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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그레고리오 1세 대 교황님의 성경 해석법에 대하여 capital [성경공부] [성경해석] [칠죄종] 782_ 1077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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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해석 1/4 [110.14.3.*]

2011-07-07 ㅣ No.1077

 
 
가톨릭 성경 해석에 관한 글 모음: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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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미 예수님!
 
이번 글에서는, 가톨릭 교회의 교부들이 성경 해석을 어떻게 하였는지에 대하여 약간 깊이있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을 작성하게 된 배경은 다음의 납득할 수 없는 주장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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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그녀가 창녀로 언급되는 이유는 591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가 부활절 설교를 하면서 누가복음 7장에 등장하는 마리아를 베다니 마리아인 줄 모르고 그녀를 창녀이며 막달라 마리아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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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문장을 읽고서,
 
도대체 어떻게 이러한 극단적인 그리고 과격한 주장을 할 수 있을까?
 
를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가톨릭 교회의 교계제도에 기인하는, 가톨릭 교회의 문헌들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하는 교회 용어들에 익숙하지 않은 자가, 당시의 시기 및 이어지는 중세에 있어서의 성경 해석의 방법을 전혀 모르는, 자신의 지식의 범위 내에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글은, 이러한 왜곡/음해/훼손에 대한 보통 수준의 독자들의 올바른 이해를 도와드리기 위하여 마련한 글이므로, 되도록 편안한 마음으로 읽으실 것을 권고합니다. 링크 설정된 글들을 또한 꼭 읽으실 것을 권고합니다.
 
1.
성 그레고리오 1세 대 교황님은 누구인가?
 
지금까지 가톨릭 교회의 역대 교황님들 중에서 "대 교황(Pope the Great)"로 불리는 분들이 단 세 분 계시는데, 이들은 성 레오 1세 대 교황님, 성 그레고리오 1세 대 교황님, 그리고 성 니콜라오 1세 대 교황님입니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글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2.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115-119항에서 권고하고 있는 성경 본문의 네 가지 의미들이란?
 
다음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115-119항들을 학습하도록 합시다. 좀 더 나은 이해를 위하여, 영어 CCC와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처1: http://ch.catholic.or.kr/pundang/4/c115.htm (우리말 CCC 제115항)
출처2:
http://ch.catholic.or.kr/pundang/4/va_c115.htm (영어 CCC 제115항)
 
The senses of Scripture
성경의 의미
  
115 According to an ancient tradition, one can distinguish between two senses of Scripture: the literal and the spiritual, the latter being subdivided into the allegorical, moral and anagogical senses. the profound concordance of the four senses guarantees all its richness to the living reading of Scripture in the Church.
 
115 성경의 의미는 오랜 전통에 따라 자구적 의미와 영성적 의미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으며, 이 중에서 후자는 우의적(寓意的) 의미, 도덕적 의미, 신비적 의미로 다시 세분된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경 읽기는 이 네 가지 의미들의 심오한 조화로써 더욱 생생해지고 풍요로워진다.
 
116 The literal sense is the meaning conveyed by the words of Scripture and discovered by exegesis, following the rules of sound interpretation: "All other senses of Sacred Scripture are based on the literal."83
 
116 자구적 의미
자구적 의미는 성경의 말씀으로 나타내고, 올바른 해석 원칙에 따른 주석으로 밝혀 낸다. “성경의 모든 의미는 자구적 의미에 근거한다.”
90)
 
117 The spiritual sense. Thanks to the unity of God's plan, not only the text of Scripture but also the realities and events about which it speaks can be signs.
 
1. the allegorical sense. We can acquire a more profound understanding of events by recognizing their significance in Christ; thus the crossing of the Red Sea is a sign or type of Christ's victory and also of Christian Baptism.84
 
2. the moral sense. the events reported in Scripture ought to lead us to act justly. As St. Paul says, they were written "for our instruction".85
 
3. the anagogical sense (Greek: anagoge, "leading"). We can view realities and events in terms of their eternal significance, leading us toward our true homeland: thus the Church on earth is a sign of the heavenly Jerusalem.86
 
117 영성적 의미
하느님 계획의 단일성 때문에 성경 본문뿐 아니라, 그 본문이 말하는 실재와 사건들도 표징이 될 수 있다.
 
1. 우의적 의미. 사건들의 의미를 그리스도 안에서 깨달음으로써 더욱 깊은 이해를 얻을 수 있다. 가령 홍해를 건넌 일은 그리스도의 승리의 표징이며, 그로 말미암아 세례의 표징이 된다. 91)
 
2. 도덕적 의미. 성경이 전하는 사건들은 우리를 올바르게 행동하도록 이끈다. 이 사건들은‘우리에게 본보기가 되도록’ (1코린 10,11 참조) 기록된 것이다. 92)
 
3. 신비적 의미(anagogia).  우리를 본향으로 인도하는(그리스 말 anagoge는‘위로’ 라는 뜻의 ana와, ‘인도하다’ 는 뜻의 agoge의 합성어이다.) 영원의 의미에서 실재와 사건들을 바라볼 수도 있다. 예컨대, 지상 교회는 천상 예루살렘의 표징이다. 93)
 
118 A medieval couplet summarizes the significance of the four senses:
 
The Letter speaks of deeds; Allegory to faith;
The Moral how to act; Anagogy our destiny.87
 
118 중세의 한 이행시(二行詩)는 이러한 네 가지 의미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글자는 행한 것을 가르치고, 우의는 믿을 것을 가르치며,
도덕은 행할 것을 가르치고, 신비는 향할 것을 가르친다. 94)
 
119 "It is the task of exegetes to work, according to these rules, towards a better understanding and explanation of the meaning of Sacred Scripture in order that their research may help the Church to form a firmer judgement. For, of course, all that has been said about the manner of interpreting Scripture is ultimately subject to the judgement of the Church which exercises the divinely conferred commission and ministry of watching over and interpreting the Word of God."88
 
But I would not believe in the Gospel,
had not the authority of the Catholic Church already moved me.89
 
119 성경 해석자들의 임무는 이러한 규범에 따라 성경의 뜻을 더 깊이 이해하고 해석하도록 노력하는 데 있다. 그리하여 어떤 의미에서 준비의 역할을 하는 연구로써 교회의 판단은 성숙하게 된다. 성경 해석에 관한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느님의 말씀을 보존하고 해석하라는 하느님의 명령과 그 직무를 수행하는 교회의 판단에 속한다.” 95)
 
만일 가톨릭 교회의 권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는다면,
나는 복음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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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St. Thomas Aquinas, S Th I, 1, 10, ad I.
84 Cf. I Cor 10:2.
85 I Cor 10:11; cf. ⇒ Heb 3:1 - ⇒ 4:11.
86 Cf. ⇒ Rev 21:1 - ⇒ 22:5.
87 Lettera gesta docet, quid credas allegoria, moralis quid agas, quo
   tendas anagogia.
88 DV 12 # 3.
89 St. Augustine, Contra epistolam Manichaei 5, 6: PL 42, 176.
90).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 대전」 , 1, q. 1, a. 10, ad 1: Ed. Leon. 4, 25.
91). 1코린 10,2 참조.
92). 히브 3,1`─`4,11 참조.
93). 묵시 21,1`─`22,5 참조.
94). 다키아의 아우구스티노, Rotulus  pugillaris,  I:  A.  Walz  편: Angelicum 6(1929), 256.
95). 계시 헌장, 12항.
96). 성 아우구스티노, 「마니교도 서간 반박」 , 5, 6: CSEL 25, 197(PL 42, 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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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의 사항: 위에 나열한 3가지의 영성적 의미(영성적 어의)들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도덕적 의미” 대신에 “윤리적 어의”, “신비적 의미” 대신에 “종말론적/신비적 어의”.
 
