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동성당

주님이 부탁하신 발을 씻기는 삶 (요한13: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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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20-05-07 ㅣ No.265

2020. 05. 07. (공동번역)

주님이 부탁하신 발을 씻기는 삶

 

(요한13:12~20)

12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고 나서 겉옷을 입고 다시 식탁에 돌아와 앉으신 다음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왜 지금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는지 알겠느냐? 13 너희는 나를 스승 또는 주라고 부른다. 그것은 사실이니 그렇게 부르는 것이 옳다. 14 그런데 스승이며 주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15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 준 것이다. 16 정말 잘 들어 두어라. 종이 주인보다 더 나을 수 없고 파견된 사람이 파견한 사람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 17 이제 너희는 이것을 알았으니 그대로 실천하면 축복을 받을 것이다. 18 이것은 너희 모두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나는 내가 뽑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와 함께 빵을 먹는 자가 나를 배반 하였다' 고 한 성경 말씀은 이루어질 것이다. 19 내가 미리 이 일을 일러 주는 것은 그 일이 일어날 때 너희로 하여금 내가 누구라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이다. 20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가 보내는 사람을 받아 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 들인다.' 아멘

 

요한복음 131-1절에서 예수님의 洗足 사건이 갖는 구속사적 의미를 자세하게 파헤쳐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종의 모습이 되셔서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하느님과 동등 된 본체이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비우시고 종의 형체로 이 땅의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심으로 하나님 백성들의 죄를 씻어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기 쉬운 그림으로 표현을 하신 것이라 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렇게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은 그 일을 마치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자리에 앉으십니다. 거기에서 이라는 그 단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앞에서 모두 발가벗겨졌던 상황에서 쓰였던 그 단어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요한은 일부러 그러한 단어를 사용함으로 해서 제자들 앞에서 겉옷을 벗으신 예수의 모습이 바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샅샅이 비워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하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다시 그 옷을 입으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리고 옷을 입으신 후에 자리에 앉으십니다. 이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겠습니까?

 

(히브12:2)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봅시다. 그분은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며 부끄러움도 상관하지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 내시고 지금은 하느님의 옥좌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바로 이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하느님의 영광에로의 복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삶은 결국 부활과 승천과 보좌로의 복귀로 결론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은 바로 그 모습을 상징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삶과 섬김의 삶이 이렇게 부활과 승귀와 영광의 보좌에로의 복귀를 향한 삶이라는 것이 확실한 것처럼 우리의 삶도 역시 그렇게 결론지어질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요한13:14-16) 4 그런데 스승이며 주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15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 준 것이다. 16 정말 잘 들어 두어라. 종이 주인보다 더 나을 수 없고 파견된 사람이 파견한 사람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들에게 보여준 것처럼 너희도 행하라하고 말씀을 하십니다. 물론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洗足禮를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주님의 세족 사건은 단순히 발을 씻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에게 주님이 행하신 그 일을 똑같이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입은 우리 교회가 모두 그 일을 해야 한다는 말인데 그럼 지금 주님께서 우리보고 당신이 지신 십자가를 지라고 하시는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마태16:24)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그렇지요? 주님은 분명 우리 제자들에게 당신을 쫓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지고 쫓아와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큰일 났습니다. 우리가 그 십자가 어떻게 질 거예요? 그러면 이제 우리 성도들이 주님을 쫓아 지고 가야할 십자가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6절을 보면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에 관한 힌트가 나옵니다.

(요한13:16) 정말 잘 들어 두어라. 종이 주인보다 더 나을 수 없고 파견된 사람이 파견한 사람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내가 행한 것을 본받아 행하라고 하시고는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파견 받은 자가 보낸 자 보다 크지 못하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다는 말씀은 본문 13절과 병행이 되는 말씀입니다.

(요한13:13) 너희는 나를 스승 또는 주라고 부른다. 그것은 사실이니 그렇게 부르는 것이 옳다.

