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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연하가 뭐 어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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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베네딕도) [hawhetal] 쪽지 캡슐

2000-10-05 ㅣ No.1720

ezpaper에서 푼 글입니다.  읽다보니 상당히 재미있어요.

'요즘 대학생들은 이렇게 연애하나'

혹시 다 아는 건데 제가 뒷북 치는거라면 빨리 알려주시기를....

 

 

연하가 뭐 어때 1회

 

 

 

작가 이현철

 

가을이 시들고 있다. 가을은 길 거리의 낙엽이 되어 이름없는 청소부의 빗질에 저만치 쓸려 가 버리고 있다.

 

공항의 아침은 제법 추웠다. 해외 여행의 붐은 아임 에프 이전의 그것과 비슷했다. 공항에는 막 겨울 방학을 시작한 학생들이 베낭을 메고 여행 출발 준비로 부산하다. 곳곳에 신혼여행을 떠나는 듯한 젊은 남,녀들도 보인다.

 

김포 공항 국제 청사 안, 한쪽 구석에 베낭 여행을 떠나는 한 팀이 있었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은 아직 모르는 사이인 듯 통성명을 주고 받는다. 이제 갓 대학생이 된 20대 초반에서부터 30대까지의 연령층이다. 여행을 떠나는 그 팀 중의 세 여자가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떨어져 베낭을 옆에 두고 앉자 통성명을 하고 있다. 한 여자는 이제 돌을 지난듯 한 아기를 안고 있고, 그 옆에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그 여자 주위에 두 여자가 아기를 보며 말을 주고 받는다.

 

"남편하고 아기를 두고 혼자 떠나는 거에요?"

 

세 여자 중 제일 나이가 들어 보이는 한 여자가 물었다.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는 미소를 지으며 답을 했다.

 

"남편이 내가 요즘 힘든 것 같다고 여행이나 떠나 보라고 권유하더군요. 이왕 갈 거 멀리 가고 싶었어요. 우리는 맞벌이 부부라서 둘이 같이 시간을 내기가 힘들어요. 아이를 오랜 시간 맡길 만한 곳도 없구요.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남편이 자기가 다 알아서 할테니 혼자라도 맘 편하니 다녀 오라고 하는군요."

 

여인은 답을 하고서 곁에 말없이 서 있는 남편의 손을 잡았다. 보기 좋은 장면이었다.

 

"아기가 너무 귀엽다. 몇개월 됐어요?"

 

가장 나이가 어려 보이고, 예쁘장한 아가씨가 물었다.

 

"13개월째 접어 들었어요."

 

"사내죠?"

 

"네."

 

"첫 아기에요?"

 

"네."

 

"그럼 아직 신혼이시겠네요."

 

그 여자는 아기에게 관심을 많이 보이며 밝은 얼굴로 여인과 그의 남편을 쳐다 보았다.

 

"계속 신혼일거에요. 우리 그이는 항상 신혼처럼 살자,라고 말하거든요."

 

"나도 이런 아기 하나 낳고 싶네요."

 

"호호. 귀엽죠? 애기 아빠를 많이 닮았어요."

 

여인은 자기의 남편을 한번 씩 쳐다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남편은 낯선 여자 둘에게 쑥스러웠는지 머쩍은 웃음이다.

 

"그 쪽은 몇살이에요?"

 

가장 나이 들어 보이는 여자가 아기에게 관심을 보였던 여자에게 물었다.

 

"내년이면 스물 여덟이에요."

 

"생각보다 나이가 많네요. 나는 스물 대여섯살 쯤으로 봤는데..."

 

"어머 저랑 동갑이네요. 반가워요. 전 김 남희라고 해요."

 

이야기를 듣던 아기 안은 여자가 반가움을 표시했다.

 

"저도 반가워요. 전 홍은정이라고 합니다."

 

"내가 나이가 제일 많네요. 난 서른 하나인데. 아마 이 여행이 내 처녀 시절 마지막 여행이 될 것 같네요. 전 이 수연이라고 해요."

 

여자 셋은 서로 반갑게 악수를 나누었다.

 

"아직 결혼 안 하셨어요?"

 

은정이라고 하는 사람이 수연씨에게 물었다.

 

"아직 임자를 못 만났네요. 연애는 몇번 해 봤는데 남자들 다 속물인 것 같아요."

 

그 말에 아기를 안고 있던 여자가 시큰둥한 답을 한다.

