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동성당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
---|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하느님께서는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죽음도, 삶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제1독서 (지혜3,1-9)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는 떠니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1~4) 지혜서는 히브리어 성경에는 포함되지 않고, 칠십인역(LXX; Septuaginta; 희랍어로 쓰여진 성경)에만 나오므로 제2경전(개신교에서는 외경)으로 분류한다. 제 2경전에서 처음으로 그리스어(희랍어; 헬라어)로 저작된 책은 지혜서와 마카베오 하권뿐이다. 지혜서의 저작 연대는 B.C. 50~30년경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살던 유다인이 쓴 것으로 보인다.
유다교 사상가 필론에 의하면, A.D.1세기 초에 이집트에는 100만명이 넘는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좀 과장된 숫자이겠지만, 이집트의 디아스포라(Diaspora; 흩어진 유다 백성들; 각 나라에 흩어져 사는 유다 교포들이 사는 곳을 말함)유다인들이 상당히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지혜서는 철학, 윤리, 신학, 역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제기된 갖가지 주제들을다룬 소품 모음집이다. 저자의 집필 목적은 이집트의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이 헬레니즘 문화가 압도하는 대도시 알렉산드리아와 그 부근에 살면서, 어떻게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다. 동시에 유다교의 정통교리를 다른 문화에 어떻게 적용하고 발전시킬 것인지를 끊임없이 모색하는 토착화(inculturation)작업의 일환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지혜서 저자는 유다교 전통을 거의 모르는 그리스인들과 저자 자신처럼 히브리어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헬레니즘에 익숙한 유다인들 에게 그리스 문화와 사상과 비교하여 유다교 관습과 사상이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헬레니즘에서 기원한 우상 숭배와 물질주의적 인생관에 맞서 유다교의 전통적 믿음과 교리를 수호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일깨워 준다. 지혜서는 크게 세 부분, 종말의 숙고(1~5장), 지혜의 찬가(6~9장), 역사의 숙고 (10~19장)로 나눈다. 첫째, 종말의 숙고(1~5장)에서 저자는 하느님의 전지하심을 강조한다. 둘째, 지혜의 찬가(6~9장)에서 임금과 권력자들에게 하는 권고, 7장 22~23절에 나오는 지혜의 정신에 담긴 정신의 특성 21가지(완전을 뜻하는 7의 3배수=매우 완전한 숫자), 지혜를 청하는 기도(9장)등이 나온다. 마지막 세째 부분(10~19장)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반성이다.
지혜서 10장에서는 원조들과 성조들의 이야기, 10장 15절~11장 20절에는 이집트 탈출 사건, 하느님의 구원의지를 높이 기리는 찬미가(11,26; 구원의 보편주의), 가나안 정복, 자연, 우상, 동물 숭배의 어리석음(13~15장), 이집트 탈출 사건과 광야에서의 시련(16~19장)을 두서없이 열거한다.
지혜서에는 특히 두 가지 신학적 주제가 돋보이는데, '의인들의 불사 불멸'과 '지혜의 의인화'이다. 지혜서의 저자는 전통적 인과응보와 상선벌악의 원리를 확신하고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그는 의롭게 살고도 현세에서 보상을 받지 못한 의인들은 비록 장수를 누리지 못하고 죽더라도, 하느님 마음에 들어 죽은 다음에 하느님 곁에서 평화를 누리며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이다. 지혜서 저자가 희망하는 것은 죽은 의인의 부활이 아니라 의로운 영혼의 불사불멸이다.
한편, 지혜서에 묘사된 '인격적 지혜'는 사람 안에 들어와 사람을 변화시키고 하느님과 일치하게 만드는 그리스도교의 '은총'개념과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우리 가운데 오신 요한 복음의 '육화된 말씀'과도 상통한다. '인격적 지혜'를 성령이나 성자와 동일시하는 것은 성급한 시도이지만, 어쨌든 지혜서에서 신약성경의 삼위일체 신학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던지는 질문 중에 이런 것이 있다.
하느님께서 전지하시고 전선하시고 전능하신데, 왜 이 세상에 악이 범람하는가? 전선하시고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왜 악을 허락(허용)하시는가? 그리고 이 세상에서 참으로 법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 착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는 분이 너무나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불행을 당하고, 불의의 사고나 불치병으로 일찍 주고, 끊임없이 나쁘고 못된 짓을 하며,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存)처럼 살아 천벌을 받아 마땅한 놈이 너무나 현세적으로 승승장구하며 잘되는 것을 보면, 神은 과연 계시는가? 도대체 神의 공의, 정의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던지면서 불신앙과 회의를 품게 된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소위 신정론(神正論)이라 일컬었다.