특히 다음의 Merriam-Webster's Unabridged Dictionary에 주어진 anagogical 단어의 설명 및 다음의 Henri de Lubac 추기경의 가르침을 담은 저서에 주어진 anagogical sense의 설명에 의하면, “anagogical sense”를 “종말론적/신비적 어의”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이는 “anagogical sense"이 관점에 따라 주관적인 입장에서의 “신비적 의미객관적인 입장에서의 “종말론적 의미 둘 다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1 : of, exemplifying, or based on anagoge ; specifically : having a spiritual meaning or a sense referring to the heavenly life
 
 
(클릭하십시오, 필독 권유) 
 
참고 사항: 사실 Henri de Lubac 추기경은, 20세기 중반에, 가톨릭 계약 신학을 재 발굴한 신학자이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4개의 핵심 문헌들 중의 하나인,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적 헌장, "하느님 말씀(Dei Verbum)", 그리고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에 있어, 성경에 대한 섹션(CCC 제101-141항)을 통합한(consolidated) 가톨릭 신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음은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15항에서 인용하고 있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성 토마스 데 아퀴노)의 신학대전 해당 구절의 인터넷 주소입니다. 영어로 번역된 신학대전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Reply to Objection 1. The multiplicity of these senses does not produce equivocation or any other kind of multiplicity, seeing that these senses are not multiplied because one word signifies several things, but because the things signified by the words can be themselves types of other things. Thus in Holy Writ no confusion results, for all the senses are founded on one — the literal — from which alone can any argument be drawn, and not from those intended in allegory, as Augustine says (Epis. 48). Nevertheless, nothing of Holy Scripture perishes on account of this, since nothing necessary to faith is contained under the spiritual sense which is not elsewhere put forward by the Scripture in its literal se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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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음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성경 해석에 대한 관점을 다루고 있는 개괄 논문(survey paper)(저자: John F. Boyle)입니다. 이 논문은 성경의 의미를 위에서처럼 네 가지로 나눈 신학자가 성 토마스 아퀴나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살았던 시대인 13세기의 가톨릭 교회 안에는 이미, 그에 의하여 성경 본문의 의미가 이렇게 네 가지로 분류가 되는, 여러 가지의 성경 해석법들이 알려져 있었음을 추론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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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성 그레고리오 1세 대 교황님(540-604년, 재위기간: 590-604년)은 당시에 성경 본문의 영성적 어의(the spiritual sense, 영성적 의미)를,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15-119항의 용어들에 따르면, 특히 우의적 어의(寓意的 語義)(the allegorical sense, 우의적/풍유적 의미) 및 신비적/종말론적 어의(the anagogical sense)를 추구하는 성경 해석자로 널리 알려진 분이셨습니다. 
 
3-1. 성경 본문에 대한 영성적 어의(영성적 의미)의 기초가 되는 성경 본문에 대한 자구적 어의(자구적 의미)는, 특히 지역 언어로 번역을 할 때에, 그 어의(의미)를 번역 대본에 있는 그대로의 의미의 보존을 위하여, 직역 번역을 하여야만 하는 것이,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지적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16항의 범주에 속할 것입니다.
 
3-2. 일반적으로 영성적 어의는 자구적 어의의 추상화 작업을 통하여 추출될 것이며, 바로 이 추상화 과정은, 그 수준에 따라, 우의적/풍유적 어의, 윤리적 어의, 그리고 최종적 수준으로서, 신비적/종말론적 어의를 추출하는 과정을 거치게 될 것입니다.
 
3-3. 즉, 성 토마스 아퀴나스“성경의 모든 의미는 자구적 의미에 근거한다.” 라고 말하였듯이, 성경 본문의 영성적 어의는 당연히 성경 본문의 자구적 어의에 근거하여, 그 수준에 따라, 5W1H 원칙들로 불리는 것들, 즉 언제(when), 누가(who), 어디서(where), 무엇을(what), 어떻게(how), 왜(why) 를 점진적으로 제거 혹은 약화 시키는 추상화 과정, 달리 말하여, 해석 과정을 거쳐, 서서히, 우의적/풍유적 어의, 윤리적 어의, 그리고 최종적으로 신비적/종말론적 어의를 추출하게 될 것입니다. 
 
3-4. 그러므로, 이러한 추상화 과정 혹은 해석 과정을 거쳐 성경 본문의 영성적 어의를 추출한 바를 기록한 가톨릭 교회의 어떤 자료 A를, 만약에 자구적 어의를 추출 할 때에 사용하는 바로 그 잣대들과 기준들만으로 이해를 하고자 한다면, 설사 아무리 충실하고 엄정하게 자구적 어의를 추출 할 때에 사용하는 잣대들과 기준들을 적용하였다고 하더라도, 이 자료 A는 이미 그러한 잣대들과 기준들을 적용할 수 없는 추상화된 자료이므로이 자료 A로부터 자구적 어의를 추출 할 때에 사용하는 바로 그 잣대들과 기준들의 기계적인 적용으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잘해야 틀림없이 오해뿐일 것입니다. 
 
4.
이제, 위의 제3항에서 말씀드린 바를 지지하는 혹은 입증하는 구체적인 자료들을 함께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4-1. 다음은,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자료로부터 발췌한 자료입니다. 여기서 그레고리오(Gregory)는 성 그레고리오 1세 대 교황님을 말합니다. 우리말 번역은 제가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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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 주 : 이 글의 저자인 Deeana Klepper미국의 보스톤 대학교(Boston University) 종교학과 교수(전공분야: 종교 및 역사)이며, 이 글은 이 교수가 강의하는 학부 2학년 과목(과목 명칭: Christianity, 강좌번호: CAS RN 212)에서 학생들에게 온라인으로 제공되고 있는 자료로 파악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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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ical Exgesis, According to Gregory the Great and a Short Biographical Sketch

그레고리오 대 교황 및 짧은 서지학적 대요에 따른, 성경 해석

 

(앞 부분 생략)

Gregory's writings are diverse: sermons, saints lives, interpretation of scripture (or exegesis) and letters, a guide for priests and bishops exercising "Pastoral Care." They have enjoyed a great and lasting popularity, and were among the most read and quoted texts during the entire Middle Ages. His writings were not so much concerned with speculative questions regarding such things as the nature of Christ or the Trinity, but was primarily concerned with providing models and instructions for how monks, priests and lay people can live a life of integrity and community that embodied the spirit and intentions of the gospel message. In his Pastoral Care, Gregory instructed priests on the duties of their ministry, composing a kind of Benedictine rule for the secular clergy (i.e. those living in the world). In his Dialogues, he recounted the lives of the holy men of Italy, including St. Benedict. He also wrote an extensive commentary on the Book of Job, called the Moralia in Job (see following selection). Here we see how thoroughly symbolic Gregory's approach to the Bible was, a mental disposition which determined not only how he read the Bible, but how he read the whole world. Words and things were for Gregory primarily important insofar as they pointed to other, supernatural, ideas and meanings.

 

그레고리오의 저술들은 다음과 같이 다양합니다: 설교들, 성인들의 삶들, 성경의 해석 (혹은 성경 해석) 그리고 “목자의 보살핌”을 행사하는 사제들과 주교들을 위한 안내(a guide)인 서신들. 그의 저술들은 커다란 그리고 지속하는 인기를 누렸으며, 그리하여 전체 중세 시기  동안에 가장 많이 읽히고 그리고 인용된 교과서(texts)들 중에 있었습니다. 그의 저술들은 그리스도의 본성 혹은 성삼위 등과 같은 것들에 관한 사변적인 질문들과 그리 크게 관련되어 있지 않았으나, 그러나 수사(monks)들, 사제들 그리고 평신도들이 어떻게 고결한 삶을 살 수 있는가를 위한 그리고 복음 메시지의 영성과 의도들을 구체화하였던 공동체를 위한, 귀감(models)들 및 가르침(instructions)들을 제공하는 데에 주로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저술인] Pastoral Care에서, 그레고리오는, 세속의 성직자들[즉, (수도원 밖의)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성직자들]을 위한 일종의 베네딕토 수도회의 규칙을 작성함으로써, 사제들을 그들의 사역 임무들에 대하여 가르쳤습니다. 자신의 [저술인] Dialogues에서, 그는, 성 베내딕토를 포함하여, 이탈리아 출신의 거룩한 사람들의 삶들을 열거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Moralia in Job 으로 불리는 (뒤따르는 발췌를 보라), 욥기(the Book of Job)에 대한 광범위한 주석서를 저술하였습니다. 여기 이 주석서에서 우리는, 그가 성경을 어떻게 읽었는지 뿐만이 아니라, 또한 그가 이 세상 전체를 어떻게 읽었는지를 결정하였던 마음의 성향인, 그레고리오의 성경으로의 접근(approach)이 얼마나 전적으로 상징적(symbolic)이었는지를 봅니다. 단어(words)들과 사물(things)들은 그레고리오에게 있어, 그들이, 다른, 초자연적, 개념들과 의미들을 가리키는 한, 주되게 중요하였습니다.

