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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춘천교구 양양 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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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3-07-11 ㅣ No.1111

 

[믿음의 고향을 찾아서] 춘천교구 양양 성당(상)

옹기촌에 뿌리 둔 영동지방 신앙 '모태'

 

 

(사진설명)

1. 양양 성당은 6.25 전쟁 때 북한군이 퇴각하면서 불을 지르는 바람에 잿더미가 됐다. 현 성당은 1954년 공소 신자들까지 팔을 걷어부치고 공사에 나서 완공한 것이다. 성당 구석구석에 82년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다.

2. 순교자 이광재(디모테오) 신부의 업적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순교각. 기념비에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칩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시골 마을의 언덕배기에 서있는 성당에 들어서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푸근해진다.

 

고즈넉한 분위기에 젖어 마당을 서성거리면 인심 넉넉한 신부님이 사제관에서 나와 반겨줄 것만 같다. 순박한 주민들이 한가족처럼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마을을 무심히 내려다보면 그 정취가 마음 속까지 전해진다.

 

남설악을 병풍처럼 휘두르고 있는 강원도 양양군 양양 성당(주임 정원일 신부)도 그 같은 정취가 남아 있는 언덕 위의 성당이다. 지금이야 시내가 제법 번창하고 군데군데 아파트도 눈에 띄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양양 군청 옆에 있는 성당 입구에 들어서면 현대식 2층 건물 '디모테오 어린이 집'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아이들이 안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지 마당은 적막할 정도로 고요하다. 옛날에는 성당 주변에 사는 코흘리개들이 시도 때도 없이 몰려와서 천사같은 수녀님을 친구삼아, 마당을 놀이터삼아 뛰어노느라 왁자지껄했을 텐데….

 

성당 올라가는 진입로 중간에 기와 지붕을 얹은 순교각(殉敎閣)이 세워져 있다. 순교비에는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친니다"라는 문구가 씌어 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옛 수녀원 건물에 '이광재 신부 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본당 공동체의 전체적 분위기가 1940년대 후반 공산치하에서 핍박받던 사제와 수도자들을 38선 이남으로 남하시키고 6.25 전쟁때 순교한 이광재(디모테오) 신부에게 쏠려 있음을 금방 느낄 수 있다.

 

기념관에는 이광재 신부의 손때 묻은 유품들뿐 아니라 82년 본당 역사가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잘 정돈돼 있다. 1930년대 공소회장단 피정 기념사진과 교리문답집 등 빛바랜 흔적을 쭉 더듬어 가다 보면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로 되돌아가는 듯하다. 가난하고 배운 게 없지만 끔찍한 정성으로 천주님을 모시고, 교우들이 친형제 자매보다 더 의좋게 살았던 그 시절 말이다.

 

양양 본당은 영동 지방 신앙의 모태(母胎) 같은 믿음의 고향이다. 영동 지방은 백두대간이 동서를 가로막고 있는 지형 탓에 타 지방에 비해 복음이 꽤 늦게 전파됐다. 마지막이자 가장 혹독한 박해인 병인박해(1866년) 당시 더 숨을 곳이 없던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 신자들은 백두대간을 넘었다.

 

그때 형성된 '범뱅이골'(양양), '싸리재'(속초) 등의 교우촌에 뿌리를 두고 1921년 설립된 본당이 양양 본당이다. 인근 홍천군에 5개, 인제군에 4개 본당이 있지만 양양군에는 아직까지도 양양 본당이 유일하다. 양양은 지금도 모든 면에서 외진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당은 예나 지금이나 굴곡없이 평온하게 신앙을 영위했을 것 같다. 그러나 군(郡)의 유일한 성당이라서 그랬던지 우리 민족과 교회가 겪은 수난과 고통을 단 한번도 비껴가지 못했다.

 

초기에 밭 한 뙤기 없이 옹기장이 신자들은 흙과 나무를 찾아 떠돌아다니면서 생계를 잇느라 가난의 설움이 컸다. 공소 마을은 대부분 옹기마을이었고, 본당신부가 봄가을 판공성사 시기에 방문을 해도 공소 한 칸이 없어 교우집에서 성사와 미사를 거행했다.

