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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성지순례[4]쿰란,예리고 자캐오나무,유혹의 산,나자렛 성모영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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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7-11-04 ㅣ No.2024

제 5일
10월16일(화)
쿰란, 사해 체험, 예리고 자캐오나무, 유혹의 산, 나자렛 성모영보성당, 시나고그
 

 
쿰란, 11개의 동굴 중 3동굴의 모습
 
쿰란동굴
쿰란동굴에서 여러 귀중한 문서가 발견되었는데 그중에
이사야서의 발견으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성 예로니모가 베들레헴에서 30년을 은둔생활을 할 때 
성서를 조작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도 했었다고 한다.
쿰란동굴에서의 발견으로 예수님 탄생전의 필사가 증명된 것이다.
유대인들은 희랍어 성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쿰란에서 아이맥스영화로 그 시대의 생활상을 보고 그들이 사용하던 항아리,그릇들,
미찌베(정결레, 물저장고)등 유다인 공동체의 생활증거 유적을 보았다.
사해문서 하나를 전시해 놓았는데 그 옛날의 체취가 묻어 나올 것 같았다.
사해 문서를 발견되는 일화는양치기소년이 잃어버린 양을 찾아 다니다가
동굴에 돌을 던졌을때 항아리에 돌이 맞는 소리를 듣고 발견하게 되었다는데 총 11개의 동굴이 발견되었다고 하며,
우리는 3, 4동굴을 멀리서 볼수 있었다.(사진:3동굴).
아마 로마군의 침략을 받자 동굴에 문서들을 숨기고 피신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사해문서가 발견되기 이전에는 서기 1004년에 기록된 레닌그라드 사본이 가장 오래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동굴이라면 산속에 있는 동굴을 상상하던 나는
동굴 앞에 사해가 펼쳐지고 있는 것을 보니 참 이상하기도 하고 장관이었다.
 
 
사해문서  死海文書  영어  Dead Sea Scrolls  
   1947년 초여름, 무리에서 떨어져 사해가 내려다보이는 벼랑으로 기어오르고 있는 한 마리 산양을 쫓고 있던 베두인족(族) 양치기 소년에 의해 한 동굴(쿰란동굴 1)에서 오래된 히브리어 구약성서의 두루마리 등의 문서가 발견되었다. 그 지역은 1948년 5월 이후 이스라엘 공화국과 요르단 왕국으로 분열된 팔레스타인의 요르단 왕국쪽에 속하며, 사해의 북서쪽, 예루살렘의 동남쪽에 펼쳐지는 '유다의 황야'의 일부이다.

   '사해문서'는 한 개의 문서가 아니고, '유다의 황야'에 있는 ① 쿰란(Wadi Qumran) 동굴, ② 무라바트(Wa야 Murabbaat) 동굴, ③ 미르드(Khirbet Mird) 폐허, ④ 하브라(Wadi Habra) 동굴, ⑤ 세이얄(Wadi Seiyal) 동굴 등에서 이미 발견되었고 현재까지도 계속 발견되고 있는 수많은 고문서의 총칭이다.

