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동성당
[연중 제4주일] 귀향 (루카 4,21-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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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4주일] 귀향 (루카 4,21-30)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자신을 민족들의 예언자로 세우시어 온 땅에 맞서게 하셨다고 한다. (예레 1,4-5.17-19)
바오로 사도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되는데,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이라고 한다. (1코린 12,31─13,13) 7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 하신다. (루카 4,21-30)
연중 제4주일 제1독서 (예레1,4-5.17-19)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선별하였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5)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직접 예언자의 소명을 주셨음을 밝힌 예레미야서 1장 4절에 이어지는 예레미야서 1장 5절 ~ 10절에서는 예레미야의 예언자로서의 소명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예레미야와 하느님 사이의 대화체 형태의 문장들이 소개된다.
본절에서는 하느님께서 직접 화법을 사용하여 예레미야의 예언자 소명을 계획과 선택의 관점에서 밝힌다. 예레미야가 소명을 시작하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소명이 하느님의 계획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계시하시므로 그에게 확신을 심어준다.
한편 시간적 관점에서 볼 때,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와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는 하느님께서 그를 아시고 예언자로서 성별하셨으며, 그것에 근거해서 그를 지으시고 나오게 하셨다는 의미, 즉 시간의 진척과 함께 하느님께서 예레미야에 대해 계획하신 바를 구체화시키는 듯한 뉘앙스를 전달한다.
여기서 '모태에서 너를 빚기전에'란 표현은 성경상의 용례를 감안할 때(이사44,24; 갈라1,15), 문자적으로 단순히 모태에 수태되기 전을 의미하기 보다는 영원 전에 이루어진 하느님의 계획과 결정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 적합하다. 즉 하느님께서는 태초부터 예레미야를 아셨던 것이다.
그리고 '너를 알았다'로 번역된 '예디으티카'(yedihthika)의 원형은 '알다'(창세3,7), '깨닫다'(탈출34,29), '간섭하다'(창세39,6), '선택하다'(창세18,19), '동침하다'(창세4,1)라는 다양한 의미를 지닌 동사 '야다으'(yadah) 이다.
이것은 단지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며, 사실 관계에 대한 피상적인 앎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하여 얻어진 본질에 대한 확실한 앎을 의미한다(창세3,7).
본문에서 이 단어는 전지하신 하느님께서 태초부터 예레미야에 대하여 머리카락 하나 하나까지 다 세고 계신(마태10,30) 만큼 온전히 아셨다는 것과, 하느님께서 그와 얼마나 친밀하고 가까운 분이신지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 것으로 풀이된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너를 성별하였다'에 해당하는 '히크따쉬티카'(hiqdashithika)는 '거룩하게 하다','거룩히 구별하다','거룩하고 깨끗하게 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카다쉬'(qadash)의 사역형(Hiphil)으로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사명을 위해 예레미야를 거룩히 구별하셨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사역형 동사가 사용된 것은 행동의 주체가 바로 하느님이심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 자신의 사명을 위해 예레미야를 거룩하게 구별하셨다는 선언은 그가 활동 내내 계속되는 생명의 위협(예레11,18)과 감금(예레38,6 ;39,15), 매국노라는 오해와 모욕을 견디며 예언자로서의 자신의 임무를 끝까지 완수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의 원천이 되었을 것이다.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聖徒) 즉 '거룩한 무리'로 선택을 받아 부르심을 입었다는 거룩한 성별 의식을 가질 때, 신앙 생활 가운데서 어떠한 시련과 유혹, 고난과 역경이 닥칠지라도 성도의 본분과 사명을 꿋꿋하게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
여기서 예레미야의 예언자 직무가 남부 유다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만국에까지 미친다는 사실이 명시된다. '세웠다'라는 의미의 '네탓티카'(nethatihka)는 '주다'(창세1,29), '놓다'(창세15,10), '세우다'(창세17,2)라는 의미의 동사 '나탄'(nathan)의 원형이다.
여기서 하느님께서 '내가 세울 것이다'라는 의미인 '나탄'(nathan)의 미완료형 '에텐카'(ethenka)를 사용하지 않고 완료형을 사용하였다는 사실은 예레미야의 예언자 임명이 이미 하느님의 결정 사항으로서 확정되었으며, 절대 불변할 것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마치 거룩한 임직식을 거행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예레미야를 만국의 예언자로 임명하시되 천상의 왕이신 하느님께서 예레미야를 자신의 충성스런 대사로 임명하신 것이다.
