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레지오

2006년 11월호 <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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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마리애 [legio] 쪽지 캡슐

2006-10-26 ㅣ No.71

 

1.삶과 죽음의 길에서 머뭇거리며

 

삶과 죽음의 길은 / 여기 있음에 머뭇거리고 / 나는 간다는 말도 / 못다 하고 가는가 / 어느 가을 바람에 / 여기저기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 같은 가지에 나고서도 / 가는 곳을 모르겠구나 / 아아! 극락세계에서 만나 볼 내가 / 불도를 닦으며 기다리겠노라.(제망매가)


서방정토(극락)에서의 만남을 기약함으로써 누이의 죽음을 종교적으로 승화시킨 월명사의 죽음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를 볼 수 있는 시(향가)이다.


뜻밖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시퍼렇게 어린 자식을 앞세우는 부모들, 그리고 사랑하는 배우자를 앞세우는 연인들 가슴에 피멍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요, 어떤 위로도 그들의 슬픔 앞에서는 위로가 되지 않고 공허한 울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죽은 이가 남기고 간 그리움의 향기는 새록새록 피어나 산 이를 미치게 만들지 않는가? 그리움의 잔영은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일 수도 있다. 이럴 때가 하늘에 삿대질이라도 하면서 하느님을 원망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아니겠는가?


ꡒ하느님, 내가 얼마나 봉사를 많이 했는데요,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데, 왜요? 나의 아내를, 왜 내 자식을, 왜 내 남편을, 왜 하필 나를 벌써 데려가시렵니까? 왜요? 왜죠? 무엇 때문이지요? 하느님, 내 기도는 왜 안 들어주시는가요? 하느님! 정말 당신이 계신가요?ꡓ라고 패악을 떨 수도 있고 신앙의 원초적인 부분까지 흔들려 냉담할 수도 있는 상황이 되기도 한다.


월명사는 누이의 죽음을 종교적인 힘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월명사는 도를 닦아 극락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열심히 이 땅에서 살아갈 것임을 스스로 다짐하면서 시의 대미를 장식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톨릭 신앙인이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서 답을 찾아낼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ꡒ나는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ꡓ(필리 3,10-11)라고 고백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죽음을 구원과 생명의 원천으로 변화시키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저주스럽고 치욕스러운 십자가상의 죽음을 맞이하시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심으로써 영원한 삶의 맏배가 되심을 증명해 주셨다. 예수님의 부활로 그리스도인은, 죽음이 결코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으로 옮겨가는 과정이며 우리도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갖게 된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인간적인 고통과 슬픔을 제거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 고통과 슬픔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것이 ꡐ모든 성인들의 통공ꡑ을 믿는다는 고백일 것이다. 우리가 기도, 선행, 희생 등으로 쌓은 공을 다른 성도를 위해서 양보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ꡐ지상교회ꡑ의 성도들끼리 서로 육신과 영혼에 필요한 은혜를 받도록 하기 위해 ꡐ통공ꡑ을 행할 수 있고, ꡐ지상교회ꡑ의 성도가 ꡐ연옥교회ꡑ의 성도를 위해 공을 쌓음으로써 그들이 받아야 할 잠벌을 면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니 위령성월을 보내는 우리가 먼저 이 세상을 떠난 가족과 동료 단원들을 위해, 버림받고 잊혀진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는 레지오 단원이 되자!

_권대섭 요셉 단장

 


2. 영원히 사는 죽음인가, 영원히 죽은 삶인가?

 

성당 일대에 수북히 쌓인 낙엽을 밟으면서 또다시 한 해가 저물어가는 것을 체감합니다. 교회력 또한 2006년의 마지막을 예고하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사색과 묵상에 잠기게 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이라면 누구든지 잘 살고 잘 죽기로 작정하여 사는 이들이라고 하겠지만, 특별히 위령성월은 더욱 열심히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하고, 또 자신의 삶과 죽음을 깊이 체현하며 사는 한 달이라 할 것입니다. 더욱이 ꡐ한평생 싸움이 끝난 다음 저희 레지오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주님의 사랑과 영광의 나라에서 다시 모일 수 있도록ꡑ 간절히 열망하며 ꡐ기도하고 공부하며 활동하는ꡑ 레지오 단원들에게는 참으로 은혜롭고 특별한 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인간의 생애란 그 첫출발부터 순간순간 죽음의 시간들을 재촉하며 사는 아이러니에서 비롯된다고 할 때, 인간에게 가장 시급하고 절실한 일이란 결국 ꡐ사느냐 죽느냐ꡑ문제일 것입니다.