   1. 쿰란동굴 : 1947년에 쿰란동굴 1(1Q)이 발견되면서 그 부근 일대에 대한 탐사가 시작되어, 200개 이상의 동굴이 시굴(試掘)되었으며, 그중 11개 동굴에서 문서가 출토되었다. 동굴 1에서 발견된 두루마리들은 아마포에 싸서 항아리에 넣어져 있었기(예레 32:14) 때문에 보존상태가 가장 좋았다. 동굴 1에서 최초로 발견된 두루마리는 이사야서(1Q Isa,b), 하바꾹서 주해(1Q p Hab), 교단교규계율(敎團敎規戒律, 1Q S), 아람어의 외전적 창세기(1Q Apocry), 빛의 자식과 어둠의 자식의 싸움(1Q M), 감사의 시편(1Q H) 등이며, 예루살렘의 히브리대학에 소장되었다. 이들 문서의 연대는 대체로 기원전 2-1세기의 것으로 보고 있다. 그후 1949년 봄의 동굴 1의 또 다른 과학적 탐험 발굴에서 수백 개의 구약정전, 외경, 위전(僞典) 사본의 단편(斷片), 경찰(經札), 토기 등이 발견되었다. 그밖에 수확이 풍부했던 동굴은 동굴 4(4Q)인데, 동굴 11(11Q)에서 나온 문서는 동굴 1의 것에 못지않게 보존상태가 양호해서, 완전에 가까운 몇 권의 두루마리가 얻어졌다. 동굴 4에서는 판독(判讀)이 가능한 것만도 382개의 사본군(寫本群)에 속하는 수천 개의 단편이 발견되었다. 예루살렘의 고고학 박물관에는 쿰란동굴의 것만도 대소 400개 이상의 사본 또는 그 일부, 4만 개 이상의 사본단편이 구입, 소장되어 있다. 동굴 3에서는 보물의 매장 장소가 기록되어 있는 2개의 동판 두루마리가 발견되었다.
   2. 쿰란 폐허 : 예리코(Jericho)의 남쪽 12km, 사해의 서북 연안에서 1.3km, 사해 수면에서 약 300m 높이에 위치한 이 폐허는 1951년부터 5차에 걸쳐(1951, 1953, 1954, 1955, 1956년) 드보(Roland de Vaux)와 하딩(G.L. Harding)에 의해 처음으로 조직적 발굴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건물내를 종횡으로 달리고 있는 수로(水路), 몇 개의 저수지가 달린 수도원풍의 커다란 석조건물의 윤곽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 석조건물에는 여러 개의 방이 있고, 그중의 큰 방 하나는 사경실(寫經室)이다. 그리고 집회실 또는 식당으로 보이는 넓은 방, 약 1,000개의 식기류가 저장되어 있는 방, 다수의 화폐도 발견되었고, 부근에는 1,100개의 묘가 있는 묘지가 위치하고 있다. 이 주거지(住居址)는 기원전 100년경에 건립되고, 제1차 유대반란(67-70년) 때 파괴되었다고, 드보는 결론지었다.
   3. 무라바트 동굴 : 2개의 동굴에서 1951년에 많은 출토품이 얻어졌는데, 쿰란 동굴 출토품과는 관계가 없는 것 같다. 히브리어, 아람어, 그리스어, 라틴어로 되어 있고, 로마시대와 그 이후의 날짜로 된 이 출토품 중에는 유다 제2차 반란 즉 바르코크바(Bar Kokhba)의 난(132-135년)에 관계되는 문서와 바르코크바 자신의 편지도 포함되어 있다.
   4. 미르드 폐허 : 요르단의 Wadi en-Nar 부근에 위치하며 비잔틴 시대의 수도원 자리였던 이 폐허에서 1952년에 다량의 출토품이 얻어졌다. 그리스어, 아람어, 아랍어로 쓰여져 있는 이 문서들의 기록연대는 5세기에서 8세기에까지 이른다. 여기에는 구약 및 신약성서 사본, 서한, 그리고 5세기 그리스의 극작가 유리피데즈(Euripides)의 작품 ≪Andromache≫의 단편(斷片)도 포함되어 있다.
   5. 하브라 동굴 : 이스라엘에 있는 이 동굴에서 1960년과 1961년의 2회에 걸쳐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은 일련의 고문서들을 발견하였다. 1960년의 출토품에는 히브리어, 아람어, 그리스어로 된 바르 코크바의 15통의 서한이 포함되어 있었고, 1961년에는 50내지 60개의 문서가 추가 발견되었다.
   6. 세이얄 동굴 : 1952년 베두인족에 의해 '미상(未詳)의 장소'에서 일련의 고문서가 발견되었는데, 후에 그 고문서가 이스라엘에 있는 이 동굴에서 나온 것임이 확인되었다. 히브리어, 아람어, 아랍의 나바타이어(Nabataean), 그리스어로 된 이 문서들은 2세기 바르 코크바 시대의 서한과 약정서, 그리고 구약성서에 나오는 소예언자(小預言者)들의 예언서 그리스어본을 포함하고 있다.
   7. 쿰란 사본 및 단편의 내용 :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모든 사본은, 쿰란 폐허에 있었던 건물에서 거주하던 쿰란 교단(敎團)에 관계가 있는 것들로, 그 모든 문서는 성서 또는 성서와 관계가 있는 것, 묵시문학(默示文學) 또는 그 교단의 조직과 생활에 관계되는 것들이다. 그 사본 및 단편 속에는 에스델기 이외의 구약성서의 각서(各書)가 포함되어 있고, 그밖에 위경(僞經) 및 성서 이외의 문서도 포함되어 있다. 구약 정경(正經)의 사본 · 단편 주에서는 신명기(申命記), 이사야서, 시편, 다니엘서 등이 가장 많고, 또한 정경 이외의 문서 속에 나오는 인용구(引用句)에도 이들 4개의 서(書)로부터의 인용이 많다. 12족장의 유훈(遺訓), 요엘서의 단편 등은 신약성서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8. 쿰란 교단 : 엄격한 계율에 따라 수도원적인 공동생활을 하고 있던 이 교단의 조직과 생활에 관해서는 교단교규계율(1Q S), 회중규정(1Q Sa), 감사의 시편(1Q H) 등 이외에 1910년 카이로에서 발견된 다마스코서 등이 주요 자료이다. 많은 학자들은 쿰란 교단을 예수 시대의 유태교 3대 종파의 하나인 에세네파(派)와 동일시하고 있으며, 사해문서가 신약성서의 진정하고 분명한 배경을 제공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는 에세네파의 일원은 아니었고, 교회는 쿰란 교단의 일파도 아니다. 이 교단은 이방세계 사람들을 획득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들을 증오했으며, 율법의 사슬 밑에서 떠날 수도 없었다.
