니다. 인간이 진정 인간으로 부끄러워 할 줄 아는 삶, 그것이 회개입니다.
해마다 맞이하는 사순시기, 오늘 우리는 사순의 장막을 열며 깨우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지상에서의 비움, 나눔, 회개의 삶, 그것은 결코 그냥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빠르게 지나가는 세월 속에서 우리가 바뀌어야 할 변화된 모습, 참된 회개의 삶을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격려하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배광하신부

-지금여기 강론대- [최성영 신부] 2월 22일(사순 제1주일), 마르 1,12-15 (참조 : 루카 4,1-13)

 

오늘 복음을 보면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십니다. 광야는 풀조차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척박한 땅입니다. 자신의 몸 하나 추스르기도 힘든 땅입니다.

그렇지만 광야는 박해받거나 쫓기는 이들에게 피신처가 됩니다. 하느님을 만나려는 사람에게는 기도하는 장소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날 광야는 어디입니까? 세상의 시끄러움에서 벗어난 곳입니다.

세상의 편함과 즐거움을 포기하고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어느 깊은 산속에서 홀로 자신을 성찰한다면 그곳이 광야입니다.

요나 예언자에게는 물고기 배 속이 광야였습니다. 성전에서 홀로 기도한다면, 성전이 광야입니다. 광야에서는 하느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수련하시던 중에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십니다. 아마도 사탄은 배고픔과 외로움에 시달리신 예수님께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먼저 자신의 문제부터 해결하라고 유혹했을 것입니다(마태 4,1-3 참조).
우리는 능력이나 시간이 있어야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나의 배고픔부터 해결하겠다는 유혹에서 벗어나 이웃을 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유혹을 잘 극복하시고는 하느님의 뜻을 선포하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철저하게 광야를 체험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번 사순 시기 동안 광야를 체험하며 하느님의 영으로 충만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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