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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필독]사랑(love) 안에만 시기(jealousy)가 있을 수 있고, 시기 안에만 질투(envy)가 있을 수 있다[교차번역오류]1035_질투 1032_heart 773_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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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vs질투 -12 [218.55.90.*]

2014-02-02 ㅣ No.1515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질문 1:

 

(i) 사랑(love), (ii) 시기(jealousy), 그리고 (iii) 질투(envy),

 

이들 셋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요?

--------------------


당부의 말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글들은 어떤 특정인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하여 마련된 글들이 결코 아니기에, 다음의 당부의 말씀을 드립니다:

(1) 지금까지 필자의 글들을 읽고서 필자에 대한 "분노(anger)" 혹은 "질투(envy)"를 가지게 된 분들은, 혹시라도 그분들께 "걸림돌(stumbling block)"일 수도 있는, 많이 부족한 죄인의 글들을 더 이상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2) 그리고 위의 제(1)항의 당부의 말씀을 읽고도 굳이 이 화면의 아래로 스스로 이동하여, 많이 부족한 죄인의 아래의 본글을 읽는 분들은, 필자에 대한 "분노(anger)"와 "질투(envy)" 둘 다를 가지지 않을 것임에 동의함을 필자와 다른 분들께 이미 밝힌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3) 그리 길지 않은 인생 여정에 있어, 누구에게나, 결국에, "유유상종[類類相從, 같은 무리끼리 서로 사귐 (출처: 표준국어대사전)]"이 유의미할 것이라는 생각에 드리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 찬미 예수님!

 

질문 1에 대한 간략한 답변 시작:

 

예! 있습니다. 즉,

 

질투(envy)는 오로지 시기(jealousy) 안에만 있을 수 있고,

그리고 시기(jealousy)는 오로지 사랑(love) 안에만 있을 수 있다

 

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사랑(love)

애덕(charity, caritas)으로 더 많이 채워질수록,

질투(envy)는 더 많이 소멸될 수 있습니다.

 

(이상, 질문 1에 대한 간략한 답변 끝)

 

게시자 주: 한자 낱 글자들의 어원을 밝히고자 마련된 아래의 제2-2항과 제2-6-3항은, 이 글의 작성 과정에 있어, 2014년 2월 15일자 이전의 제일 마지막 단계에서 작성되었습니다.

 

1. 들어가면서

 

이번 글에서는 이들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더 상세하게 함께 고찰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다음을 항상 유념하실 것을 요청드립니다:

 

(i) 성경과 가톨릭 교회 교리서를 포함하는 가톨릭 보편 교회의 핵심 문헌들은 모두 번역서들이다.

 

(ii) 따라서, 이들 번역서들에서 사용되고 있는 우리말 차용(借用) 번역 용어들의 의미(meaning)/정의(definition)는, 원 용어들의 의미(meaning)/정의(definition)와 동일하도록, 우리말로 또한 정의되어야 한다(must be defined).

 

(iii) 그리고 이를 위하여, 가톨릭 보편 교회의 핵심 문헌들의 여러 지역 언어들로 번역된 번역본들에서의 차용(借用) 번역 용어들의 의미(meaning)/정의(definition)를, 원 용어들의 자구적 어원/어근들에 근거하여, 서로 정밀하게 비교/검토하여야 한다.

 

(iv) 이 때에 특히 동일한 어원/어근을 잘 보존하고 있는 지중해 문화권의 여러 지역 언어들(여기에는 영어가 포함됨)로 번역된 번역본들은 마땅히 우선적으로 존중되어야 하며, 그리고 중국에서 모국어인 한문으로 번역된 번역본들에서 이미 정의된(already defined), 차용(借用) 한자 용어들은, 라틴어가 지중해 지역의 여러 언어권들에서 여전히 존중되고 있는 정도와 마찬가지의 수준으로, 한자 단어들을 차용(借用)하여 사용 중인 한문 문화권의 여러 지역 언어권들에서 마땅히 존중되어야 한다.

 

(v) 세속의 문학 작품들이 아닌 가톨릭 보편 교회의 핵심 문헌들에서 사용중인 신학적 용어들의 지역 언어로의 번역시에, 특정 지역 언어로 번역되기 이전에 이미 정의되어 있는(is defined) 이들 가톨릭 그리스도교 신학적 용어들의 정의(definition) 및 가톨릭 보편 교회 교도권 제공의 교의(dogmas)들, 교리(doctrines)들, 그리고 기타 가르침(teachings)들의 내용에 위배되지 않도록 그리고, 더 나아가, 상당한 세월이 흐르고 난 이후에도 이들의 내용과 충돌의 가능성이 발생하지 않도록, 차용(借用) 번역 용어를 선정할 때에 특히 초벌 번역자는, 언어 장벽과 문화 장벽에 기인하는 개념 전달 장애/오류를 극복하기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vi) 용어 번역을 하면서 기존에 사용하고 있는 단어를 차용(借用)하더라도, 해당 번역 용어에 대응하는 원 언어 표현의 자구적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는 것은, 개념 전달을 정확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대단히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이는,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맨날 하는 이야기이지만,

 

하느님께서는 개념(concept)을 앞서고,

개념은 언어(language)를 앞서며,

그리고 언어는 문법(grammar)을 앞서기 때문입니다.

 

다들 잘 알고 계시겠지만, 정의(definition)에 의하여, 교의(dogmas, 계시 진리)들로부터 연역적 추론에 의하여 도출되는 개념들을 말하는 가톨릭 그리스도교 교리(doctrines)들, 어느 특정 지역 언어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는 것들이 결코 아니며, 따라서 특정 지역 교회 안에서 번역 용어의 선정 단계에서 잘못 선정된 차용(借用) 번역 용어 때문에 발생하는 개념 전달 장애/오류(error)라는 잘못은, 그 다음 단계들인, 그리고 세월따라 변하는, 지역 언어 혹은 지역 언어의 문법, 즉 "어법(語法) 단계"에서 결코 바로 잡아질 수 없음에 반드시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더구나 예상 밖의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표준국어대사전에 주어인 猜忌(시기)에 대한 설명 자체가 "전와(轉訛, 어떤 말이 본래의 뜻과 달리 전해져 그릇되게 굳어짐)"인 경우로 파악되고 있습니다(아래의 제2-6-3항을 필독하십시오)

 

2. 이 글에서 사용 중인 차용(借用) 번역 용어들의 정의(definition)에 대한 고찰

 

2-1. "사랑(love)"이라는 차용(借用) 번역 용어의 정의(definition)는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에 주어져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374.htm <----- 클릭하여 꼭 읽도록 하십시오

 

2-2. 이번 항에서는 "한문 문화권"에서 철학서로 널리 알려진, 유학(儒學)의 4서5경(四書五經)들 중의 하나인, 역경(易經), 즉, 주역(周易)의 영어본 본문 중에서 jealousyenvy라는 번역 용어들이 사용되고 있는  영어본 괘사(卦辭)와 효사(爻辭)들을 찾아서, 이에 대응하는 주역(周易) 본문 중의 해당 괘사(卦辭)와 효사(爻辭)들을 찾아내어, 이들 한문 문장들을 함께 고찰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고찰은, 우리들이 우리말 명사, 형용사, 혹은 동사의 구성 요소로서, 평소에 접하는 한자 낱 글자의 어원과 그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인 것이지, 그 이상의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게시자 주 2-2: 갑자기 역경(易經), 즉, 주역(周易)의 본문을 왜 들여다 보는지에 대항 궁금해 하실 분들도 계실 것 같아, 이 점에 대하여,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평소에 알고 있는 바에 대하여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는, 중국의 상(商)나라, 즉 은(殷)나라 말기(기원전 1046년경) 혹은 주(周)나라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대단히 오래된 한문 문헌으로서 지금까지 그 전체 본문뿐만이 아니라 이 문헌에 대한 대단히 많은 양의 주석들이 잘 보존되어 있는 유학(儒學)의 경전이, 그리고 공자님(기원전 551-479년)이 마지막 저자인 문헌이, 바로 바로 이 역경(易經), 즉, 주역(周易)이며, 그리고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들여다 보고 약간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문헌이 바로 이 문헌이기 때문입니다. 

 

2-2-1. 다음의 출처 2를 클릭하면, 영어본 주역(周易) 제41번째 괘(卦)인 산택손(山澤損) line-3(六三)에 jealousy 라는 번역 용어가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출처 1: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출처 2: http://www.jamesdekorne.com/GBCh/hex41.htm

(발췌 시작) 

41 -- Compensating Sacrifice -- 41

 

 

HEXAGRAM NUMBER FORTY-ONE --

COMPENSATING SACRIFICE

 

Line-3

 

Legge: The third line, magnetic, shows how of three men walking together, the number is diminished by one; and how one, walking, finds his friend.

Wilhelm/Baynes: When three people journey together, their number decreases by one. When one man journeys alone, he finds a companion.

Blofeld: If three set forth together now, one will be lost on the way; whereas one man going forth alone will find company.

Liu: Three people walking together will lose one. When one walks alone, he will meet a friend.

Ritsema/Karcher: Three people moving, by-consequence Diminishing the-one-person. The-one-person moving. By-consequence acquiring one's friend.

Shaughnessy: If three men move then they will decrease by one man; if one man moves then he will obtain his friend.

Cleary (1): Three people traveling are reduced by one person; one person traveling finds a companion.

Cleary (2): … One person traveling gets companionship.

Wu: When three persons walk, one will be left out. When one walks alone, he will find a friend.

 

COMMENTARY

Confucius/Legge: When three are together, doubts(疑) arise among them. Wilhelm/Baynes: If a person should seek to journey as one of three, mistrust(疑) would arise. Blofeld: It is well to travel alone now, as three would give rise to suspicion(疑). Ritsema/Karcher: Three by-consequence doubting(疑) indeed. Cleary (2): When one person travels, three then doubt. Wu: Three would create doubts(疑).

The Master said: "Heaven and earth come together, and all things take shape and find form. Male and female mix their seed, and all creatures take shape and are born. In the Book of Changes it is said: `When three people journey together, their number decreases by one. When one man journeys alone, he finds a companion.' This refers to the effect of becoming one."

Legge: Chu Hsi says that the lower trigram was originally three yang lines, like "three men" walking together, and that the third line was removed and made into the topmost line of the upper trigram which was originally three yin lines. This exchange of places between lines three and six maintains their proper correlation and suggests the proper pairing of affinities. The K'ang-hsi editors observe that this line is true not only of three men, but of many repetitions of thought or action.