여기서 쓰인 스승(선생)- 디다스칼로스- 큐리오스는 둘 다 최고 권위를 가진 주인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큐리오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야훼를 헬라어로 번역을 할 때 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단어가 사람에게 쓰일 때에는 하느님과 버금가는 최고의 권위를 가진 주인을 가리킵니다. 주님은 당신을 향한 제자들의 그러한 평가가 옳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 말씀은 16절의 말씀을 하시기 위한 포석인 것입니다. 그렇게 본문 16절의 주인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고 아울러 종은 제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인인 주님께서 종의 모습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그 모습을 제자들이 마다할 수 없다는 그런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인이 했는데 종이 그런 일을 마다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지요. 따라서 종들은 주인이신 주님이 본을 보이시고 시키신 발 씻김의 삶을 반드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종들은 주인에 의해 보냄을 받는 자들입니다. 어디로 무엇을 하도록 보내심을 받는 것이지요? 먼저 어디로 보내심을 받는 것인지 보지요.

 

(요한17: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이 사람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세상에 가서 뭐 하라는 것이지요?

(사도1,8)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라고 하십니다. 증인은 사건 현장에서 그 사건을 확실하게 목격한 사람을 가리켜 증인이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洗足 현장에서 그 분이 하시는 일을 일거수일투족 모두 지켜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에 나가서 바로 그 세족 사건이 의미했던 바를 분명하게 전해야 함과 동시에 자신들도 그러한 발 씻김의 삶을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십자가의 삶 발 씻김의 삶에서 배태되는 열매는 무엇입니까?

(요한20:21~23) 21 예수께서 다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고 말씀하셨다. 22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말씀을 계속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

제자들은 보내심을 받고 발을 씻기는 삶의 증인으로 살게 됨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 즉 구원의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그렇게 보내심을 받은 종들이 하는 일의 결과를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13:20)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가 보내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 들인다.'

예수님께 보내심을 받고 발을 씻는 삶을 사는 제자들을 영접하는 자들은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를 받아 들이는 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간단하게 정리하겠습니다. 주님의 제자들 즉 성도들은 주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자로 살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보내지는 곳은 이 죄로 물든 세상입니다.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은 종이 되어 다른 이들의 발을 씻는 일입니다. 종이 주인보다 낫지 않다는 말씀은 주인이 산 삶을 종이 마다할 수 없다는 말인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이들의 발을 씻는 일은 성도에게 필연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성도의 발 씻음은 다름 아닌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그러한 성도의 발 씻음의 삶이 바로 십자가를 이해한 증인의 삶이며 성도의 그 십자가의 삶을 통하여 복음이 전파되게 됩니다. 그러니까 창조이전에 택함을 받은 하느님의 백성들이 하느님을 맞이하고 하느님께로 돌아오게 되는 그 역사적 사건의 현장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먼저 돌아온 자들의 발 씻음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발 씻음의 삶이 구체적으로 어떤 삶인지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그 삶이 과연 우리의 의지의 결단으로 비롯될 수 있는 것인지 부터 한 번 보겠습니다. 혹자들이 가르치기를 우리도 주님의 삶을 본받아 열심히 발을 씻어주는 삶을 살자고 하는데 과연 그게 가능한 일인지 보지요.

 

(고후2:14~16) 14 우리를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언제나 끼워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또 우리로 하여금 어디에서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풍기게 하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5 우리는 하느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이 향기는 구원받을 사람에게나 멸망당할 사람에게나 다 같이 풍겨 나가지만 16 멸망당할 사람에게는 역겨운 죽음의 악취가 되고 구원받을 사람에게는 감미로운 생명의 향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향기의 구실을 아무나 할 수 있겠습니까?

바오로가 주님께 보내심을 받은 자들의 삶을 묘사하는데 형태적으로 설명을 하지 않고 추상적 묘사를 합니다. 냄새는 모양과 다른 것입니다. 모양은 형태적인 것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지만 냄새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확실하게 인식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성도의 삶을 묘사하면서 모양이 아닌 추상적 개념을 선택한 것은 그리스도의 증인의 삶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양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이 고린도서의 말씀대로 분명 성도의 삶을 통해 죽음에 속해 있는 자들이 사망에 이르게 되고 생명에 속한 자들은 생명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그 향기는 성도의 삶 속에서 겉으로 나타나는 도덕적 윤리적 모양이 아닌 그 존재의 속에서 뿜어 나오는 그 존재 자체의 냄새인 것입니다. 냄새는 그 발향체가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가 애초부터 함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미꽃에서 개나리 냄새가 날 수 없고 시궁창에서 샤넬N5 향수 냄새가 날 수 없듯이 냄새는 그 존재의 고유한 정체성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우리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향기를 대하면서 자신의 시체 됨을 보게 되어 우리를 불편해 하게 되는 것이고(그게 죽음에 이르는 냄새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향기를 대하면서 예수의 은혜 즉 생명의 냄새를 맡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오로는 그 다음 장에서 보내심을 받은 성도들을 가리켜 소개장(편지)’ 이라고도 합니다.