지나간 해의 신문철을 들춰 보면 어느 하루인들 사고가 없는 날이 없고 죽음에 관한 기사가 없는 날이 거의 없습니다. 그만큼 삶이 어렵고 각박하며 죽음 또한 쉽게 부딪쳐 오는 현실이 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종류가 많은 것도 많지만 죽음의 양상 역시 얼마나 천태만상입니까. 사람 얼굴이 저마다 다른 것처럼 각기 다르게 죽어가고, 시대의 변천에 따라 죽음의 유형도 변모된 것 같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요. 지금 나는 어떻게 죽어가고 있으며, 어떻게 어느 정도로 살아있는 것인지 자못 안쓰럽고 안타깝습니다.

많은 이들의 경우 ꡐ죽을 시간ꡑ도 없을 만큼, 사는 데 몹시 바쁘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삶에서 얼마나 많은 계획과 일들을 다음으로 미루며 살아갈까요?  누구든지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될 때 근심하고 불안해하며 초조해질 것입니다.

종종 신문이나 방송, 각종 매체를 통해 순교자들을 비롯한 순국열사들의 장한 삶과 죽음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앞서간 선대 의인들은 어쩌면 그토록 죽음을 앞둔 최후의 순간들을 의연하고 당당하게 맞이할 수 있었을까요. 세월이 흐름에 따라 순교자와 배교자도, 애국자와 매국노도, 충신과 변절자도 모두 이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누가 옳고 그른지 또한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 시간과 역사는 명명백백 판별해 줍니다. 실로 배교자와 배신자들이 당장에는 죽지 아니하고 떵떵거리며 천년만년 잘살 듯 비치지만 세월과 더불어 지금 그들의 존재, 그들의 이름, 그들의 자리는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반면에 순교자와 애국애족하신 분들은 그 당시에는 죽은 삶이었던 듯 보여졌지만 지금 이 순간에 역사 속에, 우리들의 삶의 자리 한복판에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그들 의로운 이들은 자유와 진리와 정의 편에서 살고 죽었습니다. 순교자들은 그리스도 님의 죽음 안에서 세례받은, 부활한 그리스도 님의 운명(로마 6장)을 살았기에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 그리스도 님과 함께 영원히 산다는 메시지가 되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인간이란 누구든, 어떤 모습으로 죽어가든 결국 죽는 듯하지만 영원히 ꡐ사는 죽음ꡑ을 맞이하거나, 아니면 잘 사는 듯하지만 마침내 허망해질 수밖에 없는 ꡐ죽은 삶ꡑ에 얽매어거나 하는 두 갈래 갈림길에서 삶과 죽음을 동시에 맛보며 살아가는 존재라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첫째 아담의 범죄로써 이 세상 전 인류에게 죽음을 가져왔지만 둘째 아담에 의하여 새로운 생명이 주어졌습니다(로마 5,17-21). 이것은 죽음을 극복한 하느님의 은총이요 선물인 것입니다. 새 아담 예수 그리스도 님은 피땀이 흐르도록 오뇌하며 머리에서 발끝까지 아니 찢기고 터진 데 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지만 죽음을 이기고 영원히 사셨습니다. 수많은 성인들과 순교자들이 그리스도 님처럼 살다가 죽어갔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들 역시 새 아담 그리스도 님처럼, 순교자들처럼 -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죽음을 넘어서 영원히 사는 길을 따라 - 그렇게 살며 죽어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의 죽음을 보며 천상영복을 빌 때마다 자기 자신의 삶과 죽음도 동시에 바라보며 ꡐ나는 영원히 사는 죽음을 맞이하려는가, 아니면 영원히 죽은 삶을 의식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ꡑ 스스로 깊은 성찰과 묵상을 해야 합니다.