 

NOTES AND PARAPHRASES

Siu: A close bond is possible only between two persons. A group of three engenders jealousy. The lone man finds a complementary companion.

Wing: The closest bonds are now possible only between two persons. Groups of three create jealousy and mistrust(疑) and will eventually splinter. Yet someone who remains alone becomes lonely and will seek a companion. It is time to strike a proper balance.

Editor: The original condition described by Chu Hsi is an image of hexagram number eleven, Harmony, which represents the correct union of male and female forces. Psychologically the Syzygy archetype is suggested: the proper pairing of male and female which is seen in its supreme state in the hieros gamos or holy marriage. (See commentary on hexagram eleven for further detail.) A dialectical process is also implied.

God unfolds himself in the world in the form of syzygies (paired opposites), such as heaven/earth, day/night, male/female, etc ... At the end of this fragmentation process there follows the return to the beginning, the consummation of the universe through purification and annihilation.
Jung -- Aion

A. The image suggests a sorting-out of affinities to attain balance or unity. Forces are seeking their natural level.

B. "Birds of a feather flock together."

(이상 발췌 끝)

 

출처 3: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발췌 시작)

                   41_산택손(山澤損)

 

損(손) : <손>은

有孚元吉(유부원길) : 믿음을 두면 크게 길하고

无咎可貞(무구가정) : 허물이 없어서 가히 바름이라.


利有攸往曷之用(이유유왕갈지용) : 가는 바를 둠이 이로우니, 어디에 쓰리요,

二?可用享(이궤가용향) : 두 대그릇에 가히 써 제사지내느니라.


彖曰(단왈) : 단에 이르기를

損損下益上(손손하익상) : 손은 아래를 덜어 위를 더하여

其道上行(기도상행) : 그 도가 위로 행함이니,

損而有孚(손이유부) : 손괘의 도리를 지켜 성의가 있으면

元吉无咎(원길무구) : 크게 길하여 허물이 없다

可貞利有攸往(가정이유유왕) : 꾸준한 마음이 변함이 없게 하라 그러면 하는 일에 이로우니라

曷之用二?可用享(갈지용이궤가용향) : '갈지용이궤가용향'은

二?應有時(이궤응유시) : 두 대그릇이 마땅한 때가 있으며,

損剛益柔有時(손강익유유시) : 손괘에서 <剛>을 덜어 <柔>에 더함에 때가 있으니,

損益盈虛(손익영허) : 덜고 더하고 차고 비는 것을

與時偕行(여시해행) : 때에 따라 함께 행함이라.


象曰(상왈) : 상에 이르기를

山下有澤損(산하유택손) : 산아래 못이 있는 것이 손괘의 괘상이니,

君子以懲忿窒欲(군자이징분질욕) : 군자가 이로써 성냄을 징계하며 욕심을 막느리라.


初九(초구) : 초구는

已事湍往无咎(이사단왕무구) : 일을 마치거든 빨리 가야 허물이 없으리니,

酌損之(작손지) : 참작하여 더느니라.


象曰(상왈) : 상에 이르기를

已事湍往(이사단왕) : '이사단왕'은

尙合志也(상합지야) : 위와 뜻이 합함이라.


九二(구이) : 구이는

利貞征凶(이정정흉) : 바르게 하는 것이 이롭고 가면 흉하니,

弗損益之(불손익지) : 덜지 말아야 보탬을 받느니라.


象曰(상왈) : 상에 이르기를

九二利貞(구이이정) : '구이이정'은

中以爲志也(중이위지야) : 중정으로써 뜻을 삼음이라.


六三(육삼) : 육삼은

三人行則損一人(삼인행칙손일인) : 세사람이 가면 [의심이 생겨] 곧 한사람을 덜고,

一人行則得其友(일인행칙득기우) : 한사람이 가면 벗을 얻어 협력할 수 있다.


象曰(상왈) : 상에 이르기를

一人行(일인행) : '일인행'은

三則也(삼칙의야) : 이 되면 곧 의심하리라.


六四(육사) : 육사는

損其疾(손기질) : 그 병을 덜되,

使?有喜无咎(사천유희무구) : 빨리하게 하면 기쁨이 있어서 허물이 없으리라.


象曰(상왈) : 상에 이르기를

損其疾(손기질) : '손기질'하니

亦可喜也(역가희야) : 또한 가히 기쁘도다.


六五(육오) : 육오는

或益之十朋之(혹익지십붕지) : 혹 더하면 열 벗이라.

龜弗克違元吉(귀불극위원길) : 거북점을 하여도 어기지 아니 하리니 크게 길하니라.


象曰(상왈) : 상에 이르기를

六五元吉(육오원길) : '육오원길'은

自上祐也(자상우야) : 위로부터 도우니라.


上九(상구) : 상구는

弗損益之(불손익지) : 덜지말고 더하면

无咎貞吉(무구정길) : 허물이 없고 바르게 하여 길하니

利有攸往(이유유왕) : 가는 바를 둠이 이롭다


得臣이 无家ㅣ리라.

득신    무가

신하를 얻음이 집이 없으리라.


象曰(상왈) : 상에 이르기를

弗損益之(불손익지) : '불손익지'는

大得志也(대득지야) : 크게 뜻을 얻음이라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2-2-1: 위에 굵게 표시된 한문 문장과 영어본 문장들을 서로 비교/검토하면 다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세 사람이 함께 여행하면 [삼각관계 안에서] 의심/의혹이 발생하여 한 명이 줄어든다는 내용이며, 그리고 疑(의) jealousy 로 번역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여기를 클릭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 猜(시) 의 자구적 의미(literal sense)가 또한 의심함(疑), 어함(恨)을 뜻하므로, 猜(시)도 또한 영어로 jealousy 로 번역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jealousy 猜(시)로 번역될 수 있음을 또한 알게 되었는데, 또 다른 한편으로, 삼각관계에서 경쟁(rivalry, emulation; 라틴어 aemulatio) 끝에 발생하는 jealousy 라는 단어의 정의(definition) 그 자체에 의하여jealousy 猜(시)로 번역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아래의 제3항, (iii)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2월 16일]

(3) 그리고 다음의 漢典에 주어진  글자에 대한 설명 제(7)항은  이 글자가 시기(猜忌, 의심하고 꺼림)를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출처: http://www.zdic.net/z/1f/xs/7591.htm

(발췌 시작)

...

 

(7) 疑忌;猜忌 [be suspicious and jealous]

(이상, 발췌 끝)

[이상, 내용 추가 끝]

 

2-2-2. 다음의 출처 2를 클릭하면, 영어본 주역(周易) 제50번째 괘(卦)인 화풍정(火風鼎) line-2(九二)에 envy 라는 번역 용어가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출처 1: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출처 2: http://www.jamesdekorne.com/GBCh/hex50.htm

(발췌 시작)

50 -- The Sacrificial Vessel -- 50

 

 

HEXAGRAM NUMBER FIFTY --

THE SACRIFICIAL VESSEL

Line-2

 

Legge: The second line, dynamic, shows the cauldron with the things to be cooked in it. If he can say, "My enemy dislikes me, but he cannot approach me," there will be good fortune.

Wilhelm/Baynes: There is food in the cauldron. My comrades are envious, but they cannot harm me. Good fortune.

Blofeld: The Ting possesses solidity. My enemies are in difficulty and there is nothing they can do to me -- good fortune!

Liu: The cauldron is filled with food. My associates are jealous, but they cannot harm me. Good fortune. [Even though a person profits from his business or performs his work carefully and well, he should still beware lest others harm or disturb him.]

Ritsema/Karcher: The Vessel possesses substance. My companion possesses affliction. Not me able to approach. Significant.

Shaughnessy: The cauldron has substance: my enemy has an illness; it is not able to approach me; auspicious.

Cleary (1): The cauldron is filled. One’s enemy is jealous, but cannot get at one; this is lucky.

Cleary (2): The cauldron has content. My enemy is afflicted, but luckily cannot get to me.

Wu: The cauldron is full. My associates have ill feelings about me, but they cannot do anything to me. This is auspicious.

 

COMMENTARY

Confucius/Legge: Let the subject of the line be careful where he goes. My enemy dislikes me, but there will in the end be no fault to which he can point. Wilhelm/

Baynes: Be cautious about where you go. This brings no blame in the end. Blofeld: The first sentence indicates a need for caution. "My enemies are in trouble" indicates that I shall remain blameless to the end. Ritsema/Karcher: Considering places it indeed. Completing without surpassing indeed. Cleary (2): Being careful about where one goes. After all there is no resentment. Wu: Be mindful of where to go. There will be no resentment in the end.

Legge: The enemy is the first line which solicits. Line two is able to resist the solicitation, and the auspice is favorable.

 

NOTES AND PARAPHRASES

Siu: The man achieves great success, thereby incurring the envy of others. No harm will come to him, since he is not distracted from his purpose.

Wing: You may feel a need to stand apart from your fellow man to achieve a significant aim. Such a stance will invite envy, but this will not create a problem for you. Good fortune is indicated.

Editor: If the Sacrificial Vessel is seen as an analogue of the psyche, it is easy to see this line as a commentary on not allowing inner forces (appetites, passions, emotions, etc.) to overcome the ego's control of the Work. Note that the Wilhelm, Blofeld and Liu translations are not conditional like Legge's: "If he can say..." Liu's note is derived from the Confucian commentary, which seems unduly grave: note that the original line is not overtly cautionary. Generally, you are protected despite any perceived threats.

The Oracles urge men to devote themselves to things divine, and not to give way to the promptings of the irrational soul, for, to such as fail herein, it is significantly said, "Thy vessel the beasts of the earth shall inhabit."
W.W. Westcott -- The Chaldean Oracles of Zoroaster

A. The situation is favorable, but you must be on guard to maintain it.

B. Divisive forces covet that which is under your control, but cannot harm you if you are careful.

C. Your idea has merit. (A cauldron with food in it.) Develop it carefully and don't get carried away. (Protect it from the enemies of doubt, over-enthusiasm, etc.)

(이상, 발췌 끝)

 

출처 3: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발췌 시작)

                        50_화풍정(火風鼎)

 

鼎(정) : 정은

元吉亨(원길형) : 크게 길하여 형통하니라.