   9. 사해문서의 공헌 :
   첫째로, 구약본문 비평학(舊約本文批評學)에 대한 공헌을 들 수 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히브리어 성서 사본보다 근 1천년이나 더 오래된 이 사본의 발견이 가져다 준 공헌은 크다. 마소라 본문(本文)과의 비교, 또는 70인역(七十人譯, Septuaginta)의 평가문제에서 구약비평학은 새로운 전개를 보이고 있다. 둘째로, 히브리어 학자에게 새롭고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셋째로, 종래에 자료가 빈약했던 구 · 신약 중간시대사, 특히 에세네파 또는 그들의 사상 · 교의 · 생활 등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제공하고 있다. 넷째로, 신약성서와의 관련에서 많은 연구과제를 제시한다. 초대교회와의 유사점(類似點)과 상위점, 목욕재계의식과 초대교회의 세례, 메시아 사상, 세례자 요한과 에세네파 또는 쿰란교단과의 관계, 하느님과 벨리알(Belial, 타락한 천사), 빛과 어둠의 항쟁 등 문제에 대한 연구자료로서의 공헌도 빼놓을 수 없다. 구미 각국에서는 많은 학자들이 사해문서의 연구에 종사하고 있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쿰란 사본과 그리스도교의 기원: 쿰란의 정결 예식과 요한의 세례[2] 
1947년 쿰란의 첫째 동굴에서 사본이 발견되자, 예루살렘 성경·고고학 연구소와 요르단 문화재 관리국은 공동으로 키르벳(=폐허) 쿰란에 대해 고고학적 발굴을 시작하였다. 이 발굴 작업은 롤랑 드 보(R. de Vaux)가 지휘하여 1951년부터 1956년까지 계속되었는데, 발굴 결과 쿰란 거주지의 구조는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생활하기에 적합한 것으로 밝혀졌다. 즉 쿰란 거주지에는 전체 모임 장소로 사용된 곳과 규모가 큰 식당, 사본을 제작하고 필사하는 것과 관련된 유품들이 발견된 필사실, 다양한 토기를 만들었던 공동 작업장, 약 200여 명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물 저장소 여러 개와 정교하게 만들어진 수리 시설, 그리고 정결 예식에 사용되었던 다양한 시설이 있었다.
쿰란 유적지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의 결과는 유다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묘사하고 있는 에세네파의 생활뿐 아니라, 여러 쿰란 사본에서 묘사하는 공동체의 생활과 명백히 일치한다. 쿰란의 공동체는 재산을 공유하는 남자 독신자들의 공동체로 묘사된다. 그들은 흰 옷을 입고 함께 식사를 하였다. 이 공동체의 식사에는 매우 높은 수준의 정결을 유지하는 정식 회원들만 참석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쿰란 공동체가 스스로를 성전으로 간주하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성전과 그 사제직에 대해 비판하였던 쿰란의 에세네파는 자신의 공동체가 예루살렘 성전을 대신하는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공동체 안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기에 충분한 수준의 정결, 그리고 성전의 사제들에게 요구되었던 높은 수준의 정결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쿰란 공동체에서는 정결 예식의 가치와 실천을 강조하였다.
사실 제2차 성전 시대 유다이즘에서 정결 문제는 특별한 관심사였다. 유다인들은 정결에 대한 구약성경의 다양한 규율에 근거하여, 그들을 더럽히는 모든 것을 정화해야 했다. 에세네파의 정결 예식, 바리사이파의 실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기 전 정결 예식,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세례 실천 등은 모두 이 ‘정화’라는 의미에서 일맥상통한다.