 

일제시대 말기에는 일본군이 성당을 빼앗는 바람에 신부와 몇몇 성당 식구들은 성당에 붙어있는 쪽방에서 살아야 했다.

 

해방후 36년 일본 압제에서 풀려나는가 했더니 소련군이 들어와서 또 성당을 짓밟았다. 성당 지대가 높아 무전실로 사용하기 안성맞춤이라며 막무가내로 빼앗은 것이다. 그때만 해도 양양은 38선 이북에 속해 있었다. 이광재(1909-1950) 신부는 성당 안에 있는 비밀 다락에 성체를 모셔두고 미사를 드리다 그마저도 발각돼 성당 아래 부속건물로 쫓겨났다.

 

소련군이 물러가서 성당을 되찾았는데 이번에는 또 인민군이 들어와서 성당은 물론 부속건물까지 모조리 차지했다. 공산정부를 수립한 북한 공산당의 종교탄압은 이루 형언할 수가 없다.

 

이때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핍박을 견디다 못해 월남할 생각으로 38선 부근까지 내려왔으나 이미 길은 막혀 버렸다. 특히 1948년부터는 경비가 한층 강화돼 목숨을 걸지 않고는 월남을 감행할 수가 없었다.

 

38선 마을, 양양에 사목기반을 둔 이광재 신부가 걸었던 '순교의 길'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평화신문, 제731호(2003년 7월 6일), 김원철 기자>

 

 

[믿음의 고향을 찾아서] 춘천교구 양양 성당(하)

'한국의 꼴베' 이광재 신부 순교혼 '생생'

 

 

공산당의 탄압을 피해 월남(越南)을 결심한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38선과 가장 가까운 양양 성당으로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연길, 함흥, 원산 등지에서 활동하던 사목자들이었다.

 

삼엄한 감시를 따돌리고 이들을 남으로 내려보내는 일은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하지만 양양 본당 이광재 신부는 "나보다 훌륭한 성직자와 수도자가 한 명이라도 더 내려가는 것이 남한에서 하느님 영광을 드러내는 길"이라며 탈출을 도왔다.

 

당시 이 신부 부탁으로 38선을 넘나들면서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탈출시킨 김봉만(보니파시오, 85) 할아버지는 "밤이 되면 신부님과 수녀님들을 모시고 외진 산등성이를 타고 가서 넘겨주고 날이 새기 전에 돌아왔다"며 "특히 1948년부터는 38보안대 경비가 강화돼 숨이 멎을 정도로 위태로웠던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인터뷰 참조>

 

수녀들은 남양리에 사는 김성녀(서울대교구 김홍진 신부 조모, 58년 작고)씨가 주로 맡았다. 김씨는 수녀들에게 치마를 입히고 비녀를 꽂아 박물장수로 변장시켜 감시를 따돌렸다.

 

그러나 정작 이 신부는 끝까지 남아 성당을 지키다 6.25전쟁 발발 하루 전날 원산 와우동 형무소에 투옥됐다. 그리고 그해 가을 밤 움푹 패인 방공호에서 다른 수감자들과 엉켜 인민군의 총에 숨을 거뒀다.

 

아비규환의 집단살육 현장. 숨이 붙어있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물을 찾자 시체더미 속에서 "응, 내가 물을 떠다주지. 응, 내가 가지요…. 내가 가지요…."라는 신음섞인 말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24시간 이상 숨이 붙어있던 이 신부의 마지막 음성이었다. 집단처형 상황과 이 신부의 최후 순간은 아비규환 속에서 생존한 한준명 목사와 권혁기(라파엘)씨가 생생한 증언으로 남겨놓았다.

 

이 신부는 세월이 흐른 지금도 양양 신자들의 가슴 속에 '착한 목자'로 각인돼 있다. 50년 넘게 한결같은 마음으로 '착한 목자'를 따르는 신자들의 믿음, 그리고 '착한 목자'가 남긴 자취와 정신은 성당내 순교각과 기념관에 보존돼 있다. 특히 이 신부의 제의와 제구, 친필교리서 등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는데 이는 신자들이 그것들을 옹기에 숨겨놓고 피난을 떠난 덕분이다.

