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동성당

[연중 제16주일]외딴 곳 (마르코6,3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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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8-07-22 ㅣ No.115

 

 

[연중 제16주일]외딴 곳 (마르코6,30-34).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살아남은 양들을 다시 모아들여 그들이 살던 땅으로 데려오시고, 그들을 돌볼 목자를 세워 주시리라고 한다.(예레 23,1-6).

1 불행하여라, 내 목장의 양 떼를 파멸시키고 흩어 버린 목자들! 주님의 말씀이다.
2 ─ 그러므로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내 백성을 돌보는 목자들을 두고 말씀하신다. ─
너희는 내 양 떼를 흩어 버리고 몰아냈으며 그들을 보살피지 않았다. 이제 내가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벌하겠다. 주님의 말씀이다.
3 그런 다음 나는 내가 그들을 쫓아 보냈던 모든 나라에서 살아남은 양들을  다시 모아들여 그들이 살던 땅으로 데려오겠다. 그러면 그들은 출산을 많이 하여 번성할 것이다.
4 내가 그들을 돌보아 줄 목자들을 그들에게 세워 주리니,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그들 가운데 잃어버리는 양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5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6 그의 시대에 유다가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살리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시고, 그분께서는 당신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셨다고 한다. (에페 2,13-18).

13 이제, 한때 멀리 있던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느님과 가까워졌습니다.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15 또 그 모든 계명과 조문과 함께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16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17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18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고 외딴 곳으로 가셨는데, 거기서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신다. (마르코6,30-34).

그때에 30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3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32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33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연중 제16주일 제1독서(에레23,1~6)

 

"불행하여라, 내 목장의 양 떼를 파멸시키고 흩어 버린 목자들! 주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내 백성을 돌보는 목자들을 두고 말씀하신다. 너희는 내 양 떼를 흩어 버리고 몰아냈으며 그들을 보살피지 않았다." (1~2ㄴ)

 

남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게 될 심판의 원인과 결과를 강조한 12개의 단편 예언수록된 예레미야서 제2장~25장 중에서, 예레미야서 23장 1절부터 8절까지는 아홉번째 예언 속한다.

남부 유다의 왕가에 대한 예언이 수록된 예레미야서 21장 1절~23장 8절의 마지막 단락을 이루고 있다.

 

앞선 에레미야서 21장, 22장에서는 치드키야, 살룸(여호아하스),여호야킴, 콘야(여호야킨 혹은 여콘야)등 남부 유다 왕국 마지막 통치기의 인물들이 직접 거명되는데, 이들의 죄악상과 더불어 그들 각각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가 제시되었다. 

그리고 그 심판의 메시지는 각각의 왕들 개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과 남부 유다 왕국과 유다 백성들 모두에 대한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특별히 마지막 부분에는 여호야킴의 아들 콘야의 자손들 가운데에서 남부 유다를 다스릴 왕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예언되었다(예레22,30).

 

이 콘야 왕은 당시 남부 유다 백성들에게 다윗의 계보를 잇는 정통성있는 왕으로 여겨졌으므로, 이같은 메세지는 남부 유다 왕국에 아무런 희망을 찾아볼 수 없다는 매우 절망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남부 유다 왕가에 대한 예언을 마무리하는 예레미야서 23장 1절 이하 8절에서는 분위기가 완전히 전환되어 남부 유다 백성들에게 매우 희망적인 메시지 전달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예레미야서 21장, 22장과 달리  예레미야서 23장에서는 남부 유다 백성이 이제까지 백성들을 잘못 인도한 여러 유다 왕들과 공동 운명체로서 다루어지지 않는다. 

심판은 유다 민중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한 각각의 왕들에게 주어질 것이며(1~2절), 포로로 잡혀간 선민들은 귀환하게 되고,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왕 세워주실 것이라고  예언된다(3~4절).

 

그리고 이어지는 예레미야서 23장 5,6절 단락에서는 이 새로운 왕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예레미야서 23장 7,8절 단락에서는 장차 도래할 포로민의 귀환과 남부 유다 왕국의 회복을 확증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인간의 패역부도와 죄악에도 불구하고 주도적인 권한으로 역사하시고 자비와 은총으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면모를 드러내 보여주며, 보다 거시적인 구원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모든 성도들의 참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예표하고 있다고 하겠다. 

 

'내 목장의 양 떼를 파멸시키고 흩어버린 목자들!'  

본문은 하느님의 저주와 심판의 대상 밝히고 있다. 이것을 나타내는 '목자들'에 해당하는 '로임'(roim)'목자'라는 의미를 가진 '라아'(raah)의 복수형이다. 

