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성당 게시판

산 아래로... 세상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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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지종 [sjjbernardo] 쪽지 캡슐

2002-02-24 ㅣ No.1573

 

 

2002, 2, 24 사순 제2주일 복음 묵상

 

 

마태오 17,1-9 (영광스러운 변모)

 

그리고 엿새 후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기 요한을 데리고 (나서시어) 그들을 따로 이끌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으니, 그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이 때 마침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에게 나타나서 예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참견하여 예수께 "주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제가 여기에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아직 그가 말을 하고 있는데 홀연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감쌌다. 이 때 구름에서 소리가 (울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나는 그를 어여삐 여겼노라.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였다. 제자들은 (이 소리를) 듣고 얼굴을 (땅에) 대며 두려워 떨었다.

 

예수께서 다가와 그들을 만지시며 "일어나시오, 두려워하지 마시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눈을 들어 (살피니) 아무도 없고 예수 그분만 보였다.

 

그리고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인자가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켜질 때까지 이 현시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시오" 하고 명하셨다.

 

 

<묵상>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을 그리스도, 곧 구세주로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구세주인 그리스도 예수는 과연 누구입니까?

초인적인 힘으로 세상을 통치하는 이입니까?

모든 불의와 부정을 단칼에 잘라버리고 순식간에 새 세상을 여는 전지전능하신 분입니까? 불치병을 씻은 듯이 낫게 하고, 삶의 온갖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도록 특별한 조치를 취하시는 분입니까?

 

아닙니다.

무력하신 분입니다.

십자가라는 치욕적인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아무 힘이 없으셨던 분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힘없는 이를 우리의 구세주라고 고백합니다.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했다고, 십자가를 따르는 길이 생명의 길이라고 믿습니다.

적어도 입으로, 머리로는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는 어떻습니까?

이와는 반대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굿판에서 불려지는 온갖 잡신들처럼 우리 구세주께서 우리의 현세 생활을 보호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당장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당장 아픔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아무런 고통도 없는 삶을 마련해주기를 바랍니다.

아니 그것을 강요합니다.

이렇게 해주셔야만 우리의 구세주가 될 수 있다고 구세주의 자격을 제시합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를, 십자가에 처형되신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고백하면서도,

동시에 십자가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라고 예수님께 외칩니다.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만 참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살기 위해 십자가를 내팽개치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돌아봄으로써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되새겨보는 시간이 바로 사순 시기입니다.

그러기에 다른 이야 어떻든 나의 편안함과 유익을 위해 살아온 우리라면

이 사순 시기는 고통의 시간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순 시기가 지나고 영광스러운 부활이 빨리 왔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순 시기 성가가 귀에 거슬릴 정도로 암울하고 처량하게 들리고,

수난의 여정을 담은 말씀들이 거북하게 느껴지지만, 억지로 참습니다.

마치 주님의 수난 여정에 기꺼이 함께 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애쓰면서 말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복음은 빛처럼 다가옵니다.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예수님, 우리가 생각했던 구세주, 바로 그 모습입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이 사람 저 사람에 치여 지칠 대로 지친 모습은 간데 없고,

환하고 빛나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신 예수님,

죽음을 향해 걸어가야 하는 이의 초조함과 절망적인 모습은 사라지고

빛처럼 당당하게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

얼마나 든든합니까?

구약 시대 구원의 상징적 인물,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를 살리실 분이라면, 바로 이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던 제자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듣고 미칠 것 같았던 이들,

밤낮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통스러워하던 이들,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기다림의 시간을

헤어날 수 없는 절망감 속에 처절한 몸부림으로 지내야 했던 이들,

이제 벅찬 해방감에 젖습니다.

안도의 한 숨을 내쉽니다.

 

 주님,

 여기에 머뭅시다.

 이대로 삽시다.

 이것이 우리가 꿈꾸는 삶이 아니었던가요.

 저희가 모든 것을 해 드리겠습니다.

 집도 짓고 먹을 것도 마련하고...

 그저 이 자리에 이렇게만 있을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당연한 제안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주님의 뜻이었겠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아직 머물 때가 아닙니다.

가야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

아직 함께 보듬어야 할 이들이 있습니다.

산에서 내려가야 합니다.

산에서 이루어진 모든 것들,

산에서 보았던 모든 모습들,

영광과 환희가 넘쳐나는 그 모든 것들을

희망으로 곱게 간직하고,

그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

두려움 없이 다시 고통의 길, 십자가의 길로 들어서야 합니다.

 

한 주간의 고단한 삶을 뒤로하고 우리는 성전에 모였습니다.

참으로 편안한 시간입니다.

참으로 아늑한 공간입니다.

이렇게 언제까지나 머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지금 미사를 봉헌하고 있는 이 시간, 이 공간은

결코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지어 바치고자했던 초막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 곳에서 예수님을 만나 힘을 얻은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따라 이 곳에서 밖으로,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마음 맞는 이들과 함께 주님을 모시고 오순도순 살아간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마는

예수님의 뜻은 이렇게 편안하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온 세상에 복음이 울려 퍼지는 것,

구체적으로

가난한 이들,

고통받는 이들,

빼앗긴 이들,

묶이고 억압받는 이들,

슬퍼하는 이들과 함께 함으로써

이들을 세상의 굴레에서 해방시키고

주님의 기쁨에 온전히 함께 하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뜻이고 십자가를 통해 부활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산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척박한 땅에 흙투성이가 되는 아픔을 감수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일구기 위해서 힘차게 나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감으로써만

오늘 우리가 미리 맛 본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삶에

영원히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하느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서

 나와 함께 고난에 참여하시오."(2디모 1,8ㄴ)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주님 안에 사랑 담아 여러분의 벗 상지종 베르나르도가 띄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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