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동성당

[연중 제17주일] 오병이어 (요한 6,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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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8-07-29 ㅣ No.116

 

[연중 제17주일] 오병이어 (요한 6,1-15)

 

 

 

 

다니엘 예언자는 밤의 환시 속에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연로하신 분 앞으로 인도되어 통치권을 받는 광경을 본다 (2열왕4,42-44)
그 무렵 42 어떤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 왔다. 그는 맏물로 만든 보리 빵 스무 개와 햇곡식 이삭을 자루에 담아, 하느님의 사람에게 가져왔다. 엘리사는 “이 군중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하고 일렀다.
43 그러나 그의 시종은 “이것을 어떻게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엘리사가 다시 말하였다. “이 군중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주님께서 이들이 먹고도 남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44 그리하여 그것을 사람들에게 내놓으니, 과연 주님의 말씀대로 그들이 먹고도 남았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입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입니다.(에페 4,1-6)
형제 여러분, 1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2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3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4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5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6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되리라고 하신다. (요한 6,1-15)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2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4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5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6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7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8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9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0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11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12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14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연중 제17주일 제1독서(2열왕4,42~44)

 

 

 

"그무렵 어떤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 왔다." (42ㄱ)

 

 

 

열왕기 2권 4장 42절에서 44절까지는 열왕기 2권 4장에 기록된 엘리사의 기적 사화 가운데 맨 마지막 다섯번째 기적 사화이다.

 

 

 

이것은 앞선 열왕기 2권 4장 38~44절에 나오는 '독이 든 국'밀가루를 넣어 예언자들의 무리를 살린 네번째 기적 사화와 비교할 때 음식과 관계된 기사란 점길갈을 지리적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이 다섯번째 기적은 엘리사 보리 빵 스무개와 햇곡식 이삭으로 100여명의 군중을 먹인 기적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병이어 기적(마르6,30~44; 마태14,13~21; 루카9,10~17; 요한6,1~14)을 연상케 한다.

 

 

 

한편 여기서 익명의 인물로 등장하는 사람의 출신지로 소개되는 '바알 살리사' '셋째 우상' 또는 '셋째 남편'이란 뜻으로 이곳의 정확한 위치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세켐 서쪽 20km 지점에 위치한 '케프르 틸트'(kepr Tilt)일 것으로 본다.

 

 

 

이곳은 'Lydda' 또는 'Diospoleos'에서 북쪽으로 약 24km 가량 떨어진 곳으로서

 

Eusebius 와 Jerome이 '벤 살리사' '세 계곡의 집'으로 불렸던 곳이다.

 

 

 

또한 사무엘서 1권 9장 4절에서 사울이 아버지의 나귀를 찾아 돌아다닌 지역들 가운데 한 곳 '살리사'로 소개된다.

 

 

 

'그는 맏물로 만든 보리 빵 스무개와 햇곡식 이삭을 자루에 담아,

 

 하느님의 사람에게 가져왔다.'

 

 

 

본문에서 '하느님의 사람'엘리사를 가리킨다.

 

 

 

그리고 '맏물'(햇)로 번역된 '레헴 삑쿠림'(lehem bikkurim)'떡', '빵', '식물'이란

 

의미를 갖는 '레헴'(lehem)'맏물'(첫 열매)란 의미를 지닌 '삑쿠림'(bikkurim)

 

함께 사용된 것으로 '맏물로 만든 빵' 또는 '햇곡식'(첫 열매로 만든 식물)이란 뜻이다.

 

 

 

본래 율법에 의하면, 모든 곡식의 첫 소산중에 가장 좋은 것은 주님께 바치도록

 

되어 있다(탈출34,26; 레위23,9~14; 신명26,3~10).

 

 

 

그리고 이것은 하느님의 일에 전념하는 사제나 레위인들이 먹는 양식이 되었다.