일찌기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보다 더 큰 선(善)을 위해서, 보다 더 큰 악(惡)을 예방하기 위해서' 전지하시고 전선하신 하느님께서 惡을 허락하신다고 말하면서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섭리안에서 고찰할 것을 설파했다. 오늘 지혜서 3장의 말씀은 여기에 대한 응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전통적 인과응보(因果應報)와 상선벌악(償善罰惡)의 원리를 확신하고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영원(eternity)에 비교하면 이 세상은 잠깐 지나가는 점에 지나지 않고, 잠깐 지나가는 이승의 삶을 마치면 반드시 심판이 있으며, 그때에는 종말론적 자리바꿈(자리 전도)가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이다. 공의하시고 거룩하신 하느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지상에서 비뚤어진 부분을 바로 세워 실추된 명예를 회복시켜 주시고, 당신의 말씀과 계명에 충실한 이들에게 당신이 약속하신 상급을 반드시 주시며 의로운 영혼은 반드시 불사불멸이 있음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선행에는 상급을 내려 주시고, 악행에는 벌을 주시는 공의(公義)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불의하고 죄짓고 자신이 신이 되어 안하무인(眼下無人; overbearance)으로 이승에서 맘대로 산 자들을 가만히 두지 않고, 영원한 심판과 지옥벌로 갚아 주시어 당신의 의(義)를 바로 세우시며, 당신의 생명의 말씀이 진실되다는 것을 입증하시고, 당신이 천상 천하의 절대 주권을 가지신 분임을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지상에서 잠깐 살다가 육신 생명을 마치지만, 불의와 불법, 거짓과 오류, 무지와 폭력에 맞서서 하느님의 진리와 의를 위해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순교를 통해 그 목숨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되돌려 드린 순교자들처럼, 이 땅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불의와 절망과 억울한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천국의 영원한 복락과 내세를 믿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인간성으로는 견딜 수 없는 지독한 고문과 박해와 죽음 속에서도, 내세의 영원한 복락과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산 자에게 약속된 선물과 하느님을 지복지관(至福直觀)하며 영원히 찬양할 수 있는 축복에 대한 믿음과 희망으로 견딜 수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 7장 55절에 나오는 초대 교회 첫 순교자이신 스테파노 부제의 순교 장면처럼,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 쪽에 서 계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위한 고난의 순간에까지 항상 동행하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제 우리 하느님의 구원과 권능과 나라와 그분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다. 우리 형제들을 고발하던 자, 하느님 앞에서 밤낮으로 그들을 고발하던 그자가 내쫓겼다. 우리 형제들은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 그자를 이겨냈다. 그들은 죽기까지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묵시 12,10~11참조)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묵시21,3ㄹ~4)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을 왜 따라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그것을 어디서 얻을 수 있는지를 찾게 되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찾게 되고, 그 목적지까지 가는 방법을 배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 또 베드로 사도는 최고의회에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1-12).” 마르타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 11,27).”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는,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메시아시고,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왜 따라야 하는가?”를 확실하게 알았다면, 그 다음에는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 이 말씀은, “누구든지 내가 주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해서 내 뒤를 따라오려면”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스로 원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 뒤를 따라가는 일은 아무도 강요하지 않는 일입니다. 각자 스스로 원하고 선택하고 결정하는 일입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원하지 않는 사람은 따라가지 않을 텐데, 실제 현실을 보면, 원하지 않는데도, 즉 왜 하는지 모르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데도 강요당해서 억지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사람은 중간에 조금이라도 어려운 일을 만나면 바로 꺾이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끝까지 가지 못합니다. 가다가 중간에 포기하면 처음부터 가지 않은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끝까지 가지 않으면 중간까지 갔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은 모두 ‘밖’에 있게 됩니다.) “자신을 버리고” - 이 말씀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을 방해하는 걸림돌은 모두 물리치고, 버리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자기 내부에서 올 수도 있고, 밖에서 올 수도 있습니다. (내적 욕망일 수도 있고, 외부의 유혹일 수도 있습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 이 말씀은, 어떤 어려운 일, 시련, 고난을 겪더라도 기꺼이 감수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뒤를 따라가면, 즉 신앙생활을 하면, 편안하고 쉬운 길도 만나고, 어렵고 힘든 길도 만납니다. 