 

"우리 남편은 아니에요."

 

"우리 팀에는 대부분 나이 어린 학생들이죠? 유럽 가면 우리 같이 다녀요."

 

"그거 좋죠."

 

아기를 안은 여자는 흔쾌히 답을 했으나 은정이라는 여자는 새큼한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전 같이 다닐 사람이 있어요."

 

"누구 같이 온 사람이 있어요?"

 

"네."

 

그 답에 때를 맞춰 저기 이 팀의 다른 일행들 속에 있던 한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세 여자 쪽으로 왔다.

 

"누나, 베낭을 짐칸에 맡긴다고 들고 오래."

 

"알았어. 이제 일어서죠."

 

"그래야 겠네요. 저 남자하고 같이 다닐거에요?"

 

다가왔던 남자를 보고 그렇게 묻는 남희라는 여인은 아기를 남편에게 맡기며 천천히 일어섰다.

 

"네."

 

은정이라는 여인의 눈망울이 사랑스럽다. 방금 말을 던지고 간 그 남자를 보는 시선의 눈망울이었다.  

 

"친동생? 동생하고 같이 온거에요?"

 

"아니에요."

 

은정이라는 여인은 이번에도 고개를 흔들었다. 수연씨는 베낭을 짊어 지며 천천히 일어섰다. 남희씨도 베낭을 짊어 지려 했다.

 

"자기, 베낭도 내가 짊어 질까?"

 

"자기는 현철이나 잘 돌봐요. 베낭 정도는 내가 짊어 질 수 있어요."

 

은정씨는 그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은정씨가 들고 있는 베낭은 다른 이들에 비해 작았다. 두툼하기는 했지만 학생들이 등,하교시 메고 다니는 이스트 팩 멜빵 가방이었다.

 

"베낭이 작네요."

 

수연씨가 자기가 들어야 할 베낭과 곁에 있는 남희씨의 베낭을 번갈아 보더니 은정씨에게 물었다.

 

"대부분 짐들이 아까 그 사람 베낭 속에 다 들었어요."

 

"누구에요? 짐을 맡길 정도면 꽤 가까운 사인가 보네요."

 

"학교 후배였었어요."

 

"과거형인데..."

 

수연씨는 계속 물었다. 남희씨는 베낭을 짊어 진 채 남편이 안고 있는 아기를 보며 곧 헤어질 것이라는 아쉬움을 달래 듯 사랑스런 말들을 주고 받았다. 수연씨와 은정씨는 그들과 조금 떨어져 걷고 있다.

 

"졸업을 했으니까 과거형이겠지요?"

 

"나이로 보니까 은정씨도 아가씨로서 가는 마지막 해외 여행이겠다. 나처럼 노처녀가 되면 기회가 더 생길수도 있겠지만 은정씨는 남자들이 그때까지 놔두지 않겠네요."

 

"호호, 아가씨로 보이나요? 저 결혼했어요."

 

"응? 결혼 했어요?"

 

"네."

 

"근데 남편이 마중도 안나왔어? 그리고 남편이 학교 남자 후배랑 베낭 여행 같이 가는 거 알고 있어요?"

 

"마중이라... 흠, 아직 인식이 그렇군요."

 

"뭐가? 아무리 팀을 구성해 떠나는 팩키지 여행이라도 다른 남자랑 같이 가는 걸 좋아 할 남편이 어디 있어요."

 

"그 인식 말구요."

 

"후배랑 남편이 잘 아는 사인가 보네요 그럼.?"

 

"흠, 너무 잘 아는 사이지요. 한 번 물어 봐야 겠네요."

 

"그렇군요. 근데 뭘 물어본다는 거에요?"

 

"아까 남희씨처럼 내가 힘들 때 혼자 여행간다고 그러면 보내 줄 수 있는지."

 

"아, 아까 그 남희씨 남편 분은 대단한 사람이야. 한달 가까이 부인을 멀리 외국으로 떠날 보낼 생각을 했으니까. 갓난 아기까지 있으면서 말이에요. 참, 은정씨는 결혼한지 얼마나 됐어요? 완전 아가씨로 보이는데."

 

"저요? 저 지금 신혼 여행 가는거에요."

 

"네?"

 

"아까 그 후배란 남자하고 엊그제 결혼했어요. 아까 저보고 누나라 불렀던 그 남자가 제 사랑하는 남편이에요. 저 먼저 가 볼게요. 나중에 봐요."

