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창동성당 게시판

이스라엘성지순례[3]시나이산 등정, 성 카타리나 수도원, 시나이에서 미사 봉헌.

인쇄

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7-11-04 ㅣ No.2023

제 4일
10월15일(월)
시나이산 등정, 성 카타리나 수도원, 시나이에서 미사 봉헌.
 

 
시나이 산
 
신명6,4-5
4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5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들은 새벽 1시에 기상하여 시나이 산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캄캄한 밤, 후래시를 비춰가며 올라갔는데 중간 지점쯤에 낙타들이 많이 모여있었다.
낙타들은 온순하고 순종적이며 인내심이 강한 동물들이었다.
일부 사람들은 낙타를 타고 올라가기도 했지만, 우리일행은 일부 몇사람은 중간 지점에 남아있고
모두 다  정상까지 걸어서 올라갔는데 낙타를 비켜가며 올라갔다.
 
 

 
시나이 산 정상에 거의 올라갔을 때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오늘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주님, 당신은 사랑이시오며 자비이시나이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 
                                                   
                                                       성 프란치스코
 
주님, "당신은" 홀로 거룩하시오며,
"기적을 하시는" 주 하느님이시나이다(시편 76,15). 
 
당신은 힘세시고 위대한 분이시나이다.
당신은 지극히 높은 분이시며 전능한 왕이시나이다.
당신은 거룩한 아버지시며 하늘과 땅의 왕이시나이다.
 
당신은 삼위이시고 일체이시오며
신들의 주 하느님이시나이다(참조: 시편 135,2).
당신은 선 자체이시며 모든 선이시며 지상 선이시나이다.
당신은 살아계신 주님이시오며 참 하느님이시나이다.
 
당신은 사랑이시오며 자비이시나이다.
당신은 지혜이시오며 겸손이시나이다.
당신은 인내이시오며 아름다움이시나이다.
당신은 온화이시오며 안식처이시나이다.
당신은 우리의 평화이시오며 기쁨이시나이다.
당신은 우리의 희망이시오며 즐거움이시나이다.
당신은 우리를 흡족하게 하는 온갖 보화이시나이다. 
 
당신은 아름다움이시오며 온화이시나이다.
당신은 피난처이시나이다.
당신은 우리의 보호자이시오며 방어자이시나이다.
당신은 힘이시오며 휴식이시나이다. 
 
당신은 우리의 희망이시오며 우리의 믿음이시나이다.
당신은 우리의 사랑이시나이다.
당신은 우리의 온전한 감미로움이시오며,
당신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시나이다.
위대하시고 감탄하올 주님,
전능하신 하느님, 자비로운 구세주이시여!
 
 
 
시나이 산의 해돋이
 
지극히 높으시고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주여!
찬미와 영광과 칭송과 온갖 좋은 것이 당신의 것이옵고
호올로 당신께만 드려져야 마땅하오니 지존이시여!
사람은 누구도 당신 이름을 부리기조차 부당하여이다.
 
내 주여!
당신의 모든 피조물 그 중에도
언니 햇님에게서 찬미를 받으사이다.
그로 해 낮이 되고 그로써 당신이 우리를 비추시는
그 아름다운 몸, 장엄한 광채에 번쩍거리며
당신의 보람을 지니나이다 지존하신 이여!
(성프란치스코의 태양의 노래 중에서)
 
 
시나이산에서 보는 일출, 해돋이...
둥근 해가 성체 처럼, 성체 거양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당신께서 십계명을 주신 시나이 산에서 맞는 일출...  
오, 아름다워라!  형님인 태양과 누님인 달은....
광야에서 있으면 신을,
하느님을 안 만날래야 안 만날수가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시나이 산 산상미사를 드리지 못해 아쉬웠다.
가방에 발자취를 따라서,성지순례책....무겁게 메고 올라왔는데 너무 아쉬웠다.
언제 또 올 수 있을까?
 
