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성당 게시판

사랑을 하며는 예뻐져요 (본당의 날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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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리 [uree] 쪽지 캡슐

2001-06-24 ㅣ No.2538

 사랑을 하면 예뻐져요

- 6월 23일 특전미사   강론: 배우리  (전 사목회장) -

 

       

 

 

     역사 깊은 우리 성당

     

    -1941년 성당 설립 이래 (60년 동안)-

    본당 신부님:  16분 (1인 평균 약 3년 8개월씩사목)  

    본당 총회장:  12분 (1인 평균 약 5년씩 사목)

    본당 분할: 5건

      (청파동, 공덕동, 신수동, 삼각지, 새남터)

     

    특징:

     성직자 묘지

      (조선 대교구 초대 교구장 소브르기에르 신부 등)

     공원형 성당 (나무와 숲, 넓은 마당)

     종탑 (용산과 마포에서 올려다 보였던 용산성당 상징물)  

     2개구 신자 포용 용산-마포구의 구민이 함께 미사 봉헌

     

     

    강산은 여섯 번이나 변했는데---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합니다. 정말 많이도 변한 우리 성당입니다.

    우선 외형적으로 크게 변했습니다.

    조그마했던 성전 건물이 큰 건물로 되었고, 그 위치도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높아졌던 성전이 이젠 낮아진 성당으로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삼성-현대-우성 등 아파트군이 우리 성당의 동-서-북을 에워싸고 우리 성당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그나마 남쪽이 훤히 틔어 있어 다행인데, 아쉽게도 또 경희연립이 17층 아파트로 변한다니 이젠 그나마 남쪽까지 기대할 수가 없게 돼 버렸습니다. 둘러싼 아파트들이 성당보다 훨씬 높아 전에는 성당을 올라간다고 했는데 이제는 내려간다고 해야 할 판이 됐습니다.

    신자 수도 엄청나게 증가했습니다.

    전에는 성당 사람이라면 서로가 서로를 다 아는 편이었죠. 그러나, 이제는 서로가 서로를 모를 정도가 됐습니다.

    60년 세월을 거친 이 시점에 우리는 그 동안 우리 성당의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던 선배 교우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산등성길로 약현성당을 걸어다니며 이 곳의 용산 공소를 본당으로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 주셨던 분들.

    6·25 그 어려운 전쟁 상황 중에서도 신부님을 자택에까지 모셔 주셨던 어른.

    종탑을 짓기 위해 치마폭과 대야에 모래와 물, 블록 벽돌을 나르고, 손수 쌓고, 일꾼들과 함께 땀을 흘리며, 아예 성당에서 살았던 교우들.

    성당 부지와 건물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돈을 다 바치고도 모자라 집문서까지 담보로 잡혀 가며 비용을 대었던 분

    성당 이 교육관을 짓기 위해 그 뜨거운 여름철에 휴가도 반납하고 이 성당 저 성당을 뛰어다니며 기금을 모았던 많은 교우들.

    성직자 묘지에 풀을 다듬어 주고, 물도 주며, 꽃으로 장식까지 해 드리며 돌보아 온 그 많은 신자들.

    이러한 모든 일들에 힘을 쏟은 우리 선배들의 피와 땀이 있었기에 이렇게 아름다운 오늘의 우리 용산성당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자기 한 몸 아끼지 않고, 성당을 위해 그 모든 것을 바친 우리 선배 교우들의 노고에 머리가 숙여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찌 보면 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러한 일들은 하느님의 도움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니고 싶었던 용산성당

     

    제가 처음 용산성당을 알게 된 것은 일제 때입니다.

    태어난 곳은 도화동 산 7번지, 바로 지금 성당 마포 현대아파트 자리. 지금의 우리 성당 아래입니다. 무척이나 배 고팠던 시절, 그 어린 시절에 저는 이 용산 산마루에 있는 동네 친구들과 함께 일본군 고사포 진지를 바라보며 언덕에서 비행기놀이, 총쏘기놀이 같은 것을 하며 자랐습니다.

    어느 땐가는 지금의 우리 성당이 있는 곳 고사포 진지를 지나 반대쪽 용산 산비탈까지 내려온 일이 있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아카시아 꽃을 따 먹기 위해 어떤 담을 기어 넘은 일이 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당시에 이 곳에 있었던 수녀원 뒤뜰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마포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안 있어 저희 가족은 이사를 해야 했습니다. 군사지역에 아주 가까이 있는 산동네여서 일본군이 이 곳의 집들을 옮기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용산쪽의 원효로4가로 이사와 살게 되었고, 학교도 남정학교로 옮겼는데, 얼마 안 있어 해방을 맞았습니다.