 

답을 들은 수연이란 사람은 멍한 표정이었다.

 

"뭐야? 연하하고 결혼 한 거에요?"

 

"연하는 남편 하면 안되나요."

 

"베낭 여행인데?"

 

"이것도 좋지 않나요?"

 

은정이라는 여자는 지금 행복이 넘치는 표정으로 자기의 남편이 있는 곳으로 뛰어 갔다.

 

 

 

"철수씨."

 

"낯간지러워요. 그냥 하던대로 해요."

 

"그럼 자기야."

 

"언제 나한테 자기야, 한 적 있어요?"

 

"그래 철수야."

 

"왜요. 은정씨."

 

"네가 그렇게 부르니까 나도 어색하다. 후후."

 

팀의 일행 중 저 둘이가 부부라 생각하는 사람은 금방 사실을 알게 된 수연씨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1993년 깊은 가을이었다. 수원 근교의 어느 대학이었다. 철수는 이학기부터 집에서 통학하는 것을 포기했다.

 

""내 서울에 살면서도 어째서 원서 쓰고 날 때까지 이 대학 자연계가 이런 촌구석에 쳐 박혀 있었는지를 몰랐을까? 대학로가 그립다. 전국에서 단일 캠퍼스 내에서 이 학교처럼 남학생 대 여학생 비율이 절박하게 불균형한 곳이 있을까? 아, 있다 참. 이화여대, 숙명 여대, 기타 등등 여대. 그래도 거긴 여자가 많지 쩝.""

 

철수는 좋은 집 놔두고 자취를 시작하면서 불만이 많았다. 더군다나 자기가 자취하는 방 주위로 모두 지저분한 공대 남학생들의 자취방들 뿐이었다.

 

""오피스텔처럼 꾸며져 있으면 뭘하나, 주위 환경이 지저분한데..."

 

철수는 공대생이다. 물론 공대생이기 때문에 여자친구가 없다. 고 삼일 때 이 학교에 원서를 내면서 후일 대학생이 되면 마후라를 휘날리며 한 쪽 옆구리엔 든든한 여자친구를 데리고 눈 내리는 대학로를 활보할 것이란 꿈이 있었다. 대입 시험도 저기 명륜동에 있는 캠퍼스에서 치루었다. 시험을 보면서 천정에 쥐가 지나 다니는 것을 보며 좀 지저분하다,라는 생각은 했어도 근처에 있는 대학로를 보며 꿈을 키웠다.

 

진짜 몰랐을까? 진짜 몰랐다. 철수는 이런 촌구석으로 오게 될 지 진짜 몰랐다.

 

철수는 난생 처음 집을 떠나 혼자의 생활을 하게 되었다. 부모님은 말할 여지도 없었고, 참 예쁜 두살 터울의 여 동생도 보고 싶었다. 제발 이사 가기를 바랬던 보기 싫던 뒷 집 싸움쟁이 할머니도 보고 싶었다. 철수는 혼자만의 공간에서 혼자 잠드는 것에 외로움을 느꼈다. 전철을 타면 한시간 반이면 가는 거리에

 

좋은 집을 두고서 도저히 계속 별 보고 등,하교 하는 것에 자신 없어서 두달 전부터 외로움과 한판 정면 승부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건 자기가 자취하는 곳에서 멀지 않는 곳에 좋아하는 여자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 여자는 철수의 외로움을 달래 주는 사람이었다. 철수는 친한 누나가 한명 있었다. 자기 동네에서 몇 년을 살았던 두살 위의 누나였다. 그 누나를 어떤 동아리에 가입을 하면서 다시 만났다. 예전 어릴 적 같은 동네에서 친했던 사이라 다시 만난지 채 반년이 되지 않았지만 친남매처럼 보일 정도 까지 가까워 져 있었다. 그 누나는 같은 학교 약대생이었다. 두 살위니까 삼학년이라는 것은 말하지 않겠다. 철수는 하교를 하고 혼자 있기가 싫으면 그 누나를 찾아 갔다. 집에 없을 때가 간혹 있었지만 연락하지 않고 가도 만날 수 있는 경우가 더 많았다.

 

 

 

"누나야."

 

"철수 왔니?"

 

"오늘은 방에 있네. 커피 한잔 얻어 먹으러 왔어요."

 

"잘 왔어. 안 그래도 오늘 나 쓸쓸했는데."