(고후3:3) 여러분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시켜 써 보내신 소개장입니다. 이 소개장은 먹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령으로 쓴 것이며 석판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마음 속에 새겨진 것입니다.

소개장은 누군가에게 보내져서 보낸 이의 마음을 전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개장은 스스로 작성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쓰여 진 소개장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자기의 전도 사역에 의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소개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즉 바오로라는 예수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향기에 의해 그들이 소개장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개장은 사도가 쓴 것이 아니라 다른 이가 쓴 소개장입니다. 그렇게 보내심을 받은 자들의 향기에 의해 소개장이 된 이들은 누군가에 의해 心秘 즉 그들의 마음 판에 편지가 새겨져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새 언약 하에 들어있는 모든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예레31:31-33) 31 앞으로 내가 이스라엘과 유다의 가문과 새 계약을 맺을 날이 온다. 나 야훼가 분명히 일러 둔다. 32 이 새 계약은 그 백성의 조상들의 손을 잡아 에집트에서 데려 내 오던 때에 맺은 것과는 같지 않다. 나는 그들을 내 것으로 삼았지만, 그들은 나와 맺은 계약을 깨뜨리고 말았다. 귀담아 들어라. 33 그 날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맺을 계약이란 그들의 가슴에 새겨 줄 내 법을 말한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그 마음에 내 법을 새겨주어,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에 의해 세상에 보내진 증인들은 이미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고유의 향기를 갖게 되는 것이고 그 향기를 세상에 풍기게 되면 하느님께서 창조이전에 택해 놓으신 마음에 그리스도의 새긴 소개장을 지닌 이들이 그 생명의 향기를 쫓아 또 다른 향기가 되어 세상으로 보내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에게서 나오게 되는 그리스도의 향기와 소개장의 삶은 모두 하느님에 의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에게서 자연스럽게 발산되게 되는 향기의 삶 소개장의 삶은 우리의 결단이나 우리의 열심에 의해 나오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의 은혜로 새롭게 창조가 되면 그 새로운 존재의 삶 속에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어떤 특별한 현상과 모양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단어로 옮기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발 씻음의 삶은 우리가 열심을 부려 내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주님께서 명령하신 발 씻음의 삶은 내가 반드시 너희를 그렇게 만들고야 말겠다는 하느님의 의지의 표명인 것이지 우리에게 요구하는 명령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에 의해 우리에게서 나타나게 되는 발 씻음의 삶이 우리 성도들의 삶 속에서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일까요? 자기 것을 손해 보면서 다른 이들을 섬기는 모습으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자를 이를 악 물고 용서해 버리는 그런 모습으로? 물론 그런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은 발 씻음의 삶 속에서 나타날 수도 있고 안 나타 날 수도 있는 모양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반드시 필연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존재의 향기나 심비에 새겨져 있는 소개장의 모습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반드시 풍겨져야 하는 발 씻음의 삶의 향기는 무엇이겠습니까? 다시 한 번 필리비서 2장으로 가보겠습니다.

(필리2:6-8) 6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하느님이신 주님께서 종의 모습이 되셔서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신 이 삶이 바로 발 씻음의 삶이며 그리스도의 향기이며 하느님의 소개장으로서의 삶인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아담 안에서 타락한 죄인들은 자신을 하느님으로 여기며 삽니다. 그러한 자들이 하나느님의 자리에서 내려와 저는 하느님의 종입니다하고 고백을 하는 종의 자리로 내려오는 것. 그리고 그렇게 완성되기까지의 모든 과정 속에 들어 있는 삶을 발 씻음의 삶이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삶 속에 나타나게 되는 발 씻음의 삶은 자기 자신을 우상으로 삼아 살던 교만의 자리에서 내려와 자신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능력과 은혜 앞에 완전히 항복하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발 씻음의 삶인 것입니다. 그건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착한 삶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의 삶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엄청나게 많은 재산을 하루아침에 날리고 이 땅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재산도 아니고 건강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고 오직 변치 않는 예수 뿐 이구나하고 진리의 복음을 붙들게 되었다면 그 삶 자체가 바로 발 씻음의 삶이며 그리스도의 향기의 삶이며 하느님의 소개장의 삶인 것입니다.