彖曰(단왈) : 단에 이르기를

鼎象也(정상야) : <정>은 형상이니,

以木巽火亨?也(이목손화형임야) : 나무로써 불을 들여서 밥을 삶으니

聖人亨(성인형) : 성인이 삶아서

以享上帝(이향상제) : 상제께 제사 올리고,

而大亨(이대형) : 크게 삶아서

以養聖賢(이양성현) : 성현을 기르느니라.

巽而耳目聰明(손이이목총명) : 겸손하고 귀와 눈이 총명하며,

柔進而上行(유진이상행) : <유화한 자>가 나아가 높은 자리로 가고

得中而應乎剛(득중이응호강) : <중정>을 얻어 강에 응함이라.

是以元亨(시이원형) : 이로써 크게 형통하니라.


象曰(상왈) : 상에 이르기를

木上有火鼎(목상유화정) : 나무위에 불이 있는 것이 정괘의 괘상이니,

君子以正位凝命(군자이정위응명) : 군자가 자리하여 바로해서 천명을 완수한다.


初六(초육) : 초육은

鼎顚趾(정전지) : 솥이 발꿈치가 엎어지나

利出否(이출부) : 비색한 것을 내놓는 것이 이로우니,

得妾以其子无咎(득첩이기자무구) : 첩을 얻으면 그 자식으로써 허물이 없어지리라.


象曰(상왈) : 상에 이르기를

鼎顚趾未悖也(정전지미패야) : '정전지'나 거스리지 아니함이요,

利出否以從貴也(이출부이종귀야) : '이출부'는 귀한 것을 좇음이라.


九二(구이) : 구이는

鼎有實(정유실) : 솥에 실물이 있으니

我仇有(아구유) : 내 원수는 이 들었으니 [주: 아래 게시자 주 (2)의 우리말 번역을 보라]

不我能卽吉(부아능즉길) : 나를 능히하지 못하니 길하리라.


象曰(상왈) : 상에 이르기를

鼎有實(정유실) : '鼎有實'이나

愼所之也(신소지야) : 삼가해서 가는 바를 삼가야 한다

我仇有(아구유) : '我仇有'하니

終无尤也(종무우야) : 마침내 허물이 없어지리라.


九三(구삼) : 구삼은

鼎耳革(정이혁) : 솥귀가 고쳐서

其行塞(기행색) : 그 행함이 막혀서

稚膏不食(치고부식) : 꿩의 기름을 먹지 못하나,

方雨(방우) : 바야흐로 비 내려서

虧悔終吉(휴회종길) : 뉘우침이 이그러져 마침내 길하게 되리라.


象曰(상왈) : 상에 이르기를

鼎耳革(정이혁) : '정이혁'은

失其義也(실기의야) : 그 뜻을 잃음이라.


九四(구사) : 구사는

鼎折足覆公?(정절족복공속) : 솥이 다리가 부러져서 공의 밥을 엎으니,

其形渥凶(기형악흉) : 그 얼굴이 젖음이라 흉하니라.


象曰(상왈) : 상에 이르기를

覆公信如何也(복공신여하야) : '복공속'하니 믿음이 어떠하리오.


六五(육오) : 육오는

鼎黃耳金鉉(정황이김현) : 솥이 누런 귀에 금 고리니

利貞(이정) : 바르게 힘이 이로우니라.


象曰(상왈) : 상에 이르기를

鼎黃耳(정황이) : '정황이'는

中以爲實也(중이위실야) : 중정서 실물이 있음이라.


上九(상구) : 상구는

鼎玉鉉(정옥현) : 솥이 옥고리이니

大吉无不利(대길무부리) : 크게 길해서 이롭지 아니함이 없느니라.


象曰(상왈) : 상에 이르기를

玉鉉在上(옥현재상) : '옥현재상'은

剛柔節也(강유절야) : 강과 유가 절제함이라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2-2-2: 위에 굵게 표시된 한문 문장과 영어본 문장들을 서로 비교/검토하면 다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疾(질) 嫉(질)의 옛 글자임은, 다음의 康熙字典(강희자전)疾(질)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출처: http://ctext.org/dictionary.pl?if=en&char=%E7%96%BE

(발췌 시작)

...


又與通。

(이상, 발췌 끝).

 

[내용 추가 일자: 2-14년 2월 16일]

게시자 주 (1): 또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소장 중인 1981년 판 민중서림 출판의 한한대자전(韓韓大字典) 제842쪽에 주어진 글자의 설명에는, "대학(大學)""而惡之" 라는 표현에서 글자가  嫉 글자와 동일하다는 설명이 주어져 있는데, 이것은 또한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의 제四항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출처: http://www.bsm.org.cn/show_article.php?id=1402

(발췌 시작)

簡帛網>>簡帛文庫>>楚  簡

讀《?華大學藏戰國竹簡(壹)》書後(四)

黃人二、趙思木[搜索該作者其他文章]

(華東師範大學中文系)

(首發)

 

...


四、《祭公》簡一六之“息”
  (1)簡文詞例是:“汝毋以嬖御息?(爾)莊句(后),汝毋以小謀敗大作,汝毋以?(嬖)士息大夫,卿、士。”(2)相同的話,在今本《逸周書·祭公解》云:“汝無以嬖御固莊后,汝毋以小謀敗大作,汝無以嬖御士疾大夫、卿、士。”[12](3)而《禮記·緇衣》引,又作:“《葉(祭)[13]公之顧命》曰:‘毋以小謀敗大作,毋以嬖御人疾莊后,毋以嬖御士疾莊士大夫、卿、士。’”[14](4)郭店竹簡《緇衣》則作:“《祭[15]公之顧命》曰:‘毋以小謀敗大圖[16],毋以嬖御息(塞)莊后,毋以嬖士息(塞)大夫、卿、事(士)’。”[17]?華簡整理者對簡文兩個“息”字,都逕釋讀?“塞”。(《?華大學藏戰國竹簡(壹)》第一七四至一七五頁。)大?是受了郭店簡整理者意見的影響。(《郭店楚墓竹簡》第一三四頁。)
  案,今本《逸周書》在第一個“息”字(其實應該說相當於“息爾”的位置)所在的位置,作一“固”字,王念孫云:“固讀??,音護。《說文》:‘?,?也。’《廣雅》作‘?’,云:‘嫉,?,?,妬也。’是?與嫉妬同義。言汝母以寵妾嫉正后也。?之通作固,猶嫉之通作疾。下文曰‘女無以嬖御士疾莊士大夫、卿士’,疾亦固也,《緇衣》引此作‘毋以嬖御人疾莊后’,是其證。”[18]不管是“息莊后”或“息爾莊后”,“息”字還是訓?“嫉妬”之義較佳。“塞”古心母、之部,“息”古心母、之部,“疾”古從母、脂部,以聲韻來看,“息”、“塞”二字聲韻皆同,似乎互?通假,最?理想,但是,楚系簡牘中,之、脂互押是?常見的(有方言的因素存焉),重要的是,宜以訓?上應該作?某一種意思,來限定原字要通假?何字,這裡還是訓?“嫉妬”,要優於訓?“阻塞”、“禁塞”。是以,簡文此處兩“息”字,疑應通假?“疾”,亦?“嫉”,訓?“嫉妬”,《?書·秦誓》云:“人之有技,冒疾以惡之。”[19]“冒”?“?”,“疾”?“嫉”,義皆相同,而詞例正可互?對照,《禮記·大學》引正作“?嫉以惡之”,[20]竹簡本《皇門》簡九至簡十有云:“是人斯乃讒[21][22]□□。”所缺的兩字,疑正應作“?嫉”。傳世本《緇衣》和《祭公解》經過兩千餘年的流傳,經過名家的精校,還是有可?的水平令人信從的。

(이상, 발췌 끝)

[이상, 내용 추가 끝]

 

(2) 따라서, 九二에서, 삼각관계가 아니고, 한 사람과 그의 원수라는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我仇有(아구유) : 내 원수는 병이 들었으니

不我能卽吉(부아능즉길) : 나를 능히하지 못하니 길하리라.

 

이 아니고

 

我仇有(아구유) : 나의 원수가 질투(嫉妬, envy)에 있으니,

不我能卽吉(부아능즉길) : 내가 가히 가까이 하지 않을 수 있으면 길하리라.

 

입니다. 그리고 지금 말씀드린 바대로, Wilhelm/Baynes에 의한 영어본 주역(周易) 제50번째 괘(卦), 화풍정(火風鼎) 九二 본문에서 envy로 번역하였음을 또한 우리는 위의 영문본에서 확인하였습니다.

 

(3) 그리고 다음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소장 중인 Wilhelm/Baynes에 의한 영어본 주역(周易)제50번째 괘(卦), 화풍정(火風鼎) 九二 본문에 바로 이어지는 설명 전문입니다:

 

(발췌 시작)

In a period of advanced culture, it is of the greatest importance that one whould achieve something significant. If a man concentrate on such real undertakings, he may indeed experience envy and disfavor, but that is not dangerous. The more he limits himself to his actual achievements, the less harm can the envious inflict on him.

 

진보된 문화의 시기에는, 우리가 주목할만한 그 무엇을 성취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게 됩니다. 한 사람이 그가 정말로 질투(envy)싫어함(disfavor)을 경험할 수도 있는 바로 그러한 실제적 떠맡은 일들에 집중하면, 그러나 바로 그러한 경험은 위험하지 않습니다. 그가 자기 자신을 자신의 실제적 성취들에 더욱 더 제한할수록, 질투하는 자들은 그에게 더욱 더 적게 해를 끼칠 것입니다(can).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4)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년) 선생님의 문집인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수록된, 주역사전(周易四箋)에 나열된 8가지의 질병례(疾病例)들에 제시된, 화풍정(火風鼎) 九二에 대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선생님의 주석은 다음과 같은데, 또한 이 주석으로부터 우리는, [십익(十翼)으로 불리는, 소위 말하는, 주역(周易)의 부록을 구성하는, 열 개의 문헌들 중의 한 개인 설괘문(說卦文)에서 심병(心病)이라고 설명되고 있는] 疾(질) 이, 화풍정(火風鼎) 九二에서,  嫉(질, 질투, envy)를 말함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출처: 周易四箋口訣, 茶山 丁若鏞 著, 涵齋 金在泓(1916-2006년) 口訣(**), 이회출판사, 제273쪽.  