 

"아니, 왜 쓸쓸해요. 애인도 있는 사람이."

 

"흠, 그래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렇게 혼자네."

 

"그럼 누나 방이니까 혼자 있어야지."

 

"누나 오늘 생일이야."

 

"정말요? 근데 왜 궁상맞게 집에 혼자 있어요. 그 애인이라는 사람 안 만나요?"

 

"오늘이 내 생일인지도 모를거야. 그 사람은 바쁘잖아."

 

"누나가 먼저 연락했어야지요."

 

"초라하지 않을까? 그냥 알겠지, 기대만 하고 있다가 그 기대가 받아 들여 졌을 때 느끼는 기분은 정말 좋지 않을까, 그래서 연락하지 않았어."

 

"참내. 그나저나 오늘이 누나 생일인데 난 뭐 해 줄게 없네요. 월요일날 용돈 받아 가져 온 거 이제 남아 있지도 않아 선물도 못하고."

 

"흠, 괜찮아. 제과점에서 빵 좀 사올테니 축가나 불러 줘."

 

"알았어요."

 

 

 

철수는 빵에다 촛대를 꽂고 열심히 생일 축가를 불러 주었다.

 

"너처럼 귀여운 동생 같으면서도 그 사람처럼 든든함을 주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좋겠다."

 

"네?"

 

"아니다."

 

"누나 이 기회에 바꿔 버려요."

 

"뭘?"

 

"애인 말이지요."

 

"호호, 누구로?"

 

"나는 어떨까요?"

 

"내가 너 성격을 좀 알지. 어릴 때도 같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자연스럽게 말하는 것을 보니까, 넌 날 누나 이상으로는 보지 않아."

 

"허허, 나 누나 좋아 한다니까요."

 

"알아."

 

"하하, 힘 내세요."

 

"그래. 고마워."

 

"우리 선배 중에 좋은 사람들 많으니까, 말만 해요. 내 소개팅 주선 해 줄게요.

 

누나 정도면 다들 좋아할 거에요."

 

"후후, 생일 한 번 모르고 지나쳤다고 좋아하는 사람을 바꾸냐. 니가 그 얘기를 하니까 은정이가 생각이 난다."

 

"은정이가 누군데요?"

 

"나와 동긴데, 과에 관심이 별로 없었는지, 아니면 다른 일 때문인지 작년 겨울에 외국 나갔다 아직 돌아 오지 않은 애가 있어."

 

"근데 걔가 왜 생각이 나는데요?"

 

"걔라니, 누나 친구 보고."

 

"쏘리."

 

"걔가 우리과 퀸카였어. 근데 남자 친구를 사귀면 길면 두달, 짧으면 일주일도 못가서 깨지더라. 물론 걔가 찬 것이지만."

 

"나쁜 년이네. 남자를 쉽게 생각 하다니."

 

"그래, 그 나쁜 년이 내 제일 친한 친구다. 너 누나랑 맞먹을려는 경향이 있어.

 

누나 친구보고 년이라니."

 

"근데 그 누나가 왜 생각이 나는데요."

 

"니가 나에게 남자 소개 시켜 준다고 그러니까. 나 애인 있잖아. 내가 체인징 파트너니. 나는 옅을지라도 길게 사귈거야. 그게 편할 거 같아."

 

"체인징 파트너?"

 

"은정이 별명이야."

 

 

 

잠시간의 시간이 흘렀다.

 

"누나 생일 선물 해 줄거 생각이 났다."

 

"뭔데?"

 

"눈감아 봐요. 정희씨, 내 뽀뽀해 줄게."

 

"뭐야. 정희씨? 이게 맞먹네 진짜."

 

"볼에다 해 줄게 볼에. 놀라긴."

 

"후후, 철수야 난 연하에는 관심 없다."

 

"나도 편하긴 해도 연상에는 관심 없어요. 누나가 좀 쓸쓸해 하는 것 같아서 하는 소리지 뭐."

 

"오른 쪽 볼? 아니면 왼쪽 볼?"

 

"눈감아 봐요. 그건 내 맘이지."

 

철수는 정희가 눈을 감자 댑다 입에다 입을 맞추고서는 문쪽으로 도망치듯 나갔다.

 

"너, 이씨."

