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동성당 게시판

상처 없이 사랑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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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아델라 [thella] 쪽지 캡슐

2001-03-23 ㅣ No.6360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눈송이들은

풍금 소리가 되어 사람들 마음속으로 쌓이고, 세상의 저녁은 평화로웠다.

난로 위에선 가쁜 숨을 토하며 보리차가 끓고 있고, 처마 밑 고드름은

제 팔을 길게 늘어뜨려 바람에 몸을 씻고 있었다.

 

저녁 무렵 음식점 출입문이 열리더니 한 여자아이가 동생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초라한 차림의 아이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주방에서 가장 가까운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영철이 주문을 받기

위해 아이들 쪽으로 갔을 때 큰아이가 동생들에게 물었다.

" 뭐 시킬까? "

" 자장면."

" 나두...... "

" 아저씨, 자장면 두 개 주세요. "

영철은 주방에 있는 아내 영선에게 음식을 주문한 후 난로 옆에 서 있었다.

그때 아이들의 말소리가 그의 귓가로 들려왔다.

" 근데 언니는 왜 안 먹어? "

" 응, 점심 먹은 게 체했나 봐. 아무것도 못 먹겠어. "

일곱살쯤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나무젓가락을 입에 물고 말했다.

" 누나, 그래도 먹어. 얼마나 맛있는데. "

" 누나는 지금 배 아파서 못 먹어. 오늘은 네 생일이니까 맛있게 먹어. "

큰아이는 그렇게 말하며 남동생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 언니.....우리도 엄마 아빠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저렇게 같이 저녁도 먹구. "

아이의 여동생은 건너편 테이블에서 엄마 아빠랑 저녁을 먹고있는

제 또래의 아이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영선이 주방에서 급히 나왔다.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한참동안 아이들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 왜? 아는 애들이야? "

" 글쎄요. 그 집 애들이 맞는 거 같은데..... "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영선은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 너 혹시 인혜 아니니? 인혜 맞지? "

" 네 맞는데요. 누구세요? "

영선의 갑작스런 물음에 아이는 어리둥절해했다.

" 엄마 친구야. 나 모르겠니? 영선이 아줌마..... "

"......"

개나리같이 노란 얼굴을 서로 바라볼 뿐 아이들은 말이 없었다.

" 한 동네에 살았었는데, 네가 어릴 때라서 기억이 잘 안 나는 모양이구나.

 그나저나 엄마 아빠 없이 어떻게들 사니? "

그녀는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어루만지고 있었다.

" 인정이도 이제 많이 컸구나. 옛날엔 걸음마도 잘 못 하더니. "

그제야 기억이 났다는 듯 굳어 있던 아이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아줌마가 맛있는거 해다 줄께. "

영선은 서둘러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자장면 세 그릇과

탕수육 한 접시를 내왔다.

아이들이 음식을 먹는 동안 그녀는 내내 흐뭇한 얼굴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 안녕히 계세요. "

" 그래, 잘가라. 차 조심하구..... 자장면 먹고 싶으면언제든지 와, 알았지? "

" 네....."

영선은 문 앞에 서서 아이들이 저만큼 걸어갈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었다.

어두운 길을 총총히 걸어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이 처마 끝에 매달려

제 키를 키워 가는 고드름처럼 힘겨워 보였다.

 

아이들이 가고 난 뒤 영철은 영선에게 물었다.

" 누구네 집 애들이지?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안 나는데..... "

" 사실은 나도 모르는 애들이에요. 엄마 아빠가 없는 아이들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음식을 그냥 주면 아이들이 상처받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래서 엄마 친구라고 하면 아이들이 또 올 수도 있고 해서..... "

" 그랬군. 그런데 아이들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 "

" 아이들이 말하는걸 들었어요. 주방 바로 앞이라 안에까지 다 들리던데요. "

" 이름까지 알고 있어서 나는 진짜로 아는 줄 알았지. "

" 오늘이 남동생 생일이었나 봐요. 자기는 먹고 싶어도 참으면서

동생들만 시켜주는 모습이 어찌나 안돼 보이던지..... "

영선의 눈에 맺혀 있는 눈물은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가난으로 주눅든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했던 아내를 보며

영철은 많은 생각을 했다. 그 날 저녁의 감동은 기억 저편에서 아스란이

들려오는 풍금 소리처럼 지금도 그의 마음속 깊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상처를 주지 않고 사랑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

소리 없이 아픔을 감싸준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

 

 

-이철환님의 연탄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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