침수하는 정결 예식은 정화에 특별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유다이즘에 새롭게 입문하는 개종자들에게 할례와 함께 침수 예식을 행하였는데, 이 두 예식을 실천하는 것은 매우 큰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개종자는 침수 예식을 준비하면서 율법과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교육받고, 유다 전통을 충실히 지키도록 훈련받는다. 그 후 침수 예식을 거행하는데, 이것은 장차 그가 사는 동안 계속해서 실천할 침수 예식의 시작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개종자들은 그가 사는 동안 유일하게 단 한 번 침수 예식을 거행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정결 예식을 실천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제2차 유다이즘의 정결 예식 실천이라는 맥락에서 쿰란의 에세네파 공동체의 실천을 이해할 수 있다. 고고학적 발굴과 문헌 증거들에 따르면, 쿰란 공동체는 자신의 정결과 거룩함을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하여 침수하는 정결 예식을 거행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쿰란 공동체가 거행하였던 침수 예식에서 당시 다른 여느 유다의 종교 집단들과 구별되는 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쿰란 공동체는 침수 예식을 할 때 침수자들의 내적 상태를 무엇보다 강조하였다. 침수자의 마음과 영혼이 올바르고 겸손해야 그 침수 예식은 더 큰 효과를 갖는다. 영혼의 올바른 상태가 침수 예식을 효과 있게 만들기 때문에, 침수자는 악과 불순종의 길을 떠나 하느님과 이웃에게 되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쿰란의 침수 예식은 공동체의 입문과 불가분한 관계에 있다. 공동체에 입문하고자 하는 지원자는 2년 동안 교육과 시험 기간을 거쳐야 한다. 이 기간 동안 지원자는 공동체의 중요한 가르침과 올바른 행동 방식에 대해 교육 받는다. 최종 시험을 거쳐 공동체에 받아들여지는 지원자는 특별한 침수 예식을 거행하는데, 이 침수 예식은 오순절에 거행되는 공동체 전체의 연례 계약 갱신 의식 중에 행하여진다. 이 예식을 거친 지원자는 비로소 공동체의 정식 회원으로 받아들여지며, 공동 식사를 포함하여 모든 의식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따라서 지원자를 위한 입문의 성격을 지닌 침수 예식은 공동체 회원들이 매일 일상적으로 거행했던 침수 예식과는 달리, 전체 공동체가 그것을 증거하고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특별히 중요성을 가졌던 것이다.
이와 같이 쿰란 공동체는 일년 동안 거행되는 축제 가운데 오순절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이 축제 동안 전체 공동체는 연례 계약 갱신 예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이것과 함께 새로운 계약의 공동체 안으로 입문하고 통과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이 공식적인 의식에는 전체 공동체 회원과 공동체 평의회가 입회를 허락한 지원자들만 참여할 수 있었다. 우리는 쿰란 공동체 규칙서의 여러 본문에서 이 입문적인 침수 예식에 대한 신학적인 설명을 발견할 수 있다:
1QS II 25-III 12: 25완고한 마음에 따라 걷기 위해서 하느님의 계약 안으로 들어오기를 거부하는 이는 누구나 하느님 진리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영혼이 1지식의 가르침과 정의의 심판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바꾸려 노력하지 않았고 올바른 이들 가운데 포함되지 않았다. 2그의 지식, 힘, 재산은 공동체 평의회 안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흉계는 혼란스런 부정에 있고 3그의 회개에는 흠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완고한 마음을 제멋대로 하게 놓아두면 그는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고 빛의 길에서 어둠을 가질 것이다. 완전한 이들의 샘에 4그는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속죄로 의롭게 되지 않을 것이고 깨끗한 물로써 정화되지 않을 것이고, 바닷물과 5강물로 거룩하게 되지 않을 것이며 정화의 물로써 깨끗하여지지 않을 것이다. 그가 공동체 안에서 스스로를 고치지 않고 하느님의 심판을 무시하는 한 그는 정결치 못할 것이다. 6그러나 그가 하느님의 올바른 의견의 영에 의해 사람의 길, 즉 그의 모든 죄악들이 속죄될 때, 7그는 생명의 빛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공동체의 성령에 의해, 그분의 진리 안에, 그는 8모든 죄악에서 정화될 것이다. 그리고 곧고 겸손한 영에 의해 그의 죄는 속죄될 것이다. 하느님의 모든 계명에 따르는 그의 겸손한 영혼에 의해 9사람들이 그에게 물을 뿌릴 때와 물에서 거룩하게 될 때, 그의 몸은 정화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하느님의 모든 길에서 온전히 걷기 위하여 자신의 걸음을 확고히 할 것이고 10그분이 당신의 축제들에 대해 명령하신 것을 따를 것이다. 그는 오른쪽으로든 왼쪽으로든 빗나가지 않을 것이고 11그분의 말씀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는 흡족한 속죄로 하느님 앞에서 받아들여지고 그것으로 12영원한 공동체의 계약을 얻을 것이다.
(송창현, 성서와 함께. 2007년6월호)
 