만일에 어렵고 힘든 길은 피하고 편안하고 쉬운 길로만 가려고 하면, 그 길을 제대로 걸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뒤를 제대로 따라가려면 믿음과 희망이 꼭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틀림없이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믿음, 그리고 구원과 생명을 얻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거나 부족하다면, 예수님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또는 무엇인가를 따라가는 일이 생길 것입니다. 희망이 없다면 시련과 고난을 참고 견디는 힘이 없습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이 말씀의 뜻은, “현세에 대해서만 집착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내가 주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하면서 현세에 대한 집착과 미련을 버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이 말씀은, 당신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약속을 성실하게 지키시는 분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현세에 대해서만 집착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말씀은, 지금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경고 말씀인데,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늦기 전에 회개하라는 호소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루카 9,25)” 이 말씀의 뜻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입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루카 9,26).” 여기서 ‘부끄럽게 여기다.’ 라는 말은, ‘거부하다, 배척하다.’ 라는 뜻입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관한 예수님 말씀을 무시하거나 배척하는 사람은, 나중에 크게 후회하게 될 것이고, 그리고 완전한 절망에 빠질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이런 말이 지금은 전혀 실감 나지 않을 것이고, 뜬구름 잡는 것 같은 헛된 말이라고 비웃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도 임종 때가 되면,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종교를 찾는 모습을 자주 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연중 제25주일]첫째와 꼴찌 (마르 9,30-37)
지혜서의 저자는, 악인들은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인지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고 한다고 말한다. (지혜 2,12.17-20) 야고보 사도는, 위에서 오는 지혜는 순수하고,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다고 한다. (야고 3,16─4,3) 예수님께서는,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신다. (마르 9,30-37)
연중 제25주간 2독서 (야고 3,16-4.3)
16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행도 있습니다. 17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순수하고, 그다음으로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18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16-18)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행도 있습니다." (16)
모진 시기와 이기심이 생산해 내는 해악의 결과들은 혼란과 온갖 악행이다. '혼란'으로 번역된 '아카타스타시아'(akatastasia)는 '무질서한 상태', '불안정', '혼동', '요란'이란 뜻의 명사이다. 여기에는 마음의 평정이 없으며, 일관된 언어가 없어, 결국에는 다른 사람에게도 혼란과 다툼을 초래한다.
'온갖 악행'에서 '악한'으로 번역된 '파울론'(phaulon)의 원형 '파울로스'(phaulos)는 '나쁜', '악한', '무가치한'이란 뜻을 가진 '카코스'(kakos)와 동일한 뜻으로, 여기서는 공동체의 조화와 평화를 깨트리는 악한 면을 지칭한다. 따라서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간에 심지어 교회일지라도, 그곳에는 필연적으로 평화를 깨뜨리는 무질서와 파멸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순수하고, 그 다음으로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 (17-18)
이제 세속적이고 현세적이고 악마적인 지혜와 대립되는 '위에서 오는 지혜'가 어떤 것인지, 또 그 지혜가 어떤 열매를 가져 오는지를 진술한다.
우선 '위에서 오는'으로 번역된 '아노텐'(anothen)은 이 땅에 근거를 두지 않고, 오직 하느님께로부터 시작되는 것을 말한다. (요한3,3.7 ; 19,11 ; 야고1,17) 따라서 '위에서 오는 지혜'는 하느님의 지혜로서, 세상으로부터의 지혜와는 정반대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사로서의 이 지혜는 교회를 위한 축복의 열매를 맺도록 한다.
야고보는 바오로가 말한 성령의 9가지 열매(갈라5,22-23)와 유사하게, 하느님께서 난 지혜의 8가지 구체적인 특성을 나열하고 있다. ① 순수 ; '하그노스'(hagnos)는 '순결한', '순수한'(pure)이란 뜻으로, 부정하거나 더럽지 않음과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하느님의 선명하고 분명한 말씀을 왜곡없이 따르며, 하느님 앞에 항상 동일한 모습만을 견지한다.
② 평화 ; '에이레니코스'(eirenikos)는 '평온한', '평화로운'이란 뜻으로, 신약 성경에서 여기와 히브리서 12,11에서만 발견된다. '혼란'으로부터 나온 세상의 지혜와 대비된다.
③ 관대 ; '에피에이케스'(epieikes)는'온화한', '온순한', 공정한'이란 뜻으로, 세상의 지혜를 가진 독선적이며, 오만한 사람의 마음과 달리, 참을성과 이해심이 많고, 관대하며 친절한 마음을 의미한다.
④ 유순 ; '유페이데스'(eupeides)는'복종하다'에서 유래되어, '쉽게 순종하는', '고분고분한'이란 뜻이다. 이것은 거칠고 완고한 것과는 반대로,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 온당하고 유순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⑤ 자비 ; '엘레오스'(eleos)는 고통가운데 있는 죄인들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동정심'이란 뜻으로,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불쌍한 마음으로 자비와 동정심을 아끼지 않는다. 냉정과 냉랭함이 그 반대이다.
