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성당 게시판

무관심을 넘어 함께 사는 세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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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지종 [sjjbernardo] 쪽지 캡슐

2002-02-27 ㅣ No.1579

 

 

2002, 2, 28 사순 제2주간 목요일 복음 묵상

 

 

루가 16,19-31 (부자와 라자로의 예화)

 

어떤 부유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자색옷과 모시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라자로라는 어떤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그 (집) 대문 곁에 누워 부자의 음식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들로] 배를 채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핧았습니다.

 

그러다가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의 품으로 데려갔습니다. 부자도 죽어서 묻혔습니다.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을 받다가 눈을 드니 아브라함이 멀리 바라보이고 라자로는 그 품안에 있었습니다. 이에 부자는 소리를 질러 ’아브라함 조상님,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라자로를 보내어 그의 손가락 끝을 물에 적셔다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저는 이 불길 속에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얘야, 돌이켜 생각해 보아라. 너는 생전에 복을 누렸지만 라자로는 그만큼 불행을 겪었다. 그래서 지금 그는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심한 고통을 받는 것다. 더군다나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 건너가려 해도 할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건너오지도 못한다.’

 

그러자 부자는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조상님, 조상님께 청하오니, 라자로를 제 아버지의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사실 제게는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그러나 아브라함은 ’저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된다’ 하고 일렀습니다. 그러자 부자는 ’안됩니다. 아브라함 조상님! 죽은 이들 가운데서 누가 저들에게 가야만 회개할 것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함은 그에게 ’저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누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묵상>

 

부자가 살았습니다.

 

그는 결코 인색한 구두쇠가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자신의 삶에 있어서 만큼은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로운 생활을 할 정도로 자신이 가진 것을 쓸 수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초대해 근사한 잔치도 베풀고, 정치와 경제에 관한 이야기며, 자신의 종교, 그리고 문화와 예술에 대해 대화를 주고받으며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근사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무자비한 사람도, 이렇다할 특별한 죄를 짓지도 않았습니다. 자기 집 대문간에서 더부살이하는 종기투성이의 거렁뱅이 라자로를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자기 동네에 장애인 시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쌍심지를 켜고 반대하거나, 외국 관광객들에게 좋지 않은 이미지를 보인다고 빈민촌을 무지막지하게 철거하는 우리의 현실에 비추어보면 오히려 그는 자비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인색하지도, 무자비하지도 않았던 부자는 죽고 나서 결코 건널 수 없는 구렁텅이 저편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신음해야만 했습니다.

 

왜? 무엇 때문에? 그것은 라자로에 대한 무관심 때문입니다.

 

부자는 자신의 삶에 있어서 만큼은 최선을 다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최선은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 대한 무관심을 바탕으로 한 최선이었을 뿐입니다. 이 무관심, 너는 너의 인생을 살고, 나는 나의 인생을 살면 된다는 식의 무관심은 더불어 함께 살아야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자신의 삶에만 안주했던 한 사람이 이제는 완전히 고립되어 살아야만 하는 고통에 직면해 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아야만 사람답게 살 수 있었던 외로운 이를 외면했던 부자는 이제 자신이 그 철저한 외로움 속에서 고통을 받아야만 합니다.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봅니다. 하느님의 벌이 아니라 자신이 쳐놓은 올가미에 걸려 허우적대는 한 사람을 봅니다.

 

관심을 호소하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과 끝까지 무관심으로 자신의 길만을 걸어가는 부유하고 힘 가진 사람 사이의 단절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바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단절을 깨뜨리시기 위해 끊임없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모세를 통해서 예언자들을 통해서, 그리고 마침내는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말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건너가려 하지 않는 단절의 강을 건너갈 수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자리에 안주하여 다른 이들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건너가려고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이들에게는 ’나의 삶과 너의 삶’이라는 구별이 없습니다. 너의 삶이 곧 나의 삶이고 너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기에, 함께 하지 못할 때 마음 아파하며 함께 하는 기쁨을 세상의 어느 것보다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나의 관심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그 사람을 환한 웃음으로 맞아주고, 따뜻한 한 마디 말을 건네며, 필요한 것을 나눌 수 있다면, 이 때 느끼는 행복과 기쁨은 세상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관심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언제까지나 나를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나누어주려고 해도, 나누어 줄 대상을 만날 수 없는, 아니 아무도 만나주지 않는 처절한 외로움에 언제 처할 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많은 이들은 갈수록 치열한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서로에 대한 무관심이 자신의 살길이라고 생각하고, 냉정하리만큼 자신의 길만 걸어갑니다. 그럼으로써 참된 행복의 기회를 스스로 걷어찹니다.

 

과연 우리 자신은 어떠한지요?

행복과 불행의 갈림길에서 어디를 택하고 있는지요?

더불어 함께 사는 기쁨과 홀로 외로이 죽어가는 슬픔 가운데 무엇을 택하고 있는지요?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주님 안에 사랑 담아 여러분의 벗 상지종 베르나르도가 띄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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