따라서 예레미야는 세상의 어떤 핍박이나 유혹, 회유에 대해서 타협할 필요가 없다. 다만 자신을 예언자로 세우신 만왕의 왕이신 하느님의 결정에 순명하는 것만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러한 거룩한 임직에 대한 확신은 오늘날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봉사자로 일하는 이들 모두가 반드시 가져야 하며 결코 이것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한결같이 충성스런 소명자로 서게 하는 굳건한 토대가 될 것이다.
한편, '민족들'로 번역된 '꼬임'(goim)은 단수형 '꼬이'(goi)로 사용될 때에는 '민족'(창세12,2), '사람들'(2열왕6,18), '무리'(욥기1,6) 등의 집합적인 개념을 가진다. 그러나 본문처럼 복수형으로 사용되면, '인류'(이사42,6), '이교도'(에제5,6-8), '이방민족'(탈출34,24) 등의 집합적인 의미가 보다 강조된다.
따라서 민족들의 예언자로 세웠다는 표현은 예레미야의 활동의 범위가 어디에까지 이르는 것인지를 나타내준다. 예레미야는 남부 유다 뿐만 아니라 이방 나라에 대해서도 예언자로서 활동해야 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인생 후반기에 몇 년 동안 이집트에서 살았던 것 외에 외국에 간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예레미야를 "민족들의 예언자"로 세우셨다고 말씀하신 것은 예레미야서 46장~ 51장의 여러 나라들을 향한 신탁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그의 예언이 유다를 포함하여 많은 나라들에도 영향을 미치는 예언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예레미야는 유다를 향해 하느님의 심판과 멸망을 선포했을 뿐 아니라 주변 국가들의 심판과 멸망을 예언하였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가 선포한 예언대로 모든 것을 행하시고 이루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 예레미야를 민족들의 예언자로 임명하셨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유다에만 국한되는 지역神 이나 자기 백성도 책임지지 못하는 무능한 神이 아니라 민족들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전 우주적인 주권자이심을 나타내준다.
아울러 남부 유다 멸망 당시 대표적인 예언자인 예레미야를 가리켜 이처럼 민족들의 예언자로 세우셨다는 표현은 구원사적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함축한다.
즉 선민의 나라인 남부 유다가 멸망당하고, 하느님의 백성들의 약속의 상속인 가나안 땅이 아닌 이방 땅에 흩어져 살지만, 그들이 흩어져 사는 이방 땅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주권을 행사하시며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고 계심을 암시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연중 제4주일 제2독서 (1코린12,31-13,13)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12)
코린토 전서 12장 11절과 12절은 10절의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없어집니다' 에 대한 예언이며, <사랑의 영원성> 에 대한 논지를 강화하기 위해 주어진 구절이다. 본절에서 바오로는 '지금은'(arti ; 아르티)와 '그때'(tote ; 토테)란 상반된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를 통해, <은사의 현재성>과 대비되는 <사랑의 영원성>을 매우 명확하게 드러낸다.
말하자면, 코린토 교인들이 경험하고 있는 <현재적 실존>과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체험하게 될 <미래적 실존> 사이에는 분명히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거울의 비유를 통해 설득력있게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거울'로 번역된 '에솦트루'(esoptru)의 원형 '에솦트론'(esoptron)은 '~안에' 란 뜻의 전치사 '에이스'(eis)와 '보다'라는 뜻이 있는 동사 '옵타노마이'(optanomai)의 합성어에서 파생하며, '안에 보이는 것' 이란 문자적 뜻을 가진다.
이것은 오늘날의 유리와 수은으로 만든 거울(mirror ; glass)과는 달리, 청동에 광을 낸 거울을 뜻한다. 이것은 코린토 지역에서 생산되는 특산품이었으나 고가품이었으므로, 소수의 사람들만이 거울을 가질 수 있었다. 당시에는 코린토 지방의 거울이 다른 지방의 거울보다 질이 좋은 것으로 여겨졌으나, 이것 역시 오늘날과 같이 잘 비치는 거울이 아니었다. 따라서 거울이 희미하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식적인 지적일 뿐이다.
