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회성당 자유게시판

마지막 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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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민규 [Augustine13] 쪽지 캡슐

2000-01-24 ㅣ No.1232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일찍 일어났습니다. 피정 때문에 전체 소집일에 결석하게 되는 중앙

 

중학교 아이들의 사유서를 제출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오는 길에 병원도 들리고 (피정

 

가니까 빨리 감기 나아야 한다고 하니 쌍뎅이-양쪽 궁뎅이-에 한대씩 주사를 놓더군요)

 

햄버거를 사들고 성당에 갔습니다. 갑자기 피정 못 가게 된 학생이 생겨 다시 인원 조정과

 

방배정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학년별 인원 점검표도 빠진 걸 보게 되어 새로 치고

 

이름표도 학년별로 묶어 놓다 보니 벌써 저녁이 되었답니다. 그냥 내일 일찍와서 해도

 

되지만 막상 당일날은 정신도 없을 것 같고 내가 교감일 때 가는 마지막 피정이고 해서

 

마지막인 만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새 교감에 놓여질

 

짐은 상당히 많거든요. 아이들 이름만으로 몇학년인지 구분해 가면서 내가 지난 3년간 많은

 

아이들을 보아왔고 기억하고 있음을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워낙 사람 이름과 얼굴

 

외우는데에 소질이 없는 저이지만 늘상 매 주일 지나치거나 인사, 또는 약간의 대화 그리고

 

무엇보다 켐프나 피정 같은 커다란 행사들을 같이 한 아이들인지라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외우게 된 듯 싶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니 이름표 정리하는 시간이 더 길어졌습니다.

 

하나하나 아이들 이름을 보고 그 아이의 인상과 나와 경험했던 추억들, 그 아이로 인해

 

기뻤거나 속상했던 일들이 마구 뒤엉켜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리고 3년 전과는 다르게 너무

 

커버린 지금 학생들에 대한 묘한 감회도 한 몫 했습니다. 내가 신입생일 때 중 3이던

 

아이들이 이젠 피정에 참석하는 학생들 중 최고 학년인 고2가 되어 있는 것 부터 세월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고, 내가 교사일 때 간 첫 피정 때 작고 귀엽기만 한 중1이던 아이들이

 

이젠 내 키를 넘나드는 중 3인 것도 내 가슴을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맨 처음 피정 때

 

속상했던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성서 봉독 피정을 주관하시던 신부님이 "못한다, 못한다

 

해도 이렇게 못하는 아이들은 처음이다"며 학생들 야단 치실 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던

 

기억. 피정에 도착하자마자 전의 성당 아이들이 애써 쌓아놓은 눈사람 4개를 단숨에 엎어

 

버리고 돌아오던 학생들, 방에서 신나게 눈싸움 하던 남자아이들, 경당에 눈 뭉탱이를

 

가지고 와 성서 읽는 아이에게 쏟아 붇던 여자 아이들. 방안에서 야구인지 뭔지 한다며

 

소란 피우다 결국 문짝 망가뜨린 아이들이 스쳐지나 갑니다. 잠자라는 것에 끝내 반항해서

 

동료 여 선생님을 울게 만든 것에 덩달아 분노하던 기억도 납니다. 교사가 되어서 처음 간

 

피정인지라 잇다른 돌발상황에 어쩔 줄 모르고 믿었던 아이들의 횡포(?)에 망신살 뻗쳐서

 

결국 피정이 끝남과 동시에 쓰러져 서울로 왔던 것들도요. 피정 한번 끝낼 때마다 저를

 

비롯한 교사들이 몸과 마음이 모두 피로해서 녹초가 된답니다. 전에는 피정에 관계되는

 

교통편까지 다 도맡아서 제가 했는데 아이들이 속만 썩히고 가면서도 고맙다는 한마디 없이

 

사라지니까 곁에 계시던 수녀님이 울기 까지 하셨습니다. 내가 많이 불쌍해

 

보이셨는지......미움을 없애려고 가는 피정에 저는 왜 맨날 피정 끝낼때마다 아이들이

 

미워지던지요. 그렇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리 나쁜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단지

 

그러던 아이들이 지금은 어느 정도 크고 말을 듣는다는 사실이 고맙고 대견스러울

 

뿐입니다. 그보다 어린 학생들이(아님 고학년일지라도) 똑같은 잘못들을, 철이 없는

 

행동들을 할 지언정 이제는 적응이 되어서 예전만큼 상처받거나 녹초가 되진 않을 것

 

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아이들 그대로의 모습이니까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이

 

아이들에게 애착이 더 느껴졌습니다. 드문 드문 이름표가 고장 났거나 흠이 있는 것은 새

 

것으로 바꾸다 보니 시간이 더 걸렸네요. 본명이 실수로 안 적힌 아이 이름표엔 본명도

 

써주지만 나름대로 불평 할 아이도 있겠지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아마도 이제는 감사하는

 

마음보다는 투정이 앞서는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이번 피정의

 

주제는 ’모든 일에 감사하시오(데살. 5,18)’라고 합니다. 수사님들이 이것을 우리 아이들의

 

마음에 얼마만큼 잘 불어넣어주실지는 모르지만 지금 제 바램은 아무 사고 없이

 

건강하게 아이들과 함께 피정을 다녀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같이 가시는 교사들, 학사님,

 

수녀님들도 아이들로 하여금 커다란 상처나 실망을 덜 체험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만큼

 

아이들이 잘 따라와야겠지만 말입니다. 이 피정이 끝남과 동시에 제 임기도 끝입니다. 뭣도

 

모르고 시작한 교사일이지만, 나 혼자만 일이 몰렸다면서 일 다 잘 해놓고 불평하고

 

속상해했던 교감일이지만 아무쪼록 하느님과 내 주위 분들이 제가 한 일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가지셨길 바랍니다. 저로썬 아마 다시는 교사일에 그런 열정과 시간을 쏟지 못할 것

 

같습니다. 지금 괜히 마음이 울적해지는 건 지금껏 교사 생활에 바친 내 노력과 정성이

 

아까워서도 아니고 후회해서도 아닙니다. 그간 혼자 겪은 섭섭한 일들 때문도 아닐 겁니다.

 

아마도 언젠가 그렇게 순수하게 주님 앞에 봉사하던 제 자신이 그리워 질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나 봅니다. 그렇지만 이미 흘러간 시간과 나이는 되돌릴 수 없듯이 저는 내일

 

피정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제 임무에 충실해 보렵니다. 얼덜결에 떠맡은 가회동 주일학교

 

최연소 교감직을 이 피정을 마지막으로 하느님께 바칩니다. 이 글을 읽으실 몇 안되는

 

분들일 지라도 그 기도의 힘은 큽니다. 저희 중고등부 피정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들이

 

무사히 다녀 올 수 있도록, 욕심을 좀 더 내자면 이들이 한층 성숙되어 올 수 있도록

 

화살기도나마 해 주시길 기대하면서 이 글을 마칩니다.      

 

          

        

                                전 가회동 중 고등부 주일학교 학생들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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