 

이 신부 추모열기는 5년전부터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38도보 순례'에 잘 드러난다.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남하한 길을 따라 10㎞를 걷는 순례인데 최근에는 타본당 신자들도 이 도보순례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영북지역 사제단과 신자들은 이 신부 순교 50주기에 즈음해 시복청원 요청서를 교구장 장익 주교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정원일 주임신부는 "이 신부는 자신을 버리고 철저하게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산 사제라는 증거가 곳곳에서 발견된다"라며 "묻혀있는 지역 교회사와 이광재 신부 행적을 조사, 연구할 전임자가 시급히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 신부는 이어 "박해시절 옹기골에서 시작된 신앙 역사와 이 신부의 순교혼이 잘 보존돼 있다"며 "동해안을 찾는 피서객들이 많이 찾아와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양양성당: 033-671-8911

 

 

■ 인터뷰: 성직자 수도자들을 탈출시킨 김봉만 할아버지

 

 

"왜 겁이 안나? 발각되면 그 자리에서 총에 맞아 죽는데."

 

목숨을 걸고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월남시킨 김봉만(보니파시오, 85, 양양읍 내곡리) 할아버지는 "쌀 2가마를 짊어지고 10리를 걸었을 만큼 기운이 좋았던 때라 이 신부님이 그 험한 일을 믿고 부탁한 것 같다"고 말했다.

 

"북에서 신부님이나 수녀님이 내려오면 이 신부님께서 그분들을 교우 집에 숨겨놓고 저한테 연락을 해와요. 보통 밤 8시에 출발하는데 보초병과 주민들의 눈을 피하느라 험한 산등성이를 빙빙 돌아갔지요. 38선 아랫 마을로 넘겨드리고 나면 뒤돌아서서 정신없이 뛰었어요. 그래야 날이 밝기 전에 집에 도착하니까. 그때는 동네 사람들간에도 감시가 얼마나 심했는데요."

 

손바닥보듯 훤한 길이었지만 한번은 돌아오는 새벽길에 낭떠러지에서 굴러 그 날 밤에 깨어난 적이 있다. 허리가 성인 얼굴 크기만큼 부은 채로 집에 돌아와 눕자 주민들은 '38선 넘어가다가 인민군에게 두들겨 맞아서 그렇게 됐다'고 수군거렸다.

 

부인 정순남(아가다, 81) 할머니는 "신부님이 자꾸 그 일을 시키길래 한번은 찾아가서 '일본 보국대에 끌려가서 3년 만에 겨우 살아 돌아온 남편을 죽이려고 하느냐'고 싫은 소리를 했다"며 "신부님이 시킨 일이니까 하느님한테 목숨을 맡겨놓고 했지만 남편이 나가면 걱정이 돼서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고 말했다.

 

김 할아버지는 15회 가량 38선을 넘나들었다. 신부와 수녀는 20여명, 신자들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월남시킨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중에는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 수녀회 수녀 9명이 포함돼 있다.

 

김 할아버지는 "한번은 신부님과 수녀님을 데리고 가는데 뒤에 따라 붙은 신자가 62명이었다"며 "그런 경우 발각돼도 흩어져 도망치면 절반은 살아남지만 1, 2명이 갈때는 정말 위험하다"고 말했다.

 

수고비를 받았느냐는 질문에 김 할아버지는 "만주 등지에서 몇달, 몇주를 걸어 내려온 분들에게 무슨 돈이 있었겠느냐"고 말했다.

 

또 "물이 겨드랑이까지 차오르는 개울을 건너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어떤 수녀님은 손을 잡아줄테니 내밀라고 해도 손 대신 수건을 내밀고 그걸 잡아달라고 하더라. 수녀님들의 생활규율이 무척 엄했던 시절이었다"며 껄껄 웃었다.

 

김 할아버지는 "이 신부님이 말씀하신대로 '이때 아니면 언제 하늘에 공덕을 쌓을까' 싶어 한 일"이라며 "단 한번도 실패하지 않은 것은 하느님의 보살핌 덕분"이라고 말했다.

 

<평화신문, 제732호(2003년 7월 13일), 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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