_최홍길 레오 신부

 


3. 주님의 사랑이 이끄시는 대로

 

우리는 하느님의 도구로 살아가면서 복음을 전파하고 주님이 가신 길을 따르려고 레지오 단원으로서 열심히 기도와 활동을 합니다. 그러면서 때때로 보람을 느끼며 만족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끔 우리의 나약함을 자극하는 일들이 생기게 됩니다. 때로는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때로는 ꡐ내가 왜 레지오를 하고 있는가?ꡑ라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ꡐ지금 하고 있는 간부직책만 끝나면 레지오를 그만둘까?ꡑ 이런 유혹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엄청난 악의 유혹이 도사리고 있으며, 엄청난 은총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 삶의 매 순간순간이 이런 갈림길 앞에 놓여 있습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나약한 우리의 삶에서 어느 한순간도 외면하신 적이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그분의 손길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 자기의 입장에서만 보려고 하기에 주님의 손길이 언제 어느 순간에 나에게 다가왔는지를 모르고 놓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좌신부였을 때 ꡐ나는 잘하고 있는데 왜 아이들이 잘 따르지 않을까?ꡑꡐ나는 잘 준비하였는데 왜 교사들과 호흡이 잘 맞지 않을까?ꡑ하고 생각했었는데, 그러한 저의 모습을 성찰하면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였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판단을 내렸던 것입니다. ꡐ나는 항상 칭찬을 받아야 하고, 나는 항상 잘해야 한다. 내가 하는 일은 항상 잘될 거야.ꡑ 등등의 착각에 빠져서 지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사를 드리던 제 등 뒤에 십자가가 느껴졌습니다. 몇몇 사람들의 칭찬과 호의에 현혹되어 자기 잘난 줄로만 생각했던 저의 모습이 부끄럽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초라한 모습 뒤에 주님이 계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서 참으로 불쌍한 듯이 저를 바라보시는 것이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완성되지 않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아직 우리는 하느님의 완전함과 거룩함에 일치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의 착각에서 벗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각자가 자신의 착각 속에 머물지 말고, 애벌레가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되듯이 착각의 허물을 벗고 하느님 앞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의 주님 앞에서 부끄럽고 초라한 우리의 모습을 올바로 바라봅시다.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며 겸손된 모습으로 살았던 바오로 사도의 모습을 기억합시다. ꡒ우리가 무엇이길래 이토록 사랑하십니까?ꡓ 하고 고백했던 시편 저자와 같이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주님의 십자가 아래서 우리 자신을 봉헌합시다.

우리 안에 흘러넘치는 하느님의 사랑을 감사와 찬미의 기도로 응답합시다.

그리고 주님의 참된 도구로 다시 일어서는 레지오 단원이 됩시다.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이끌어줄 것입니다.


준주성범 2권 11장: 예수의 십자가를 사랑하는 사람이 적음

1.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천국은 많이 찾으나, 그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은 적다. 그의 위안을 받으려는 자는 많으나, 어려움을 참아 가려는 자는 적다. 예수의 제자들처럼 그와 같이 음식을 나누려는 자는 많으나, 그와 같이 재를 지키려는 사람은 적다. 누구나 다 그와 같이 즐기려 하지만, 그를 위해서 무엇을 참아 견디려고 아니한다. 예수를 따라 떡은 나누어 먹으려 하지만, 그 수난의 잔을 마시려는 사람은 적다. 그가 하신 업적은 존경하는 자 많지만, 그 십자가의 모욕을 따르려는 자는 적다. 많은 사람은 어려운 일이 없을 때까지는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어떤 위안을 받을 때까지는 그를 찬양하나, 예수께서 잠시 숨어 그들을 떠나시면 그들은 혹은 원망하고 혹은 실망에 떨어진다.

2. 그러나 예수를 사랑하되 그를 위해서 사랑하고 무슨 위안이나 받으려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어렵고 고통이 심한 때라도 큰 위안을 받는 때나 다름없이 예수를 찬양한다. 예수께서 그에게 전혀 위로를 주시지 아니해도 그는 예수를 언제나 찬양하고 그에게 언제나 감사한다.

3. 오! 예수를 사랑함이 자기 유익이나 자기 사랑에 기인하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얼마나 깨끗하랴. 사랑에서 언제나 위안만 찾으면 그것은 품팔이하는 격이 아니냐. 언제나 자기 편리나 유익만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증거가 아니겠느냐. 아무 보수 없이 하느님을 섬기려는 사람을 어디서 만나보겠는가.

