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 화

상급 평의회[Con.] 2011년 5월 훈화

인쇄

세나뚜스 [senatushp] 쪽지 캡슐

2011-07-04 ㅣ No.143

Allocutio - May, 2011
폴 처칠 신부-더블린 프레젠타타 꾸리아 영적지도신부
 
우리 삶의 중심에 있는 미사
 
최근에 저는 어느 “거듭난” 그리스도인 단체에 초대받았다는 사람의 말을 들었는데 그 단체에 소속된 회원들이 함께 모여 성경을 읽고 성가를 부른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들이 우리 가톨릭 신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그리스도인이 되겠다고 주장하는 매우 많은 단체들과 우리를 구별시켜 주는 것은 우리 삶의 중심에 미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미사는 다른 많은 것에 비해 훨씬 더 귀중합니다. 왜냐하면 미사의 본질에는 어떤 인간도 할 수 없었던 가장 위대한 행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저와 함께 갈바리아를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스스로 택하셨으며 치욕적으로 비난받고 대우받았던 그분의 행위는 인류의 역사상에서 볼 수 없는 최상의 사랑을 드러내는 행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역사상 어떤 다른 인물과 비교하더라도 다르다는 것을 여러분도 느낄 것입니다. 유다인에게는 분개할만한 일이었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오늘날까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 일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스스로 그 입장이 돼보면 그 일의 위대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백인대장이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마태 27,54)라고 말했던 것이 놀랄만한 일은 아닙니다.
 
그 자리에 성모님과 사도 성 요한도 함께 그 끔찍한 순간에 잠겨 서 있었다는 것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그 일이 그들에게 어떠한 일이었겠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화가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에 대해 최선을 다해 그리지만 때때로 놓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정신적 외상(trauma : 외부의 충격으로 인한 정신적 손상)을 초래했다는 현대적 용어로 설명하고 싶습니다. (정신적)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수년간 그 상처를 남깁니다. 성 요한이 자신의 복음을 4 복음서 중 맨 마지막에 저술했다는 것은 그가 본 것을 극복하는데 그만큼 시간이 걸렸던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예수님이 참혹하게 돌아가시는 모습을 본 것은 어쨌든 매우 젊었을 때였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성 요한을 성모님께, 성모님을 성 요한에게 맡긴 것은 당신 자신의 고통 중에서도 그들의 괴로움을 아셨기에 그렇게 응답하셨던 것입니다.
 
드디어 성 요한이 복음의 모든 자료를 정리하고 나서 내린 단 하나의 결론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사야가 예언했던 그 분, 전 세계의 죄를 없애주실 새로운 희생양이셨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인한 숭고한 행위, 당신에게 가해진 모든 잘못에 대한 총체적인 용서, 그런 심한 고통 중에서도 부정적인 말은 한 마디도 안 하시고 당신의 고통에 대해서도 말없이 당당하게 참으시며 도리어 정반대로 십자가에서 하신 선한 말씀으로 인해 완고한 백인대장조차도 감명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행위로 우리 모두를 천벌에서 구해주셨습니다.
 
우리는 미사 안에서 그 위대한 행위를 거행합니다. 이는 우리가 그 행위를 단지 과거의 어떤 행위로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신비한 방법에 의해 우리가 현존하는 그 행위 안으로 이끌려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복자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말씀하신대로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함께 거룩한 미사를 거행하는 모든 사제는 마음으로 그곳, 그 시간으로 되돌아갑니다.”(Ecclesia de Eucharistia/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 : 2003년 4월 7일 회칙 4) 그 행위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께 끝없이 바치는 하나의 영원한 희생이 되었고 더 이상 공간과 시간의 한계라는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스스로의 계획에 따라 사도들과의 최후의 만찬에서 나누어 주셨듯이 당신의 사제들에게도 그 행위를 우리에게 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우리가 그 행위의 은총을 쉽게 받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성 요한과 성모님께서 겪으신 정신적 외상을 반드시 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건과 더불어 그 행위의 전체 뒤에 진실로 내재된 하느님을 사랑하는 위대한 마음에 진정하게 접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사랑의 질과 수준은 최후의 만찬에서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고 하신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기도 모임이나 단지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시편을 노래하고 기도하며 좋은 친목의 기회를 가지는 다른 모임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우리는 미사 시간에 예배 행위의 중심에 있습니다. 우리의 이 미사는 무섭고 두려우며 부닥치고 따라 하려는 생각을 하기조차 어려운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행위와 맞닥뜨리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고 말씀하셨습니다. 예, 이 말씀들은 우리가 당신의 말씀과 최후의 만찬에서의 행위를 재현하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에는 또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도록 우리도 당신의 행위의 일부가 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의 육신을 버리며 우리의 피를 흘리는 노력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 이유로 이제 미사는 여러분이 음악회나 극장에 가서 있는 것과는 다른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미사는 하느님의 뜻이라면 그리스도의 고통 안에서 버팀대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예수님의 뜻을 따르며 모든 일에서 예수님을 믿기 위해 나의 삶과 기력을 하느님께 바치는 진정한 예배 행위입니다. 미사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봉헌하고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약속하며 그분의 영웅적인 사랑을 본받는 곳입니다. 미사는 교회의 모든 보화를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보화가 단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도전 의식과 힘을 북돋아주는 숭고한 희생의 사랑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하느님께 자신을 계속 바치시는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미사는 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랑의 원천입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분과의 동질화이기도 하고 더 나아가 그분을 우리 삶에 받아들여 그분께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일상생활을 하도록 강화시키실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도행전 6장의 서두에 매우 흥미로운 대화 내용이 있습니다. 사도들이 제자들의 공동체와 관련된 일의 부담에 대해 어떻게 의논했는지 쓰여 있습니다. 그 결과로 부제 제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일 직후에 사제들의 큰 무리가 사도들과 합류하기 위해 찾아왔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초기 교회에 대한 그 내용에서 교회의 기본 구조-제자들의 공동체와 주교, 사제, 부제의 성무를 집행한 사도들-가 오늘날과 똑같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제자들이 구약 시대의 사제들에게 어떤 정확한 역할을 맡겼는지는 모르지만 오늘날 우리가 알기로는 신약 시대의 사제들의 성무는 무엇보다도 속죄의 보상으로 어린 양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갈바리아의 희생을 현재 이 순간으로 불러옴으로써 하느님의 티없는 어린 양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성소 주일에 사제가 없이는 미사도 없다는 명제를 살펴볼 가치가 있습니다. 사제들은 특별한 사람들이라고 불립니다. 특별한 방법으로 갈바리아의 신비의 일부가 되고 하느님의 어린 희생양과 동일하게 되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위대한 행위를 교회에 더 적절하게 나타나게 할 수 있는 것이 그들의 소명입니다. 보기에 따라서 십자가 밑에 서있는 성 요한은 제 표현으로 하자면 사제들의 영성을 나타냅니다. 요한과 같이 사제들은 깊이 묵상하고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강조하는데 힘을 쏟도록 예수님께 부름 받았습니다. 사제는 자신이 무엇을 거행하고 있는지 그 깊은 뜻을 생각해 보며 그의 성소를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박해받을 때 그 공격의 첫 번째 주요 직접적인 대상이 사제라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성직에 대해 묵상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주로 예수님께 향하는 불의와 증오를 같이 지고 가야 사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만 합니다. 만일 그가 타산적인 사람이라면 자신의 입장만 따져 달아날 것입니다. 사제 각자는 진정으로 순결하고 선의만 가지고 있으며 하느님의 뜻만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때로는 복음의 의미를 부정하고 증오하는 사람들로부터의 오해와 적의 때문에 고통을 받을 하느님의 어린 양이 되어야만 합니다.
 