 

 

 

그런데 예로보암으로 인해 북부 이스라엘에서는 주님 대신에 금송아지를 섬기는

 

우상 숭배 국가로 전락하고 말았고, 일반 백성 가운데에서 사제들을 임명하였으므로 경건한 사제들이나 레위인들이 모두 남부 유다로 이주하였다(1열왕12,29~32참조).

 

 

 

따라서 북부 이스라엘에서는 합법적인 사제나 레위인들을 찾아볼 수 없는 상황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 암흑기에도 북부 이스라엘 사람들 중 경건한 사람들은

 

그들이 얻은 첫 소산을 하느님의 사람, 즉 예언자에게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에 나타난 이같은 행위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신앙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불의하고 악한 북부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율법을 지킴으로서

 

계약의 백성의 본분과 정체성을 지키려는 노력으로 평가된다.

 

 

 

본문의 '어떤 사람'도 하느님을 믿는 이러한 경건한 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보리 빵 스무개와 햇곡식 이삭을 자루에 담아'

 

 

 

본문은 앞의 '맏물'(햇)에 해당하는 '레헴 삑쿠림'과 동격을 이루는 명사구이다.

 

원문에는 동격을 표시하는 어떤 표시도 없이 단지 '레헴 삑쿠림'과 본문이 함께 연결되어 있다.

 

 

 

한편 레위기 2장 14절에서는 '너희가 주님에게 맏물 제물을 바치려면, 이삭을 불에 볶아 굵게 빻은 햇곡식을 너희의 맏물 제물로 바쳐야 한다'로 되어 있는데, 여기 '어떤 사람'으로 지칭되는 사람이것을 빵으로 만들어 하느님의 사람인 예언자 엘리사에게 바쳤다.

 

 

 

또한 여기서 '곡식 이삭'으로 번역된 '카르멜'(karmel)은 열왕기 2권 4장 39절에서

 

'푸성귀'로 번역된 '오르트'(orth)와는 다르다.

 

 

 

'오르트' '요리해서 먹을 수 있는 푸른 풀'을 의미하며, 이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채소'에 해당한다.

 

 

 

그러나 본절의 '카르멜'은 중동 아셀 지방 남쪽이나 사해의 서쪽 지역의 고산 지대에서

 

생산되는 곡물이었으며(여호15,55 ; 1사무15,12 ; 25,5), 어떤 성경은 이같은 원어적 의미를 고려해 '옥수수'(corn)로 번역한 것도 있다.

 

 

 

"그러나 그의 시종은 '이것을 어떻게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본문은 바알 살리사에서 온 사람이 바친 예물을 예언자 생도 무리들에게 주어

 

먹게 하려는 엘리사의 명령에 대하여 시종이 난색을 표하는 부분이다.

 

 

 

시종의 대답은 '내가 이것을 어떻게 백 명의 사람들에게 주겠습니까?'이다.

 

 

 

당시 보리 빵 한 개는 일반적으로 성인 한 명이 먹을 수 있는 한 끼 분의 식사에

 

해당하였으므로 '보리 빵 스무개' 20명 밖에 먹을 수 없는 분량이었다.

 

 

 

또하 자루에 담긴 '햇곡식 이삭' 역시 일백 명이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어떤 사람'이 엘리사에게 드린 '맏물'을 혼자서 운반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이처럼 턱없이 부족한 분량의 음식을 가지고 100명이나되는 사람들을 먹인다는 것은 시종에게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을 것이다.

 

 

 

따라서 본문에 나와 있는 시종의 반문이 신앙적 측면에서는 분명히 문제가 있지만,

 

산술적으로는 타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초자연적 능력을 신뢰하는 엘리사는 이같은 수학적이고 산술적인

 

계산을 초월하여 놀라운 역사를 드러낸다.

 

 

 

산술적으로 턱없이 부족하던 것이 하느님의 능력으로 충분한 것이 되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넘쳐 남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43,44절).

 

 

 

그렇다면 이같은 일이 가능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것은 열왕기 2권 4장 43절에 나오는 것처럼 엘리사에게 제공된 주님의 말씀과

 

이것을 신뢰하는 엘리사의 믿음으로 가능케 된 것이다.