 
쿰란에서 신약성경 
1972년 스페인의 예수회 신부 오칼라간(J.O’Callaghan)은 쿰란의 제7동굴에서 신약성경의 사본이 발견되었다는 놀라운 경이로운 주장을 내세웠다. 당시 그는 로마 성서대학의 성경 본문 비평학 교수였다. 그가 주장한 신약성경의 사본인 쿰란 문헌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7Q4=1티모 3,16; 4,1-3/ 7Q5=마르 6,52-53/ 7Q6 1=마르 4,28/ 7Q6 2=사도 27,28/ 7Q7=마르 12,17/ 7Q8=야고 1,23-24/ 7Q9=로마 5,11-12/ 7Q10=2베드 1,15/ 7Q15=마르 6,48 등이 그것이다. 그는 특히 7Q4와 7Q5를 확실한 것으로 주장했다. 오칼라간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쿰란 사본과 그리스도교 기원의 문제를 연구하는 데 가히 획기적인 발견이 아닐 수가 없다.
오칼라간이 신약성경의 사본들이 발견되었다고 주장한 쿰란 제7동굴은 1955년에 발견되었다. 그리고 이 동굴에서는 19개의 그리스어 파피루스 단편들이 발견되었다. 이 파피루스들은 오칼라간의 주장 훨씬 이전에 이미 쿰란 사본 국제 위원회에 의해 공식판이 출판되었다. 제1동굴의 사본들을 제외하고 다른 동굴에서 발견된 사본들은 대부분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 단편들이었다.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을 경우 사본을 해석하는 데 많은 이견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 사본들의 해석과 공식판의 발표를 위해 예루살렘 성경·고고학 연구소의 드보(R. de Vaux)를 중심으로 다양한 국적과 다양한 종파의 학자들로 이루어진 국제 위원회가 구성되었던 것이다. 프랑스 학자 바이에(M. Baillet)는 쿰란 제7동굴 사본들의 공식판을 1962년에 DJD(Discoveries in the Judaean Desert)의 III권을 통해 발표하였다. 이 공식판에서 바이에는 가장 큰 두 파피루스 단편을 그리스어 번역 성경으로 확인하였다. 즉 7Q1을 탈출 28,4-7의 사본으로, 7Q2를 예레미야의 편지 43-44의 사본으로 확인하여 발표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17개의 그리스어 파피루스는 미확인 상태로 발표하였는데, 그 이유는 제7동굴의 파피루스 단편들은 크기가 매우 작고, 보존 상태도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쿰란의 11개 동굴 중에서 유독 제7동굴에서만 그리스어 파피루스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우리 주제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파피루스는 바로 7Q5이다. 바이에에 따르면 7Q5은 3.9cm 높이와 2.7cm 너비의 다섯 행으로 된 매우 작은 사본인데, 기원전 50년에서 기원후 50년 사이에 필사된 듯하다. 바이에에 따르면, 공식판의 7Q5 사본 해독은 예루살렘 성경·고고학 연구소의 신약성경 학자 보아마르(M.E.Boismard) 교수에 의해 이루어졌다. 
(송창현, 성서와 함께 2007년 2월호에서)