'희미하다', '어렴풋하다' 라고 번역된 '아이니그마티'(ainigmati)의 원형 '아이니그마'(ainigma)에서, '수수께끼', '불가사의한 일' 을 뜻하는 '에니그마'(enigma)라는 말이 파생되었다는 것은 당시에 거울을 보는 것이 얼마나 모호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반면에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이다' 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종말의 때에는 완전하게 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2코린5,7) 이러한 비유의 결론으로서, 바오로가 현재는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전지하신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는 것과 같이 온전히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 알지만' 으로 번역된 '기노스코'(ginosko)가 현재형인 반면에,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이다' 로 번역된 '에피그노소마이'(epignosomai)는 생각의 방향을 나타내는 전치사 '에피'(epi)와 '기노스코'(ginosko)의 합성어인 '에피기노스코'(epiginosko)의 부정(不定) 과거형이다. 여기서 접두어로 사용된 '에피'(epi)가 강조적 의미를 지닌다.
뿐만 아니라 결정적 행동을 나타낼 때 쓰이는 부정 과거형이 사용된 것은 하느님께서 온전히 아시며, 하느님께서 아시는 지식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되지 않는 온전하며 절대적인 지식인 것과 마찬가지로, 성도의 지식 또한 종말의 때에 그처럼 분명해 질 것이라는 뜻을 드러낸다.(Now I know in part ; then I shall know fully, even as also I am fully known.)
그런데 본문에는 종말의 때에 성도가 확실하게 알게 되는 대상이 무엇인지 명시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렇게 명시적으로 표현하지 않음으로 인해, 성도가 알게 되는 대상이 더욱 넓고 크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그 대상에 대해 규명할 필요가 없지만, 굳이 말하자면 13장 2절에 나와 있는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 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하느님의 전지하심(omniscience)이 포괄하는 앎의 범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사업의 진리를 말한다고 봄이 좋다. 즉 종말의 때가 되면 그때까지는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던 구원사업의 진리에 대하여 확연히 알게 될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13)
본절은 <사랑의 찬가> 로 불리워지는 13장 전체의 최종적 결론으로서 <사랑의 영원성과 우월성>에 대한 선언이다. 바오로의 서간 어디에서도 본절과 같이 이렇게 분명하게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이라는 세 표현을 결합시킨 적이 없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바오로의 전반적인 사상에서는 이 세가지를 한데 묶는 경향이 농후하고, 이 세 가지를 그리스도교의 중심적이고 본질적인 요소들로 여기는 경향이 드러난다.(콜로1,4.5 ; 1테살1,3 ; 5,8)
한편 바오로는 '그러므로 이제' 로 번역된 '뉘니 데'(nini de)로 본절을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강조점은 시간적 의미의 현재에 있다기 보다는 논리적인 결론의 도출에 있다. 즉 바오로는 13장 8절에서 언급한 바 있는, 예언, 신령한 언어, 지식 등의 여러 개별적 은사들은 사라질 것이지만, 이와 반대로 믿음, 희망, 사랑은 영원히 존속할 것이라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계속됩니다' 로 번역된 '메네이'(menei ; remain)는 '남아 있다', '머물다' 라는 뜻을 지닌 '메노'(meno)의 현재형이다. 희랍어에서 현재 시제는 현재의 사실과 더불어 지속되는 사실을 나타낼 때도 쓰이므로 본문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현 세대 뿐만 아니라 오는 세대에서도 지속될 것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공통적으로 그리스도 재림으로 완성될 하느님 나라와 밀접하게 관계되는 종말론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계속 된다'(항상 있다) 라는 것을 사람의 언어로 표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바오로는 시간적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 '계속됩니다' 란 표현은 극복된 시간, 곧 영원을 언급한 것이다.
영원은 결코 시간의 범주에 포괄되지 않는 영역이다. 영원은 끝없이 계속 연장된 시간의 지속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묵시록 10장 6절에서 '영원무궁토록' 이란 말로 언급하고 있듯이,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신 분을 두고, 하늘과 그 안에 있는 것들, 땅과 그 안에 있는 것들, 바다와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창조하신 분' 에게만 적용되는 신의 영역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원은 시간과 반대되는 영역이다.
한편,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모두 종말론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면, 바오로는 왜 유독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셋중에서 사랑이 으뜸이라고 말하는가? 여기서 '으뜸은'으로 번역된 '메이존'(meizon ; the greatest)는 가장 위대한 것이라는 뜻이다.