'목자들'이라는 의미로서 남부 유다 말기의 왕들, 특별히 에레미야서 21장, 22장에서 언급된 네 명의 왕들 더불어 예레미야 예언자 당대의 왕국 관료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한 국가의 왕을 '목자'로 나타내는 것고대 근동에서 드문일은 아니었다. 특별히 목축업과 상당히 많은 권력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에게 '목자'라는 단어는 보호와 인도와 돌봄의 이미지를 피부로 느낄 수 있게 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치는 가축과 동고동락하면서 그들을 잘 돌보는 역할을 하는 목자의 이미지는 하느님의 양 떼를 불행의 길로 인도한 남부 유다의 왕들과 대조되면서 그들이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목자들이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이유인 목자들의 행태두 가지 동사로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각각 '파멸시키고''흩어버린'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이 중에서 '파멸시키고'에 해당하는 '메압베딤'(meabbedim)의 원형 '아바드'(abad)'죽다', '사라지다'라는 의미이며, 본문에서처럼 강조형으로 쓰일 경우 '죽게 하다', '멸망케 하다'라는 사역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흩어버린'에 해당하는 '우메피침'(umephitsim) '푸츠'(phuts)의 사역형으로서 '널리 흩어 보내다', '몰아내다', '쫓아내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전쟁에 패하여 뿔뿔이 흩어지는 것(2열왕 25,5)과 더불어 이방 땅으로 포로로  끌려가는 것(느헤1,8)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결국 이 동사는 남부 유다 왕국의 왕들이 패전으로 인한 백성들의 죽음 남부 유다 왕국의 멸망 남부 유다 백성들의 바빌론 유배의 원인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왕들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 평가와 대조적으로 남부 유다 백성들을 상징하는 '양 떼'에 대해서는 '내 목장의'라는 표현으로 수식하고 있다.

여기서 사용된 1인칭 접미어 즉 '나의 소유'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표현은 남부 유다 백성들이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특별한 백성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5ㄷ) 

본문은 하느님께서 남부 유다에 새로운 왕을 세우실 것이라는 사실은유적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사용된 '싹'에 해당하는 '체마흐'(tsemah)나무 줄기나 땅에서 새롭게 돋아나는 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이사야서에서 두 번 사용되었는데(이사4,2; 61,11), 특히 이사야서 4장 2절의 문맥에서 본문의 예언과 동일하게 장차 하느님의 나라를 이끄실 메시아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또한 즈카리야서 3장 8절과 6장 12절에서도 이 용어의 사용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것은 이 표현이 이상적인 왕 메시아를 나타내는 전문 용어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처림 메시아께서 한 싹으로 나신다는 비유 두 가지 의미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이전의 왕들과 전혀 다른 왕이 될 것이라는 사실과, 또 하나는 남부 유다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느님의 주도적인 능력에 의해 새로운 왕이 나타나실 것보여준다고 할 수 이다. 

사실 남부 유다 왕조의 역사는 패역부도한 인간의 본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역사로서 인간 왕에게는 어떤 기대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여호야킨이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바빌론 땅에서 그 삶을 마무리하고, 그나마 왕으로 세워진 치드키야 마저 바빌론으로 끌려갔을 때, 다윗 왕조는 완전히 끝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왕조가 완전히 끊어져 버린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과거에 있었던 패역부도한 이런 왕들의 흐름을 끊고, 새 역사를 창조해 나갈 진정한 왕을 세워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와 관련해 세례자 요한의 부친 즈카리야는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다윗 집안에 일어날 메시아의 탄생을 예언한다(루카1,69.78.79).

 

 

 연중 제16주일 복음(마르6,30~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34)

 

여기서 '목자'로 번역된 '포이메나'(poimena; a shepherd)'포이멘'(poimen; 1베드2,25)의 목적격 단수이다. 

신약에서 '포이멘'(poimen)이 여기처럼 단수형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거의 다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마태26,31; 히브13,20).

 

하지만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목자'예수님처럼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진정한 지도자를 뜻한다. 

당시 군중들을 인도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 즉 당시에 존경받던 랍비들이나 말씀을 가르친 율법학자들은 참된 의미의 목자가 아니었다.

 

마르코 복음 6장 34절(ㄴ)에서 동사 두 개하나는 직설법으로 쓰였고, 다른 하나는 분사로 쓰였다. 

'목자 없는''없는'분사로 쓰인 '에콘타'(echonta; having)의 시제는 현재이며, '같았기 때문이다''같았기' 직설법으로 쓰인 동사 '에산'(esan; they were)시제는 미완료 과거이다.

 

이것은 벳사이다 들판에 몰려든 큰 군중들이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목자 없는 양들 같은 삶', 즉 참된 영적 지도자를 만나지 못한 채 목적없이 방황하는 삶을 살아 왔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그들에게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은 더더욱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군중들에 대한 예수님의 애끓는 감정을 묘사한 단어가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이다.

 

여기서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에 해당하는 '에스플랑크니스테'(esplangchnisthe; was moved with compassion) 원형 '스프랑크니조마이'(splagchnizomai)'창자' 혹은 '내장'을 의미하는 '스플렌'(splen)에서 유래했다. 

당시 사람들은 인간의 마음이 내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으며, 그래서 이 용어는 인간의 감정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특히 사랑이 전제되어 상대에 대해 주체할 수 없는 애끓는 '측은지심'(연민의 정; 동정심)의 마음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마태9,36).