 

"에이. 입만 살짝 맞춘건데 왜 그래요. 내가 손해지. 누나는 내가 고려해 볼 맘이 있으니까 나중에 애인한테 차이게 되면 나 찾아 와요. 그때까지 내가 이렇게 솔로로 있진 않겠지만."

 

열린 문으로 고개를 내민채 철수가 장난스런 말을 뱉었다.

 

"내가 차일 일은 없겠지만 미팅 가서 항상 바람 맞는 넌 솔로일 가능성이 크겠다."

 

"내가 이래뵈도 우리과 킹카에요. 여학생이 없어서 그렇지. 내일 봐요."

 

"그래 잘난 철수야 잘 가. 나중에 은정이 오면 소개시켜 줄게."

 

"연상은 관심 없어요. 제 또래를 소개시켜 달란 말이에요. 제 또래를..."

 

"관심 없어도 같은 동아리니까 자주 보게 될거야."

 

 

 

1994년 이월 달이었다. 철수는 자취하는 방을 그대로 둔 채 방학 동안은 계속 집에 있었다. 어쩌다 하루 학교를 가게 되어도 자취방에서 자지는 않았다. 철수는 수강 신청을 할 겸 학교를 갔다. 그제 내렸던 눈이 이제야 녹기 시작했다. 곳곳에 눈이 죽은 흔적으로 지저분 했다.

 

철수는 혹시 아는 놈을 만날 까 두리번 거리면서 이제 막 약대와 마주 보고 있는 학생회관을 지나쳤다. 공대는 아직 멀었다.

 

철수가 혼자 걷고 있는데, 외제차 한대가 자기를 지나치면서 녹은 눈을 철수 쪽으로 튀겼다. 철수는 바지를 버렸다. 운전사는 그 사실을 몰랐는지 차를 세우지 않았다.

 

"뭐야 이씨. 니가 고급차면 다야. 바지 물어 내, 씨."

 

철수는 그렇게 투덜 거리면서 차 뒷창문에 대고 알밤을 깠다. 운전사가 백미러로 그걸 본 모양이었다. 차를 세웠다. 철수는 차가 멈추자 그리로 뛰어갔다. 따질 생각이었다. 근데 차에서 내린 사람을 보고 별말 하지 못했다. 운전한 사람은 아주 예쁜 아가씨였다. 내 누누히 말했지만 철수가 별말 하지 못했던 이유는 여자가 예쁘면 많은 것에 용서를 받는 안타까운 현실 때문이었다.

 

"왜 이상한 제스춰를 보냈던 거에요?"

 

"예?"

 

"보니까 어려 보이는데, 몇학번이에요?"

 

"저요? 저 93학번인데요."

 

"조심해요. 이제 93학번이면서 아무나 보고 하는 그런 나쁜 제스춰는 좋지 못해요."

 

"그게 아니라."

 

"나보고 한 게 아니라 변명할 셈이에요? 그래도 내가 봤으니까 기분이 좋지 못하네요. 나는 댁보다 이 년 선배에요. 앞으로 조심 하세요."

 

"네."

 

여자의 태도는 차분하고 고자세였다. 철수는 따지려다 야단만 맞았다.

 

""내가 왜 저 여자에게 야단을 맞았을까? 난 바지를 다 버렸는데...""

 

여자는 차를 약대 앞 어느 곳에 세우더니 철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철수는 눈치를 살피며 그 차 있는 곳으로 갔다. 눈 때문이었는지 차의 겉모습이 그렇게 깨끗하지 못하다.

 

""제법 비싼 차군. 베엠베 삼이공아이. 누구야 근데.""

 

철수는 그 차를 동전으로 긁어 버릴 생각으로 다가 갔으나 그러지는 못했다. 그냥 손가락으로 아주 긴 문장만 적어 놓고 떠났다.

 

""니가 나이가 많으면 많았지 왜 날 야단치는 거야. 고급차 타고 다니면 다냐.

 

울 아버지도 자가용 있다. 내 바지 물어내라 이 뇬아. 니 잘난 자가용이 흙탕물을 튀겨 내 잘난 바지를 엉망으로 만들어 놨다 이뇬아. 니가 예쁘면 다냐? 우리 뒷집 쌈쟁이 할매도 젊었을 땐 예뻤었다더라. 너도 늙어 그 할매처럼 되지 않으란 법이 있냐? 앞날이 훤하다. 잘난 척 하지 마라. 내 바지 어떡할겨. 철수가. 철수가 누군지 궁금할거다. 알려고 하지마 다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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