    이 무렵, 옛날 생각이 몹시 났던 저는 더 어렸을 때의 생각이 그리워 신창동 언덕을 기어오르곤 했는데, 이미 이 곳도 집들이 많이 들어서고 크게 변해 있었습니다. 제가 종탑을 보게 되고 이 근처로 많이 왕래하는 수녀님들을 보게 된 것은 이 무렵이었고, 아침 저녁으로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어려운 끼니를 찾아 먹던 것도 바로 그 즈음이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저희 옆집에 정말 지독하리만큼 성당엘 열심히 다니는 이웃이 있었는데, 신앙 속에 사는 그 집이 그렇게도 부러웠고, 나도 그 종소리 울려 대는 성당에 나가 보았으면 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이러한 소망을 하느님께서 어여삐 보셨음인가? 제가 중매로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상대의 집이 역시 신심 깊은 천주교 집안이었습니다. 우선 이 조건이 좋아 결혼하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아내와 함께 성당을 나오게 되었는데, 그것이 1970년 초입니다.

    교리를 받고, 1976년 부활절에 영세 받았습니다. 당시 저를 눈여겨 보았던 성당 사목회의 한 어른이 자진해서 영세 대부를 맡아 주셨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분이 교구에서도 많이 알아 주는 하승백 바오로 회장이셨습니다. (하승백 회장은 우리 성당 6대 총회장을 하셨는데, 그 분의 자제분이 지금 KBS에서 야구 해설을 하는 하일성씨입니다.)

    그 다음해엔가, 저는 교육부 차장이라는 직책을 맡았습니다.

    당시, 학원에서 저녁 강의를 했던 저는 낮이면 열심히 교리 공부도 하며 성당에서 봉사를 하였는데, 너무 튀었음인가? 벽에 부딪히는 일이 많았습니다. 선배 어른들의 도움이 기대와 같지 않았고, 하는 일마다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저는 너무 가볍게 행동한 것 같았고,-

    역시 텃세가 센 성당임을 절감했습니다.

     

     

    섭섭한 일로 한때 냉담에 빠지기도

     

    교육부 차장직을 맡았던 저는 주일학교 어린이에 관한 일도 맡아 보았는데, 매 주일마다 주일학교 교사들과 자리를 함께 하고 교사회의를 가졌습니다.

    매주 성당에서 열리는 이 교사회의에 참석하여 교사들이 교안을 작성하고, 토론을 하고 하는 일에 관여하고 보람을 갖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는 여기에 참석해 주신 담당 수녀님으로부터 무척 섭섭한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물론, 수녀님은 저를 위해서 한 말씀이셨는지 모르지만, 저에게 있어사는 그야말로 충격적인 말이었습니다.

    "교육차장님은 다음부턴 이 회의에 더 이상 나오시지 않아도 되겠어요."

    순간, 이 말씀이 왜 제게 그렇게 서운함을 안겨 주었을까요? 그리고, 그 소리가 왜 그렇게 날카롭게 들렸을까요?

    그렇게 보람을 느끼며 일하던 자리에 나오지 말라 하니, 제게는 사형 선고 같은 것이었습니다. 아마 그 수녀님은 교사회의에 나와 관여하는 것이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도리어 방해가 된다고 보셨던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생각한 방향이 서로 달랐던 데서 나온 결과라고도 보여집니다. 어떻든 이 자리에 나오지 말아 달라는 수녀님의 말씀이 정말 너무너무 서운했습니다.

    그 후로 저는 교사회의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아니, 못 나갔습니다. 아예 성당에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아내에게에도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몹시 괴로웠지만, 그 누구에게도 이런 제 심정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여간해서 빠지지 않고 나가던 성당을 한참 안 나가고 보니 성당에선 냉담한다는 소식까지 들렸습니다.

    몇 달쯤 뒤, 대부님 권유에 따라 마음을 돌려 참회의 기도 끝에 다시 나오게 되었습니다. 성당 교우들은 환영해 주었으나, 제게 충격적(?) 말씀을 해 주셨던 수녀님 근처로는 왠지 가지지가 않았습니다. 그 수녀님을 대하기가 싫었습니다.이것은 제 내성적 탓이기도 했습니다. 기회가 없어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수녀님도 저에게 아무 말씀을 안 하셨습니다.

    그런데, 모든 아픔은 세월이 해결해 주는가 봅니다.

    그 해 12월에 사목회 개편이 있었는데, 의외에도 제가 교육부장이 된 것이었습니다. 아니 냉담까지 했던 내가 주일학교 등의 일을 관장할 교육부장? 저는 의외의 자리 조정에 놀랐습니다.

    새 사목회가 구성되어 회식하러 가는 길에 수녀님을 뵙기가 거북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걸었는데, 그 수녀님이 갑자기 제 옆으로 다가오셨습니다.

    무슨 말씀이 나올까 조금 긴장되는 순간.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기우였습니다.

    "교육부장님. 축하드려요. 앞으로 더 열심히 해 주세요."

    아니, 이게 웬일입니까? "그렇게 내가 얘기한 것이 섭섭했나요?" 식의 말씀이라도 나올 줄 알았는데, "축하"라니? 거기다가 이제 새로 받은 "교육부장님"이라는 호칭까지---. 그 동안 미움으로만 남아 있던 수녀님에 대한 모든 것이 한꺼번에 해소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미워 보였던 수녀님 얼굴이 정말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이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그 수녀님이 저를 교육부장으로 추천했다고 합니다.)