이것은 이 용어가 루카 복음 15장 20절에서 집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돌아오는 아들이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아들임을 알아채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는 아버지가 가졌던 마음을 묘사하는 데도 사용되었다는 점에서도 잘 나타난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도 바로 이같은 도무지 주체할 수 없는 애끓는 사랑의 마음이 불타올랐기 때문이다. 

복음 선교와 선행과 치유의 밑바닥에는 이같은 측은지심이 깔려 있어야 하고, 전제되고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목자 없는 양들 같은, 군중에 대한 측은지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신다. 

여기서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가르쳐 주기'에 해당하는 '디다스케인(didaskein; to teach; teaching)현재형으로서, 그 가르침이 쉬지 않고 계속 베풀어지고 있었음을 나타낸다(마르6,35).

 

그리고 본문과 병행 구절인 루카 복음 9장 11절에서 이 가르침이 '하느님 나라'관한 것임을 말해 주고 있으며, 여기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목자로서의 첫번째 행위가 '가르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병행 구절인  마태오 복음 14장 14절에서는 병자들을 고쳐 주신 것으로 되어 있고, 루카 복음 9장 11절에서는 말씀과 치유가 둘 다 언급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목자로서 자신을 찾아온 가엾은 양들에게 영적 양식과 육적 회복을 다 베푸셨던 것이다.

 

 

[연중 제16주일 분당 요한성당 21시미사](2016.7.17.일) / 대성전 꽃꽂이 등 22장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지난주일 예수님께로부터 파견 사명을 받은 뒤, 복음 선포 활동을 하였던 제자들은 오늘 예수님께 돌아와서 자신들이 한 일과 가르친 내용들을 자랑스럽게 보고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말 한마디에 마귀가 복종하고, 병자가 치유되는 모습을 보며 놀랐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하느님의 권능에 두려움을 느꼈을 테고, 또 누군가는 그것이 마치 자신의 능력인 듯 착각에 빠져 사람들 앞에서 우쭐대는 마음도 가졌을 법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전한 모든 가르침과 그들이 일으킨 기적들은 자신들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에 힘입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이 의미를 깨닫고, 감사드릴 수 있는 시간을 가지기를 원하셨으며, 그렇기에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라고 말씀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외딴곳에서의 쉼’이란... 여장을 풀어 헤치고, 마냥 축 늘어져 쉬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일치된 삶을 살기 위한 기도의 시간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숨가쁘게 행하신 복음 선포의 여정 중에도 늘 한적한 곳에 따로 물러가셔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신 모든 일들이 당신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허락해주심에 감사드리고, 또 다가올 일들 역시 당신을 파견하신 아버지와의 일치 안에서 능히 해낼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셨던 겁니다.

 

우리들도 지난 한 주간 각자 삶의 자리에서 복음의 가르침을 충실히 살아왔고, 또 새로운 한 주간의 삶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들에게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라며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외딴 곳은 어디일까요?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성체를 모시기 위해 모인 지금 이곳이 우리 삶의 외딴곳은 아닐런지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마련하여 주신 이 시간... 복잡한 생각들은 잠시 여며두고, 주님 안에서 참된 일치를 이루는 시간이기를 바라며 기도합니다.


 송홍영 스테파노 신부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2012년 7월 22일 연중 제16주일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경제 구조는 생산 능률과 효용성을 최고의 가치로 삼습니다. 모든 것을 자본으로 환산하다 보면 복음의 가치들도 물질적 척도로 평가되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속성을 잘 아셨습니다.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전한 복음은 물질적 평가와 보상의 대상은 아니었지만, 군중은 가난한 이가 부를 얻고, 병든 이가 치유되고, 불의한 재판의 결과가 공정하게 바뀌기를 기대하며, 복음이 세상 속에서 내는 효과를 직접 느끼고 싶어 한다는 점을 말입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기대감이 커질수록 복음이 지닌 내면의 가치는 사라집니다. 예수님께서 맡기신 복음 선포는 능률과 효용성의 문제가 아니라 내적 평화와 자유의 길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느님 안에 ‘쉼’을 통해 그것을 깨닫도록 초대하십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신성한 노동이 고된 노역으로 전락하고, 기쁜 봉사가 피하고 싶은 의무감으로 느껴질 때, 내가 선택한 삶이 잘못된 판단처럼 여겨지고, 희망찬 내일이 두려운 미래가 되는 불안감에 빠질 때, 우리는 잠시 외딴곳에서 쉬면서 물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평화와 자유, 내가 가진 재물과 세속적 권력이 누군가의 희생이나 나의 위선과 기만으로 얻어진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서로 다른 가치와 이념으로 갈라져 적대하며 살아가는 현실은 물론, 우리가 지닌 내적 모순을 십자가를 통해 화해시키시어 새로운 인간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라고 고백합니다. 흩어진 양들을 이끌어 줄 목자가 세상의 공정과 정의를 이루어 줄 그날이 올 것임을 확신한 예레미야 예언자의 굳은 믿음과 바오로 사도의 고백을 깊이 묵상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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