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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교황 프란치스코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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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3-22 ㅣ No.81

새 교황 프란치스코는 누구인가

단순ㆍ겸손ㆍ가난… 프란치스코 성인 닮은 목자





▲ 새 교황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이들의 옹호자였다. 사진은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장 시절인 지난 2009년 신자들과 만나는 베르골료 추기경. 【CNS】


이탈리아에서 아르헨티나로 이민 온 부에노스아이레스 철도 노동자의 아들. 화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그에게 부르심은 다른 데서 왔다. 한쪽 폐를 쓸 수 없게 된 그는 화학자 꿈을 접고 수도자의 길을 택했다. 예수회원이 됐고, 관구장이 됐다. 교회의 더 큰 부름을 받아 주교가 됐고, 추기경이 됐다. 그리고 마침내 교황이 됐다.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76) 추기경. 물질의 화학적 변화에 관심을 갖던 젊은이는 인류의 영적 정신적 가치관을 선도(善導)하는 사도로 섰다. 새 교황 프란치스코 그는 누구인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1182~1226) 성인을 닮고자 새 교황은 자신의 이름을 프란치스코라고 정했다. 가난과 겸손과 단순함에서 탁월한 프란치스코 성인, 평화의 사도이자 생태계의 수호자인 프란치스코 성인이 교황의 롤 모델이 된 것이다.

그는 겸손하다. 교황으로서 전 세계에 첫 모습을 드러냈을 때 먼저 머리를 숙였다. 대주교 추기경으로서 그 권위에 따르는 처신을 얼마든지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견진성사를 주러 부에노스아이레스 한인공동체를 찾았을 때 신자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시내버스에서 내려 작은 가방을 들고 들어오는 허술한 차림의 노 사제가 추기경일 줄은 생각지 못한 것이다. 로마에 주교들의 모임이 있을 때면, 언제나 뒷자리에 앉기를 원했다.

그는 가난하고 서민적이다. 보좌주교 시절에는 은퇴사제를 위한 집을 숙소로 이용했고, 대주교가 된 후에도 잘 꾸며진 대주교관에서 살지 않았다. 침대 하나와 냉기를 가셔주는 난로가 있는 소박한 아파트에서 생활했다. 음식은 손수 해먹었고, 교통편은 버스나 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즐겨 이용했다. 틈틈이 빈민촌을 찾아 미사를 집전하고 가난한 주민들과 어울렸다.

2001년 추기경에 임명돼 서임식에 참석하러 로마로 갈 때 그는 축하단이 함께 하려는 것을 못하게 했다. 그 돈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하라고 권유했다. 로마에서는 숙소에서 바티칸까지 걸어다녔다. 서임식장에서 수많은 축하단이 함께 한 다른 추기경들과 달리 베르골료 추기경을 축하한 사람은 비서 신부와 친척 두 명이 전부였다.

그는 어느 면에서 단순하다. 예수회원들은 지성의 번득임과 자유로움을 특징으로 하지만, 그는 예수회원의 수련 교범인 '이냐시오 영신수련'을 고집스러울 정도로 전통적 방식으로 해석한다는 평을 받았다. 아르헨티나 군부 독재 시기인 1970년대에 아르헨티나 관구장이었던 그는 동료나 후배 사제들이 기초공동체에 들어가고 사회구조를 바꾸려는 의식화 운동에 가담하는 것을 반대했다. 사제는 본당을 사목하고 신자 단체들을 사목해야지 행동주의에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는 지론에서였다.

그렇다고 베르골료가 사회적 불의를 외면하거나 방관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추기경이 된 2001년 아르헨티나는 경제가 붕괴되고 있었다. 그는 고삐 풀린 자본주의가 수백만 아르헨티나인들을 더욱 더 가난하게 만들고 있다고 질타했다. 2007년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 때는 "계속되는 재화의 불공정한 분배가 사회적 죄악의 상황을 만들고… 수많은 형제들에게 제대로 된 삶을 누릴 가능성을 제약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그는 사회 변혁가는 아니었다. 가난한 삶을 살고 가난한 이들을 향하는 그의 삶은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해준 것이 나에게 해준 것'이라는 그리스도의 명령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교회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가 추구한 것은 구조적 개혁이 아니라 사랑의 개혁이었다.

그는 순명한다. 교회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에 순명한다. 그는 교회 가르침에 투철하다. 성ㆍ생명 윤리와 관련, 낙태와 피임, 동성애자들의 혼인 등에 대해 단호하다. 아르헨티나 정부가 동성애자들의 입양을 허용하자 "입양되는 아이의 인권에 대한 차별"이라며 강력히 비난했다.