요한은 자신을 사랑하시는 제자로 표현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사랑, 예수님 마음속의 이해하고 용서하시는 사랑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또한 사제들이 접해야만 되는 부분입니다. 마리아 사제 운동(Marian Movement of Priests)의 창설자인 곱비 신부(Fr. Stefano Gobby)가 자신의 책의 표지에 “성모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시는 아들 사제들에게(Our Lady's beloved sons)”라고 제목을 붙인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아마도 젊은 제자에게 주신 성모님의 베풂 또한 그가 그의 일생에서 이 진실을 깨달을 수 있게 성장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당신의 소명이 아내와 어머니의 소명이기도 하신 성모님은 미사에서 평신도 참여의 표본입니다. 여러분이 성경과 예수님의 교회를 조소하는 세상에서 예수님과 함께 어떤 정신적 외상의 어려움을 나누고 비극을 겪은 사람들과 고통스러워하며 여러분의 무거운 짐을 지고 서 있다면 그 때가 여러분이 성모님과 함께 십자가 밑에 서 있는 것입니다. 미사보다 이를 더 잘 거행하거나 그리스도와 함께 나눌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그분과 함께 있는 그곳에서 여러분은 또한 삶을 봉헌으로 바치고, “그가 그리스도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마태 27,42 참조)라는 구절을 현대적 말투로 비꼬는 다른 사람들의 비웃음과 경멸을 포함하여 그분을 따르는데 들어가는 노고를 바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는 것처럼 죄를 용서하는데 따르는 고통을 바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마 여기에는 성모님께서 요한을 아들, 참으로 사랑하시는 아들인 것처럼 따뜻하게 받아들이고 돌보신데 대해 생각해볼만한 다른 진실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이 자신의 집에 성모님의 거처를 마련했다면 이는 성모님께 보답 받았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또한 교회와 확실히 레지오 마리애를 경험한 사람의 본질 안에서 또 다른 진실을 지적할 수 있는데 바로 사제에 대한 신자들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내 경험이지만 매우 많은 수의 내 형제 사제들도 경험했을 것인데 레지오 안에서 내 자신이 편안하게 느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레지오 안에서 수년간 다른 것에 비할 수 없는 안식처를 찾았고 후원을 받았습니다.
 
오늘 성소 주일에 여러분의 예수님에 대한 증언과 예수님과 그분의 교회에 대한 사랑, 그리고 사제들에게 준 대단한 격려에 대해 제 마음을 다해 감사드립니다. 또, 제가 제 마음을 다해 이 말씀을 하는 동안 도처에 있는 많은 사제들도 저와 같은 감정에 동조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성소 주일은 교회의 다른 소명보다 중요합니다. 이는 단지 사람들을 그들의 성소를 듣고 그것을 따르게 하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그들의 성소를 따라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와 지원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요즈음 계속하여 단지 사제가 되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이미 사제가 된 분들을 위해서도 여러분이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이 기도를 통해 그들이 성소 안에서 성숙되고 계속 성소를 지킬 것입니다.
 
갈바리아에서 마리아와 요한은 예수님과 결합되어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한 예수님의 말씀으로 예수님도 그들과 결합되어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의 미사도 우리가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성모님의 아드님인 예수님의 길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여러 그리스도인 소명 안에서 상부상조를 실행하는 결합의 장소가 되기를 빕니다. 아멘.
 


401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