 
(탈출24,12-18)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사십 일을 지내다 
12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있는 이 산으로 올라와 머물러 있어라. 내가 이 백성을 가르치려고 훈계와 계명을 기록한 돌판을 너에게 주리라." 13 모세는 자기의 시종 여호수아를 데리고 하느님의 산으로 올라가며
14 장로들에게 일러두었다. "우리가 그대들에게 돌아올 때까지 여기 앉아 기다리시오. 아론과 후르가 그대들과 함께 여기에 남아 있을 터이니, 사건이 생기거든 그들에게 가서 판단해 달라고 하시오." 15 모세가 산에 오르자 구름이 산을 덮었다. 16 야훼의 영광이 시나이 산 위에 머물러 있어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뒤덮고 있었다. 야훼께서 이레째 되는 날 그 구름 속에서 모세를 부르셨다. 17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는 야훼의 영광이 마치 그 산봉우리를 태우는 불처럼 보였다. 18 모세는 구름을 뚫고 산으로 올라가 사십 주야를 그 산에서 지냈다.
 
(탈출34,29-30)모세가 빛나는 얼굴로 시나이 산에서 내려오다
29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내려왔다. 산에서 내려올 때 모세의 손에는 증거판 두 개가 들려 있었다. 그런데 모세는 야훼와 대화하는 동안에 자기 얼굴의 살결이 빛나게 된 것을 모르고 있었다. 30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쳐다보니 그의 얼굴 살결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으므로 모두들 두려워하여 가까이 가지 못하였다. 
 
 
광야   한자  廣野  라틴어  desertum  영어  desert 
   일반적으로 너른 벌판을 가리키는 광야는 구약의 백성이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는 길목이었고 하느님의 백성이 탄생하는 장소였다. 거기서 야훼의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는 이스라엘에게 야훼는 만나와 구리뱀으로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광야는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곳일 뿐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가 개선하는 곳이기도 하다. 세례자 요한의 시기에는, 광야가 내림할 메시아를 고대하며 회개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는 구약의 백성처럼 광야에서 여러가지 시험을 당했으나 그들과는 달리 그것을 모두 이겨내고 성부께 충실하였다(마태 4:1-11). 그의 지상 생활 중에 예수는 군중을 피하기 위하여 광야로 갔고 한적한 기도의 장소로서 광야를 택하였다. 그러나 광야의 상징을 직접 표현하는 것은 이러한 행위에 있지 않고 일찍이 광야에서 있었을 놀라운 선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재현된다는데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광야라 할 수 있다. 그 분 안에서 우리는 시련을 이겨내고 하느님과 친교를 가진다.
이처럼 광야라는 장소와 광야의 시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
   광야의 상징은 교회의 처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까지 광야에서 살고 있다. 시련을 이겨낸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말씀을 듣고 그의 살과 피를 먹으며 성사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또 수도자들은 광야에 은둔하여 기도하고 수덕에 전심함으로써 광야는 오늘날의 수도원 발생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시나이의 성 가타리나 수도원 THE MONASTERY OF ST. CATHERINE - MOUNT SINAI
 
아쉽게 시나이산 정상에서 미사를 봉헌하지 못하였다.
시나이산을 내려오니 새벽에 올라갈 때는 성 카타리나수도원이 어둠속에 희미하게 보였는데,
내려오면서 보니 수도원 전경이 다 보였다. 이콘의 보고인 성 가타리나 수도원!
숙소에서 미사와 아침식사를 한 후 다시 오기로 하였다.
 
