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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주 [zizibe76] 쪽지 캡슐

2001-12-13 ㅣ No.8826

서방을 팝니다  

 

서방을 팝니다

헌 서방을 팝니다

반 십 년쯤 함께 살아

단물은 빠져 덤덤 하겠지만

허우대는 아직 멀쩡합니다.

 

키는 6척에 조금은 미달이고

똥배라고는 할 수 없으나

허리는 솔찬히 굵은 편,

대학은 나왔으나 머리는 깡통입니다.

 

직장은 있으나 수입은 모릅니다.

아침에 겨우 일어나 출근하고

밤늦게 용케 찾아와 잠들면 그뿐.

 

잔잔한 미소 한 번,

은근한 눈길 한 번 없이

가면 가는 거고 오면 오는 거고.

포옹이니 사랑놀이니

달착지근한 눈맞힘도

바람결에 날아가버린

민들레 씨앗된 지 오래입니다.

 

음악이며 미술이며

영화며 연극이며

두 눈 감고 두 귀 막고

방안의 벙어리된 지 오래입니다.

 

연애시절의 은근함이며

신혼초야의 뜨거움이며

생일이며 결혼기념일이며

이제는 그저 덤덤할 뿐,

세월 밖으로 이미 잊혀진

전설따라 삼천리 같은 이야기일 뿐,

눈물방울 속에 아련한 무늬로 떠오르는

무지개일 뿐, 추억줄기일 뿐.

밥 먹을 때도 차 마실 때도

포근한 눈빛 한 번 주고받음 없이

신문이나 보고 텔레비나 보고,

그저 덤덤하게 한마디의 따근따끈한 말도 없고.

매너도 없고 분위기도 모르는지

 

그 흔한 맥주 한 잔

둘이서 나눌 기미도 없고.

일요일이나 공휴일의

들뜨는 나들이 계획도

혼자서 외출하기, 아니면 잠만 자기.

 

씀씀이가 헤퍼서 말도 잘해서

밖에서는 스타같이 인기 있지만

집에서는 반 벙어리,

자린고비에다 술주정꾼.

 

서방도 헌 서방이니

헐값에 드립니다.

 

사실은 빈 가슴에 바람 불고

눈 비 내리어

서방 팝니다, 헐값에 팝니다,

 

주정거리듯 비틀거리며 말은 하지만

가슴에는 싸한 아픔

눈물 번지고

허무감이 온몸을 휘감고 돌아

빈말인 줄 뻔히 알면서도

서방 팝니다.

 

헌 서방 팝니다며 울먹입니다.

 

흩어진 마음,

구멍이 송송 뚫린 듯한

빈 가슴을 추스리며

안으로만 빗질하며 울먹입니다.

각시도 팝니다

 

각시를 팝니다.

헌 각시를 팝니다

한 20십년 살았으니

단물은 커녕 쓴물밖에 안 남았지만

걸레질은 할 수 있습니다.

 

키는 6척에 버금하고

임신이라고 오해할 정도는 아니지만

두 팔로 안기엔 다소

버겁습니다

 

대학은 나왔으나 머리는 숯검댕이입니다

직장은 다닌적이 있으나

조잘조잘 수근수근대는 재미로 다녔을 뿐

공익에 도움은 되지 못했습니다

 

은근한 눈빛

요염한 눈웃음 한 번 준 적 없이

보든지 말든지

언제라도 벗어 제끼고

어깨 주무르기나

발 씻어주기는 소설 속 이야기라고 강변합니다

 

음악이며 미술이며

연극이며 문학은

소리에 귀멀고 색깔에 눈멀었습니다

 

연애시절의 청초함이며

삐진 듯 귀여운 내숭이며

은은한 화장에 단아한 옷차림은

이미 흘러간 옛 노래입니다

 

입에 먼저 맛있는 거 넣어 주겠다고

아웅다웅하던 전쟁은

어느새 제 주둥이 채우기에도 바빠졌습니다

 

밤이면 위 아래 아낙네들과

노래방에 찜질방에

고스톱에 소주 파티에

주야장창 즐겁기만한 행복한 인생이지만

 

조금이라도 일찍 퇴근하거나

저녁을 먹지 않고 들어오는 날이면

역팔자 눈썹을 휘날리며

탁자에 깨지지지도 않는 밥그릇이 날아다닌답니다

 

장미 한 송이라도 바칠량이면

이게 얼마짜린데 허튼 짓 한다며

그래도 백화점엔 신나게 들락거립니다

 

씀씀이가 다소 해퍼서

어제 산 블라우스가 오늘은

색깔만 달리하여 옷장에 걸려있고

하루 한켤레씩 날아가는 스타킹이지만

남편의 담배값은 아깝다고 합니다

 

각시도 아주 헌 각시이니

아주 꽁짜로 드립니다

 

혹시 운반비가 필요하시면

택배 배달료까지 송금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도 싫으시면

.

.

.

그래도 싫으시면

....

 

어찌합니까

어찌 하란 말입니까

.

.

.

.

그냥 사는 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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