 

Gregory's world view and imagination was profoundly symbolic or allegorical, in the sense that he was always looking for the "other meaning" or the non-literal meaning of events, words and things. Allegory means to say one thing and mean another. The term allegory derives from the Greek words alles (other) and agoreuein (to speak publically or openly, and refers to ordinary language and our ordinary use of language to communicate with the obvious and literal meanings of words). Allegory is another way of speaking and another way of meaning. For Gregory God spoke allegorically, using the concrete words of the Bible or the ordinary events and objects of our material existence to communicate another level of meaning beyond the literal and concrete. Any word or passage in the Bible might then have several levels of meaning, and it was up to the reader to decipher these. For example, to say "Christ entered Jerusalem," could mean just that, AND could mean the soul enters the spiritual realm. Gregory was most interested in the non-literal meaning of texts and events.

 

그레고리오(Gregory)의 세상에 대한 견해와 상상은, 그가 사건들, 표현들 그리고 사물들에 대한 "그밖의 의미" 혹은 비 자구적 의미(non-literal meaning)를 항상 찾았다는 점에 있어, 대단히 상징적(symbolic) 혹은 우의적(allegorical)이었습니다. 우의(寓意, allegory, 풍유)는 한 개의 사물을 말하면서 다른 것을 뜻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의라는 용어는 그리스어 단어들인 allens(그밖의, other)와 groreuein [공개적으로 혹은 개방적으로 말을 함, 그리하여 단어(words)들의 자명한 그리고 자구적 의미들로써 나누어 주기 위하여(to communicate) 일상적인 언어와 언어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인 사용을 언급함]로부터 유래합니다. 우의/풍유는 말하기의 다른 방식이며 그리고 의미하기의 다른 방식입니다. 그레고리오에게 있어 하느님께서는, 자구적이고 구체적인 의미를 넘어서는 의미의 다른 수준을 나누어 주시기(to communicate) 성경의 혹은 우리의 질료적 존재의 일상적 사건들 및 대상들의 구체적인 표현들을 사용하시면서, 우의/풍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결과 성경에 있어 어떤 단어 혹은 구절은 의미함에 있어 여러 수준들을 가지며, 그리하여 이들을 해독하는 것은 독자들에게 달려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는 바로 그것을 뜻할 수 있으며, 그리고 영혼이 영적인 영역에 들어감을 뜻할 수 있습니다. 그레고리오는 본문들과 사건들의 비 자구적 의미(non-literal meaning)에 가장 흥미를 가졌습니다.

 

In a dedicatory letter prefixed in the Moralia, Gregory explained his methods of Biblical interpretation. He distinguished three kinds of meaning which could be sought and, often, had to be sought from Scripture. These were the literal, the allegorical and the moral. The moral level referred to what a given passage might indicate that we should do, or how we should live. To Gregory the allegorical meaning included reference to spiritual truth or experience, to the Kingdom of God, to heaven, to eschatology or the final end of all things, to Christ or to all things concerning the life of church communities. Other Biblical readers and commentators broke Gregory's category of the allegorical into two separate levels: 1) the "anagogical," which meant the mystical or prophetic or eschatological and 2) the allegorical which referred to Christ and the "body of Christ" (understood as all believers, the life of all churches), to christological and ecclesiastical doctrine. Those who assigned four levels of meaning to the Bible (eg. John Cassian ca. 360-435) were simply making an additional distinction within Gregory's category of the allegorical level of meaning or reference. 

 

[성 그레고리오 1세 대 교황에 의한 욥기에 대한 광범위한 주석서인] Moralia에 표제로 붙여진 헌정 서한(a dedicatory letter)에서, 그레고리오는 성경의 해석에 대한 자신의 방법들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는 성경으로부터 찾아질 수 있었던, 그리고, 자주, 찾아져야만 하였던 의미에 있어서의 세 가지 종류들을 구분하였습니다. 이들은, 자구적 의미, 우의적/풍유적 의미 그리고 윤리적 의미였습니다. 윤리적 수준은 어떤 주어진 구절이 우리가 행하여야만 하는지 혹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지를 나타낼 수 있을 바를 언급하였습니다. 그레고리오에게 있어 우의적/풍유적 의미는, 하느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에 대한, 하늘(heaven)에 대한, 종말론 혹은 모든 사물들의 최종적 끝에 대한, 그리스도에 대한 혹은 교회 공동체들의 삶에 관련된 모든 것들에 대한, 영적인 진리 혹은 경험에 대한, 언급을 포함하였습니다. 다른 성경 독자들 및 주석자들은 우의적/풍유적 의미라는 그레고리오의 범주를 다음과 같이 두 개의 분리된 수준들로 쪼갰습니다: 1) 신비적 혹은 예언적 혹은 종말론적 의미를 뜻하는 "신비적/종말론적 의미(the anagogical)" 그리고 2) 그리스도와 (모든 믿는 이들, 모든 교회들의 삶인) "그리스도의 지체"에 대하여, 그리스도론적 및 교회론적 교리에 대하여, 언급하는 우의적/풍유적 의미(the allegorical). 성경에 대하여 의미에 있어서의 네 수준들을 할당하였던 자들은[예를 들어, 성 요한 카시아노(John Cassian, 360-435년경)] 의미(meaning) 혹은 언급(reference)에 있어서의 그레고리오의 우의적/풍유적 수준이라는 범주 안쪽에서 단순히 어떤 추가적 구분을 하여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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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 주 : 성 요한 카시아노(St. John Cassian)에 대한 굿뉴스 서버 제공의 설명은 다음에 있으니 참고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t/John_Cassia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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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gory was indebted for his methods primarily to St. Augustine and to the great Greek theologian and exegete Origen. We read, for example, how Augustine in Book 6, chapter IV of the Confessions, credits Ambrose for helping to show him how to discover the life-giving meaning or "spirit" behind the literal meaning or "letter" of Biblical, especially Old Testament texts: "And [Ambrose] would go on to draw aside the veil of mystery and lay open the spiritual meaning of things which taken literally would have seemed to teach falsehood." Augustine then understood that everything in the Bible was there for our edification and that when one encountered a text that on the literal level seemed unedifying, absurd or not to support Christian teaching, the job of the reader or interpreter was to find a way to make them useful to faith by figurative or allegorical interpretation. The Bible communicated the truth: the reader's job was then to figure out in what sense or at what level of meaning a given text was true. Augustine puts forth his interpretive or hermenutical principles in his works On Christian Doctrine and On the Spirit and the Letter. Gregory developed and demonstrated, with a great and tireless imagination, Augustine's principles of allegorical interpretation in his Moralia. The Moralia was intensively studied in the Middle Ages as a model of interpretation and thinking.