 

 

 

 

 

 

 연중 제17주일 복음(요한6,1~15)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11)

 

 

 

군중들이 식사를 할 준비가 끝내자, 이제 음식을 제공하실 예수님께서 준비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이 간단히 언급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한 아이로부터 가지고 온 그 빵을 손에 드셨다.

 

 

 

'손에 들고'에 해당하는 '엘라벤'(elaben)'람바노'(lambano)의 부정(不定) 과거

 

시제로서 예수님께서 거리낌없이 즉시 취하신 행동을 나타낸다.

 

 

 

여기서 '빵을'에 해당하는 '투스 아르투스'(tous artous; the loaves)는 복수형으로서 안드레아가 가져온 보리 빵 다섯 개를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손에 들고 나서 감사를 드리셨다.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로 번역된 '유카리스테사스'(eucharisteras; when he had given thanks)'유카리스테오'(eucharisteo)의 부정(不定) 과거 분사로서 기본적인 뜻은 '감사한 마음을 가진 것' 혹은 '감사를 돌린 것'이다.

 

 

 

이것은 식사 전에 행하던 통상적인 감사 기도를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내용으로 감사 기도를 바쳤는지 알 수 없지만, 유다인의 모든 가정에서 사용되는 내용의 것이었다고 보면 된다.

 

 

 

예수님께서는 한 가정의 가장이 가족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 앉아 감사 기도를

 

바치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수많은 군중 앞에서 행동하셨는데, 눈으로 보이게

 

차려진 음식은 다섯 개의 빵이었고, 식사를 기다리는 이들은 오천명의 몇 배가

 

되는 군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충분한 식사가 준비되고 있는 것처럼, 통상적인 감사 기도를 바쳤다.

 

 

 

그 결과 그 날에 빵과 물고기가 부족하게 되기는 커녕, 도리어 남아서 열두 광주리나 되는 조각들을 거두기에 이르렀다.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은 원하는 대로 배불리 음식을 먹었으며, 그 맛 역시 원래의

 

오병이어보다 훨씬 더 나았으리라는 것은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있었던 경험으로 봐서 (요한2,10) 추측해본다.

 

 

 

특히 다른 복음서에 나오지 않는 '원하는 대로 주셨다'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은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는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을 풍성하게 주시어

 

결코 주리지 않게 하실 것을 예시하는 것이다(요한6,35).

 

 

 

 

 

연중 제17주일 \

 

<오천 명을 먹이시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요한 6,5-6)."

 


 

공관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군중을 가르치시다가 식사 시간이 지났고, 그래서 제자들이 걱정하면서 사람들을 돌려보내자고 예수님께 말씀드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마태 14,15; 마르 6,36; 루카 9,12).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군중이 이제 막 예수님께 오는 상황이고, 예수님께서 먼저 군중을 먹일 빵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똑같은 기적도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르게 기록될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공관복음서 저자들은 '빵의 기적'을 굶주린 사람들에게 빵을 주신 기적으로 이해하고 그렇게 기록했지만, 요한복음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 기적으로 이해하고 그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식사 시간이 지났다는 말도 없고, 군중이 '배고픈 사람들'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뭔가를 가르치시려고 의도적으로 질문하셨다는 뜻입니다. 왜 '필립보'에게 물으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의 질문은 사실상 제자들 모두에게 하신 질문으로 생각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라는 말은, '빵의 기적'은 군중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신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려고 의도적으로 행하신 기적이었음을 나타냅니다.

 

 

 

필립보는 예수님께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요한 6,7)." 라고 대답했고, 안드레아는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9)" 라고 말했는데, 필립보와 안드레아의 말은 모세가 했던 말과 비슷합니다.

