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막달라 마리아의 부활체험

인쇄

오대일 [joseph5] 쪽지 캡슐

2007-04-15 ㅣ No.529

 

성목요일, 침울하지만 엄숙한 최후의 만찬.

성금요일, 사형선고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비통한 주님의 죽음.

성토요일, 무덤의 적막감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부활의 기쁜 축제.

불과 하루 이틀 전에 그렇게 애통해 하던 마음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기쁨으로 바뀔 수 있는지,

인간의 마음을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내 부모 내 자식 내 애인이 죽었다면 사흘이 아니라

석달 열흘이라도 눈물 속에 있을 것 같은데

어찌하여 그분의 죽음에는 사흘도 되기 전에

할렐루야 노래를 부르며 기뻐할 수 있는가?

주님이 부활했으니까 당연히 기뻐해야 한다고?

과연 나의 기쁨이 주님의 부활 때문인가?

주님이 붙잡히어 처형되자 제자들은 무서워 도망치고

사흘이 넘었어도 문을 닫아걸고 숨어있었다.

우리는 그들보다 낫는가?

우리의 기쁨은 주님의 부활에서,

내 속 깊은 실존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전례용은 아닌가?

연례적으로 이 맘 때가 되면 나타나는 것은 아닌가?

그건 그렇고 주님께도 여쭙고 싶다:

주님께서도 당신이 부활하신 것이 우리처럼 기쁘십니까?


예수께서 부활하셨기에 우리가 기뻐해야 한다면,

성서는 그분의 부활 이후를 온통 기쁨으로 채웠어야 마땅하겠건만,

그렇지 않다.

사흘이 지나도 한 달이 지나도

성서의 분위기는 그저 조용하기만 하다.

여전히 제자들은 문을 닫아걸어 잠그고

수심에 잠겨 있거나 조용히 낙향한다.

부활한 그분을 만나면서도 두려움에 쌓여 있다.

온통 무거운 분위기다. 알렐루야를 노래하며 기쁨을 나누는

우리의 축제분위기를 느낄 수 없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는데 어찌 그럴 수 있는가?

왜 우리처럼 기뻐하지 못하는가?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제일 처음 나타났다고 말하는데 익숙해 있다.

그 당시 여자들은 사회적으로 공적인 증인이 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부활하신 예수께서 증거 능력이 없는 여인에게 나타나셨다면

부활이 꾸민 이야기일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그런 것까지를 생각하면서 여인에게 나타나셨을 리야 없다.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의 부활체험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장소가 바로 무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무덤을 지키고 있던 그녀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신 것이다.

그분의 부활은 그분이 처형된 십자가, 그분이 묻히신 무덤에서 체험할 수 있다.

역으로 말해서 십자가에서 도망친 자, 무덤에서 멀어진 자는 부활을 체험할 수 없다.

문을 닫아 건 곳에서 어찌 주님의 부활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는가?


막달라 여자 마리아. 예수께서 처형될 때 십자가 아래 서 있었던 마리아는

그분이 묻히신 곳도 떠날 수 없었다.

그분께서 붙잡혔을 때 그녀도 함께 붙잡혔고

그분께서 못 박혔을 때 그녀도 함께 못 박혔다.

그렇게 그녀는 그분과 함께 죽었고, 그분과 함께 묻혔고,

그분과 함께 땅속 깊은 지옥에까지 내려갔다. 사랑 때문에.

그런 그녀가 그분의 부활을 체험한 것이다.

예수께서 사흘만에 부활했으니까 자동적으로 사흘만에

부활한 예수를 만난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내놓으시며 붙잡히신 성목요일,

십자가의 성금요일 그리고 지옥으로 내려가신 성토요일을

비켜가지 않았기에 그분의 부활을 체험할 수 있었다.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은 주님의 죽음을 슬퍼하지만

그분에게서 멀어졌던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인지

아니면 아직 겁에 질려 있어서인지 그분의 무덤에 가까이 가지 못하고 있다.

그분과 함께 지옥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있다.

무서워 안전의 문을 닫아 건 그런 마음으로는 사흘이 지났어도

부활한 예수를 만날 없었다.


사흘은 물리적인 시간도 도그마의 시간도 아니다.

사흘이 지난다고 그분의 부활을 자동적으로 기계적으로

체험하는 것은 아니다.

그분을 따라 다니며 그분께 고백했던 제자들도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의 죽음과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묻히고,

그분과 함께 지옥에 내려감으로써 마리아는

그분의 시간을 자신의 시간으로 만들었다.

그분의 사흘을 자기의 사흘로 만들었다.

성금요일과 성토요일을 피해간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그분의 사흘을 체험할 수 없었다.

성목요일에도 그들은 주님의 시간을 피해갔다.

그들이 잠을 자는 동안 주님의 시간이 그들을 지나간 것이다.

그리스도의 시간으로, 다시 성목요일, 성금요일로

성토요일로 돌아가는 날 그들은 부활을 체험할 것이다.

마리아가 그들을 도울 것이다.


마리아로부터 예수의 부활의 소식을 들은 그들은 무덤을 향한다.

그리고 드디어 무덤에서 그들은 부활을 체험한다.

그분의 시간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그들의 발길은 골고타로 옮겼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 이전 최후의 만찬이 있었던 다락방으로 옮겨갔을 지도 모른다.

예수께서 빵을 쪼갤 때 그들은 드디어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보았다.

기쁨과 평화의 원천인 주님을.


부활에 대한 우리의 기쁨이 진실이라면,

부활에 비는 우리의 평화가 진심이라면

우리는 지금 무덤에 있어야 한다.

무덤에서 십자가로, 성찬의 다락방으로 달려갈 수 있어야 한다. 



266 1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