 

그레고리오는 자신의 방법들에 대하여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에게서 그리고 위대한 그리스의 신학자이며 그리고 성경 해석자인 오리제네스(Origen)에게서 은혜를 입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아우구스티노가 [자신의 저서인] 고백들(the Confessions)의 Book 6, chapter IV 에서, 성경의, 특별히 구약 성경 본문들의 자구적 의미 혹은 “글자” 뒤에 있는 생명을 주는 의미 혹은 “영(spirit)”을 어떻게 발견하는지를 그가 보여주는 것을 도와준 데에 대한 공적이 어떻게 암브로시오(Amprose)에 있다고 간주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읽습니다: “그리고 [암브로시오는] 신비의 베일(veil of mystery)을 한쪽으로 움직이는 것을 그리하여 글자 그대로 받아들였더라면 거짓을 가르치는 것 같았을 사물들의 영성적 의미를 드러내는 것을 계속하곤 했었습니다.” 그 위에(then) 아우구스티노는 성경에 있는 모든 것이 우리의 교화(敎化, edification)를 위하여 거기에 있음을 이해하였으며 그리고 어떤 이가 자구적 수준에서 비 교화적이고, 모순되거나 혹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지지하지 않는 어떤 본문을 직면한다면, 독자 혹은 해석자의 임무가 표상적(figurative) 혹은 우의적/풍유적(allegorical) 해석에 의하여 그들이 믿음에 유익하도록 만드는 어떤 방식을 찾아내는 것임을 이해하였습니다. 성경은 진리를 나누어 주었습니다(communicated): 따라서 독자의 임무는 어떤 의미에 있어 혹은 뜻의 어떤 수준에 있어 주어진 본문이 참인 것인지를 생각해내는 것이었습니다. 아우구스티노(Augustine)는 자신의 저술들인 On Christian Doctrine On the Spirit and the Letter 에서 자신의 해석적(interpretive) 혹은 성서 해석적(hermenutical) 원칙들을 제시합니다.(*) 그레고리오는 우의적/풍유적 해석에 대한 아우구스티노의 원칙들을 [자신의 저서인] Moralia 에서, 커다란 그리고 지치지 않는 상상과 함께, 발전시켰으며 그리고 예증하였습니다. [그의 저서인] Moralia 는 중세에 있어 해석과 사유(thinking)의 어떤 귀감(a model)으로서 집중적으로 학습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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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재천명된 다음의 글 [제목: 성경 본문의 무오성에 대한 성 아우구스티노의 입장]을 또한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279/htm <----- 필독 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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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hyme survives from the Middle Ages that seems to have been designed to help monks, preachers and students remember the four level of meaning outlined by Cassian, Augustine and Gregory:

 

중세로부터, 수사(monks)들, 설교가들 그리고 학생들이, 카시아노(Cassian), 아우구스티노(Augustine) 그리고 그레고리오(Gregory)에 의하여 윤곽이 그려졌던, 의미에 있어서의 네 개의 수준들을 기억하는 것을 도와주기 위하여 고안되어졌던 것으로 보이는, 다음과 같은 한 개의 압운시(押韻詩)가 생존하고 있습니다:

 

Litera gesta docet,
Quid credas allegoria,
Moralis quid agas,
Quo tendas anagogia.

This verse, with some license, translates:

 

이 한 편의 시는, 어떤 승낙과 함께, 다음과 같이 번역이 됩니다:

 

The letter shows us what God and our ancestors did;
The allegory shows us where our faith has hid;
The moral meaning gives us the rule of daily life;
The anagogy shows us where we end our strife.

 

글자는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그리고 우리의 선조들이 행했던 바를 보여주며,
우의는 우리에게 우리의 믿음이 어디에 숨어있는지를 보여주고,
윤리적 의미는 우리에게 일상의 삶의 규정을 제공하며,
신비는 우리에게 우리가 어디로 우리의 분발을 끝내는지를 보여준다.

 

(Robert M. Grant, A Short History of Biblical Interpretation, New York, 1963).

More literally, the verse says: The letter instructs about what things were done; Allegory teaches us what we should believe; the moral level shows what to do; the anagogical signals aspects of the (spiritual and future) realm toward which we are directed. 

훨씬 더 글자 그대로, 이 한 편의 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글자(the letter)는 어떠한 일들이 행해졌던지에 관하여 정보를 제공하며, 우의(the allegory, 풍유)는 우리에게 우리가 믿어야 하는 바를 가르치고, 윤리적 수준(the moral level)은 무엇을 행하여야 하는지를 보여주며, 그리고 신비적 어의(the anagogical)는, 거기를 향하여 우리가 인도되는, (영성적 및 미래의) 영역의 양상들을 표지합니다.

(뒷부분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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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다음의 글은,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Dan Brown의 책인 "다빈치 코드(Da Vinci Code)"에서 어떠한 왜곡/폄훼/훼손이 성 그레고리 1세 대교황에게, 그리고 가톨릭 교회에 대하여 악의적으로 가해지고 있는지를 다루고 있는 글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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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 주 : 이 글은, 호주 멜보름에 기반을 둔(Melbourne-based) 가톨릭 저자, 저술가 및 강사인 John Young의 글입니다. 위의 제3항 및 제4-1항에서 말씀드린, 성 그레고리오 1세 대 교황님의 성경 해석법에 대한 설명을 읽은 다음에 이 글을 읽으시면, 훨씬 더 쉽게, 이 글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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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a Vinci Code and the itching ears syndrome

다빈치 코드와 몹시 듣고싶어하는 증후군

Brown's "discovery"

브라운의 "발견"

 

The Church, he says, pretended Mary was a reformed prostitute, but scholars know this is wrong. This "discovery" will doubtless impress some readers, particularly those who have always assumed Mary was the woman who had a bad name in the town and who, repentant, washed the feet of Jesus and dried them with her hair. Readers may wonder: why weren't we told the truth? Brown's rejection of the error will dispose some of them to believe other claims he makes.

 

그는 교회가 마리아가 한 명의 개심한 창녀(a reformed prostitute)였다고 사칭하였다(pretended)고 말합니만, 그러나 학자들은 이것이 잘못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 "발견"은 의심할 여지없이 일부 독자들에게, 특히 마리아가 그 고을에서 어떤 나쁜 평판을 가졌으며 그리고, 뉘우치면서, 예수님의 발들을 씻었으며 그리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이들을 닦았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고 항상 가정해 왔던(have always  assumed) 자들에게, 감명을 줄 것입니다. 독자들은 왜 이 진실이 우리에게 말해지지 않았을까? 하면서 의아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오류에 대한 브라운의 거부(rejection)는 그들 중의 일부로 하여금 그가 만드는 다른 주장들을 믿고자 하는 성향을 가지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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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 그레고리오 1세 대 교황님께서, 추상적인 영성적 의미를 추출하는 과정에서 칠죄종들과 관련시키고 있는, 591년의 바로 그 강론 33 에서, 마리아를 "창녀"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파악이 되고 있다. 이것은, 특히 그러한 주장을 하는 자들이 제시하고 있는, 그레고리오 1세 대 교황님의 강론 33에서 발췌한, 다음의 발췌문의 어디에도 있지 않은 표현으로, 이 발췌문을 제시한 자들이 그레고리오 1세 대 교황님께서 그러한 주장을 하였다고 왜곡/음해/훼속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특히 다음의 발췌문에서 파란색으로 굵게 표시한 라틴어 원문들을 주의깊게 살펴 보면, 라틴어 발췌문 어디에도 창녀(prostitute)자구적으로 직역 역될 수 있는 표현은 있지도 않다:

 

출처: http://witcombe.sbc.edu/davincicode/gregory-homily33.html

(발췌문 인용 시작)
"We believe that this woman [Mary Magdalen] is Luke's female sinner, the woman John calls Mary, and that Mary from whom Mark says seven demons were cast out." 
("Hanc vero quam Lucas peccatricem mulierem, Joannes Mariam nominat, illam esse Mariam credimus de qua Marcus septem dæmonia ejecta fuisse testatur") 

The seven demons Gregory identified as "all the vices" 
("Et quid per septem dæmonia, nisi universa vitia designantur?") 

