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북한관련

북 "남측 편리한 날 상봉" 백지수표 보내왔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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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규 [vegabond] 쪽지 캡슐

2014-01-27 ㅣ No.10155

날씨가 좀 풀린 다음" 단서 달아
내달 한·미 훈련 빌미 판 깰 수도
정부, 17일부터 상봉 제의 방침
박 대통령 “북 유화 뒤 도발” 경계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미 공화당의 유력 대선주자인 마르코 루비오 상원의원(가운데)을 만났다. 박 대통령은 이날 “북한이 한반도의 평화를 원한다면 무엇보다 한반도 평화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핵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왼쪽은 성 김 주한 미국 대사. [청와대 사진기자단]

정부는 27일 설 명절 계기 이산가족 상봉행사 문제를 협의할 남북적십자 실무접촉을 이번 주 내 갖자고 북한에 제의할 방침이다. 정부 핵심 당국자는 26일 “상봉 실무 절차 논의뿐 아니라 북측의 진의 파악 등을 위해서는 양측의 대면이 필요하다”며 “조속한 상봉을 위해 설 명절 연휴(1월 31일~2월 2일) 이전인 이달 28~29일께 적십자 실무접촉이 시작돼야 한다는 게 정부 판단”이라고 밝혔다. 접촉에는 이덕행(통일부 통일정책협력관) 대한적십자사 실행위원을 수석대표로 한 대표단이 참석할 예정이다. 또 북측과의 협의를 거쳐 상봉장인 금강산 지역에 통일부 당국자를 비롯한 시설점검단을 조속히 파견해 현지 이산가족면회소와 숙소의 난방과 전력·급수 등 설비를 보수토록 한다는 계획이다.

 이산상봉 시기와 관련해 정부 당국자는 “북한이 ‘백지수표’를 보내 왔지만 우리가 일방적으로 액수를 채워 넣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백지수표’란 북한 적십자회가 “설이 지나 날씨가 좀 풀린 다음 남측이 편리한 대로 정하는 게 좋을 것”(24일·대남통지문)이라고 한 대목을 의미한다. 당국자는 “북측이 설 명절을 지난 시기 어느 때라도 정해도 좋다는 식으로 말하면서도 ‘날씨가 좀 풀린 다음’이란 단서를 단 게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혹한과 폭설이 잦은 금강산 상황을 고려할 때 ‘풀린 날씨’는 3월 이후를 의미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북한은 박근혜 대통령의 설 이산상봉 제안(6일 신년 기자회견)을 9일 거부하면서 “좋은 계절에 마주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정부와 대한적십자사가 조기 상봉을 추진하는 건 다음 달 24일 시작될 ‘키 리졸브(Key Resolve)’와 독수리(Foal Eagle) 한·미 합동군사연습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시기를 늦췄다가는 북한이 합동군사연습을 빌미로 상봉 합의를 또다시 깨버릴 수 있다는 우려다. 북한 조국평화통일위는 지난 9일 통지문에서 “곧 대규모 합동군사연습이 벌어지겠는데, 총포탄이 오가는 속에서 흩어진 가족·친척 상봉을 마음 편히 할 수 있겠는가”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런 분위기를 읽은 통일부는 다음 달 17일께부터 엿새간 남북한이 선발한 각 100명이 각기 사흘씩 순차적으로 두고 온 가족을 상봉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 당국자는 “27일 대북전통문을 보낼 때 우리가 희망하는 상봉 날짜를 명시할지 아니면 적십자 실무접촉 때 북한에 직접 날짜를 제기할지를 놓고 막판 검토 중”이라고 귀띔했다.

 국방부는 북한이 한·미 군사연습을 ‘평양 타격훈련’이나 ‘핵 공격’으로 선전·선동하고 나서자 다음 달 초 훈련 일정과 목적 등을 북한과 중국 군부에 통보할 예정이다. 군 관계자는 “이번 훈련의 경우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함이 정비 때문에 불참하고 전략폭격기도 오지 않는 등 예년보다 수위가 낮아졌는데도 북한이 집요한 비난전을 전개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의 이산상봉 호응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신중한 접근을 하는 건 올 초부터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의 속내가 불분명한 강온 양면전술을 펼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1일 신년사에서 ‘북남 관계 개선 분위기’를 언급한 김정은은 16일에는 상호 비방·적대행위 중단 등의 유화제스처를 보였다. 하지만 대남 침투부대의 야간훈련 현장을 찾아 독려하는 등 도발행보도 드러내고 있다. 자신들의 평화공세가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 무력도발을 감행할 수 있다는 대남 압박이란 분석도 제기된다.

 박근혜 대통령도 이런 김정은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언급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25일 마르코 루비오 미 상원의원을 접견한 자리에서는 “북한이 최근 갑자기 유화적인 선전공세를 펴고 있는데, 과거 경험으로 보면 항상 그런 공세를 편 뒤 도발이 있거나 말과 행동이 반대로 가는 경우가 있어 왔다”고 강조했다. 또 “이제는 말보다 행동”이라며 북한의 진정성 있는 실천을 촉구했다. 정부 당국자는 “박 대통령이 신년회견 때 이산상봉을 ‘남북 관계의 첫 단추’로 제시한 만큼 향후 북한의 순조로운 상봉 호응 여부가 정부의 대북 접근 속도와 폭을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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