    저는 당시에 어떤 억제하지 못할 마음에 벅차 눈물이 나올 것 같았습니다.

     

     

     거인과 난쟁이의 사랑 이야기

     

    어느 마을에 흉칙하리만큼 몸집이 큰 거인과 그와 반대로 아주 초라할 만큼 몸집이 작은 난쟁이가 살았답니다.

    그들은 보통의 몸집으로 살고 있는 그 마을의 다른 사람들을 몹시 부러워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그 마을을 떠났습니다. 그 보통의 몸집을 가지고 사는 사람을 보면 괜히 짜증이 나고 그들에게 비웃음을 받는 것 같아 도저히 그 곳에서 살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살지 않는 어느 깊은 숲속으로 들어온 거인과 난쟁이는 함께 살았지만, 서로의 사이는 그렇게 좋지가 않았습니다. 거인은 그래도 몸집으로 보면 자기가 낫다고 우겼고, 난쟁이는 자기가 낫다고 우겼습니다. 밥 짓는다고 거인이 냇가에서 쌀을 씻으면 난쟁이는 자기가 가로채어 쌀을 씻었고, 난쟁이가 쌀을 씻어 밥을 지으면 거인이 그 밥을 먹지 않았습니다. 서로 상대의 손이 징그럽기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이 있는 숲속에 새 한 마리가 떨어졌습니다. 그 새는 상처를 입어 몹시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거인은 급히 그 새를 정성껏 치료해 주었고, 난쟁이도 열심히 함께 그 새의 아픈 부위를 치료해 주었습니다.

    이 때, 거인은 자기와 함께 새를 치료해 주는 난쟁이의 두 손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전에는 보잘 것 없어 보이던 난쟁이의 손이 아주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난쟁이 역시 새를 정성껏 치료해 주는 거인의 손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거칠고 우락부락하게만 보였던 그런 왕손이 아니었습니다. 겸손하게 보이는 작은 손이었습니다.

    서로는 몸집이나 몸이 그렇게 흉칙하게 보였던 것은 그 동안 사랑의 눈으로 보아 오지 않고 미움의 눈으로만 보아 왔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상대의 손이 크고 작게 보였던 것은 바로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얼마 후, 두 상처가 다 아문 새는 하늘 높이 날아올랐습니다.

    하늘 높이 날아오른 새를 향해 달려가며 팔을 내저어 잘 가라고 외치는 두 사람의 눈, 입, 팔, 발 그 모든 부위들이 서로가 보기에는 그 동안 흉하게만 보아 왔던 그런 몸 부위들이 아니라 이제는 아주 아름답고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었습니다.

    그 뒤로 거인과 난쟁이는 자신들이 그토록 부러워하던 보통 사람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사랑을 하면 예뻐지는 것을

     

    이 이야기를 통해 저는 20년 전 쯤에 있었던 교사회의 때의 일을 떠올리고 자성을 했습니다. 당시 내가 그 잠깐의 충격으로 성당을 등졌던 것은 상대의 아름다운 면은 보지 못하고, 그 반대의 면만 보았기 때문이라고.

    이 작은 이야기와 제 경험이 여러 교우분들에게 그 동안 미움의 눈으로 보아 왔던 사람들의 그 모든 것이 다정한 친구의 모습으로 다가오게 하는 데, 한 몫을 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동안 미워했던 사람들의 좋은 면을 보아 그 상대자가 아름다운 선녀처럼 다가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저에게는 가끔 충격(?)을 주었던 우리 성당이긴 하나, 그래도 제게는 무척 고마운 성당입니다. 계집애처럼 수줍었던 저를 키워 당당히 여러 사람 앞에 서게 하는 용기를 주었고, 직장 일로 좌절에 빠진 저에게 위안과 격려, 삶의 의욕을 주었던 신앙 공간이었습니다. 60이 넘은 이 나이까지 방송이나 강의, 집필 활동 등 꾸준히 일할 기회와 힘을 갖게 된 것도 그 동안 숱한 난관을 통해 이런 일에 필요한 능력을 길러 주신 주님의 은덕이었습니다.

    사랑이 너무도 부족했던 저에게 "사랑"이라는 것을 조금이나마 알게 한 것도 우리 용산성당입니다. <거인과 난쟁이>의 이야기에서처럼 그 누군가에게 가졌던 미움의 껍질을 벗어 던지게 한 것도 용산성당을 통해 만나게 된 우리 주님이십니다.

     

    어느 지하철역에 써 붙어 있는 글귀 하나.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성당 설립 60년>이라는 시간적 공간에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들의 머문 자리가 앞으로 60년 뒤쯤의 우리 후배 교우들에게 얼마쯤 아름답게 보일까?

    문득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는 노래가 생각납니다..

    이제 우리들 모두 사랑을 해서 우리의 손이 발이, 얼굴이, 온 몸이 서로가 서로에게 아름답게 보이기를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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