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곡동성당 게시판

언제나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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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근수 [seopius] 쪽지 캡슐

1999-11-11 ㅣ No.373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

 

1997년 11월 28일에 서품을 받고 처음 발령 받은 이 곳

월곡동으로 왔다. 왜이리 썰렁. 주변의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다.

선듯 다가서기 어려운 낯설음이 얼굴에 깔려 있다. 새로 온 사람에게 대한

환대나 환영보다는 (특별한 기대를 한 것도 아니었지만) 왔다 갔던 이들에 대한

불신이 얼굴에 차가움으로 묻어 나오는 듯 하다.

 

어떻게 하지?

이 곳 저 곳에 귀을 기울이며 듣는다.

한 달이 지났다.

이전에 한 번도 와보지 못했던 월곡동이었다. 월곡동은 어떤 곳인가?

신자들과 주변 환경들을 살펴 본다.

 

가만히 떠오르는 상념들

’나는 과연 월곡동 동민이 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면? 생각하기 싫다.

그것은 나의 소임을 인정치 못하는 것이다. 아예 그런 생각의 싹을 자르고 생각하자.

그럼 그럴 수 있다면, 언제나 가능할까?

토착화라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이것은 학문적으로 아주 넓은 개념이다. 서양과 동양, 제 3세계와 제 1세계, 민족과 민족 간의 간격을 인정하는 개념이다. 그리스도교는 로마 가톨릭에서 비롯된다. 그 문화적 차이는 종교에서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동양권이며 아시아 대륙의 작은 반도의 대한민국이다. 유럽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씨앗은 같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을 발아시키고 접목시키는 방법은 각 민족의 고유성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어떻게? 바로 이것이 토착화에 대한 문제제기다.’

 

나는 이것을 거시적인 개념에서 보기 보다는 바로 이 곳 월곡동에서도 그러한 인식의 틀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곳은 돈암동도 길음동도 아니다. 물론 나의 출신 본당인 개봉동도 아니다.

지방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30년이 넘게 뿌리내린 곳이다. 다른 동네로 이사도 별로 없는 곳이다. 지연과 혈연의 관계가 깊이 내린 곳이다. 합리성을 추구하며 지극히 개인적인 것을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도심지 심성과는 다르다. 지역의 유대가 깊고, 함께하는 정분을 중요시 한다. 그렇다고 개인적인 프라이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많으며, 다채로운 삶에 대한 이해가 깊다. 그런 반면 지나가는 말들도 무성하다.(관심이 많기에 그런 것 같다)

 

차갑다고 느꼈던 것에 대한 이해는 전 주임 신부님에 대한 이야기와 성전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많이 수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청년들이 제일 활성화 되었었다는 김종욱 신부님 때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어 좀 더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외적인 이야기들 그리고 환경에 대해 듣는 것은 아주 미미할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안다. 왜냐하면 각각의 신자들의 삶, 본당에 대한 이해는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시작이다. 부딪혀 보자. 우선 한가지 마음 속에 새기고

’진솔하자.’( 솔직한 게 최고다. 열려진 문에 한 번 더 들여다 보고 싶을 것이다) ’월곡동민이 되자 (그러나 될 수 없음도 함께 인정하면서)’

 

 

- 추신 ; 앞으로 이 제목으로 2년 동안의 생활을 나름대로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혹시 ’이게 아니다’ ’이거 뭐야’라는 마음이 들더라도 잘 참작해 들으시고, 피드백을 하실 수 있으면 더욱 고맙겠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언제나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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