 

건강을 잃고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람이 하느님의 은혜가 떠난 육신의 삶의 한계를 절절히 깨닫고 내 육신은 비록 이렇게 후패하고 썩어짐의 종노릇을 할 수 밖에 없지만 주님께서 십자가의 공로로 이루어 놓으신 새로운 부활의 몸과 새로운 하느님 나라는 이러한 후패함과 썩어짐과 사망이 없는 영원한 곳이므로 나는 이 상황에서도 감사의 찬송을 드릴 수밖에 없다고 신앙 고백을 한다면 그게 바로 발 씻음의 삶이며 향기요 소개장의 삶인 것입니다. 내가 나를 주장하지 않고 내 주인의 종의 자리에서 그 주인이 시키시는 것을 수긍하고 수용하며 겸허히 인정하는 것이 바로 예수의 발 씻음의 삶이었으며 우리 성도의 발 씻음의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성도에게 명령하신 발 씻음의 삶은 간단히 말해 자기부인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라는 우상이 제거되고 그동안 그 우상을 섬기기 위해 차지하고 앉아 있던 하느님의 자리에서 내려와 하느님의 종의 자리에 앉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서로 발을 씻기라는 말씀이고 내 행위를 본받으라' 는 말씀의 진의인 것입니다. ‘가 내 인생의 중심에 앉아 있을 때에는 내 옛사람의 썩은 냄새만 진동할 뿐입니다. 아무리 위장을 해도 냄새는 숨길 수 없습니다. 썩은 시체에다가 아무리 향기로운 향수를 뿌려댄들 그게 얼마나 가겠습니까?

내 안에서 라는 옛 사람이 제거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어 좌정하시게 되면 자연스럽게 풍겨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하여 하나님께 후한 점수를 얻을까를 고민하기 전에 먼저 라는 존재가 부인되고 있는가를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마테20:26~27) 26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27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이 말씀이 바로 나를 쫓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과 동일한 말씀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러한 자기부인이라는 발 씻음의 삶을 살도록 만드시기 위해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의지하고 있던 이 세상 것들을 하나하나 쳐 내시는 작업을 하십니다. 자존심 체면 재산 건강 가정의 행복 안전한 직장 등등 우리가 하느님 이외에 우리의 안전과 행복의 근거로 삼고 있는 모든 것들의 허황됨과 무력함을 경험케 하십니다. 우리는 그러한 하느님의 배려 속에서 이 세상에서 우리가 의존하고 있던 것들에서 하나하나 풀려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택한 백성들은 그러한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아 예수 믿는 것은 저런 것이구나 저런 시험과 고난도 잘 참고 견뎌내야 하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이구나 그래도 흔들리지 않는 저 굳건한 믿음을 나도 한 번 갖고 싶다하고 생명으로 나아오게 되는 것이고 하느님의 택함에서 제외된 자들은 봐 예수 믿고 잘 되는 게 뭐가 있니? 애초에 예수 안 믿길 천만 다행이다 예수 믿고 천국 간다고 뻐기더니 그거 쌤통이다하고 죽음으로 도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너희를 맞이하는 자는 하느님을 영맞이하는 자이지만 너희를 거부하는 자는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발을 씻는다는 것이 단순히 다른 이를 섬겨주고 사랑해 주고 도와주고 하는 것이라면 그런 좋은 모습만 보여주는 데 누가 그 사람을 마다하겠습니까? 당연히 환영받지요.

그러나 예수를 믿는 자들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자기 부인의 삶과 십자가의 삶을 보면서 저게 바로 예수 믿는 삶이구나하고 그들의 삶을 맞을 수 있는 이들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발을 씻는 삶을 살라고 하셔놓고 그들을 맞이하는 자는 예수를 영맞이하는 것이라는 애매모호한 말씀을 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 전파는 종이 된 이들의 모습을 통해 소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미련하게 전파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믿음의 효력이 검증이 될 것 아닙니까? 누구나 다 믿을 수 있는 상황과 현상 아래서 어중이떠중이 다 믿는다고 나서면 하느님께서 준비하셔서 제공해주신 믿음이라는 것이 무용지물이 되잖아요?