 

 

 

"저를 둘러싼 백성은 걸어서 행진하는 사람만 육십만 명입니다. 당신께서는 '내가 그들에게 고기를 주어 한 달 내내 먹게 하겠다.' 하시지만, 양 떼와 소 떼를 다 잡는다 한들 그들에게 넉넉하겠습니까? 바다의 고기를 모조리 모아들인다 한들 그들에게 넉넉하겠습니까?(민수 11,21-22)" 그때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손이 너무 짧기라도 하단 말이냐? 이제 너는 내 말이 들어맞는지, 맞지 않는지 보게 될 것이다(민수 11,23)."

 

 

 

여기서 한 가지, 어떤 아이가 내놓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아이가 자기의 빵과 물고기를 내놓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빵의 기적'이 가능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그 아이의 사랑 실천이 기적을 일으켰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모두 틀린 말입니다.

 

하느님(예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분입니다. 뭔가가 있어야만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면 '전능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없었어도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는 분이고, 기적을 일으키셨을 것입니다. 또 그 아이의 사랑이 기적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가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의 빵과 물고기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때 '능동적으로' 응답하고, 예수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다는 점에서 좋은 모범이 됩니다.

 

 

 

필립보와 안드레아의 말을 간단하게 줄이면, "저 많은 군중을 모두 먹이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입니다. 이 말을 좋은 뜻으로 해석하면, 이 말에는 "주님의 힘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라는 뜻이 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필립보와 안드레아가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니 아예 생각하지도 맙시다." 라는 뜻이 될 것이고...)

 


 

요한복음서가 전하는 '빵의 기적'의 핵심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이 말씀을 단순하게 표현하면,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또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공관복음에 없는 이야기가 더 있습니다. 기적의 빵을 먹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다는 이야기와(요한 6,15), 사도들만 예수님 곁에 남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떠나버렸다는 이야기가(요한 6,66) 그것입니다.

 

그래서 결과만 놓고 보면, '빵의 기적'은 '실패'입니다.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통해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셨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올바르게 믿기는커녕 세속적인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고, 그랬다가 결국 다 떠나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실패하실 일을 왜 하셨을까?"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우리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떠나버리는 상황에서도 사도들은 왜 남았을까?" 라고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군중 전체를 보면 '빵의 기적'은 실패한 계시처럼 보이지만, 사도들만 놓고 보면 성공한 계시입니다. 그래서 최종적인 결과를 다시 보면, 예수님의 계시는 당신의 제자들(사도들)과 믿는 사람들을 위한 계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놀라운 기적과 표징을 보고 체험해도 안 믿지만,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그런 기적과 표징을 통해서 '예수님'이라는 분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게 되고, 더욱 깊은 믿음을 갖게 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연중 제17주일 + 기적을 낳는 사람/ 반영억라파엘신부님

 

 

 

예수님의 빵의 기적 이야기에는 하느님 나라의 표징이 담겨 있습니다.

 

장정만도 오천 명이 넘는 굶주린 군중에게 나누어 줄 빵을 구한다는 것은 인간의 셈법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필립보가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세상의 논리를 대변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의 질서와 논리로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세상임을 표징을 통해 일깨워 주십니다.

 

수많은 군중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인다는 것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들이 모두 먹고 남긴 조각을 모았을 때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는 성경의 표현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독자의 상상력에 맡겨 둘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신성을 지니신 예수님의 초자연적 기적이었는지, 우리가 흔히 알 듯 나눔을 실천하는 사랑의 기적의 결과였는지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빵의 기적에서 기억해야 할 점은 모두가 배불리 먹었다는 사실입니다.

 

단순히 빵으로 허기를 채운 것이 아니라, 군중이 빵보다 더 중요한 영적인 충만함으로 가득 찼고 함께 기쁨을 누렸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충만한 영광을 맛본 자신의 인생을,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그는 몸은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겸손과 온유, 인내심과 사랑, 평화와 일치를 말하며 깊은 영적 기쁨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행복은 내 배를 불리고 내 행복만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세례와 믿음으로 묶여 한 분이신 주님과 성령을 섬기는 교회 안에서 저마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서로 일치할 때 누리는 것입니다.

 

신자들의 일치는 신앙인이 성령께 받은 가장 큰 선물임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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