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북한관련

나의 신앙의 한 단면을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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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기 [suneunyu] 쪽지 캡슐

2008-07-04 ㅣ No.5845

우리 나이로 60이다.  태어난지 닷새째 되던 날, 세례를 받았는데, 그날이 위대한 바르나바 성인의 축일이라서 나의 본명이되었다. 그게 지금은 북한 땅이 되어 버린, 정확하게 말해서 38선 이남, 휴전선 이북인 땅에서의 일이었다.
어릴 때 소원이 있었다면 신부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소신학교에 가지 못해 신부는 될 수 없었다.
유아세례를 받은 집 사람의 어릴 때 소원은 수녀가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신앙 생활은 그냥  그랬다. 많은 가톨릭 신자처럼 미지근한 편이었다. 그러나 단 한번도 교회를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었다.  어릴 때도 타향에 가면 우선 성당이 어딘지 알아야 잠이 왔으며, 해외 출장을 가서도 프론트에서 성당 위치부터 파악하고 투숙하곤 했다.
 
공부 잘한다는 소리는 듣고 산 편이다. 소위 말하는 S대 법대를 나왔으니 말이다.신앙은 별 볼일 없었지만, 신학 관련 책은 열심히 읽었다. 우리집에 묵고 가신 신부님이 내 서재를 보고 신학생 방인줄 알았다고 했을 정도로 책은 열심히 읽고 살았다. 사실 나에게 주어진 달란트란 그냥 책 열심히 보는 것 뿐이었다. 나는 신앙이 지식의 대상의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내가 가진 재주는 그런 방향으로 사는 것 밖에 없었다.
 
가톨릭 신자가 90%라는 오스트리아에 살 때 들은 이야기가 있다. 한국에 갔다온 오스트리아 신부들이 아예 한국으로 가서 사목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신부를 소중히 여기는 한국에 반한 것이다. 나도 예외가 아니라서, 신부라면 무조건 존경한다.
나는 신부님들을 여러분  제법 많이 아는 편에 속한다.
나를 울리도록 감동 시킨 신부도 있고, 그냥 그런 신부도 있고, 내 속을 태운 신부도 있다.
 
 
믿거나 말거나, 내가 읽은 교회사 책에 의하면 종교 개혁 직전에 독일 시골 성당에는 시편을 다 읽어 보지 못한 신부가  술 냄새를 풍기며 미사를 드리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많은 스캔들을 일으킨 신부 때문에 밤잠을 자지 못하고 걱정하기도 했다. 결국 그 신부님은 환속하셨다.
또 다른 신부님이 스캔들에 휩싸였지만, 그 분을 그 후 만나게 되어, 골프에 모시고 여비도 마련해서 보내 드렸다.
왜 그랬을까?
그건 사제란 존재는 너무 성스럽고,그 직분은 귀하고, 삶은 외롭고 힘들다는 것을 나는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내가 다 되기를 바랄 수 있어도, 사제만은 결코 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스큉의 말대로 교회는 죄인들의 집합소이면서도 하느님이 사시는 곳이며, 하느님의 나라가 지상에서 모습을 희미하게 보여주면서도 하느님의 나라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다양한 모습으로 인간에게 계시해주시는 하느님의 빛을 찾아 나는 끊임없이 모색하고 번민하고 기도할 뿐이다.
 
나는 외로운 사제의 모습 때문에 같이 울어 본적도 있고, 사제를 친구처럼 지내고 싶은데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무력해진 일도 있다. 나는 내 마누라를 욕하는 사람과는 같이 지낼 수 있었지만, 사제를 욕하는 사람과는 같이 지낼 수 없었다.
 
이제 내 신앙의 한 단면, 그러니깐 많은 부분 중의 하나, 즉 나의 사제에 대한 관념을 이렇게 고백하였다.
왜 이제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나는 아무런 정치적 경제적 이해 관계도 없다. 참고로 나는 현재 해외에 이민와서 살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단지 나의 조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안타까워서 이러는 것이다.
도대체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과 같은 진리마저도 부인하는 조국의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다. 그래도 좋은데, 신부님들이 촛불 미사를 드리고, "고시철회 명박퇴진"이라는 팻말을 들고 앉아 있는 현실 때문에 내 일생의 신앙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되돌아 보는 것이다.
 
수많은 시간, 수많은 노력, 그리고 정열을 바쳐서 일생동안 신앙 생활을 해왔다.
그런데 이렇게 허망한 것인가.
진리요 생명이요 빛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 사제들의 모습은 정말로 진리인가?
나는 사제의 그 어떤 모습도 받아들이지만, 진리 아닌 것을 진리라고 한다면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면 나의 60평생 신앙은 무엇이 되는가?
 
주님, 나의 하느님,
이것이 정말 안식처입니까?
주님은 나의 안식처입니다. 그러면 주님에게만 매달리고 이 사제들을 떠나도 되는 것입니까?
 
주님, 나는 눈물을 닦을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제가 한 평생 살면서 주님을 찾아온 것에 대한 대답입니까?
하느님 진리 아닌 것을 진리라고 하는 사제들을 제가 과연 따라야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저분 사제들은 진리이고, 나는 오류에 빠져 있는 것입니까?차라리 내가 오류에 빠져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참으로 만에 만에 그러니 일억에 하나라도 저 사제들이 진리와 어긋나는 것이라면, 저 사제와 저 사제에 열광하는 많은 삶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나는 새삼 아우스비츄의 비극을 보며 신정론을 들먹이며 한탄하는 사람을 흉내내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단지 가슴이 찢어지도록 슬플 따름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과정이라면 하느님은 승리하시겠지만, 그 승리는 나에게 너무 멀리 있어 나는 쓴 잔을 마시며 고통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주님, 이제 저를 곧 부르시겠지요.
저는 얼굴을 들디 못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주님의 사제들을 비난하였습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시어 그래도 이 가엾은 영혼을 거두어 주소서.
주님 아니면 제가 어디에 가서 숨어들겠습니까?
주님, 자비를 자비를 자비를 베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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