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동성당 게시판

연탄 한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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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욱 [blasius] 쪽지 캡슐

2000-01-03 ㅣ No.247

연탄 한 장

 

                                                   --- 안도현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을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안도현의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에 실린 연탄 한 장!

 

이 시를 읽으면 먼저 어릴 때 연탄불 갈 때가 생각난다. 마지막 남은 불씨마저도 전해주려는 듯 철썩 달라붙어 있던 연탄 두 장.  시인의 말대로 싸늘한 재로 남는 것이 두려워 사랑의 불을 전해주는 데 머뭇거렸던 일들과 함께 추운 겨울같은 세상 안에서 뜨겁게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모습 또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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