(발췌 시작)

鼎九二는 我仇가 有이니  愼所之也니라.

 

화풍정(鼎) 구2(九二)는 내 원수가 질투(疾)에 있으니 [그의 질투를] 두려워함(愼)이 마땅하니라(所).

 

-----
(*) 게시자 주: 더 나아가, 다산 정약용 선생님께서 주역사전(周易四箋)의 초벌을 마련하셨던 시기는, 조선의 제22대 임금인 정조(正祖) 대왕의 승하 이듬 해인 1801년에 시작된 신유박해 때문에, 당신의 외가가 있는 강진(康津)으로 귀양간 이후 첫 몇 년 동안이었으므로, 이보다 훨씬 일찍인 소년 시절에, 예수회 소속의 선교사 신부로서 명나라 말기에 중국에 파견되었던 판토하(1571-1618년) 신부가 원 저자인 "칠극(七克)" 을, 큰형의 처남이며 여덟 살 위인, 한국 천주교 창립성조인 이벽 성조로부터 학습하셨을 것이기에 [주: 예를 들어, 다산 정양용 선생님께서 정조 대왕께 중용강의(中庸講義)를 제출하였는데 이 또한 이벽 성조로부터 배운 것이라고 알려져 있음], 다산 정약용 선생님께서 바로 이 주석을 남기는 데에 더 더욱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지적과 관련하여, 특히 다음의  "칠극(七克)""평투(平妬: 질투를 다스린다)" 편을 꼭 읽도록 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429.htm <----- 필독 권고

 

(**) 게시자 주: 이 책이 마련되게 된 역사적 배경은 다음과 같다: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1981년 봄부터 1984년 초봄까지 약3년간의 기간동안, 서울 성균관대학교 뒤편의 涵齋 金在泓(함재 김재홍) 선생님의 한학 서당에서 매주 두 번씩(토요일과 일요일, 한 번에 약3시간 30분) 茶山 丁若鏞 선생님의 周易四箋을 학습할 당시에 가르침을 주셨던 涵齋 선생님께서 국내 한학계에서는 처음으로 周易四箋 전체를 가르치시면서 직접 마련하셨던 현토(懸吐) 및 구결(口訣)로서 필자가 당시에 涵齋 선생님으로부터 이들을 열심히 행간에 받아적었던 교재였던 周易四箋 사본(주: 당시에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 중이었던 周易四箋을 복사하여 교재로 사용하였음)을 지금도 소장 중인데,(***) 그 당시에 涵齋 선생님에 의하여 마련되었던 周易四箋 전문에 대한 이들 현토(懸吐) 및 구결(口訣)이 드디어 2007년 3월에 이회출판사에 의하여 위의 책명으로 출간된 것이다. 이 현토(懸吐) 및 구결(口訣) 본의 출판을 위하여 수고해 주신 涵齋 선생님의 제자들 모두에게 감사드리며, 특히 그 당시에 필자와 함께 학습하였던 함재 선생님의 수제자였던 건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정운채 교수가 최근에 유명을 달리 한 것이 너무도 가슴이 아파, 涵齋 선생님께서 周易四箋 전문에 대한 현토(懸吐) 및 구결(口訣)을 처음으로 마련하실 당시의 첫 제자들 중의 한 명이었던 필자가 이 게시자 주를 기록으로서 남긴다.

 

(***) 게시자 주: 당시에 학습에 참여하였던 대다수의 분들의 명단도 또한 지금까지 필자가 소중하게 보관 중이다. 그리고 지금 말씀드리는 필자의 기록/증언과 관련하여, 다음의 주소에 있는 서평[제목: 방인, 장정욱, "역주 주역사전", 황병기]의 제270쪽을 또한 참고하라:

http://s-space.snu.ac.kr/bitstream/10371/15117/1/phil_thought_v32_265.pdf

-----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5) 특히 질투(嫉妬, envy)가, 세 사람 사이, 즉 삼각관계의 경쟁(rivalry, emulation; 라틴어 aemulatio)에서 발생하는 猜忌(시기, jealousy)와는 달리, 한 사람과 그의 원수, 이렇게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병(疾)임을 우리가 또한 확인하였음에 주목하십시오.

 

(6) 바로 위의 제(2)-(3)항에서 고찰하였듯이, "嫉妬" 라는 한자 단어 그 자체가 상대방을 해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명나라 말기에 중국에 파견되셨던 예수회 소속 신부님들께서, 그 당시에 이미 이분들이 "한문 문화권"에서 철학서로 널리 알려진, 유학(儒學)의 4서5경(四書五經)들 중의 하나인, 역경(易經), 즉, 주역(周易)을 틀림없이 학습하셨을 것이고, 그리고 또한, 주변의 불교 학승들과 사대부 학자들과의 활발한 학문적 교류를 통하여, 알게 되셨기 때문이라는 생각입니다.  

 

2-3. 명나라 말기에 한문 문화권으로 천주교가 전파될 당시에 선교사들에 의하여 이미 정의된(defined) "질투(envy)"라는 차용(借用) 번역 용어의 정의(definition)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 정의(definition)는 위의 제(ii)항의 조건을 충실하게 만족시키고 있습니다:

 

출처: 가톨릭대사전 http://info.catholic.or.kr/dictionary/view.asp?ctxtIdNum=3358

 

질투 ◆   
한자 嫉妬
라틴어 invidia
영어 envy
출처 : [가톨릭대사전]

   죄원(罪源, capital sins)의 하나인데, 한국 천주교회 용어로는 죄원을 ‘칠죄종’(七罪宗)이라 지칭하여 본죄(本罪) 즉 우리 자신이 지은 죄의 일곱 가지 근원을 가리키며, ‘질투’도 그 중의 하나이다. 다른 사람의 우수함, 행운, 성공에 대해 슬퍼하거나 불만을 느끼는 ‘이웃사랑’에 대한 배반죄이다.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은 자신에게서 빼앗아간 것이라고 보든지, 어떤 부정이 저질러진 것이라고 느끼든지 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질투에 있어 기본적인 것은, 무언가 자신에게서 빼앗아갔다는 느낌이다. 따라서, 질투는 단순히 타인이 재능이나 재산을 소유하고 있음을 슬퍼하는 것만이 아니고, 확실히 자기가 타인과 동일하게 되고자 하거나, 타인을 앞지르려고 하는 야심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성공이 자기에게 재난을 초래하는 경우는 실지로 있을 수 있는 일이므로, 타인의 행복을 슬퍼하는 일이 모두 죄스러운 질투가 된다고는 볼 수 없다. 다만 이기심과 냉혹에서 빚어지는 슬픔이 죄악이다(1고린 10:24, 13:4-6, 갈라 15:26, 1베드 2:1). 다른 사람을 앞지르려고 하는 야심은 칭찬하여 마땅한 경쟁심(emulation)이다.

   질투의 어원은 라틴어 ‘invidia’ 또는 ‘invidere’이며, 그 뜻은 ‘곁눈질로 보다’ 또는 ‘의심쩍은 눈으로 보다’이다. 악마의 질투에 의해서 이 세상에 죄와 죽음이 왔고, 질투로부터 최초의 살해가 시작되었다. 즉 그리스도 유태인에 의하여 살해된 것이다(마태 27:18). 질투는 파괴하는 한에 있어서, 인간의 이기심의 가장 비열한 형식이다. 질투가 애덕(愛德, charity)에 반하는 죄이며, 그 자체가 중죄이지만, 질투의 기본에 완전히 동의했느냐의 여부, 또는 질투의 대상의 대소에 따라서 경중의 차가 있다. 가장 무거운 대죄(大罪)는 타인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초자연의 선물, 곧 완덕(完德)을 슬퍼하는 일이다. 사실상 그다지 중대하지 않은 선(善)에 대한 질투는 단순한 소죄(小罪)에 불과하다. 부도덕한 또는 부정한 계획과 희망이 실패함을 기뻐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게시자 주 2-3:

(1) 위의 가톨릭 대사전에 주어진 envy(라틴어: invidia)의 차용(借用) 번역 용어인 "질투"는 명나라 말기에 중국으로 천주교가 전파될 당시에 중국으로 파견되었던 예수회 소속의 신부님들에 의하여 천주교 교리 혹은 문헌들이 중국어로 번역되어 마련될 때에 이미 선정된 차용(借用) 번역 용어입니다.(*) 예를 들어, 당시의 예수회 소속의 스페인 출신 판토하 신부님의 저서인 "칠극" 에서 이미 사용하고 있는 용어가 바로 "妒"/"妬"(투)입니다. 다음에 있는, 예를 들어, 판토하 신부가 원 저자인 "칠극(七克)""평투(平妬: 질투를 다스린다)" 편이 구체적으로 입증합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429.htm <----- 클릭하여 직접 확인하십시오

 

지금 말씀드린 바에 대하여 조금 더 말씀들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명나라 말기에 중국으로 파견되었던 예수회 소속의 스페인 출신인 판토하 신부님(1571-1618년)의 저서인 "칠극"은, 이벽 성조, 정약전, 정약용 등의 유학자들 사이에서 "서학"으로서 당시에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소재 천진암을 거점으로 하여 강학회 등을 통한 자발적 학습을 하다가, 드디어 그분들께서 천주교 신앙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알고 있으며, 따라서 한국 천주교 창립 시점부터 그리고 천주교 신앙을 증거하였던 수많은 이름 모르는 순교자들에게까지도 우리나라 천주교 핵심 영성 수덕서(修德書)였던 "칠극"은, 오늘을 살고 있는 한국 천주교 신자들이라면 또한 마땅히 일정 수준 이상 그 내용을 잘 알고 있어야 하는, 한국 천주교의 대단히 소중한 가치를 지닌 천주교 영성 문화 유산임을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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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그 당시에, "envy"의 차용(借用) 번역 용어로서 "질투"가 선택된 이유는 "嫉妬" 라는 한자 단어 그 자체가 상대방을 해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명나라 말기에 중국에 파견되셨던 예수회 소속 신부님들께서, 그 당시에 이미 이분들이 "한문 문화권"에서 철학서로 널리 알려진, 유학(儒學)의 4서5경(四書五經)들 중의 하나인, 역경(易經), 즉, 주역(周易)을 틀림없이 학습하셨을 것이고, 그리고 또한, 주변의 불교 학승들과 사대부 학자들과의 활발한 학문적 교류를 통하여, 알게 되셨기 때문이라는 생각입니다. 지금 말씀드린 바를 지지하는(support),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직접 찾아본, 오래 된 문헌적 근거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i) 다음의 주소에 있는, 한글대장경(*) 제공의 ftp 주소에서 치문대역.hwp 제104쪽에 주어진 각주는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2011년 4월 16일자 글에서 이미 말씀드렸던, 질투(妬) 라는 한자 단어에 대한 불교의 문헌 치문의 본문에 주어진 각주입니다:
http://ftp.buddhism.org/Korean/%C7%D1%B1%DB%B4%EB%C0%E5%B0%E6/

【3】害賢曰, 忌才曰. 又徇自名利, 不耐他榮曰嫉妬.
【3】어진 이를 해코지하 것을 이라 하고 재주 있는 이를 시기하는 것을 라 한다. 스스로는 명리를 드러내 자랑하면서 다른 사람의 영예로움은 참지 못하는 것을 嫉妬(질투)라 한다. 