by which he means the seven so-called cardinal sins (including lust, which was understood as inordinate or illicit sexual desire). The seven cardinal sins were first grouped as such by Gregory.(*) The passages mentioning Christ's casting out of the seven devils from Mary Magdalen are in Luke 8, 1-3, and Mark 1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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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
이 단 한 줄의 간략한 언급도 보통 수준의 독자들에게 자칫 왜곡/오해를 줄 수 있다는 생각인데, 그 이유는, 다음의 인터넷 주소에 있는, 그레고리오 1세 대 교황님의 성경 해석법에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파악이 되고 있는, 성 요한 카시아노(St. John Cassian, 360-435년경)에 대한 굿뉴스 서버 제공의 설명 하단부에 있는 첫 번째 게시글(제목: 요한 카시아누스: 동방과 서방 수도승(즉, 수사) 전통 통합에 한몫)에 의하면, 성 요한 카시아노 에바그리우스(Evagrius Ponticus)의 노선에 따라, 다음과 같은 여덟 가지 큰 악습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탐식(gastrimargia), 성적 탐닉(fornicatio), 인색(filargiria), 분노(ira), 슬픔(tristitia), 권태(acedia), 허영심(cenodoxia), 교만(superbia)

http://ch.catholic.or.kr/pundang/4/st/John_Cassia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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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gory then explained that the ointment used by Luke's unnamed sinner, now Mary Magdalen, to anoint Christ's feet had previously been used by her "to perfume her flesh in forbidden acts." 
("Liquet...quod illicitus actibus prius mulier intenta unguentum sibi pro odore suæ carnis adhibuit")

 

It was Gregory who also associated her, again primarily through identification with Luke's unnamed sinner, as a penitent when he explained that by immolating herself at the feet of Jesus, "she turned the mass of her crimes to virtues, in order to serve God entirely in penance."
("Convertit ad virtutum numerum criminum, ut totum serviret Deo in poenitentia")

 

Homily 33 is recorded in Homiliarum in evangelia, Lib. II, Patrologia Latina, vol. 76 (Paris: J.-P. Migne, 1844-1864), cols. 1238-1246 

(이상 발췌문 인용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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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he is right in maintaining that Mary Magdalene is not the penitent sinner of Luke 7. There is no good reason for saying they are the same person. This identification was apparently never made until late in the sixth century; and when St Luke names Mary Magdalene, after having written about the penitent woman, he seems to be introducing her for the first time. Most Scripture scholars see Mary Magdalene, Mary of Bethany and the penitent sinner as three different women.

 

이는, 마리아 막달레라(Mary Magdalene)가 루카 복음서 제7장의 회개하는 죄인이 아님을 주장함에 있어, 그가 올바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동일한 자라고 말하기 위한 타당한 이유는 없습니다. 이러한 동일시(identification)는 6세기 말기까지 전혀 외관상으로(apparently)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그리고 성 루카가, 이 회개하는 여인에 관하여 이미 기록한 이후에, 마리아 막달레나를 거명할 때에, 그가 처음으로 그녀를 소개하는 것처럼 생각됩니다(seems). 대다수의 성경 학자들은 마리아 막달레나, 베타니아의 마리아 그리고 이 회개하는 죄인을 세 명의 다른 여인들로 생각합니다(see).

 

The identification was made by Pope Gregory the Great in a homily preached in 591 (Homily 33, PL 76, 1239). Did he do so to disparage her? Certainly not. He was always more interested in drawing spiritual lessons from Scripture than in adhering to the literal meaning. In this instance he viewed the seven demons cast out of Mary Magdalene as literally demons but also as representing the seven capital vices.

 

[비 자구적(non-literal)] 동일시는 성 그레고리오 대 교황에 의하여 591년에 설교되었던 한 개의 강론(Homily 33, PL 76, 1239)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가 그녀의 명성을 더럽히기 위하여 그렇게 하였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그는 성경으로부터, 자구적 의미를 고수하는 것보다, 영적인 교훈들을 도출하는 데에 더 큰 관심을 항상 가졌습니다. 이 경우에 있어 그는 마리아 막달레나로부터 떨어져 나간 일곱 마귀들을 글자 그대로의 마귀들로 그러나 또한 칠죄종(the seven capital vices)(*)을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view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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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 가톨릭 교회가 헤아리는 본죄(本罪), 즉 우리 자신이 자신의 자유의지(free will)로 짓는 죄의 일곱 개의 죄원[capipal sins, 罪源, 즉 칠죄종(七罪宗)]들은 다음과 같다: (i) 교만(pride, 驕慢), (ii) 탐(貪, avarice), (iii) 음욕(lust, 淫慾), (iv) 분노(anger, 憤怒), (v) 탐도(?, gluttony), (vi) 질투(envy, 嫉妬), 그리고 (vii) 나태(sloth, 懶怠).

이들 칠죄종들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다음의 자료들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info/capital_sins2.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35.htm (제6항을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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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account of the penitent woman he sets in contrast the perfume with which she anointed Jesus with the perfume she would have previously worn when sinning; he sees her eyes which previously had coveted forbidden things as now filled with the tears of repentance; the hair which she had sinfully flaunted is now used to dry her tears; the mouth which had spoken proud words now kisses her Saviour's feet.

 

회개하는 여인의 이야기에 있어 그는 그녀가 예수님께 부어 발랐던 향유를 그녀가 이전에 죄를 지을 때에 몸에 발랐을 수 있는 향유와 대조적으로 설정하고, 그리고 그는 이전에 금지된 것들을 탐을 내었던(coveted) 그녀의 눈들을 이제 회개의 눈물들로 채워진 눈들로 보며, 그리고 그녀가 죄 많게 과시하였던 머리카락은 이제 그녀의 눈물들을 닦아내기 위하여 사용되고, 그리고 자만하는 말들을 하였던 입은 그녀의 구원자의 발들에 이제 입을 맞춥니다.

 

The homily doesn't lower Mary in the estimation of the hearers; it elevates her. It praises her for renouncing sin and turning so fully to Christ. Had Gregory wanted to downgrade her he would have adopted a very different approach.

 

이 강론은 청중들의 평판에 있어 마리아를 낮추지 않으며, 이 강론은 그녀를 들어올립니다. 이 강론은 죄를 포기하고 너무도 충만하게 그리스도께로 돌아선 것에 대하여 그녀를 칭찬합니다. 만약에 그레고리오가 그녀를 격하시키는 것을 원하였더라면 그는 매우 다른 접근을 채택하였을 것입니다.

 

Some of Dan Brown's readers won't realise it, but Christians through the ages have always been moved by accounts of repentant sinners: Peter weeping bitterly for his denial of Jesus; the repentant thief on the cross (the thief who stole Heaven, as Fulton Sheen put it); Thomas renouncing his scepticism with his act of faith "My Lord and my God"; St Augustine breaking with years of sin to become a great saint.

 

댄 브라운(Dan Brown)의 독자들 중의 일부는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입니다만, 그러나 세기들에 걸쳐 그리스도인들은 다음과 같이 회개하는 죄인들에 대한 이야기들에 의하여 항상 감동해 왔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부인 때문에 비통하게 눈물을 흘림; 그리고 (Fulton Sheen이 그렇게 표현하였듯이, 하늘을 훔쳤던 도둑인) 십자가 위에서의 회개하는 도둑, 그리고 토마스(Thomas)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요한 복음서 20,28) 이라는 자신의 믿음의 행위와 함께 자신의 회의(scepticism)을 버림, 그리고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가 한 명의 위대한 성도가 되기 위하여 죄로 이루어진 여러 해들과의 결별함.

 

There ever resonates in the Christian soul the statement of Jesus, "There is more joy in Heaven over one sinner who repents than over ninety-nine righteous persons who need no repentance" (Luke 15:7).

 

바로 거기 그리스도인의 영혼 안에서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루카 복음서 15,7)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영원히 울려퍼집니다.

 

Ignoring all this, Brown infers something sinister in Pope Gregory's identification of the two women: something is being covered up; the Pope knows it would be dangerous, indeed disastrous, if the truth got out - if people saw that Mary Magdalene, not St Peter, should have led the Church. So her character has to be blackened.

