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성당 게시판

청계천에 관한 그 모든 것(영상 자료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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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리 [uree] 쪽지 캡슐

2003-07-12 ㅣ No.5099

 

다음은 최근 <교통방송> 사보에 실린 제 글입니다.

읽기가 버거우실 때는 그냥 아래 부분을 눌러

그림(영상)을 통해 청계천에 관한 내용을 보시기 바랍니다.

 

 

 

 

청  계  천

-복개 공사로 사라져 간 옛 물길-

 

          유혜진의‘물 위의 해체’

 

  "여보. 비가 오드니만 개천물 많이 불었네요. 남산골 가신다잖았수? 곧장 건너시기는 어렵겠어요. 윗동네 다리쪽으로 돌아가시지요."

  "돌아가긴? 염려 안 해도 될 터이다. 이미 여기에도 배다리가 놓이지 않았겠소?"

  일반적으로 ’개천’이라고 불렀던 서울의 청계천.

  비의 양에 따라 그 몸집의 변화도 무척 심했다. 어떤 때는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의 뚱뚱한 몸으로 다가섰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지나치게 가녀린 몸매를 보이기도 했다.

 

  □ 물 많을 때는 배다리를 띄우고

 

  서울 한가운데서 줄기를 이루고 북악과 인왕산 남쪽 골짜기의 물, 남산 북쪽 자락의 물까지 몽땅 받아 내는 청계천은 비가 조금만 와도 금방 그 몸집이 불었다. 그럴 때면 개천을 건너기도 쉽지 않아 한양의 북촌과 남촌 사람들의 왕래가 일시적으로 뜸해지곤 했고.

  그러나, 비가 어느 정도 많이 와도 왕래의 지장이 별로 없는 곳이 있었다.

수표교와 광교 근처의 마을들, 즉 청계천 상류 일대였다. 이 일대는 주로 양반들이 많이 살았기로 조선 초부터 다른 곳에 비해 다리들을 많이 놓았고, 또 다리도 비교적 튼튼하게 놓았다.

  청계천의 물이 갑자기 불면 다리가 없는 곳에서는 임시로 배다리를 띄우곤 했다. 배다리는 배 몇 척을 서로 얽어 물 위에 띄우는 것으로 일종의 부교(浮橋) 즉 뜬다리였다.

  북악산(北岳山), 인왕산(仁王山), 남산(南山) 등으로 둘러싸인 서울분지의 모든 물이 한 줄기로 모여 내를 이루니 이것이 청계천이다. 길이 3,670m. 최대 너비 84m로,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내이다.

  ’청계천(淸溪川)’이란 이름은 원래 ’청풍계(淸風溪)’라는 이름에서 나왔다.

  청풍계는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 일대, 즉 지금의 청와대 서북쪽 북악산 바로 남쪽 기슭 일대의 골짜기를 일컫던 말. 이 곳에서부터 냇줄기가 시작되므로 이를 ’청풍계천(淸風溪川)’이라 하였는데, 이 이름이 줄어 ’청계천(淸溪川)’이 되었다. 따라서, 청계천은 원래 지금의 청계천 상류인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의 골짜기 시내만을 일컫던 이름이었다.   

  그러나 이 내는 한양의 중심가를 흐르는 지점에서는 따로 ‘개천(開川)’이라 불렀다.

  이 내는 동쪽으로 흐르다가 왕십리 밖 전곶교(箭串橋), 즉 살곶이다리 근처에서 중랑천(中浪川)과 합쳐 남서쪽으로 흐름을 바꾸어 한강으로 들어간다.

  이 내는 조선 왕조의 한양 정도(漢陽定都) 당시에 자연 하천 그대로여서 홍수가 지면 민가(民家)가 침수되는 물난리를 일으켰고, 평시에는 오수(汚水)가 괴어 매우 불결하였는데, 제3대 임금 태종이 개거공사(開渠工事)를 벌여 처음으로 치수사업을 시작하였다. 그 후 영조 때에는 준설 작업을 단행함과 동시에 내 가장자리에 돌을 쌓는 작업을 하였고, 물길을 바로잡는 작업도 아울러 시행하였다. 이 공사로 인해 구불구불하던 내의 흐름이 비로소 직선화하였다.

  그 뒤 순조, 고종 때에도 준설 공사가 계속되었다.

  이 개천에는 수표교(水標橋), 오간수교(五間水橋), 광교(廣橋), 영미교(永尾橋), 관수교(觀水橋) 등 모두 24개의  다리가 놓여 있었다.

  1910년대 우리 나라 땅을 거머쥔 일제는 그 초기에 이 내를 ’청계천’으로 이름으로 바꾸고, 근대적 도시계획의 성격을 띤 대대적인 준설공사를 행하였다.

 

  □ 청계천은 복개되고 판잣집은 헐리고

 

 

  8·15광복 후에는 정부에서 청계천의 유지 관리에 힘써 왔다.