 

-----

(*) 게시자 주:

(1) 한글대장경은 불교 경전의 총서를 말하는 대장경의 여러 경전들을 우리말로 번역한 저총서에 대한 이름이다. 대장경(大藏經), 한역대장경(漢譯大藏經),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한글대장경 등의 명칭들에 대한 안내는 다음에 있다:

http://abc.dongguk.edu/ebti/c1/sub1.jsp 

 

(2) 특히 "질투(妬)" 라는 한자 단어의 의미를 "스스로 명리를 드러내 자랑하면서 다른 사람의 명예로움은 참지 못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define) 있는데, 바로 이 정의(definition)는, 바로 위의 제2-3항에서 전달해드린, 그리고 Modern Catholic Dictionary에 주어진, 그리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신학 대전(Summa Theologica)에 주어진, 가톨릭 교회의 칠죄종들 중의 하나인 "envy(라틴어: invidia)"정의(definition)와 대동소이함을 알 수 있다. 지금 지적한 바에 대한 더 자세한 글은 다음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35.htm <----- 필독 권고 
-----


게시자 주 (1-i): 따라서 상대방을 해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질투(妬) 라는 한자 단어 자체가 "jealousy"에 대응하는 차용(借用) 번역 용어로 채택이 되는 것은, 탈출기 20,5의 한문으로의 번역문에서 하느님께 도저히 사용할 수 없는 부정적인(negative) 대단히 나쁜 의미를 지녔기에, 명나라 말기에 중국에 파견되어 중국어를 학습한 후에 중국어로 집필하셨던 예수회 소속의 선교사 신부님들에 의하여, 배제되었는 생각입니다.

 

(1-ii) 다음은 동국대학교 홈페이지 제공의 불교사전에 주어진 글자에 대한 설명입니다:

출처: http://buddha.dongguk.ac.kr/bs_detail.aspx?type=detail&from=&to=&srch=%EC%A7%88&rowno=10

(발췌 시작)
嫉(질)

【범】 ?ry?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심리 작용.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1-ii):

(1) 바로 위에서 설명으로부터 우리는, 윤리적으로 나쁜 의미(morally bad meaning)를 지닌 "특정 범어(梵語, 산스크리트 어)"의 차용(借用) 번역 용어로서 한자 단어 嫉(질)이 이미 불교에서 채택되었고 그리고 지금까지 불교에서 사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다른 한편으로, 하느님께서는 우리들 모두가 잘 되기를 바라는 무한히 선한 분이시므로, 따라서, 嫉(질) 이라는 한자 단어는, 하느님께도 또한 사용되고 있는, "jealous/jealousy"에 대응하는 차용(借用) 한자 번역 용어의 구성 글자가 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이 지적과 관련하여, 한자 단어 嫉(질) 그 자체의 자구적 의미/어의(literal sense)에 대하여서는 바로 아래에 이어지는 (1-iii)을 꼭 읽도록 하십시오.

 

(1-iii) 다른 한편으로, 중국의 康熙字典(강희자전),  女部·十획에 주어진 글자에 대한 설명인데, 특히 질투(妬)에 대한 다음의 註(주)가 있습니다.

 

게시자 주: 아래의 발췌문에서, 게시글의 편집기의 문제로 깨어지는 글자  는 부득불 필자가 로 교체하였습니다:

 

害色曰,害賢曰

色을 해코지하는 것을 (투)라고 하고, 어진 이를 해코지하는 것을 嫉(질)이라 한다.

 

출처: http://ctext.org/dictionary.pl?if=en&char=%E5%AB%89

《廣韻·去聲·至·自》嫉:妬也。又音疾。
《廣韻·入聲·質·疾》嫉:嫉妬楚詞注云害賢曰嫉害色曰妬。

《康熙字典·女部·十》嫉:《廣韻》秦悉切《集韻》《韻會》《正韻》昨悉切,??音?。《說文》?也。《屈原·離騷註》害色曰,害賢曰《史記·外戚傳》?先生曰:傳曰:女無美惡,入室見?,士無賢不肖,入朝見嫉。《亢倉子·用道篇》同道者相愛,同藝者相嫉。又《集韻》疾二切,音自。義同。亦作??。通作疾。或作???。

 

게시자 주 (1-iii): 따라서 상대방을 해친다는 의미을 가지고 있는 질투(妬) 라는 한자 단어 자체가 "jealousy"에 대응하는 차용(借用) 번역 용어로 채택이 되는 것은, 중국에서 탈출기 20,5의 한문(漢文)으로의 번역문에서 하느님께 도저히 사용할 수 없는 부정적인(negative) 대단히 나쁜 의미를 지녔기에, 명나라 말기에 중국에 파견되어 중국어를 학습한 후에 중국어로 집필하셨던 예수회 소속의 선교사 신부님들에 의하여, 배제되었다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이분들이 "한문 문화권"에서 철학서로 널리 알려진, 유학(儒學)의 4서5경(四書五經)들 중의 하나인, 역경(易經), 즉, 주역(周易)을 틀림없이 학습하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iv) 위의 제2-2-2항 전체.

-----

 

(3) 그리고 교황청 홉페이지 제공의 중국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259항에서 영어로 "envy" 로 번역되는 표현을 지금까지도 嫉妬(질투)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서는, 예를 들어, 다음의 글의 마지막 부분을 반드시 꼭 읽도록 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36.htm <----- 클릭하여 꼭 확인하십시오
(이상, 게시자 주 끝)

  

2-4. 다음은 개신교측 Holman Bible Dictionary (1991)에 주어진 "envy(妬, 질투)" 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입니다. 특히, 이 용어의 용례로서, 성경의 해당 구절들을 구체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점이 유익하다는 생각입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16.htm <----- 또한 참고하십시오

 

2-5,  "시기(猜忌, jealousy)" 라는 차용(借用) 번역 용어의 정의(definition)는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에 주어져 있습니다. 클릭한 후에 제4항제9-1항을 반드시 읽도록 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35.htm <----- 클릭하여 아래의 제2-6-2과 비교/검토하면서 꼭 읽도록 하십시오

 

2-6.

2-6-1.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국내의 개신교측 "대한성서공회" 홈페이지 제공의 용어사전 [즉, 독일성서공회판 해설성경전서 굿뉴스 스터디 바이블]들에 "질투""시기" 에 대한 용어 정의(definition)가 주어지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참고 자료 1 (클릭하십시오)

참고 자료 2 (클릭하십시오)

 

2-6-2. 다음은 개신교측 Holman Bible Dictionary (1991)에 주어진 "jealousy" 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입니다. 특히, 이 용어의 용례로서, 성경의 해당 구절들을 구체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점이 유익하다는 생각입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16.htm 

(발췌 시작)

Jealousy

시기(猜忌)

 

Jealousy is used in three senses in Scripture; (1) as intolerance of rivalry or unfaithfulness; (2) as a disposition suspicious of rivalry or unfaithfulness; and (3) as hostility towards a rival or one believed to enjoy an advantage. Sense 3 approximates envy. God is jealous for His people Israel in sense 1, that is, God is intolerant of rival gods (Exodus 20:5 ; Exodus 34:14 ; Deuteronomy 4:24 ; Deuteronomy 5:9 ) One expression of God's jealousy for Israel is God's protection of His people from enemies. Thus God's jealousy includes avenging Israel (Ezekiel 36:6 ; Ezekiel 39:25 ; Nahum 1:2 ; Zechariah 1:14 ; Zechariah 8:2 ). Phineas is described as jealous with God's jealousy (Numbers 25:11 ,Numbers 25:11,25:13 , sometimes translated zealous for God). Elijah is similarly characterized as jealous (or zealous) for God (1Kings 19:10,1 Kings 19:14 ). In the New Testament Paul speaks of his divine jealousy for the Christians at Corinth (2 Corinthians 11:2 ).


시기(jealousy)는 성경 본문에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미/어의(senses)들로 사용됩니다: (1)
경쟁(rivalry) 혹은 불충실(unfaithfulness)에 대한 참을 수 없음(intolerance)으로서, (2) 경쟁 혹은 불충실에 대하여 의심하는 어떤 성향으로서, 그리고 (3) 어떤 경쟁자(a rival) 혹은 어떤 우위(an advantage)를 향유하는 것으로 믿어지는 자에 대한 적대감(hostility)으로서. 의미/어의 3질투(envy)에 가깝습니다(approximates). 하느님께서는, 의미/어의 1 안에서,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에 대하여 시기하십니다(jealous), 즉, 하느님께서는 경쟁자인 잡신(rival gods)들에 대하여 참을 수 없으십니다(intolerant)(탈출 20,5; 탈출 34,14; 신명 4,24; 신명 5,9).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시기(God's jealousy)에 대한 한 개의 표현은 원수들로부터 당신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보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시기는 이스라엘을 보복하는 것(avenging)을 포함합니다(에제키엘 36,6; 에제키엘 39,25; 나훔 1,2; 즈카르야 1,14; 즈카르야 8,2). 피스나스(Phineas)는 하느님의 시기로써 시기하는 것(jealous with God's jealousy)으로서 서술됩니다[민수 25,11; 민수 25,13, 때로는 하느님에 대한 열의있는(zealous)으로 번역됨]. 엘리야(Elijah)도 유사하게 하느님에 대하여 시기하는(jealous) [혹은 열의있는(zealous)]으로 특징지어집니다(1열왕 19,10, 1열왕 19,14). 신약 성경에서 바오로(Paul)는 코린토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자신의 '하느님의 시기(divine jealousy)'에 대하여 말합니다(2코린토 11,2).


