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동성당 게시판

한 신부님을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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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 [hwanganna] 쪽지 캡슐

2001-10-17 ㅣ No.4782

†찬미예수님

 

 안녕하셨어요?

 몇 차례 가을비가 내리더니 날씨가 무척 쌀쌀해졌습니다. 이제 곧 낙엽이 지고 겨울이 올테지요. 스산한 바람이 피부에 스밀때는 행복과 따스한 사랑에 대한 갈망이 향수처럼 피어 오릅니다. 참 행복이란 진정 어떤 것인지....

 어떤 분은 우리가 진정 행복해 지기 위해서 믿어야 할 것 들을 이렇게 열거 했지요. 권력은 커다란 위험이고, 부는 노예상태이며, 안락한 생활은 불행임을 믿는 것, 그리고 자기를 버림으로써 이긴다는 것을 믿는 것, 오직 사랑이야말로 모든 것임을 믿는 것.

 

 10월 편지에는 5일 정들었던 본당을 떠나 신학교 교수 신부님으로 가신 한영만 스테파노 신부님얘기를 들려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지병을 앓고 있던 한 자매님이 있었지요. 십여년전 어렵게 나았던 지병이 다시 도진것이었어요. 자매님은 이제 나이도 들고 기도도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세포 하나하나가 피곤으로 화득거리는 몸을 이끌고 미사 참례를 했었죠.

 

 성체를 모시러 나가다 우연히 두세차례 앞에 선 자매님에게 성체를 나눠주고 있는 신부님의 얼굴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집중하고 있는 투명하고 맑은 목소리,기쁨으로 빛나고 있는 환한 얼굴, 당신에게 맡겨진 양들에게 성체를 나누어주고 있는 참으로 착하신 목자의 모습 앞에서 자매님의 몸은 고요와 평화를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부터는 신부님의 강론에 귀기울이게 되고 하시는 일을 눈여겨보게 되었죠.

 

 앓고 있는 어린소녀에게 그 나이에 맞는 가요테이프를 몰래 사다주며 격려하시던 모습, , 순수와 천진스러움으로 청년들과 어울리며 기쁨으로 그들을 일치시키시던 모습, 화장기 짙은 얼굴로 다가오는 젊은 자매님들의 얼굴을 평화와 기쁨이 있는 맑은 얼굴로 치유시키시던 모습,

 무엇보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다가가 아무도 모르게 보여주시던 관심과 사랑, 우리가 슬플 때는 돈이 없을 때도 아니고, 명예가 없을 때도 아니고, 오직 하느님과의 일치가 무너졌을 때라고 말씀하시던 모습,

 어린 복사 아이들로부터 청소년, 할머니들에 이르기까지 혼신을 다해 부어주시던 목자로서의 사랑, 끊겨버린 성소를 다시 살려 보시려고 예비 신학교 학생들의 성적까지 관리하시던 모습......

 자신의 안위는 없고 공동체와 하느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거룩한 제물로서의 삶을 강론으로, 그리고 자신의 삶으로 몸소 가르치시던 모습을 뵈며 자매님의 몸은 점점 치유되기 시작했습니다.

 맑고 밝게 정돈되어가던 공동체의 모습과 오로지 하늘로만 울리듯 투명한 은빛 소리로 변해가던 성가대의 목소리, 성당 마당을 쩡쩡 울리던 신부님의 유쾌한 웃음소리, 이 모든 것들이 치유와 기쁨, 신앙의 신비와 하늘나라를 느끼게 해주는 것들이었죠. 그런데 갑자기 신부님께서 신학교로 가시게 되었습니다.

 

  정말 아버지 같은 분이셨는데... . 이제는 다시 그분이 드리는 미사와 그분이 주는 성체를 받아 모실수가 없다니... 자매님은 그때부터 마음이 아파오기 시작했습니다 부임한지 6개월밖에 되지 않았고 이제 막 본당 신자들과 사목의 꽃을 피우고 있는 중이었는데...

 

 우연히 성당에 들렀다가 자매님은 텅빈 성당 마당을 혼자 서성이시며 아파하고 계시는 신부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죠. 평소와는 다른, 아픔으로 어쩔 줄 몰라 하시는 신부님의 모습을..