_윤병길 신부

 

 


4. 성모님을 알게 됨

 

성모님과 확실하게 친밀함을 이룰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교회의 전례에서 성모님의 축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전례를 받아들이시고 따르신 것처럼 그리스도 신비체, 즉 교회 안에서 교회를 통하여 주님의 어머니이시면서 우리들의 어머니가 되시는 분에 대해서 가르치시는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을 때 큰 은총이 있습니다. 성모승천대축일에 우리들은 그분의 영광 속에서 성모님을 만나게 됩니다. 천국에 사시는 성모님이 우리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성모님은 이미 이승에 계시는 분이 아니지 않은가? 나는 여기서 세 가지 방법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이 방법으로 성모승천대축일은 우리들에게 크나큰 은총의 샘이 될 수 있습니다. 


첫째, 이 축일은 하느님께서 우리들 각자를 위해 예비하신 최후의 운명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들은 이승에서의 행복이, 가끔 아무리 좋고 즐거운 것일지라도 그것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피조물은 아닙니다. 우리들은 사람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어떤 한계를 뛰어넘는 방법으로 또 영원한 행복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 성하께서는 성모승천대축일에 관한 말씀 중에 이렇게 강조하셨습니다. ꡒ성모 마리아는 모든 신자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이시고 힘이 되어주시는 분이시다. 성모님은 삶의 본질은 지상의 것이 아니라 천상의 것을 찾고 그리워해야 하는 것이라고 우리를 깨우치신다(콜로 3,2). 천국은 이승의 우리들이 가고 있는 순례여정에서 진정한 종착점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천국을 지향하는 마음으로 살 때 이승의 삶은 그것대로 가치를 갖는다. 왜냐하면 하느님 사랑의 영원한 진리가 이승의 우리를 비추기 때문이다.ꡓ

레지오 단원인 우리들은 레지오의 중심적 사명이, 영원한 삶이 진정 무엇인지 서로서로와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 되새기게 하고 그들을 도와서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임을 잊지 맙시다.

둘째, 성모승천대축일을 맞이하면서 우리들은 성모님을 통하여 이승에서의 갖가지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즉 우리가 성모님과 함께할 때 우리들 본래의 허약함과 악함을 궁극적으로 극복 승리할 수 있음을 알아야겠습니다. 우리들은 성모님 안에서 성모님을 통하여 결국 완전한 승리를 얻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종류의 의심도 없습니다.

셋째, 완전한 개인적 인성을 가지신 성모님의 승천대축일을 맞이하면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그분의 모성이 극상(極上)의 아름다움으로 완성 실현되었음을 우리들이 기뻐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그리스도 예수에게 속한 우리들을 단순히 신앙을 통하여 만나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직접 보시는, 드러나거나 감추어진 우리 삶의 갖가지 모습, 상황과 국면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만나십니다.


앞서 말한 내용을 정리하는 의미로 베네딕토 16세 교황 성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 훈화를 마치고자 합니다.

ꡒ우리 삶의 조건을 현저하게 개선하기는 했어도 과학과 기술이 인간 정신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지 못한다. 사랑이신 하느님의 신비에 마음의 문이 열려 있을 때만 진리와 행복에 대한 목마름이 해소될 수 있다. 영원의 세계를 바라볼 줄 아는 사람만이 이승에서의 삶에 가치를 가질 수 있다. 특히 무엇보다도 인간의 도덕적인 취약성, 질병으로 인한 고통과 죽음의 신비를 바르게 이해한다. 천상의 영광 중에 있는 성모님을 묵상하면 우리는 이승이 제일 좋은 고향이 아니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또 우리가 영원의 선(善)을 지향하는 삶을 산다면 어느 날 우리도 성모님처럼 천상의 영광에 동참하게 되리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겪는 일상의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언제나 평정심과 마음의 평화를 잃어서는 안 된다.ꡓ

우리 레지오 단원들은 이웃들과 일상에서 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마리아의 승천대축일이 우리와 그들에게 무슨 의미를 갖는지 알려야 합니다. 성모승천대축일은 우리들에게 엄청난 희망의 샘(源泉)이며 희망의 분명한 표지(標識)입니다.

_맥그리거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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