사랑은 믿음과 희망을 산출하는 근거와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으면 믿음과 희망의 근거가 없어지며, 더 이상 믿음과 희망이 지속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랑의 우월성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믿음과 희망은 자신을 위한 것이나, 사랑은 타인을 위한 덕목이라는 데서도 사랑의 우월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사랑이 하느님의 속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믿음은 그리스도교적 삶을 시작하게 할 뿐만 아니라 지속하게 하는 필수 조건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 자체는 하느님의 본질적 속성이 될 수 없다. 즉 그것은 하느님 스스로에게 요구되는 속성은 아닌 것이다.
이러한 점은 희망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인간의 희망이 하느님의 영원하심과 그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하느님 스스로는 희망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시간 안에서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존재이시지만, 그 자신 스스로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에 의해 결정되지는 않으신다.
그런 점에서 하느님 스스로가 희망하신다면, 그는 더 이상 우리들이 믿는 하느님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역시 더 이상 우리들의 하느님이 아닌 것이다. 사랑은 하느님의 본질적 속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가장 위대한 것이다.(갈라5,5.6)
사랑은 단순히 시간적으로 오래 지속되기 때문에 으뜸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본질적 속성이기 때문이며, 나아가 그것만이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닮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1요한4,7.8)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1요한4,12) 사도 요한은 사랑이 믿음과 희망에 비해 독보적인 이유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연중 제4주일 복음 (루카4,21-30)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21)
아마도 성경 봉독 후 예수님께서 하신 교훈의 말씀이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깊었으며, 내용도 풍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루카 복음 4장 21절과 18절, 19절의 내용만으로도 예수님께서 베푸신 가르침의 요지를 전달하기에 충분하므로, 루카 복음사가는 루카 복음 4장 21절로 압축 요약해서 전달하였다.
21절에서 '이루어졌다'로 번역된 '페플레로타이'(peplerotai; is fulfilled)는 구약 예언의 완성과 성취를 드러내는 전문용어인 '플레로오'(pleroo)의 수동태 완료로서 이사야서 61장 1~2절의 예언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회당의 청중들에게 이미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즉 이사야서 61장 1~2절에 나오는, 주님의 영을 받은 의로운 종은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며, 당신이 이 땅에 오셔서 공생활을 시작하는 시점에 이미 그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이심을 증명하는 중요한 예언으로서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앞으로 계속 성취될 예언이기도 한 것이다.
즉 가난한 이들이 기쁜 소식인 복음을 듣고, 죄와 죽음의 권세에 잡혔던 이들이 자유롭게 되며, 영적으로 눈먼 이들이 진리를 보게 되고, 좌절과 절망에 빠진 이들이 희망 가운데 기쁨을 회복하며, 주님께서 베푸실 구원의 은혜로운 해가 도래하는 등의 일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취되었고, 또한 성취되어 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진리와 생명, 자유와 평화, 그리고 치유와 하느님의 의로운 통치를 동반하고 육화(강생)하신 천주 성자 제2위 하느님이시다.
이처럼 예수님의 오심으로 성취되었고, 또한 성취되어 가는 이같은 일들은 오늘날에도 지구촌 곳곳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이들에 의해 계속되고 있으며, 예수님 재림때까지 끊임없이 진행될 것이다.
삽시간에 퍼진 예수의 소문 -강길웅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을 방문하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결정적인 구원의 시기에 이르렀다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읽으시고, 그 말씀이 그 자리에서 이루어졌음을 선포하십니다.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면서도, 그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예수님께서 요셉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걸려 넘어지고 맙니다. 그들은 은총의 메시지는 기쁘게 받아들이면서도, 가난한 목수의 아들을 구세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의 사례는, 하느님께서 유다인이 아닌 이방인들을 위하여 행하신 기적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모두 제쳐 놓으시고 이방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다는 말을 들은 나자렛 사람들은, 화가 나서 예수님을 벼랑에서 밀어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당신의 갈 길을 가십니다.
하느님의 선택된 민족이라고 자부하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예수님께서 배척받고 돌아가실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복음의 기쁜 소식이 이스라엘을 넘어 세상 끝까지 전파될 것이라는 하느님 구원 계획의 신비를 미리 보여 줍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이며 신자라는 사실에 머무르다 보면, 하느님의 뜻을 알아차리고 행하는 데 오히려 무뎌질 수도 있음을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순간순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