  청계천은 옛날에도 지금과 같이 4대문 안을 흘렀지만, 6·25 전만 해도 이 청계천 물은 그리 검지는 않았었다. 청계 이름 그대로 맑은 시내였다. 그러나, 6·25를 전후해 보기에 흉칙할 정도의 모습을 보이며 시내 한가운데를 흘렀다.

  서울시는 이러한 청계천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 하여 덮어 버리기로 결정, 1958년 6월부터 복개공사에 착수하였다.

  복개 당시 청계천변과 다리 밑에는 바라크(병영)라고 불리는 판잣집, 토막집 등 무허가 불량 주택이 1천여 가구 이상 들어서 있었고, 청계천은 일대에서 버린 갖가지 오물로 악취가 코를 찌를 정도로 오염이 극에 달해 있었다.

  서울시는 환경 정비와 도로 확장의 명분을 걸고 이들 판자촌을 강제 철거하고, 대대적인 하천 복개 공사에 들어갔다. 물론, 철거민들과의 공방도 만만치 않았다.

  철거민들은 미아리, 상계동, 봉천동 등 서울시가 산허리를 잘라 택지로 조성한 산동네로 뿔뿔이 흩어져 갔다.

  복개 공사가 일단락되어 청계천 일대가 도로로 쓰이고 있던 67년 8월 8일 김현옥 서울시장은 이 곳 청계천 복개 도로 위에 모두 35억 원을 들여 신촌로터리에서 용두동을 잇는 고가도로를 건설하겠다는 야심적인 계획을 발표했다.

  1960년 4월에 1단계로 광교와 주교(舟橋) 사이를 완공하여 너비 50m의 간선도로를 만들었다. 61년 말에 완성. 길이 2400미터, 폭 50미터의 간선도로가 생겼다.

  이 후 1964년에서 1970년까지 계속 복개. 마장교까지 길이 6천m의 도로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도심을 관통하는 고가도로는 그리 좋은 것이 못 된다는 일부 여론에 밀려 당초 계획에서 조금 축소된 채 삼일빌딩 옆에서부터 신설동 구간이 1차로 완공된 채 끝나 버렸다.

 

  □ 여러 곳에 놓인 배다리들

 

  옛날 한양에는 ’배다리’라는 마을이 여러 곳 있었는데, 이런 마을들 앞에는 대개 배다리가 놓여 있었다. ’배다리’란, 배를 길게 다리처럼 이어 내를 건널 수 있게 만든 다리로, 이런 다리는 물이 불어날 때 일시적으로 놓였다가 철거되는 일이 많았다.

  청계천의 배다리 중 유명한 것으로는 지금의 중구 삼각동 근처, 지금의 청계천4가쯤의 것이다. 이 곳에선 처음엔 내를 가로질러 배를 엎어 놓고 통행을 하였으나, 나중에는 나무로 적당히 놓아 다리 형태를 만들어 놓고는 했다. 나무로 놓은 후에도 계속 그 이름은 ’배다리’였다. 근처 사람들은 이 곳을 대개 ’배다릿개’라고 했고, 아울러 근처의 마을 이름까지 ’배다리’라는 이름으로 통했다. 한자로 ’주교동(舟橋洞)’이란 지금의 서울 중구의 한 동이름은 이 배다리 때문에 나온 것이다.

  근처에는 이 다리 외에도 소경이 많이 왕래했던 ’소경다리’(호경교,새경다리), 염초청을 근처에 두고 있던 ’염초청다리’ 등이 있었으나, 이 배다리만큼 알려진 다리는 아니었다.

  이 곳에서 조금 더 동쪽으로 내려간, 지금의 청계천5가 근처 오장동에도 배다리가 있었는데, 이것 역시 배가 아닌 통나무 같은 것을 적당히 얽어 건너다니던 다리였다.

 

  □ 서울 중심에서 이름났던 수표교와 광교

 

  한양의 도성 안에서 유명한 다리로는 ’수표교’와 ’광교’가 있었다.

  서울지방 문화재 18호로 지정돼 있는 수표교는 원래 청계천2가에 있었는데, 1959년 청계천 복개 공사 때 장충단 공원으로 옮겼다.

  ’수표교’라는 이름은 다리 바로 서쪽 옆 개천 한복판에 청계천의 깊이 변화를 알기 위해 세워진 수표석(水標石)이 있어서 나온 이름이다.

  수표교는 조선 초 세종 때 만들어진 유서깊은 다리이다. 다리 전체의 모양이 균형을 이루었고, 아름다운 연꽃 봉오리 모양의 난간을 양쪽에 12개씩 갖추고 있었다. 지금도 이 다리를 보면(장충단공원에 옮겨 놓음) 돌 하나하나에 석수들이 정성껏 매만져 다듬은 흔적이 엿보인다.

