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양동성당 게시판

가을에는...

 

 

가을에는   

절제하여 살게 하소서.   

 

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적게 쓰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적게 말하게 하소서.   

 

파란 하늘도   

아껴 보게 하시고,   

조락(凋落)의 슬픔 또한   

아껴 맛보게 하소서.   

 

가꾸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소박한 아름다움을 깨치게 하시고,   

쉽게 감동하는 사람에겐   

영속(永續)의 덕을 일깨워주소서.   

 

그리움은 적게   

그리고 깊게 하시고,   

기다림은 하나이게 하소서.   

 

한 병으로 취하는 사람은   

한 잔으로 더욱 취하게 하시고,   

사랑하는 이에게 보내는 편지는   

간결하게 하소서.   

 

 

가을에는   

가지를 치듯   

우리의 삶도 전지(剪枝)하게 하소서.   

 

방안은 청결하게   

그리고 텅 빈 책상 앞에 즐겨 앉게 하소서.   

 

창 밖을 내다봄은   

아침 저녁으로 한 번씩만 허락하시고,   

매무새는 단정하게 하소서.   

 

늦게 잠들고   

일찍 깨어   

짧은, 그러나 명징(明澄)한 순간을   

맛보게 하소서.   

 

눈과 마음이 유리(遊離)되지 않고   

하나로 곧 흐르게 하소서.   

 

 

가을에는   

덜 웃고,   

덜 울게 하소서.   

 

우물은 더욱 깊게 하시고   

가장 깊은 곳에서   

솟게 하소서.   

 

더욱 아껴 사랑하게 하시고,   

대신 사랑이게 하소서.   

 

준비하는 기쁨으로   

펴는 기쁨을 대신하게 하시고,   

반항보다는   

순종을 선택하게 하소서.   

 

봇물 고이듯,   

능금에 꿀이 차듯,   

가을에는   

몰래 살게 하소서.   

 

만남을 절제하게 하시고   

침묵으로 대화하게 하소서.   

 

또한,   

벗어나게 하소서.   

나의 집,   

나의 굴레에서 벗어나   

언덕으로 부르소서.   

 

가장 적은 음식으로 사는   

지혜를 얻게 하시고,   

약속 또한 절제하게 하소서.   

 

 

가을에는   

알맹이만 남게 하소서.   

최소한으로 살게 하소서.   

 

강하지 않게 하소서.   

유능하지 않게 하소서.   

성공하지 않게 하소서.   

다만   

살게 하소서.   

 

 

가을에는   

아흔아홉을 버리고   

하나만을 얻게 하소서.   

 

 

(1987년 초가을에,   정  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