그래서 주님이 본문 17절에서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라고 말씀을 하신 후에 이 중에서 한 사람은 그 발 씻음의 삶을 살 수 없다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발 씻음의 삶은 하느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 받은 사람에게만 가치 있는 것으로 보일 뿐 아니라 그 만이 직접 그 삶을 살아 낼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발 씻음의 삶이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모양으로서의 착한 삶이라면 유다도 복 받은 사람에 들어가야 합니다. 유다는 열심 당원이었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희생 봉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마 주님에 대한 실망이 더 컸을 지도 모릅니다. 조국 해방에 꼭 필요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맥없이 죽는다고 하니까 화가 났겠지요. 이렇게 발 씻음의 삶은 우리가 내어놓는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착한 삶이 아니라 하느님의 종으로 완성되기 위해 자기가 부인되어지는 전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지론이니 청부론이니 하는 그런 얼토당토 한 주장에 놀아나지 마세요. 복음은 종이 된 제자의 삶에서 향기로 소개장으로 전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성도의 삶이다 이게 바로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이다 그래도 감수하고 살래?’하고 하느님의 의중이 그의 삶에 실려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데 우리의 높은 지위와 우리의 재산이 도움이 된다고요? 고지 꼭대기에 올라가서 하느님께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자고요? 아니 종이 되어 발 씻어 주러 가는 사람이 무슨 재산이 그렇게 필요합니까? 거기에 무슨 명예가 그렇게 필요해요? 자가용타고 경호원 데리고 다니는 종 보셨어요? 그러면 이제 그러한 예수님의 명령을 쫓아 발 씻음의 삶 향기의 삶 소개장의 삶을 직접 몸으로 살아낸 제자들의 모습을 성경에서 몇 군데 찾아보고 마치겠습니다.

 

(고전10:31~11:1) 31 그러나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일을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십시오. 32 여러분은 유다인에게나 그리이스인에게나 하느님의 교회에나 어느 누구에게든지 양심의 가책을 받게 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33 나도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씁니다. 그것은 나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구하여 결국 그들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으십시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는 나를 본받아 행하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사도 바오로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삶이 전부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그 삶을 본받으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와 그 분을 믿는 이들을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해 서슬이 퍼런 숙청의 칼날을 휘두르고 스스로의 열심과 노력을 의지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길에 방해가 되는 자들은 스테파노처럼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제거하며 달렸던 사람입니다. 그러한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거는 종의 삶을 살게 되었을까요? 하느님께서 그를 발 씻는 종으로 만드시기 위해 그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고전4:9-16) 9 내 생각에는 하느님께서 우리 사도들을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처럼 여기시고, 그들 중에서도 맨 끝자리에 내세워 세상과 천사들과 뭇 사람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신 것 같습니다. 10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보가 되었고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어 현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약자이고 여러분은 강자입니다. 여러분은 명예를 누리고 있는데 우리는 멸시만 받습니다. 11 우리는 지금 이 시간에도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맞으며 집없이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12 그리고 손발이 부르트도록 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욕하는 사람을 축복해 주고 우리가 받는 박해를 참아내고 13 비방을 받을 때는 좋은 말로 대답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이 세상의 쓰레기처럼 인간의 찌꺼기처럼 살고 있습니다. 14 나는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런 말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내 사랑하는 자녀로 생각하고 교훈 하려는 것입니다. 15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지도해 줄 교사는 얼마든지 있겠지만 아버지는 여럿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교인으로 태어나게 한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16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나를 본받으십시오.

사도 바오로의 삶이 정말 처참하지 않습니까? 마치 예수님의 삶과 같습니다. 어떨 때는 하느님이 정말 나를 죽이시려고 그러시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이 들었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사도를 세상의 더러운 쓰레기처럼 만민의 찌꺼기처럼 살게 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 복음을 전하겠다고 나선 사람을 왜 그렇게 취급하십니까? 그게 바로 종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시키시는 대로 살아내는 삶 그 삶을 네가 살아낼 수 있느냐?’ 를 물어보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자기가 주인이 되어 살던 삶에서 돌이켜 하느님의 종으로서의 삶을 살아내고야 만 것입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하느님이 그렇게 살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사도는 자신의 지식과 지혜 그리고 자신의 열심과 노력이 얼마나 무용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고 하느님 앞에서의 티끌인 자신의 모습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게 바로 발 씻음의 삶입니다. 사도가 그러한 발 씻음의 삶을 살고 있을 때 하느님은 그의 삶을 통해 당신의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게 진짜 전도이며 선교인 것입니다.

