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십리성당 게시판

혹시 당신은 냉담자가 아니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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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하 [domini0727] 쪽지 캡슐

2005-04-11 ㅣ No.3379

오전, 오후 결혼식에 다니다 보니, 더구나 1시에  아치에스 행사에는 또 빠져서는 아니되고 거기다 병문안까지... 여기저기 뻔질나게 쏘다녔지만 겨우 밤 10시 미사에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신부님 혼자서 5대의 미사를 어떻게 감당하실려고 저러시나 걱정했던 그때의 마음은 그때 잠시 뿐이었고 지금 와서는 "밤 10시 미사가 있으니 얼마나 좋아?"하는 식으로 얌통머리가 없어지니 역시 사람은 남 얘기를 해서는 안되고, 남 탓은 더더욱 해서 는 안되겠구나 싶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길에서 주님을 만나 나사렛예수에 관한 얘기를 하고 가다가 빵을 떼어 나눠주시는 것을 보고서야 동행인이 바로 주님임을 느끼는 순간, 그들 눈앞에서 사라지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그분과 함께 있을 때 우리가 얼마나 행복했던가? 얼마나 기뻤던가?"하면서 고향 엠마오로 가던 발길을 돌려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오늘의 복음을 해설하시던 신부님께서 갑자기 우리에게 물으셨다.

"여러분은 혹시 냉담자가 아니십니까? 주일미사 꼬박꼬박 참석한다고, 묵주기도 열심히 바친다고 해서 나는 냉담자가 아니다 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까?"

신부님의 그 말씀에 갑자기 내 머리 속이 하얘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먼데서 친구들이 와서 7시미사에 갔어야할 시간에 그들과 저녁밥을 함께하며 몇잔 마신 술 때문에 졸릴까싶어서 진한 커피까지 마시고 갔는데도 덜 깼던 술이 일순간에 확 깨는 그야말로 충격적인 말씀이었다.

마치 내 속을 훤히 들여다 보시면서 묻는 말씀 같았다.

 

"모든 것을 하느님 편에서 바라보지 않고 오직 내 눈으로, 내 생각으로만 하느님을 바라보는 여러분이 과연 나는 냉담자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 나는 결코 '아니다'라고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엠마오로 가는 주님의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얼마나 기뻐했는지 얼마나 행복해 했는지, 그 기쁨과 행복을 다시 누리고자 엠마오를 향해 걸어가던 그들이 발걸음을 돌려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걸어가듯이 주님과 함께 함이,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뜨거운 행복이며, 기쁨인지를 우리가 스스로 가슴속에 뜨겁게 느껴야 하는데 그걸 느끼지 못한다면 바로 그 사람들이 곧 냉담자 입니다."

-- '맞아요, 신부님. 저 냉담자 맞아요.' 소리가 내 입에서 저절로 나왔다.

 

"여러분의 생각, 여러분의 눈은 오직 세상 것에만 집착해 있어. 그러기에 세상 것으로 신앙을 재단하고 기도또한 그런 식으로 하고 있는 것이에여."

-- 맞습니다. 신부님. 저는 그랬습니다.

 

"그래요. 여러분이 세상의 물질적인 잣대와 기준으로 하느님을 대하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과 함께 있을 때 그 큰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없는 거에여. 어떻게 하면 하느님 뜻에 합당한 것인가? 즉 보는 관점을 세상 것에 두지 말고 반드시 하느님 편에 놓아야만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이 내게 얼마나 큰 기쁨이며 뜨거운 행복인지를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서야 여러분은 '나는 냉담자가 아니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그래요, 신부님. 뜨겁게 느끼지도 못하는 주제에 주일미사 안 빠졌다고, 하란 기도 몇번 했다고, 주머니 만지작거리면서 요리 재고 조리 재면서 헌금 몇푼 했다고 내 딴에는 열심한 신자라고 자칭했습니다. 그리고 대죄 지은 게 없다고 요즘엔 고백성사 볼 꺼리가 없다고 교만 떨었던 이 죄인, 모든 것을 세상의 것들로 기준을 정하고  세상의 것들로 자를 잰 이 불쌍하고 우매스런 죄인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되돌아 가듯이

어젯밤 늦게 신부님한테서 실컨 야단맞고 돌아오는 밤길이

그래도 나에겐 다른 날보다 한결 행복하게 느껴졌다.

좋은 말씀 주셔서 고맙습니다. 신부님. 건강에 항상 유의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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