성 윤리, 생명 윤리에 대한 이런 단호함은 율법주의나 교조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일부 사제들이 미혼모의 아기들에게 세례 주기를 거부하는 것을 보고 "위선적인 성직주의자들"이요 "하느님의 백성을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이들"이라고 호되게 질타했다. 필요한 것은 법 글자에 얽매여 법의 정신을 외면하는 율법주의가 아니라 사랑,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사랑이다. 배가 고파 우는 형제를 위해 모든 형제들이 다 함께 단식 규정을 깨고 음식을 먹게 한 프란치스코 성인을 떠올리게 한다.



▲ 교황 프란치스코가 추기경 시절인 지난 2008년 성목요일에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약물중독자 쉼터를 찾아 사람들의 발을 씻어주고 입맞춤하고 있다. 【CNS】


추기경 시절 베르골료는 호스피스 센터를 찾아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에이즈 환자 12명의 발을 씻어주면서 입맞춤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나환자를 만나자 말에서 내려 그 환자에게 입맞춤하고 자기 옷을 내주었다.

새 교황은 군부 독재 시절인 1970년대에 동료 회원 2명을 보호하지 않고 체포되도록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베르골료 추기경의 한 전기작가는 그렇지 않다고 밝혔다. 죽을 고비에 처한 그 두 사제가 풀려난 것이 바로 베르골료가 군부 지도자를 직접 만나 설득해서 이뤄졌다는 것이다. 오히려 베르골료는 군부에 쫓기던 많은 이들에게 숨을 곳을 마련해 주거나 해외로 도피하게 해주었고, 체포된 이들이 석방되도록 막후에서 로비도 벌였다고 밝혔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쓰러져 가는 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우직스럽게 충실히 응답해 교회 개혁과 쇄신의 전기를 이루었다. 하지만 오늘날 안팎으로 도전을 받고 있는 교회의 개혁과 쇄신 그리고 복음화 사명을 수행하려면 우직스러움으로는 부족하다. 전체를 볼 수 있는 눈과 시대의 징표를 헤아리는 식별력, 결단과 함께 화합과 조화를 이끌어내는 덕성도 요구된다.

새 교황 프란치스코는 제3세계인 라틴 아메리카에서 태어났지만 제1세계인 유럽을 잘 알고 있다. 부모가 이탈리아인이고 독일에서 공부해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주교가 되기 전까지 상당한 기간 문학과 심리학, 철학과 신학 교수로서 활동했다. 로마에서 보면 변방에 있지만 교황청 여러 부서에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 모든 것이 추기경들이 "로마 주교를 뽑기 위해 땅 끝까지 간" 이유이기도 하다.

교황으로 선출된 첫날 첫 만남에서 "좋은 저녁입니다" "좋은 밤 되시고 편히 주무십시오"하고 인사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제 베드로 호의 선장으로서 항해의 출발을 위한 힘찬 고동을 울렸다. 기사가 되려던 꿈을 접고 평화의 사도가 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본받아 새 교황 프란치스코가 이 시대에 교회가 직면한 도전들을 잘 극복해 나갈 수 있기를 온 교회가 기대하며 기도로 함께 하고 있다. 그리고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평화신문, 2013년 3월 24일, 이창훈 기자]


프란치스코 교황이 걸어온 길




1936년 12월 17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이탈리아계 이민 노동자 가정의 5남매 중 한 명으로 출생. 1958년 예수회에 입회, 학업과 수련 후 1969년 사제품을 받았다. 예수회 아르헨티나 관구장, 산미구엘 성요셉신학대학장, 산호세본당 주임 등을 역임하고 1992년 부에노스아이레스대교구 보좌주교로 임명됐다. 1998년 대교구장에 올랐다. 새 교황은 버스를 타고 다닐 만큼 서민적이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과 새 복음화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 것으로 알려졌다.


▶ 교육

- 대학에서 화공학 전공
- 빌라 데보토 신학교 입학
- 1958년 예수회 입회, 칠레에서 수학
- 1963~70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성요셉신학교에서 철학ㆍ신학 공부
- 1986년 독일에서 박사학위 취득

▶ 성직 생활

- 1969년 사제수품
- 1970년~71년 3차 수련, 1973년 종신서원
- 1973년~79년 예수회 아르헨티나 관구장
- 1980년~86년 성요셉신학대학장, 산호세본당 주임 겸임
- 엘살바드로대학과 코르도바대학 고해사제와 영성지도 담당
- 1992년 아우카 명의주교와 부에노스아이레스대교구 보좌주교
- 1997년 부에노스아이레스대교구 부교구장 주교, 98년 대주교구장
- 2001년 추기경 서임

▶ 주요 경력

- 2001년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10차 정기총회 보고 책임자
- 2005년~11년 아르헨티나 주교회의 의장
- 교황청 경신성사성ㆍ성직자성ㆍ수도회성ㆍ가정평의회ㆍ라틴아메리카위원회 위원

[평화신문, 2013년 3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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