 

이러한 모든 것을 무시하면서(*), 브라운(Brown)은 이 두 여인들에 대한 교황 그레고리오(Pope Gregory)[비 자구적(non-literal)] 동일시에 있어 악의를 품은 그 무엇을 다음과 같이 추론합니다(infers): 무엇인가가 은폐되고 있으며, 그리고 이 교황은, 만약에 진실이 알려지게 되었더라면, 즉 만약에 사람들이, 성 베드로가 아니라, 마리아 막달레나가 교회를 이끌었어야만 함을 알아차렸더라면(saw), 그것은 위험할 것이며, 정말로 재앙이었을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녀의 품성은 어둡게 되어져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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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 

(1) 다빈치 코드의 저자인 댄 브라운이 무시하였던 것 혹은 모르고 있었던 것이, 그레고리오 1세 대 교황님위의 제3항 (특히 제3-3항 및 제4-4항을 잘 읽어 보도록 하십시오) 및 제4-1항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은, (자구적 의미가 아닌, 그러나 자구적 의미에 근거하여) 우의적/풍유적 의미(the allegorical sense)를 추출하기 위한 성경 해석법이었음을, 이 글의 저자는 지금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2) 위의 제4-1항에서 발췌한, 다음의 문장들을 잘 읽어보도록 하십시오:

그는 또한, Moralia in Job 으로 불리는 (뒤따르는 발췌를 보라), 욥기(the Book of Job)에 대한 광범위한 주석서를 저술하였습니다. 여기 이 주석서에서 우리는, 그가 성경을 어떻게 읽었는지 뿐만이 아니라, 또한 그가 이 세상 전체를 어떻게 읽었는지를 결정하였던 마음의 성향인, 그레고리오의 성경으로의 접근(approach)이 얼마나 전적으로 상징적(symbolic)이었는지를 봅니다. 단어(words)들과 사물(things)들은 그레고리오에게 있어, 그들이, 다른, 초자연적, 개념들과 의미들을 가리키는 한, 주되게 중요하였습니다.

...

그레고리오에게 있어 하느님께서는, 자구적이고 구체적인 의미를 넘어서는 의미의 다른 수준을 전달하기 위하여 성경의 혹은 우리의 물질적 존재의 일상적 사건들 및 대상들의 구체적인 표현들을 사용하면서, 우의적/풍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결과 성경에 있어 어떤 단어 혹은 구절은 의미함에 있어 여러 수준들을 가지며, 그리하여 이들을 해독하는 것은 독자들에게 달려있었습니다.

...

그레고리오는 본문들과 사건들의 비 자구적 의미(non-literal meaning)에 가장 흥미를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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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cording to Brown, speaking through his fictional characters, a great conspiracy is in place, and has been since early times, to prevent the truth becoming known. But there has also been a secret tradition which has preserved the truth through the centuries. A vast secret society, the Priory of Sion (whose great enemy is Opus Dei!) knows the truth. The Priory has numbered among its Grand Masters such illustrious figures as Botticelli, Leonardo da Vinci, Sir Isaac Newton and Victor Hugo.

 

브라운에 따라, 그의 소설의 등장 인물들을 통하여 말하면, 이 진실이 알려지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어떤 커다란 음모가 적소에(in place) 있으며, 그리고 이 음모는 초기 시대들 이후로 있어 왔다. 그러나 세기들을 통하여 진실을 보존해 왔던 비밀의 전통이 또한 있어 왔다. [자신에 대한 커다란 적이 오푸스 데이(Opus Dei)인] 비밀 단체인 시온 소(小)수도원(the Priory of Sion)은 이 진실을 알고 있다. 이 소(小)수도원은 그 원장들 중에 보티첼리(Botticelli),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아이작 뉴톤 경(Sir Isaac Newton) 그리고 빅토르 유고(Victor Hugo) 등과 같은 저명한 인사들을 하나씩 세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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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 주 : 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버(St. Josemaria Escriva, 1902-1975년)가 1928년에 창설한 단체인 "오푸스 데이(Opus Dei)"에 대한 안내의 글은 다음의 자료들에 있으니 참고하라:
http://www.josemariaescriva.info/index.php
http://www.opusdei.org (우리말 안내)
http://ch.catholic.or.kr/pundang/4/vatican/intro2opus_dei.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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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nardo, so the story goes, couldn't reveal the facts because of the Church's power, so he left hidden messages in his paintings. In The Last Supper the figure taken to be St John, sitting at Jesus' right, is really Mary Magdalene!

이렇게 해서 이 이야기는 진행하는데, 레오나르도(Leonardo)는, 교회의 힘 때문에, 진실들을 드러낼 수가 없었으며, 그래서 그는 자신의 그림들 안에 감추어진 메시지들을 남겼다.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에 있어, 예수님의 오른편에 앉아있는, 성 요한으로 택해진 인물은, 실제로 마리아 막달레나이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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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다음은,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댄 브라운의 소설인 "다빈치 코드"가 허구의 소설이라고 밝히고 있는, 오푸스 데이 홈페이지 제공의 글 전문입니다. 예를 들어, 오푸스 데이에는 수사(수도승)이 없기 때문입니다:

(발췌 시작)

“다빈치 코드”

다빈치 코드는 가톨릭 종교의 진실을 의심하는 픽션 소설로 세계적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소설이라 하지만 교회의 기초 자체를 비난하는 모욕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다음은 미국과 스페인 신문에 실린 기사를 요약한 것이다.

아세프렌사 11/04

 
Opus Dei -

2003년 7월 8일자 아워 선데이 비지터 (Our Sunday Visitor)에서 앤디 웰본은 "이 소설의 줄거리는 전혀 납득할 수 없다." 며 “루브르 박물관 관장이 총에 맞아 죽는다. 하지만 그는 죽기 전 자신의 몸짓으로 어떤 단서를 남긴다. 그의 손녀 소피는 미국인 사립탐정과 함께 그녀의 할아버지가 남긴 단서가 그의 암살자를 알리려는 것이 아니라 어떤 큰 비밀의 단서임을 깨닫게 된다.

(...) 그녀의 할아버지는, 오랫동안 한 비밀을 지켜온 '시온수도회'라는 고대의 비밀 단체에 속해 있었는데, 그 비밀의 발견은 인류사회가 지탱해 온 개념에 큰 문제가 될 것이었다. 물론 가톨릭 교회는 이 천년 동안 이 비밀을 누설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 비밀이란,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했다. 또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힐 때 막달라 마리아는 임신중이었다. 막달라 마리아의 딸의 후손들이 아직도 살아 있고 시온수도회에 의해 극비리에 보호를 받고 있다. 또 그들은 진실로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성배와 막달라 마리아의 유해를 찾는 것이다.”

“소피와 미국인 탐정은 오푸스 데이 회원인 한 흰머리 노인으로 상징된 교회와 암투를 벌이게 된다. 이 불가사이한 노인은 한 주교와 한 스승의 지시를 받고 있다. 소피는 그의 할아버지가 남긴 단서를 찾으려고 스위스 주리츠 은행, 성묘지의 성당, 웨스트민스터 수도원, 다빈치의 그림이 걸린 루브르 박물관까지 뒤진다. 다빈치는 자신의 그림 '최후의 만찬'에서 그리스도의 성배가 만찬 때 사용한 포도주 잔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임을 암시하고 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이가 성 요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연인 막달라 마리아라는 것이다."

앤디 웰본은“소설 줄거리 대부분은 <성혈, 성배>에서 베낀 것이고 나머지는 말도 안되는 공상이자 영지주의 이론이다."고 말한다. 브라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로마 황체 콘스탄티누스가 자신의 권력 기반을 구축하려고 거짓으로 꾸민 것이며, 그때까지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훌륭하긴 하지만 그저 인간적인 예언자로 비췄을 뿐이었다."고 했다.