Numbers 5:11-30 concerns the process by which a husband suspicious of his wife's unfaithfulness might test her. Most often human jealousy involves hostility towards a rival. Joseph's brothers were jealous ( Genesis 37:11 ) and thus sold their brother into slavery (Acts 7:9 ). In Acts 17:5 a jealous group among the Jews incited the crowd against Paul. Jealousy, like envy, is common in vice lists ( Romans 13:13 ; 2 Corinthians 12:20 ; Galatians 5:20-21 ). Jealousy is regarded as worse than wrath or anger (Proverbs 27:4 ). James regarded bitter jealousy (or envy)(*) as characteristic of earthy, demonic wisdom (James 3:14 ) and as the source of all disorder and wickedness (James 3:16 ).(**) See Envy

 

민수기 5,11-30은, 그것에 의하여 불충실한 자신의 아내에 대하여 의심하는 어떤 남편이 그녀를 시험할 수도 있는, 절차에 관계합니다. 흔히 인간의 시기(human jealousy)는 어떤 경쟁자를 향하는 적대감(hostility)을 수반합니다. 요셉(Joseph)의 형제들은 시기하였으며(jealous)(창세 37,11) 그리하여 그 결과 자신들의 형제를 노예로 팔았습니다(사도행전 7,9). 사도행전 17,5에서 유다인들 중의 한 개의 시기하는(jealous) 집단이 바오로(Paul)에 반하여 군중을 자극하였습니다. 시기(jealousy)는, 질투(envy)처럼, 악덕(vice) 나열들에 있어 일반적(common)입니다(로마 13,13; 2코린토 12,20; 갈라티아 5,20-21). 시기(jealousy)는 진노(wrath) 혹은 분노(anger)보다 더 나쁜 것으로서 간주됩니다(잠언 27,4). 야고보(James)는 모진 시기(bitter jealousy) [혹은 질투(envy)](*)를 세속의, 악마의 지혜의 특징(야고보 3,14)으로서 그리고 질서에 있어서의 혼란(disorder) 및 나약함(weakedness) 모두의 원천(야고보 3,16)으로서 간주하였습니다.(**) 질투(envy)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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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새 번역 성경" 야고보서 3,14와의 정밀한 비교/검토의 결과 원문에서 "bitter"의 위치가 잘못 놓여있다는 판단에 따라, 번역자가 원문에서 "jealousy (or bitter envy)" 를 "bitter jealousy (or envy)" 로 바로 잡았다. 왜냐하면, 오로지 시기(jealousy)안에만 질투(envy)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 번역자 주: 원문에서 "잠언 3,14" 와 "잠언 3,16"을, 번역자가 확인한 후에, "야고보 3,14"와 "야고보 3,16"으로 각각 바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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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게시자 주 2-6-2: 위의 제(1)항의 의미 안에서 그 설명이 주어지고 있는, "jealousy" 에 대한 위의 Holman Bible Dictionary에 주어진 첫 단락의 설명에서, 괄호 안에서 제시되고 있는 그리스어본 칠십인역(LXX) 구약 성경 과 신약 성경 구절들(즉, 탈출 20,5; ... ; 2코린토 11,2)은 이들이 동일한 그리스어 어근(root) "zelos" 의 단어[영어로 동일하게 "jealousy"로 번역되며 특히 이들의 발음(pronunciation)이 거의 비슷함]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즉, 위의 제(1)항의 의미 안에서 그 설명이 주어지고 있는, "jealousy" 에 대한 위의 Holman Bible Dictionary에 주어진 첫 단락의 설명은,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 본문들에서 사용되고 있는 동일한 단어인 "jealous/jealousy" 자구적 의미/어의(literal sense)에 근거하여 주어지고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직접 확인한 바는 다음에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11.htm <----- 클릭한 후에 제3항을 확인하십시오.

(이상, 게시자 주 끝).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2월 12일] 

2-6-3. 사실 위의 제2-6-2항에서 말씀드린 개신교측의 성서 사전인 Holman Bible Dictionary1991년에 초판 발행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만약에 이 사전에 실린 (i) "의심하고 그리고 꺼림"을 말하는 "jealousy(시기)"의 정의(definition)와, (ii) 이와는 상당히 다른,  "envy(질투)"의 정의(definition)의 차이점을 국내의 개신교측에서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었더라면(가정법 과거 완료),

 

표준국어대사전에 주어진 시기(猜忌)라는 단어에 대한 설명인, "남이 잘되는 것을 샘하여 미워함" 이라는 전와(轉訛, 어떤 말이 본래의 뜻과 달리 전해져 그릇되게 굳어짐) 우리나라에서의미와는 상당히 다른, 

 

시기(猜忌)[jealousy, 猜(의심할 시), 忌(꺼릴 기)]라는 한자 단어의 원 의미, "의심하고 그리고 꺼림" 때문에,

 

개신교측에서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할 때에 탈출기 20,5 등에서 "질투하는 하느님" 대신에 "시기하는 하느님"으로 번역하였을 것임(가정법 과거 완료 끝)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2014년 2월 10일(월)자로 확인하였습니다만, 지금 말씀드린 표준국어대사전에 주어진 시기(猜忌)라는 단어에 대한 설명이 우리나라에서의 심각한 수준의 "전와(轉訛)"의 한 예(example)라는 것은, 또한 국내의 저명한 국어국문학 분야 전공 교수님께서도 지적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난 2014년 2월 7일(금)국내의 저명한 국어국문학 분야 전공 원로 교수님께, "우리말 성경에 '시기'와 '질투'라는 차용 번역 용어들이 사용되고 있는데, "jealousy""envy" 를 우리말로 올바르게 번역하기 위하여, 우리말 단어로서의 '시기' '질투'의 차이점을 구체적으로 알고싶다"고 필자가 문의를 드렸더니, 이 교수님께서는 "통상적으로 비슷한 말로 사용하고 있는데 좀 찾아 보아야겠다"고 답변하셨습니다. 그래서 사흘 째 되는 날인 2014년 2월 10일(월)에 다시 말씀을 나누었더니, 이 교수님께서, "그동안 좀 들여다 보았다" 면서, "표준국어대사에 주어진 우리말 단어들에 대한 설명들 중에는 해당 한자 단어들의 자구적 의미와 다른 설명[즉, '전와(轉訛, 어떤 말이 본래의 뜻과 달리 전해져 그릇되게 굳어짐)' 설명]이 주어진 경우들이 더러 있다"는 우려(憂慮)의 말씀과 함께, "'기(猜)'에서 사용되고 있는 한자들의 자구적 의미가 '의심할 시(猜)', '꺼릴 기(忌)'" 라는 필자의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하시면서, "표준국어대사전에 주어진 '시기(猜忌)' 에 대한 설명이 또한 그 경우[즉, '전와(轉訛)'된 경우]에 해당한다"고 답변하셨습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2월 15일]

2-6-4. 다음은 Modern Catholic Dictionary에 주어진 "zeal(열의)" 에 대한 설명입니다. 첫 번째 문장이 이 용어의 정의(definition)입니다:

 

출처: http://www.therealpresence.org/dictionary/z/z006.htm

(발췌 시작)

ZEAL

 

Love in action. The strong emotion of spirit, based on deep affection, that seeks to obtain what is loved or to remove what stands in the way. In religious terms, zeal is manifested by an impelling desire to advance the Kingdom of Christ, sanctify souls, and advance the glory of God by making him better known and loved, and thus more faithfully served. (Etym. Latin zelus, eagerness; from Greek z?los.)

 

열의(zeal)

 

행위의 상태에 있는 사랑(love in action)을 말합니다. 사랑받게 되는 바를 획득하기 위하여 혹은 그 과정에 있어 획득하지 못하도록 막는(stands) 바를 제거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깊은 애착(affection)에 근거한, 영(spirit)의 강한 감정(emotion)을 말합니다. 경신덕적(religious) 표현들에 있어, 열의는 그리스도의 나라(the kingdom of Christ, 즉 하느님의 나라)를 앞당기고자(advance) 하는, 영혼들을 성화시키고자 하는, 그리고 하느님을 더 잘 알려지게 하고 그리고 사랑받게 하여, 그리하여 그 결과 더 충실하게 섬겨지도록 함으로써, 하느님의 영광(the glory of God)을 앞당기고자 하는, 재촉하는 욕망(desire)에 의하여 분명하게 나타내어집니다. [어원.  Latin zelus, eagerness; from Greek z?los.]
(이상, 발췌 끝)

[이상, 내용 추가 끝]

 

2-7.

2-7-1. 그리고 Merriam-Webster Dictionay에 주어진 자연적 용어(natural terminologgy)인 "rival(경쟁자)"의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단어는, 이글에서 또한 사용될 차용(借用) 번역 용어이며, 다른 한편으로, 표준국어대사전에 주어진, 차용(借用) 번역 용어가 아닌, 이 단어의 의미가 모호하다는 생각에, 추가로 말씀드립니다:

 

출처: http://www.merriam-webster.com/wdictionary/rival

(발췌 시작)

Main Entry: 1ri·val
Pronunciation: \?r?-v?l\
Function: noun
Etymology: Middle French or Latin; Middle French, from Latin rivalis one using the same stream as another, rival in love, from rivalis of a stream, from rivus stream — more at run
Date: 1577
1
a : one of two or more striving to reach or obtain something that only one can possess [오로지 한 명만이 소유할 수 있는 그 부엇을 달성하거나 혹은 획득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두 명 혹은 다수 중의 한 명]
b : one striving for competitive advantage [경쟁 우위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자]
2
obsolete : companion, associate
3
: equal, peer
(이상, 발췌 및 일부 문장에 대한 우리말 번역 끝).
 
2-7-2. Merriam-Webster Dictionay에 주어진 자연적 용어(latural terminologgy)인 "rivalry"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단어는, 이글에서 또한 사용될 차용(借用) 번역 용어입니다:
 
(발췌 시작)
Main Entry: ri·val·ry
Pronunciation: \?r?-v?l-r?\
Function: noun
Inflected Forms: plural -ries
Date: 1598
: the act of rivaling [경쟁 행위] : the state of being a rival [한 명의 경쟁자인 상태] : competition [경쟁]
(이상, 발췌 및 일무 문장에 대한 우리말 번역 끝).
 