⑥ 좋은 열매 ; '자비'의 결과를 나타나는 '구제'(자선)로 이해할 수 있다.
⑦ 편견이 없는 ; '아디아크리토스'(adiakritos)는 부정 접두어 '아'(a)와 '구별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디아크리노'(diakrino)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구별되지 않는'이란 뜻이다. 사람의 외관만을 보고 판단하거나 공정성을 잃은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⑧ 위선이 없는 ; '아뉘포크리토스'(anipokritos)는 부정 불변사 '아'(a)와 '~체하다'라는 뜻의 '휘포크리노마이'(hypokrinomai)의 합성어에서 유래하며, '거짓없는', '진실한', '있는 그대로', '숨김없는'이란 뜻을 지닌다. 바리사인들처럼 위선을 행치 않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8가지의 위로부터 난 지혜는 교회를 사랑으로 하나되게 한다.
우리 교우들이 세상의 지혜를 멀리하고, 하느님께로부터 온 지혜를 가까이 한다면, 이런 믿음의 열매들을 맺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열매를 맺는 사람들만이 진정한 지혜와 총명을 지닌 자로서, 교사의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 (18)
야고보는 17절의 지혜의 특성 가운데 '평화'(에이레네; eirene)의 덕목을 다시 강조하면서 본 장을 마무리한다. 이 평화는 다툼과 싸움과 분쟁과 요란이라는 세상적 지혜의 모습에 대조적인 속성이며, 그런 악의 열매들로 몸살을 앓고 있는 교회 공동체를 하나되게 하는 것으로서, 하늘에서 난 지혜의 여러 특징을 아우르는 덕이다.
평화를 이루는 이들은 의로움의 열매를 거둔다. '의로움의 열매'로 번역된 '카르포스'(열매) 디카이오쉬데스'(karpos dikaiosynes)의 개념은 17절의 위에서 오는 지혜에 속한 모든 특징들을 포함한다. 그리고 이런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려 하는 자에 의해서 심겨진 평화의 씨로 만들어진다. 평화는 14절에서 언급된 시기와 이기심과 16절에서 언급된 혼란과 온갖 악행의 상태와 상반된 것이다.
교회 안에서는 소란한 일들이 가득하기 보다는 하늘로부터 온 지혜의 열매, 즉 의로움의 열매인 평화가 감돌아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이 세상의 평화를 가져 온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거룩한 백성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마태5,9)
가진 자가 모든 이의 종이 되는 사랑의 사회
과거 고대인들은 야생에서 식량과 땅을 빼앗기 위해 서로를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그것은 권력을 탐해서가 아니라 생존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그 후 사회가 형성되면서 계급과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권한이 있는 사람은 언제나 다른 사람보다 많은 이익을 갖습니다. 반면 지위가 낮은 사람들은 불이익을 당할 때가 많지만 더 잃는 것이 두려워 불평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가기 위해, 더 많은 돈을 가지기 위해 전력 질주합니다. 누구나 가장 높은 사람이 되고 싶어하고, 누구나 가장 큰일을 하고 싶어합니다. 경쟁 사회 속에서 나와 같이 있는 사람들은 내가 도전해야 할 대상, 제거해야 할 대상일 뿐입니다. 이러한 세상이 된다면 더 이상 서로를 헐뜯고 짓밟는 일 없이 사랑만이 존재하고 그들의 관심은 어떻게 서로를 도와줄 수 있는 지 입니다. 강한 사람은 나약한 사람을 이끌고 큰 사람은 작은 사람을 위해 무릎을 굽힐 것입니다. 권력은 권한을 가진 사람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합니다. 지위란 단지 업무와 책임을 분배할 때만이 합리적으로 사용되어야 하며 각자 주어진 일은 전체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일이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권한을 가진 가장 존귀한 분이시지만 어떤 특권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조차도 아낌없이 내어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아주 작고 나약한 어린아이 모습으로, 그리고 가장 가난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을 향한 길을 걸으십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공동체 안의 서열 문제로 다툰 것입니다. 이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겠습니까? 그동안 정성을 쏟았던 제자 교육이 허무하게 느껴지셨을 것입니다.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시고 어린이 하나를 내세우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린이는 혼자 살아갈 수 없습니다.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약한 존재지요. 그러니 제자들로서는 이 말씀이 얼마나 서운하게 들렸겠습니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신들에게 어린이를 받아들이라고 이르시기 때문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