시카고 선 타임즈 (Chicago Sun Times) 2003년 9월 27일자에서 토마스 로서는 브라운이 저지른 실수를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벽화 '최후의 만찬' 에서 그리스도의 오른편에 있는 이가 요한이 아닌 막달라 마리아라는 것이 열쇠라고 하는데, 시카고 예술 학교의 브루스 브라우처가 지적했듯이, 이는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라며,“브라운의 어처구니 없는 이론은 부조리적인 사실과 연구와 섞여 있다. 고대의 올림픽은 아프로디타가 아닌 제우스를 위한 행사였고 이 소설에 나오는 템플 성당은 막달라 여자의 비밀을 지키는 템플라리오 수도자들이 건축한 것이 아니라 후에 도착한 주교들이 건축했으며, 그 고딕풍 대성당 안에는 여성적인 상징이 전혀 없다. 평론가 산드라 미셀도 차르트 어디에 여인의 모습이 있냐"고 반문한다.

"이 책은 가톨릭 교회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는데 특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인준한 오푸스 데이가 모욕을 당하고 있다. 오푸스 데이의 한 수사 (브라운은 오푸스 데이에 수사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를 막달라 여인에 관한 비밀의 누설을 저지하고자 사람을 죽인 암살자로 그리고 있다. 나는 오푸스 데이 회원은 아니지만 시카고에서 운영되는 중고등학교에서 일하고 있어 오푸스 데이를 잘 알고 있고 그들의 사업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 소설은 다빈치가 시온수도회의 한 구성원이었고 자신의 유명한 그림들인 '모나리자', '장미의 성모', '최후의 만찬'에 비밀을 암시했다고 한다. 중세 역사평론가 산드라 미셀 (뉴욕 데일리 뉴스: New York Daily News, 4-IX-2003)은 막달라 마리아가 성 요한이라는 말은 처음 듣는다고 했다.

역사적 무지

소설의 주인공은 다빈치의 그림에 성배가 없음을 보고 다빈치가 그 성배에 대해 몰랐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산드라 미셀에 따르면,“그 벽화는 요한복음에서 영감을 받아 그렸기 때문에 성체에 대한 말씀이 없어 성배가 없는 것이고”“한 교황이 자신이 살해한 수사의 시체를 티베르 강에 버리는 모습은 교황들이 로마가 아닌 아비뇽에 살고 있던 때다.”

소설가 신티아 그레니어는 위클리 스탠더드 (Weekly Standard: 22-IX-2003) 에서 “이 소설은 지나친 여성의 시각으로 그리스도교를 보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누가 뭐래도 나는 이 소설을 사지 않겠다. 상상적인 이야기를 비논리적으로 섞은 소설이기 때문이다. 만일 중세 아더 왕의 기사들이 찾던 성배가 원래는 막달라 마리아의 배었다는 것을 상상해 볼 수도 없다. 다빈치 코드는 잊어버려야 할 소설이다. 독자가 이 454 페이지의 책을 읽었다면 마지막으로 루브르 박물관 밑에서 예수의 애인의 유해가 나왔을 때 책이 손에서 떨어졌을 것이다”라고 했다.


또한 댄 브라운이 저지른 수 많은 역사적, 지리적 실수를 지적하면서“이 소설가에게 그리스도교의 역사입문서와 지도를 보내줘라”고 했다.

스페인 평론가 까사벨라 (F. Casavella)는 엘 빠이스 신문에서 (El Pais, 17-I-2004) “다빈치 코드는 60년대부터 나온 이런 부류의 소설 가운데 가장 넌더리나는 소설이다. 댄 브라운은 문학 공부에 있어 일 학년도 못 뗀 것 같다. 지루하다는 것이 아니라, 처음 듣는 성배와 다빈치와 오푸스데이를 섞은 이론을 설명할 때 엉성하고, 독자를 바보라고 생각해선지 대충대충 이야기한다. 줄거리를 만들 때 나중에 쓸모 있게 보이도록 하는 자료들과 등장인물들의 말도 엉성하고, 주인공이 하는 연구도 비논리적이어서 이 소설가가 공부하지 않은 사람임을 단박에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까사벨라는“이 모든 것을 용서할 수는 있지만 이 소설이 광고를 통해 널리 알려지는 것 뿐만 아니라 마치 가치가 있는 책처럼 팔리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댄 브라운과 그의 코드는 에드 우드의 영화 같다. 이 저질 책을 팔지 않으려 했고 지금도 이를 후회하지 않는 출판사가 있다는 것은 아직도 양심이 없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 했다.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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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항, 4-5항 외

 

여기를 클릭하면, <----- 필독을 또한 권고합니다.
 
이 자리에 붙이려고 하였으나 용량 제한 때문에 별도로 올리게 된, "Lectio Divina(거룩한 독서)의 역사/배경"이라는 제목을 가진, 김영희 데오필라 수녀님의 글 및 이어지는 글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Lectio Divina(거룩한 독서)의 역사/배경"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또한 다음의 주소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3세기 이후로 유다교 라삐들의 성경 본문에 대한 강론적 해석법인, 미드라쉬(midrash)에 대한 게시자 주를 필히 참고하도록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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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제, 어떤 분께서,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가 아니었다" 제목의, 다음의 퍼온 글을 함께 살펴 보도록 합시다. 
 
특히 위의 제3항 및 제4-1항에서 말씀드린 내용을 이해하신 후에 읽을 것은 강력하게 권고드립니다.
 
참고: 아래에서 초록색으로 굵게 쓴 부분은 저의 답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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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신교 신자가 아님을 밝혀 두면서

개신교 창에서 뭐 이런거 가져 오느냐고 하지 마시고 보시고 참고하세요

보기 싫으신분은 안보셔도 됩니다.

답변은 사양합니다.      ~로마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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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들과 충돌이 있을 수 사안들에 대하여, 개신교측의 자료들에서 주장하고 있는 바를 자신의 판단만으로 괜찮다고 생각하여 퍼 오기를 계속하는 것은 (참고: 이번이 처음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단히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큰 교만일 것입니다.

 

그리고 개신교측의 글을 퍼 올 경우에 있어, 만약에 퍼 온 글의 내용에 이런 저런 하자가 있을 경우에는, 퍼 온 분에게도 당연히 또한 책임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더구나, 나중에 문제가 있음을 알고나서 자진 삭제를 하더라도, 보통 수준의 독자들을 신앙적으로 호도한 책임이 어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래 글의 출처: 굿뉴스 서버 > 성경 묻고 답하기 > 제5395번, 혹은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가 아니었다.

 

에스라하우스의 원장으로 30년 이상 성경 통독 운동을 전개해온 노우호 목사(예장통합, 마산 샤론교회 시무)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를 풀어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던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로 알고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노 목사의 비판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한 것으로 원문을 그대로 옮겼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를 풀어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던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로 알고 있는데, 

 

이는 성경을 정밀하게 보지 못한 사람들의 경솔함에서 비롯되었다

 

<----- 이 표현은, 이 글을 작성한 분의 개인적 판단에 기인하는, 대단히 경솔한 주장이라는 생각입니다.

 

첫째,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지도 않았다.

이 오해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것으로 착각한 데서 비롯되었다.

 

<----- "오해"하였다고 생각하는 것과 "착각"하였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해이며 착각이었다는 생각입니다.

 

둘째,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가 아니었다. 창녀로 볼 수 있는 죄 많은 여인은 베다니에 살고 있던 나사로의 누이동생 마리아였다. 셋째, 막달라 마리아는 나이가 상당히 많은 여인이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을 뒷바라지를 하면서 섬겼던 여러 여인들이 이름이 나올 때 언제나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이 제일 먼저 나온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연배 비슷 서양과는 달리 동양 사람들의 관습은 나이가 많은 사람의 이름을 앞에 기록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 모친 마리아와 거의 같은 나이였거나 그 이상이었다. 예수님이 자기 어머니 뻘이나 되는 고령의 여인과 결혼을 했다는 댄 브라운의 이야기는 한마디로 삼류 코미디도 못되는 이야기다.

 

막달라 마리아는 재력이 있는 중년이었고 아마도 과부였을 가능성이 있다. 