 
 쿰란 유적지 앞에 있는 꽃이 핀 아카시아 나무
 
우리는 쿰란 유적지 앞에 있는 아카시아나무를 보고 사해를 체험하기 위해 출발하였다.
 



사해 체험
 
사해에서 처음에는 물에 뜨는 것을 겁을 내었지만 물에 몸을 맡기고 하늘을 쳐다보니 너무나 편안하였다.
물맛은 짠맛을 지나 쓴맛이었다. 파란하늘과 사해 바다... 머드팩을 발라 마르고 난후 샤워를 하였다.
사해체험을 한후 예리고를 향하여 출발하였는데 가면서 돌무화과 나무, 시커머 나무를 보았다.
 
 
자캐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올라갔다는 예리고의 시커머나무(자캐오나무)
 
실제로 보니까 키가 크지 않은 사람도 올라갈 수 있을 만큼되는 나무였다.
나무 밑둥도 굵어서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루카19,1-10) 예수님과 자캐오 
 1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2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3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4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   5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6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7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8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10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보려고 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세관장이고 부자인 자캐오, 그는 사람들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아이처럼 나무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러한 자캐오를 예수님께서는 부르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작은 키가 축복의 계기가 된 셈이었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이 축복의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예리고는 예수님께서 눈 먼이를 고쳐주신 곳이기도 하다(루가18,35-43).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우리는 눈 먼이의 입을 통해 주님! 이라는 고백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세관장이 자캐오의 입을 통해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라는 고백을 듣게 되는 것이다.
죄인이라고 여기던 눈 먼이, 세관장이...입에서 터져 나오는 "주님!"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유대 광야. 케이블 카에서 내려다 본 모습
 
유대광야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동쪽으로 사해로 이어지는데
예수님께서는 40일간 금식하시며 기도하셨던 곳이다.
이스라엘의 그랜트케년이라고 불리는 와디켈트에 그리스 정교회 수도원이 있다. 
걸어서 올라가야하지만 시간이 없어 우리는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갔다.
 
 
절벽에 매달린 것 처럼 보이는 그리스 정교회 수도원,
이곳에 예수님께서 유혹을 받으신 바위가 있다.
 
유혹의 산, 밑에서 볼땐 사람이 올라갈 수 없을 것 처럼 절벽에 매달린 모양이지만
가까이 가보니 사람들이 다닐 수 있게 해 놓았다.
수도원 위에는 그리스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유혹의 바위에 있는 그리스정교회 수도원 입구, 그리스 국기가 보인다.
 
수도원 성당 안에는 성상대와 이콘들...그리고 예수님께서 유혹을 받으신 바위가 있었다.
 
 
 유혹의 산 수도원 성당 내부의 모습
 
 
유혹의 산 수도원 성당의 성상대   
 
 
예수님께서 유혹을 받으신 바위
 
우리는 루가복음을 봉독하고 기도하였다.
 
(루가4,1-13)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다 (마태 4,1-11 ; 마르 1,12-13) 
 1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 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2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 그 기간이 끝났을 때에 시장하셨다.   3  그런데 악마가 그분께,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5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한순간에 세계의 모든 나라를 보여 주며,   6  그분께 말하였다. “내가 저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내가 받은 것이니 내가 원하는 이에게 주는 것이오.   7  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모두 당신 차지가 될 것이오.”   8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9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10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너를 보호하라고 명령하시리라.’   11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12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13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 
 
 
 
유혹의 산에서 내려다 본 유대 광야
 
광야...일상의 삶을 피하여 한적한 기도의 장소로서 광야,
일상의 삶과 단절된 상태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로서의 광야,
우리는 때때로 우리삶에서 광야로 나가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광야에서 나를 비우고 하느님을 채우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도시의 분주함 속에서도 광야를 만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유대광야에서 기도하시고 다시 갈릴래야 지역으로 올라가셔서 공생활을 하시게 된다.
예리고는 예수님께서 눈먼 두사람을 고치신 곳이기도 하다( 마태 20,29 ; 마르 10,46-52 ; 루카 18,35-43).
 
 
그리고  예리고는  이스라엘의 유대광야 지역중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라고 한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도착후 가장 먼저 정복한 곳이 예리고이며 오아시스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대추야자는 건조한 지역에서 단맛이 강한 중요한 식량이다. 
그 당시에는 집을 지을 때 돌로 기초를 쌓고 흑벽돌로 벽을 쌓았다고 하는데
시멘트는 100년을 가지 힘들지만 흙은 2000년 이상을 견딘다고 한다.
현재 여리고는 팔레스타인 지역이다.
 