3. 본문: (Sun T. Soh) 사랑(love)열의(zeal)경쟁(emulation)시기(jealousy)질투(envy) 발전과정에 대한 고찰
 
이번 항에서는, 어떤 객체/대상(object)을 수동적으로(passively) 인식하여 능동적으로(actively) 반응할 때에 우리의 의식(consciousness)이 어떻게 흘러가는 가는지에 대하여, 개략적(槪略的)으로, 함께 고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고찰은, 비록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에 의하여 마련된 개략적(槪略的) 고찰이기는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제1항제2항에 전달해 드린 가톨릭 그리스도교 윤리 신학 분야의 일부 핵심 용어들의 의미(meaning)/정의(definition)를, 설사 보통 수준의 가톨릭 신자라고 하더라도, 일정 수준 이상 깊이있게 이해하는 데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i) (대전제) 어떤 격(a persion)(A)(i-*)이 어떤 객체/대상(an object)(C)(i-**) 를 인식하는 순간에, 나름대로의 어떤 원인(a cause) 혹은 목표(end) 때문에, 만약에(if) 이 C가 선(good)하다고 판단되면, 능동적으로(actively), 즉 의지(will)의 개입과 함께, 이 C를 자신의 것으로서 소유하고 싶은 욕구(appetite)를 가지게 되는데, 이 때에 우리는 A가 이 C"사랑한다(love)"고 말합니다. 따라서 사랑(love)은 두 개의 말단(terms)들 AC 사이에 형성되는 한 개의 일방향의 관계(a unidirectiional relationship)를 말합니다.
 
그리고 사랑(love)이, 정의(definition)에 의하여, 한 개의 일방향의 관계(a unidirectiional relationship)이기 때문에, 예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체적으로, "서로 사랑하여라" 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서 유의할 점이 한 개 있는데, 그것은 사랑받게 되는 객체(object)으로서의 C가, A에게 있어, 해당 사랑의 원인(cause) 혹은 목표(end)와 동일할 수도 있고 혹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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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게시자 주: 여기서 A는 지성(intellect)과 의지(will)를 가진 하느님(God), 피조물들인 천사(angel) 혹은 인간(human being)일 수 있다.
 
(i-**) 게시자 주: 여기서 C는 지성(intellect)과 의지(will)를 가진 하느님(God), 피조물들인 천사(angel), 인간(human being), 혹은 지성과 의지를 지니지 못한 사물(thing)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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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그런데  대전제 (i) 아래에서, 사랑받게 되는 객체/대상(object)로서의 C가 두 명 이상의 모두에게 넉넉하면(Case 1) 이 C를 획득하기 위하여 아무도 C를 굳이 실제로 소유까지 하고자 하지 않을 것입니다.(ii-*) 그러나 그렇지 않고 이 C가, 예를 들어, 단 한 개뿐일 경우에는(Case 2), C를 선(good)하다고 생각하는 두 명 이상의 다수의 주체(subjects)들이 이 C를 오로지 자신만의 것으로서 소유하기 위하여 능동적으로(actively), 즉 의지의 개입과 함께, 소위 말하는, 경쟁(rivalry, emulation; 라틴어 aemulatio)을 할 수도 있게 됩니다. 따라서 경쟁(rivalry, emulation; 라틴어 aemulatio)은 적어도 삼각관계(三角關係)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것이지, 어느 둘의 사이에서는 결코 발생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경쟁(rivalry, emulation; 라틴어 aemulatio)의 대상은 결코 C아님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따라서, 논리적 등가/동치로, 오로지 사랑(love)안에만 경쟁(rivalry, emulation; 라틴어 aemulatio)이 있을 수 있습니다. 즉, 적어도 삼각관계(三角關係)인 경쟁(rivalry, emulation; 라틴어 aemulatio)사랑(love)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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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게시자 주: C가 넉넉한 경우도 더러 발생한다. 그리고, 예를 들어, A가 피조물인 인간이고 그리고  C가 하느님(God)일 때(Case 6)가 또한 Case 2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피조물인 인간은, 태생적으로 유한한 존재이기에, 무한한 하느님을 실제로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Case 6의 경우에, 경쟁(rivalry, emulation; 라틴어 aemulatio)은 발생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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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대전제 (i) 아래에서, AB가 한 개뿐인 동일한 선한(good) 객체/대상(object)인 C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어떤 원인(a cause) 혹은 목표(end) 때문에 사랑(love)을 느낄 때에, 더 나아가, 이들 둘 중의 한 명, 예를 들어, A가 또한 자신의 의지(will)의 개입에 의하여 C를 능동적으로(actively) 그리고 지속적으로(continuously) 집중하게 되어 그리하여 그 결과 열의(zeal)와 함께 AC를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마음에 품게 되면(cherish)(Case 3), 드디어 AB가 혹시 자기 자신처럼 열의(zeal)와 함께 C를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마음에 품은 것이 아닌지 B의심하고() 두려워하면서() CB함께 공유하는 것을 싫어하고() 꺼리게 되어() 그리하여 독점적으로 C를 소유하고자 하는 능동적(active) 경쟁(rivalry, emulation; 라틴어 aemulatio)이라는 상태로 돌입할 수도 있는데(may), 바로 이러한 상황이 실제로 발생하면(Case 4), 우리는 AB"jealous"라고 말하고, 이 용어를, "질투(嫉妬)한다" 대신에"시기(猜忌)한다" 라고 차용(借用) 번역합니다.
 
"jealous"라는 용어를, "질투(嫉妬)한다" 대신에"시기(猜忌)한다" 라고 차용(借用) 번역한 이유는, 제2-3항에서 말씀드렸듯이, "envy"가 오래 전에 이미 "질투(嫉妬)"로 차용(借用) 번역되었고 그리고 지금까지, "칠극," 그리고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등의 핵심 문헌들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그리고 또한 猜忌(시기)라는 한자의 자구적 의미/어의(literal sense) 자체가 "의심하고 싫어함(猜)" 그리고 "두려워하고 꺼림(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논리적 등가/동치로, 오로지 경쟁(rivalry, emulation; 라틴어 aemulatio)안에만 시기(猜忌, jealousy)가 있을 수 있습니다.(iii-*) 즉, 시기(猜忌, jealousy)경쟁(rivaly)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때에 A시기(猜忌, jealousy)의 대상(object)은, 원 사랑(original love)의 대상인 C아닌B임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따라서, 시기(猜忌, jealousy)는 적어도 삼각관계(三角關係)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것이지, 어느 둘의 사이에서는 결코 발생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오로지 사랑(love)안에만 경쟁(rivaly)이 있을 수 있고, 그리고 오로지 경쟁(rivalry, emulation; 라틴어 aemulatio)안에만 시기(猜忌, jealousy)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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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게시자 주: 따라서, 특히 AB가 피조물인 인간들이고 그리고 이들에 의하여 사랑받게 되는 객체/대당(object) C가 무한히 넉넉한 존재이신 하느님일 때에(Case 6)는, AB 사이에 경쟁(rivalry, emulation; 라틴어 aemulatio) 자체가 발생하지 않기에, 시기(猜忌, jealousy)도 또한 발생하지 않게 된다[1코린토 13,4(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이 논리적으로 참(true)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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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자 주 3: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할 때에] 영어 "jealousy"로 나타내는 개념을 우리말 "질투"라는 차용(借用) 번역 용어로 나타낼 수 없는 대단히 중대한 이유는, 위의 제2-3항에서 말씀드렸듯이,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를 포함하는 한문 문화권의 천주교에서 "jealousy" 와는 어원/어근이 전혀 다른 "envy(라틴어: invidia)""질투" 로 전통적으로 차용(借用) 번역해온 역사적 사실뿐만이 아니라, 또한 猜忌(시기)라는 한자의 자구적 의미(literal sense) 자체"의심하고 싫어함()" 그리고 "두려워하고 꺼림(忌)"이기문입니다. 우리말로 신앙 생활을 하는 가톨릭 신자들(여기에는 성직자 및 수도자들 포함)이라면, 지금 지적한 바를,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에 대한 충실(piety)이라는 가톨릭 그리스도교 윤리덕(moral virtue)에 따라, 마땅히 항상 존중하여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역 교회의 전통/전승(tradition)은 지역 교회의 구성원들에 의하여 잘 보존될 때에만 해당 지역 교회의 역사 안에서 무심하게 흐르는 세월 속에서 결코 소실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iv)  대전제 (i) 아래에서, AB 둘 다가 한 개뿐인 동일한 선한(good) 객체/대상(object)인 C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어떤 원인(a cause) 혹은 목표(end) 때문에 C를 사랑하게 되어, 그 결과 둘 다가 서로를 시기(猜忌)하게(jealous) 되면, 경쟁(rivalry, emulation; 라틴어 aemulatio)의 결과로서 결국에 AB 둘 중의 한 명이 C를 실제로 소유하게 되어, 그리하여 AB의 공통의 객체/대상(object)으로서의 C사라져 버립니다. 실제로 그러한 일이 발생하여, 예를 들어, A가 이 경쟁의 승자(winner)이고 그리고 B가 이 경쟁의 패자(loser)이라고 할 때에, 추가적으로, B가 자신이 사랑하였던 대상인 CA가 빼앗아갔다는 박탈감과 함께 또한 슬퍼하면서(sorrow) 불만을 가지게 되고, 더 나아가, 자신이 선(good)하다고 생각하는, 즉 가치롭다고 생각하는 C를 획득하였기에 자신보다 더 나아진 A로부터, C에 대한 B의 그동안의 애착(愛着)이 드디어 집착(執着)으로 바뀌어, 그 결과 B가, A로부터 C를 빼앗을 목적으로, 어떤 악의(a malice)와 함께 A에게 해를 끼치기까지 하면서 A로부터 C를 빼앗는 행위를 시도하면(Case 5), 드디어 BA질투(嫉妬)한다(envious) 라고 우리는 말합니다.(iv-*) 그러므로, 질투(嫉妬, envy)는, 삼각관계(三角關係)가 아닌, 어느 둘의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합니다.
 