 처음으로 본당을 맡으시고 혼신을 다해 본당 신부로서 사랑하고자 했던 모든 구상들과 변화되고 있는 영혼들을 두고 훌쩍 떠나야 하는 목자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아 이 분은 정말 공동체의 십자가를 손수 지고 가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구나-

 자매님은 훌쩍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거리를 걸을 때에도 설거지를 할 때에도 잠에서 깨어났을 때에도....식구들 몰래 훌쩍 거렸죠.

 

 신부님은 당신을 위한 송별 미사에서 송가로 "Let it be(그대로 이루어지소서)"를 불러 달라고 하셨습니다. 성가대에서 송가를 부르기 전에 사회자가 영어로 된 가사를 번역해서 읽어주었지요.

 

-나는 삶이 아주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성모님께서는 다가 오셔서 지혜의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그대로 이루소서.

 앞이 캄캄한 그때에도 성모님은 제 앞에 다가와서 저를 마주보시고는 지혜의 말씀을 들려   주십니다. 그대로 이루소서, 그대로 이루소서.

 마음의 상처를 받은 불쌍한 사람들,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그들은 응답을 받게 될 것입니   다. 그대로 이루소서.

 지금은 이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더라도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응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대로 제게 이루소서.

 어둔 밤에 구름까지 잔뜩 끼었는데 여전히 나를 밝혀주는 한줄기 등불이 비추고 있습니다.

 내일까지 계속해서 비추도록 그대로 제게 이루소서, 제게 이루어지소서. Let it be.-

 

 자매님은 또 훌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울고 있는 사람은 자매님 혼자만이 아니었습니다. 총회장님도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고 웬만해선 감정 표현을 하지 않던 아네스 자매님도 눈이 빨갛게 되었습니다. 카타리나 자매님도, 강론때마다 졸던 재정분과장 베드로씨도, 성당마당을 꽃밭으로 가꾸던 루까씨도... 곳곳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사회자도 목이 메였지요. 신부님은 울고 있는 우리가 안스러우셨던지 재미있는 얘기로 우리를 웃게 만드셨습니다.

이어서 신부님과 함께한 점심식사때 우리는 신부님이 좋아하시던 ’마니피깟’을 노래로 불러드렸지요.

-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오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오며 나의 마음 언제나 설레옵나이다.

   내 영혼이 주님앞에 찬미 찬양드리며 주께서 나의 신세를 돌보셨음이로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돌보셨음이로다.................................

 

 모든 송별순서가 끝나고 신부님의 사제서품 기념상본을 받아들 때였습니다. 신부님의 서품기념상본은 아무 색깔도 없는 무채색의 흑백상본이었는데,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의 사진아래 시편 (23.4) 의 구절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간다해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그 지팡이에 시름은 가시어서 든든하외다.’ 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아, 그랬었구나....... 자신에게는 너무나 엄격하시면서도, 하느님을 향한 지극한 사랑과 믿음 때문에 양들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신 그리스도를 닮은, 모든 빛깔을 삼켜버릴만큼 큰사랑으로 사시려 했던 무채색의 하느님 사랑, 자매님은 어떻게 해서 자신에게 치유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신부님을 목자와 양의 관계 안에서 만났기 때문에, 목자로서의 사랑과 진심을 만날 수 있었고, 또 알 수 있었기에 참으로 행복했던 6개월이었습니다. 진정 행복해지려면 오직 사랑만이 모든 것임을 믿는 것. 신부님은 이 모든 걸 놓고 떠나는 아픔을 감수하면서 순명 하시는 모습으로 우리곁을 떠나셨습니다.

 

 아. 이분이 내 시신앞에서 나의 장례미사를 드려 줄 분이었으면 하고 바랐었는데.....".하시던 노렌조 할아버지처럼 우리는 탄식하며 슬픔에 잠겨 있을 수 밖에 없었지요. 그러나 " 다시 못볼 분이라면 잊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했다는 데레사 할머니처럼 잊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른지요.

 

 이제 새로 신부님이 오셨습니다. 박선용 요셉 신부님이시구요, 교구 시노드에서 일하고 계시는 휼륭한 신부님이라고 합니다.

 묵주기도 성월입니다. 두 분 신부님을 위해서 기도 드립니다.

 

"어머니,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모든 사제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친히 평화와 기쁨 주시고 은총과 사랑으로 충만케 해주시라고 전구해 주십시오."

                                     

                              2001. 10. 12. 옥수동 천주교회 선교 상담실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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