하루에 한바퀴를 이 성을 돌고 일곱째날 일곱 번을 돌은 후 제사장의 뿔나팔을 불며 ...
예리고성의 성벽은 무너져 정복할 수 있었다(여호수아기 6장20절).
예리고는 세계에서 가장오래된 도시로서 9,000년전의 유적지이며
바알신에게 제사지내던 망대로 추정되는 곳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예리고는 달이라는 뜻이며 달 신에게 제사지내던 곳이다.
아직 기적의 성벽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예수님시대와 지금의 예리고의 위치가 조금 다르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가실때 예리고를 거쳐 가셨는데, 현대의 예리고는 구약시대의 예리고이다. 
어제 국경 에일랏에서 북쪽으로 올라오면서 계속 광야만을 보았다.
그러나 갈릴래아 지역으로 들어서면 녹색지대가 보이게 된다.
 
이스라엘은 크게 4지역으로 나누는데
1. 남쪽평야:네게브(히브리어로 남쪽) 브엘세바지방이며 야곱이 살던 곳이다.
(야곱은 에사오의 보복을 피해 브엘세바에서 베델을 거쳐 하란에 이르게 되는
약 460Km 길을 떠나게 된다:창세26,3.24; 28,15.20)
2. 유다지방 3. 사마리아지역(루가10장) 4. 갈릴래아 지역이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사람, 혹은 갈리래아 사람으로 불리웠다.

요르단강은 하이야르덴, 히브리어로 '야라드흐'라고 하며 내려가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북쪽에서 4개의 샘이 쿨라에서 합쳐지며 예리고에서 사해가 시작되는 것이다.
사해는 빗물이 들어오기만 하지 나가지않아, 나누지 않아 죽음의 바다가 된것이고
나눌줄 알때 풍요로워지며 하느님께서 채워 주시는 삶이 되는 것이다.
예리고에서 아랍식 전통 점심식사를 하고 쇼핑을 하였다(순례일정중 유일한 쇼핑이었음).
빵의 기적 모자이크문양의 접시와 잔, 머드팩,크림등을 구입하였다.
1시쯤 나자렛을 향하여 예리고를 출발하였다.

수꼿축제(초막절)이 지나면 우기가 시작된다.
밭을 갈아놓고 비를 기다리게 되는데 차창밖으로 농토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제는 이해가 된다.
길보아산 근처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사울왕이 블레셋사람들과 전투를 한 곳이며
사울 왕과 그의 아들들이 전멸한 곳이다(1사무 28장,31장). 
 
블레셋은 필리스팀, 팔레스타인의 어원이 된다.
필리스타인들은 사울을 시체를 거두어 벳산성벽에 매달아 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나보트 지역을 지나면서 1열왕 21장의 아합이 나붓의 포도원을 빼앗은 이야기와
2열왕 10장의 예후가 이제벨을 죽인 성경이야기를 들었다.
팔레스타인들의 마을 표시는 항상 뾰쪽탑, 미나레트가 있다.
 
우리는 나자렛 성모영보(주님 탄생예고)성당으로 갔다.
 
 
나자렛 성모 영보 성당, Nazareth, Basilica of the Annunciation
작은형제회 1620년, 나자렛의 '주님의 탄생 예고성지'(the Annunciation)유적지를 취득함.
1730년, 첫 성당 건물을 건립함.
 
유다인 마을인 아훌라를 지나 계속 2시간쯤 가니 나자렛 동네가 나왔다.
이즈리엘평야의 일부인 나자렛을 들어가면서 양옆에는 비옥한 농토가 있었다.
 
예수님께서 30년을사셨던 나자렛은 산 동네였다.
옛날에는 동네를 방어하는 목적으로 산위에 거주하였다고 한다.
요셉과 마리아의 고향이며 이스라엘에서 베들레헴과 함께 기독교인이 가장많이 거주한다고 한다...
 
이 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 모습에서 예수님과 성모님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리고 왜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시켜 도시의 큰 동네가 아닌 시골 산동네의 마리아에게 방문했을까?
 
주님 탄생 예고(성모 영보) 대축일:3월25일,게시판1679번
Annuntiatio Domini,  Annunciazione del Signore ,  Annunciation of the Blessed Virgin Mary
 
 
3월25일 주의 탄생예고(성모영보)대축일 기념미사로 봉헌되었다(오후3시).
성모영보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였다.(이날  나는 성모공통 아침성무일도를 바쳤었다)

오늘부터 이스라엘에서의 미사는 안베다신부님과 이세라피노신부님께서 공동집전하셨는데
안베다 할아버지신부님께서 계속 젊은 이세라피노신부님께 주례를 양보하시는 모습이 참 좋아보였다.