사도는 그러한 자신의 삶을 장황하게 나열한 뒤에 나를 본받아라하고 말을 합니다. 그 삶을 정말 본받고 싶으세요? 세상의 쓰레기 같은 취급 받고 싶으세요? 만민의 찌꺼기 같은 취급 받고 싶으십니까? 하느님이 죽이려고 코너에 몰아넣으신 것과 같은 그런 진퇴양난의 삶을 원하세요? 그런데 사도는 교회들에게 자기의 삶을 본받으라고 간곡히 권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삶이 주님이 부탁하신 발 씻음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발 씻음의 삶 뒤에는 우리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의의 흰옷을 챙겨 입고 하늘의 보좌에 앉게 되기 때문입니다.

(묵시3:21) 승리하는 자는 마치 내가 승리한 후에 내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옥좌에 앉은 것같이 나와 함께 내 옥좌에 앉게 하여 주겠다.

 

(에페2:5-6) 5 잘못을 저지르고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6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셔서 하늘에서도 한 자리에 앉게 하여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 주위에서 우리가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이 누굴까? 그리고 우릴 위로하는 것은 무엇일까? 혹시 내 이웃의 불행이나 슬픔을 나의 위로로 삼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내가 이 세상의 중심이다를 외치고 싶은데 그게 여의치 않으니까 다른 사람의 불행을 위로삼아 라는 우상을 달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그건 여전히 하느님의 자리를 차고앉은 세상 사람들의 삶인 것이지 종으로 보내심을 받아 발을 씻는 성도의 삶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자리에서 내려오셔서 종의 모습으로 복음을 전파하다 가셨습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바로 그 삶을 본받아 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종은 상전보다 크지 못하다는 말씀과 함께요. 그 말은 보내심을 받은 종은 상전의 삶보다 더 낫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을 감수하며 아니 기대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발 씻음의 삶이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날 때에 당황하지 않으며 오히려 기뻐할 수 있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감옥에서 두들겨 맞고 나오면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그렇게 대우하셨다는 것에 기뻐 찬양을 했다는 사도들의 모습이 우리에게서도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발을 씻는 종의 모습입니다.

우리 성도의 삶은 그렇게 한 주인의 종으로서의 삶으로 수렴이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길에 시험과 고난과 이해할 수없는 사건들이 우리에게 찾아 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결국 우리를 인내하게 하실 것이고 그러한 우리의 삶을 보며 세상 사람들이 저런 게 예수 믿는 거라면 절대 나는 예수 안 믿을 거야라는 반응과 그래 저런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나라를 바라는 저게 바로 신앙이야라는 두 가지 반응을 보이게 될 것입니다. 전자가 죽음에 이르는 향기이고 후자가 생명에 이르는 향기인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느님의 일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고 결국 하느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참 된 종의 삶을 사는 하느님 나라 백성으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발을 씻는 자의 삶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담과 함께 선악과를 따 먹고 하느님의 자리에 올라 교만을 떨고 있는 우리를 당신의 능력과 은혜로 부인시켜 가시는 과정 속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대할 때 당황하지 말고 열심히 종의 자리로 내려가시오. 그게 오늘 우리 주님이 우리 신자에게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64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을 결론으로 읽겠습니다.

(고후6:4~10) 4 우리는 무슨 일에나 하느님의 일꾼으로서 일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난과 궁핍과 역경도 잘 참아냈고 5 매질과 옥살이와 폭동을 잘 겪어 냈으며 심한 노동을 하고 잠을 못 자고 굶주리면서도 그 고통을 잘 견디어 냈습니다. 6 우리는 순결과 지식과 끈기와 착한 마음을 가지고 성령의 도우심과 꾸밈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느님의 능력으로 살고 있습니다. 두 손에는 정의의 무기를 들고 8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언제든지 하느님의 일꾼답게 살아 갑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진실하고 9 이름없는 자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것 같으나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또 아무리 심한 벌을 받아도 죽지 않으며 10 슬픔을 당해도 늘 기뻐하고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만들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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