 

<----- 이 글을 작성한 분이 동의하는, 하나의 추측이라는 생각입니다. 이는 프랑스 지역의 가톨릭 교회의 전통은 이와 다르게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한때 일곱 귀신이 들어가서 폐인이 될 뻔했는데, 그녀를 억압하던 일곱 귀신을 예수님께서 쫓아내어 주심으로 정상적인 회복되시어 그날부터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다. 그녀는 자기의 소유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섬겼다. 예수님의 삼년 사역에 들어간 경비 중 상당 부분을 막달라 마리아가 담당했고 베대의 부인 즉 야고보와 요한의 모친이 일부분을 담당했다.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눅 8:2~3)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라는 여인은 젊은 여인이라고 볼 수가 없다. 헤롯이 자기의 내탕고를 맡을 청지기를 풋내기 젊은 아이를 택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나이 50이 덜된 사람이 헤롯왕의 청지기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요안나 역시 나이가 대체로 50대였을 것이고 당시 상당한 신분에 있었던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의 이름보다 앞에 거명되는 막달라 마리아의 나이도 최소한 50대 여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가 아니었다 성경 어디에도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였다는 기록이 없다.

 

그럼에도 그녀가 창녀로 언급되는 이유는 591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가 부활절 설교를 하면서 누가복음 7장에 등장하는 마리아를 베다니 마리아인 줄 모르고 그녀를 창녀이며 막달라 마리아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 

(i) 가톨릭 교회의 교부들의 전통적 성경 해석에 어떠한 방법들이 있었는지를 모르다 보니, 그리고 

(ii) 가톨릭 교회의 미사의 전반부인 말씀 전례의 마지막에 있게 되는 강론(homily)의 정의(definition)에 대하여 모르다 보니, 

 

이 글을 작성 한 분이 동의하는, 무지에 기인하는 대단히 잘못된 주장을 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성 그레고리오 1세 대 교황님께서는, 강론 중에서,

 

(1) 마리아 막달레나를 "창녀"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으셨으며, 그리하여 

(2) 그녀를 "창녀"이며 마리아 막달레나 라고 "선언"하지 않으셨던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창녀" "선언" 등의 주장들은, 상당히 무지한 누군가가, 그러나 성 그레고리오 1세 대 교황님의 권위를 훼손하고자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자가, 그레고리오 1세 대 교황님의 강론(homily)의 일부분을 발췌하여서는, 거기에다 자신 고유의 왜곡을 추가하여, 극히 작위적으로 그리고 자의적으로 만들어 내었다는 생각이며, 

 

그 결과, 이러한 억지 주장으로부터, 이러한 주장들에 동조하는 자들이 여전히 우리들 주변에 있음을 우리 모두가 오직 잘 알게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참고: 성경 본문 어디에도 삼위일체(Trinity)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개신교측에서도, 개신교가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의 가톨릭 교회의 교도권에 의하여 선포/선언된, "삼위일체 교의(the dogma of Trinity)"를 믿을 교리로 고백하는데, 그 이유가 "삼위일체"라는 표현이 비록 성경의 본문 중에서 사용되고 있지는 않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내용들이 바로 "삼위일체 교의"로 개념적으로 요약되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개신교가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의 가톨릭 교회의 교도권에 대한 의구심을 그 바탕으로 하는 "다빈치 코드" 라는 제목을 가진 책자가 허구의 소설임에 대하여, 가톨릭측 뿐만이 아니라, 개신교측에서도 분명하게, 근거 제시와 함께, 지적하며 밝히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적으로 유의미하나, 

 

그러나 이러한 지적을 하는 과정에서, 위와 같은 또다른 대단히 그럴듯한 주장을 만들어서 슬쩍 끼워 넣음으로써, 개신교가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의 가톨릭 교회의 교도권에 대한 의구심을 독자들로 하여금 여전히 가지게끔 하고 또 유지하도록 시도하는 것은, "다빈치 코드"라는 제목을 가진 책자가 주장하는 허구의 연장선상에 있는, 또하나의 허구의 주장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에, 이러한 또하나의 허구의 주장은, 가톨릭 교회의 교부들의 전통적 성경 해석에 어떠한 방법들이 있었는지에 대한, 그러한 주장을 하는 자와 또 그러한 주장에 동조하는 자들의 무지를 드러낼 뿐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더 자세하게 살펴본 사람이라면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마리아는 베다니의 마리아 즉 나사로의 누이동생이었고, 그 장소는 베다니의 나사로 집 가까이에 살고 있었던 바리새인 시몬이라는 문둥병 환자의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이 주장도, 이 글을 작성한 분이 동의하는, 정설이 아닌, 하나의 추측이라는 생각입니다.

 

베다니라는 동네는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는 곳에 위치한 가난하고 소외된 마을이었다.

 

그곳에는 불가촉 질병을 앓는 사람들이나 죄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동네였다. 그래서 그 동네의 이름도 '벧-아니' 즉 베다니 , '슬픔의 집'이라는 뜻이다. 병든 나사로 역시 나병환자였다는 것이 정설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에게는 여동생이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마르다'이고 다른 한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마리아'였다. 예수님은 나사로와 오래 전부터 사귀어왔고 예루살렘에 오셨을 때는 당연히 나사로의 집을 찾았으며 당연히 그의 여동생들도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으며 고마운 분으로 존경하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집에 자주 출입하는 것을 그 이웃에 사는 바리새인 시몬이라는 문둥병을 앓는 사람이 자연히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때 앓던 병으로 죽어 장사까지 지냈던 나사로를 능력으로 살려내신 사건이 있은 후로부터 예수님은 베다니 마을에서 매우 유명해졌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평소에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사이가 좋지 않기는 했지만 그래도 시몬은 혹시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시게 되면 무슨 은혜를 받을 수 있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하게 되었고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꺼림이 없이 그 초대에 응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때 시몬의 이웃에 살고 있었던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그 자리에 나타나서 예수님께 다가가 예수님의 머리에 한 방울을 떨어뜨린 후 나머지 향유는 한꺼번에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를 풀어서 예수님의 발을 닦고 있었다. 향유를 깨뜨린 마리아는 막달라가 아닌 '베다니'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더라."(요 11:1~2) 복음서마다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댄 브라운은 복음서를 읽지 않고 무슨 책을 읽었는지가 매우 궁금하다.

 

복음서의 어떤 부분에서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고 하고 다른 곳에서는 발에 부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런 경우는 간단하다. 처음에 한 방울은 머리에 붓고 나머지는 발에 부었던 것으로 보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마 26:7)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막 14:3)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눅 7:38)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눅 7:45)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눅 7:46)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 위하여 잔치할 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요 12:1~3)

  

엉뚱한 근거로 소설 쓴 댄 브라운만 탓할 일은 아닌 듯 성경을 제대로 보지 못한 <다빈치 코드>의 댄 브라운이 엉뚱한 이론을 만들어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 가톨릭 교회의 교부들의 전통적 성경 해석에 어떠한 방법들이 있었는지에 대히여, <다빈치 코드>의 댄 브라운또한 대단히 무지하였음을 드러낼 뿐이라는 생각입니다.

 

하기야 우리 한국의 찬송가에까지 그런 실수를 할 정도로 성경을 잘 모르니 댄 브라운만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우리 찬송가 346장에 보면 꼭 오해하기 좋게 되어 있다. "값비싼 향유를 주께 바친 막달라 마리아 본받아서" 막달라 마리아가 아니라 베다니 마리아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가 향유를 가지고 간 것은 예수님께서 무덤 속에 계실 때 그 시신 즉 미이라에 바르기 위하여 준비했었던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인지 베다니 마리아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쓴 책이 그렇게 팔리고 또 그런 것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영화를 만들고 하는 것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우리 목사들이 그 동안 성경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서 이런 끔찍한 일이 발생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우리 목사들이 잘못하여서 엉뚱한 피해자를 만들면 천국가서 그분을 어찌볼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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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 D.)
작성에 소요된 시간: (자료 조사를 포함하여) 약 40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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