가브리엘천사의 방문을 받으시고 예수님 잉태소식을 들으신 자리는 오상을 상징하는 다섯개의 십자가,
예루살렙 십자가 표시가  되어있었고 그 위에 "말씀이 이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라고 씌여 있었다.
"VERBUM CARO HIC FACTVM EST"   베르붐 까로 히크 팍툼 에스트
히크는 "이 곳에서"  여기, 이곳, 이장소라는 표현은 앞으로 성지에서 계속 보이게 될 것이다.
 

 
 "VERBUM CARO HIC FACTVM EST"   베르붐 까로 히크 팍툼 에스트  "말씀이 이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주님! 육화의 겸손을 기억하오며 찬양하나이다."
 
(루가1,31-33)
31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32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33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환희의 신비 1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심을 묵상합시다.
 
성모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의 방문을 받으시고 잉태소식을 들은신 후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가1,38)라는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숨을 죽이고 그 순간을 영원처럼 느꼈을 것이다.
순간에서 영원으로...!!!

만약 성모님의 대답이 없었다면 구원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때로는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신비에 맞딱들였을 때,
하느님의 뜻을 곰곰히 생각하며 마음에 담는 성모님의 자세는 우리 신앙인의 자세인 것이다.

"보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한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부르리라"(이사7,14)
 

제대는 "말씀이 이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
"VERBUM CARO HIC FACTVM EST"   (베르붐 까로 히크 팍툼 에스트), "
말씀이 바로 여기에서 사람이 되셨다."라는 거룩한 장소 바로 앞에 있었는데 
성당의 중앙의 가장 낮은 곳에 있었습니다.
낮은 자리, 겸손과 가난의 자리이다.
 
"주님! 육화의 겸손과 가난을 기억하오며 찬양하나이다."

미사를 봉헌하면서 이 곳 성지에서 미사봉헌을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오늘도 사제의 손으로 저희에게 가난한 성체로 오시는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렸습니다.
 
 
성당 마당에는 각 나라의 성모자 모자이크화가 있었다.
한복을 입은 성모자 모자이크도 있었는데 참 반가웠다.
"평화의 모후여, 하례하나이다" 
 
또한 이곳은 삼종기도가 이루어진곳이다.
우리는 삼종기도를 바쳤다.

○ 주님의 천사가 마리아께 아뢰니
● 성령으로 잉태하셨나이다.    (성모송)
○ "주님의 종이오니
●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성모송)
○ 이에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 저희 가운데 계시나이다.    (성모송)
○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 기도합시다.
   하느님, 천사의 아룀으로
   성자께서 사람이 되심을 알았으니
   성자의 수난과 십자가로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은총을
   저희에게 내려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 아멘.
 
 
 
나자렛에 있는 유대인 회당(시나고그)
 
그리고 성모영보성당 옆에는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토론하고 계시는 장면을 그린 성화가 있는유대 시나고그를 방문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이셨으므로 회당에서 유대 교육을 받으셨을 것이다.
여기서 30년을 사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시골 나자렛 출신이지만 옆에 있던
큰 도시 세포리스의 영향을 받아 공부를 하셨지 않았을까 추측한다고 한다.
 
*세포리스(치포리)
나자렛근처에 예수님의 교육적 배경인 세포리스라는 곳이 있는데 세포리트는 새라는 뜻이며,
해발588미터의 로마시대의 도시였다. 나자렛에서 하룻길거리이다.
BC 4년 갈릴리왕국의 새로운 수도로 건설되었으며. 중세 십작군시대 유적이 있다고한다. 
또한 세포리스는 AD 200년에 유대교 경전인 미쉬나가 최종 편집된 곳이다.
이곳에 작은형제회 관구 성지의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의 집이 있다고 한다.
 
 
우리는 그랜드크라운에서 숙박을 하였다.
예수님께서 자라고 사시던 나자렛 동네에서 잠을 자려고 하니
정말 내가 이곳에 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묶는 방은 2층이어서 땅과 아주 가까웠다. 
예수님께서 밟고 다니시던 땅과  마시던 공기,
땅 내음 그리고 하늘...
나자렛.
나자렛 사람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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