  조선시대엔 동대문의 오간수다리에서 시작해서 지금의 무교동 사이에 7개의 다리가 있었다. 그 중 가장 정교하게 만들어진 다리가 이 수표교였다. 청계천 복개 공사 때 여러 다리를 모두 없앴으나, 이 다리만 살려 장충단공원으로 옯겨 놓은 데는 그러한 미적(美的) 가치 때문이었다.

  다리 서쪽에 있었던 수표석은 장석(長石)을 네모꼴로 만든 돌기둥에다 한 자(당시의 한 자는 21.78㎝)마다 눈금을 새긴 10자 높이로 해서 세웠다. 지금으로 치면 수위측정계(水位測定計)라고 할 수가 있었던 이 수표석은 청계천 복개 공사 때 다리와 함께 장충단공원으로 옮겨가지는 못하고, 홍릉에 있는 세종대왕 기념관으로 따로 들어가 있게 되었다.

  서울 중구의 ’수표동(水標洞)’이란 이름은 이 수표석 때문에 나온 것이다.

  수표교와 쌍벽을 이루던 다리엔 ’너븐다리’라고도 불리던 ’광교(廣橋)’가 있었다.

  ’광교’는 달리 ’광통교(廣通橋)’라고도 했는데, 이 이름은 ’큰광교’와 ’작은광교’를 통틀어 일컫던 말이었다. 큰광교는 종로구 서린동에, 작은광교는 남대문로1가에 있었다. 모두 청계천에 놓인 다리임에는 틀림없으나, 큰광교는 남산쪽에서 내려오는 지류에 놓인 반면에 작은광교는 북악과 인왕산쪽에서 흘러내리는 지류에 놓여 있었다.

  다리가 넓어 이 다리들은 옛날에는 수표교와 함께 다리밟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대보름날에 종루(鐘樓)의 인경 소리를 듣고 열두 다리를 밟으면 한 해 동안 내내 다리병을 앓지 않는다."

  그래서, 해마다 보름달이 뜨기만 하면, 서울 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인경 소리를 들어 가면서 밤을 새워 이 다리들을 밟았었다.

  태종 10년(1410) 여름에 큰 장마가 져서 청계천이 범람했는데, 그 때까지 흙으로 된 다리였던 광교가 무너져 버렸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처음엔 흙으로 적당히 만들어 놓았던 다리였음을 알 수 있다.

  ’무교(武橋)’, 즉 ’모전다리’라고 했던, 지금의 서울시청 근처(무교동)의 다리도 시내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다리였다.

  원래 옛날에 토산 과일을 파는 모전(毛廛)이 있어서 ’모전다리’라 하고, 이를 한자로는 따로 ’무교(武橋)’라 하였다.

  ’모전다리’를 ’모교’라 하지 않고, ’무교’라 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지금의 세종로 네거리쪽 청계천의 지류에 놓인 다리 역시 똑같이 ’모전다리’로, 그것이 이미 ’모교(毛橋)’라는 다리 이름으로 돼 있어 이와 구분하기 위해서 그 ’모’라는 음과 똑같지 않은 ’무(武)’자를 붙이게 된 것이다. 그래서, 동이름도 ’모교동’이 아닌 ’무교동’이 된 것이다.

  두 개의 ’모전다리’가 서로 가까이 있어 이를 구분해 부를 필요가 있을 때는 세종로쪽의 것을 ’웃모전다리’라 했고, 이 무교동쪽의 것을 ’아래모전다리’라 했다.

  아래모전다리(지금의 시청 앞 근처)에 있었던 ’군기시(軍器寺)’라는 관청은 병기, 깃발, 융장 들의 일을 맡는 곳이었다.

  청계천에 놓인 또 하나의 다리로 ’오교(午橋)’라는 것이 있었다. 지금의 방산동과 을지로5가 사이에 있던 이 다리는 그 모양이 한자의 ’오(午)’자를 이루었다고 전해 오고 있다.

  이 땅의 큰 마을인 서울 한가운데에서 복작거리던 사람들에게 작게나마 졸졸졸 다정하게 물소리를 들려 주었던 청계천.

  이 내는 콘크리트 뚜껑 속에 묻혀서 이젠 우리 눈에서 멀어져 갔다.

  그런데, 새 시장이 서울의 살림을 책임지게 되면서 ’복원’이라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도심지를 관류하는 하천을 되살린다는 단순한 차원을 넘어 서울의 도시 운영 기조가 과거의 ‘개발’에서 ‘친환경’으로 바뀐다는 상징성을 갖기도 한다. 따라서, 서울을 비롯해 다른 지역에 미치는 파급 효과도 적잖을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청계천’의 새로운 그림을 상상해 보면서 이제 ’청계천’이란 이름도 다시 우리 입에 친근한 이름으로 다가오길 기대해 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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