따라서, 오로지 시기(猜忌, jealousy) 안에만 질투(嫉妬, envy)가 있을 수 있습니다.(iv-**) 즉 질투(嫉妬, envy)는 시기(jealousy)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고찰한 바로부터 우리는 다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로지 사랑(love)안에만 열의(zeal)가 있을 수 있고, 오로지 열의(zeal)안에만 경쟁(rivaly)이 있을 수 있으며, 그리고 오로지 경쟁(rivalry, emulation; 라틴어 aemulatio)안에만 시기(猜忌, jealousy)가 있을 수 있고, 오로지 나쁜 시기(bad jealousy) 안에만 질투(嫉妬, envy)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선한 시기(good jealousy)(2코린토 11,2)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 바로 위에서 말씀드린 바를 논리적 등가/동치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질투(嫉妬, envy)는 나쁜 시기(bad jealousy)에 포함되고, 시기(猜忌, jealousy)경쟁(rivalry, emulation; 라틴어 aemulatio)에 포함되며, 그리고 경쟁(rivalry, emulation; 라틴어 aemulatio)열의(zeal)에 포함되고, 열의(zeal)는 사랑(love)에 포함된다.
 
지금 바로 위에서 말씀드린 바를 논리적 등가/동치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질투(嫉妬, envy)는 나쁜 시기(bad jealousy)이고, 시기(猜忌, jealousy)경쟁(rivalry, emulation; 라틴어 aemulatio)이며, 그리고 경쟁(rivalry, emulation; 라틴어 aemulatio)열의(zeal)이고, 열의(zeal)는 사랑(love)이나, 그러나 이들의 역이 항상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사랑(love)

애덕(charity, caritas)으로 더 많이 채워질수록,

질투(envy)는 더 많이 소멸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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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추가 일자: 2014년 2월 17일]
(iv-*) 게시자 주:
(1) 교황 프란치스코께서는,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짝수 해 연중 제2주간 금요일이었던, 또한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이었던,  2014년 1월 23일(목)  아침 묵상(meditation)에서, 제1독서(1사무엘 24,3-21)의 내용과 관련하여, 여기에서 설명하고 있듯이시기(猜忌, jealousy, 빼앗기지 않고자 의심하고 꺼림)로부터 질투(嫉妬, envy, 빼앗기 위하여 해침)가 발생함/야기됨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셨다:
 
(발췌 시작)
“the worm of jealously leads to resentment, envy, bitterness”
"시기(猜忌, jealousy)라는 벌레가 분개(resentment), 질투(嫉妬, envy), 쓰라림(bitterness)에 이르게 합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2월 18일]
(2)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가 자신의 저술인 수사학(Rhetoric)에서 자신의 철학 용어로서 항상 부정적인(negative) 의미를 지닌 "질투(嫉妬, envy, 교회 라틴어 invidia)" 를 정의할(define) 때에 사용하였던 그리스어 단어 "phthonos/phthonus"는 그리스 신화에서 "질투(envy)" 혹은 "시기(jealousy)"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한 명의 잡신(a god)의 이름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어본 칠십인역(LXX) 성경의 본문에서 "시기(猜忌, jealousy)" 를 나타낼 때에 사용되었던 그리스어 단어 "zelus/zelos"는 그리스 신화에서 "시기(jealousy)" 혹은 "경쟁(rivalry, emulation; 라틴어 aemulatio)"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한 명의 잡신(a god)의 이름이었다고 한다. 이들에 대하여서는 다음의 그리스어 어원 사전에 주어진 설명을 참고하라:
 
또한, 다음의 그리스어 어원 사전에 주어진 "zelus/zelos"에 대한 설명도 참고하라:
http://www.theoi.com/Daimon/Zelos.html
[이상, 내용 추가 끝]

(iv-**) 게시자 주: 따라서, AB가 피조물인 인간들이고 그리고 이들에 의하여 사랑받게 되는 객체/대상(object) C가 무한히 넉넉한 존재이신 하느님일 때에(Case 6)는, AB 사이에 경쟁(rivalry, emulation; 라틴어 aemulatio)이 발생하지 않기에, 시기(猜忌, jealousy)도 또한 발생하지 않게 되고[1코린토 13,4(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이 논리적으로 참(true)인 이유], 따라서 이 경우에는 질투(嫉妬, envy)도 또한 발생하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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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대전제 (i) 아래에서,A가 하느님이시고 C가, 아담과 하와의 원죄(original sin)의 결과, 피조물로서의 선(good)을 완전히 상실당하지 않은 피조물인 인간들일 때(Case 7),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상태에 있는 인간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the love of God)의(definition)에 의하여, 피조물인 인간들이 원죄 이전의 상태로 회복되기를 원하시고[하느님 사랑의 원인(cause)이며 또한 목표(end)], 그리고 바로 이 하느님의 의지(will)를 현실태적으로(actually) 구현하시기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드디어 인간들 C계약(Covenant)을 맺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일단 하느님과 피조물인 인간들이 계약(Covenant)을 맺고나면,  이 피조물인 인간들 C가, 미신(superstition)이라는 원인(cause) 혹은 목표(end) 때문에 사실은 현실태적으로(actually) 존재하지도 않는 잡신(god) B가 또한 자신을 사랑한다고 착각하여, 인간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the love of God)에 적정하게(condignly) 화답하지 않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즉시, 피조물인 인간들 C와 당신께서 맺으신 계약(Covenant)에 의거하여, 당신의 열의(zeal)와 함께 인간들 C를 단속(團束)하시는데, 즉, 인간들 C가 잡신 B를 가까이 하지 못하게 어떤 조치들을 취하시는데, 즉, 인간들 C가 잡신 B를 가까이 하는 것을 당신의 열의(zeal) 때문에 도저히 참지 못하시는데(intolerant)(탈출 20,5-6 참조), 즉, 소위 말하는, 의인관(擬人觀, anthropomorphism)에 따른 인간들의 언어로, 즉, 피조물인 인간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계약(Covenant)에 의한 하느님 당신의 의지(will)의 개입에 의하여 C를 능동적으로(actively) 그리고 지속적으로(continuously) 집중하게 되어 그리하여 그 결과 당신의 열의(zeal)와 함께 C를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마음에 품게 되신(cherish) 하느님 A께서 잡신 B경쟁(rivalry, emulation; 라틴어 aemulatio)을 하게 되는 양상(樣相)이 전개되는데, 즉, 하느님 A께서, 또한 피조물인 인간들을 사랑하는, 피조물인 인간들이 존재한다고 추측하는, 잡신 B시기하게(jealous) 되는 양상(樣相)이 전개되는데, 장차 발생할 수도 있는 바로 이러한 양상(樣相)의 전개를 두고서, "[당신께서 피조물인 인간들과 계약(Covenant)을 맺으시면서] 피조물인 인간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시기하는 사랑(jealous love)이다" 라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고, 구약 성경의 인간 저자(human author)는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바로 이 "하느님의 시기하는 사랑(jealous love)"은, 당신의 의지(will)라는 원인(cause) 혹은 목표(end)의 구현인 당신과 맺은 계약(Covenant)을 통한 피조물인 인간들의 영원한 생명으로의 회복(restoration)을 위한, 선한 시기(good jealousy)이며(*), 그리고 하느님의 시기(the jealousy of God)의 대상(object)은 당연히, 경쟁자로 간주되고 있는 잡신 B인 것이지, 하느님의 사랑의 원 대상(original object)인 인간들 C일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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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이에 대하여서는, 예를 들어, 2코린토 11,2에 대한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해설로의 안내가 주어진 다음의 글의 제7-4항과 그곳의 게시자 주 7-4를 읽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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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의지(will)대로 주도하시어, 피조물인 인간들과 계약(Covenant)을 맺으려고 주도권(initiative)을 행사하셨고 그리고 이러한 당신의 요청을 피조물인 인간들이 믿음(faith)으로 동의하고 받아들였기에, 당신께서 스스로 "시기하는 하느님(a jealous God)"이 되셨음에 반드시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4. 성경 본문의 예제(example) 두 개 (번역 미숙/오류 한 개)
 
질문 2: 성경 본문 중에서 위의 제3항에 마련된 정식화(formulation)와 관련된 구절이 있는지요?
 
질문 2에 대한 답변 시작: 예! 있습니다. 다음의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NAB(New American Bible) 용어 색인이 잘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발췌 시작)
  NTLet, 2Cor   12:   20    |         wish; that there may be rivalry, jealousy, fury, selfishness,
10   NTLet,  Gal    5:   20    |     idolatry, sorcery, hatreds, rivalry, jealousy, outbursts of
(이상, 발췌 끝)
 
바로 위의 발췌에서, 경쟁(rivalry, emulation; 라틴어 aemulatio)시기(jealousy)가 바로 이어서 나열되고 있는데, 위의 제3항에서처럼, 경쟁(rivalry, emulation; 라틴어 aemulatio) 끝에 시기(jealousy)가 발생할 수도 있음을 성 바오로가 구체적으로 나열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새 번역 성경"2코린토서 12,20 갈라티아서 5,20에서는, NAB 에서 "rivalry"로 번역된 표현이 "분쟁"으로 번역되었는데, 이것은 번역 미숙/오류라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i) 여기를 클릭하면 직접 확인할 수 있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주어진 "분쟁"에 대한 설명은, 사용된 한자단어들, 分爭, 忿爭, 紛爭 에 의하여, 세 가지의 다른 의미들을 가질 수 있는 모호하기 짝이 없는 우리말 표현인데, 따라서 해당 한자단어를 괄호 안에 병기하지 않고 있는 "새 번역 성경"의 각 해당 본문에서의 "분쟁"이 이들 세 개의 한자 단어들 중의 어느 것을 말하는지 알수 없기 때문에, (ii) 그리고 分爭, 忿爭, 紛爭 어느 경우이든, "분쟁"의 이전 단계인 "경쟁(競爭, rivalry)"에서, 위의 제3항에서 고찰하였듯이, 이미 시기(jealousy)가 발생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이상, 질문 2에 대한 답변 끝).
 
게시자 주: 이 글을 작성할 초기에 지금까지 말씀드린 바에 이어서 더 말씀드리고자 한 바가 있으나, 그러나 이 글이 이미 너무 길어졌기에, 이것은 다음에 이 글에 이어지는 글에서 말씀드리기로 하고, 이상으로, 이번 글에서 말씀드리고 한 바는 이쯤에서 끝맺을까 합니다.

게시자 주 4: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차용 번역 용어들로서, "嫉妒"(질투, envy)"猜忌"(시기, jealousy)의 커다란 차이점에 대한 글들을 학습할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envy_vs_jealousy_concept_error.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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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업에 소요된 시간: 약44시간 (문헌 조사 및 분석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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