숙소에서 미사를 봉헌하였는데 이요한신부님께서는
오늘 아빌라의 대 데레사 성녀의 축일을 맞아,
여걸이셨던 성녀 대 데레사께서는 수도원 주인은 성모님이라고 하시고
기도는 내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하느님께 맡기는 것이라고 하셨으며,
수영을 배울 때도 어느정도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 후에는 물에 몸을 맡기는 것 처럼 하느님께 맡기는 것이라고 하셨다.
내 자신이 용을 쓰고 사는 사람은 꽃밭에 물뿌리개로 물을 주는 사람이지만,
비가 올때 다 젖는 것처럼 하느님께 맡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셨다.
또한 성녀 소화데레사와 아빌라의 대 데레사 두분의 성덕의 공통점은 '상식을 지키는 것,
일상의 삶에 충실하기'라고 하시며 삶의 구석구석에서 향기를 풍기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콘의 보고] 시나이의 성 카타리나 수도원
4세기 초 이집트의 막시미누스 황제 당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심하였다.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캐더린(알렉산드리아의 성녀 가타리나,축일:11월25일)은 용모와 학식이 출중했다.그녀는 예수님을 받아 들이면서 세례를 받고 황제의 우상 숭배를 비난했다.황제는 여러 학자들을 보내 회유하려 했으나 그들마저 예수를 믿게 되었다.결국 캐더린은 고문을 받고 되고 순교를 하게 된다.그녀의 시신은 천사에 의해 시나이 반도 제일 높은 곳으로 옮겨진다.이 사건 이후 시나이산 수도원이 성 캐더린 수도원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 수도원의 역사적 배경은 3세기 중엽부터 수도사들이 찾기 시작했고, A.D. 330년에 헬레나 황후가 불붙는 떨기나무 자리에 성모 마리아에게 헌납하는 교회를 짓는다.(성녀 헬레나 축일:8월18일.성 십자가현양 축일:9월14일)
4세기 경부터 많은 순례자들이 방문하게 되고 5세기 중엽에는 시나이 교구가 성립되었다.비잔틴 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은 요새화된 장방형의 수도원을 건설 하였다. 이 수도원이 완성 된 것은 A.D. 557년 이다.

7세기 때 아랍인들이 점령을 해서 수도사들이 30명 까지 줄어들었다가 수도원장이 모하메드에게 수도원에 대한 보호를 요청하였고 모하메드는 그것을 받아 들였다.11세기에 접어 들면서 십자군들이 등장함에 따라 수도원은 서방세계의 기독교와 아랍 지역의 모슬렘 사이에서 미묘한 균형을 유지해야만 했다.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점령했을 때도 수도원은 보호되었다. 이곳은 또한 이콘이라고 불리우는 목판 성화의 보고이며, 2000여 개가 넘는 이콘들이 보관 되어 있다.

성 캐더린 수도원 내에 있는 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인 6세기 중엽에 건설 되었다.
이 교회로 들어가는 나무 장식 문은 건립 당시 만든 문으로써 1400년 이상 된 문이다.교회 안에는 12 기둥이 있으며 이것은 12 달을 의미한다. 기둥 위에는 그 달의 성자 이콘이 있다.이 교회 제단 뒤에는 불붙는 떨기나무의 기념 예배당이 있고 이곳은 지금도 반드시 신발을 벗고 들어간다.이 교회 근처의 떨기나무는 시나이 반도에서만 자라나는 특수한 종류로써 소중하게 보존되고 있다.
 
 
General view Mosaic, apse of "Katholikon" 6th century-Monastery of St. Catherine-Mount Sinai.

거룩한 변모산에서의 예수님 모습을 나타낸 성당 제대 중앙에 있는 모자이크는
왼쪽부터 엘리야, 요한, 예수님, 베드로, 야고보, 모세의 모습이 새겨져 있고,
이 둘레에는 12 제자, 12 예언자, 건축 당시의 수도원장 롱지너스, 집사 요한등 모두 26명의 모습이 둘러져 있다.
목판에 그려진 이콘 중 현재 가장 오래된 것은
6세기 콘스탄티노플에서 그려져 성 가타리나수도원으로 옮겨진 '성모자 이콘'과
콥트 교회에 기원을 둔 '그리스도와 성 메나스' 이콘(현재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소장)이다.
 
*'그리스도와 성 메나스' 이콘에 대한 설명은 이스라엘 성지순례[1]에 있다.
 
 
아침10시반 다시 성 카타리나 수도원으로 갔다
성 카타리나 수도원 외벽에 성냥갑처럼 매달려 있는 것은, 예전에 수도원 문을 안 만들고 위에서 내려준
도르레를 타고 수도원을 드나들었을 당시 도르레가 설치 되었던 곳이라고 한다. 
.
이콘의 보고인 성카타리나 수도원의 성당, 예수님 변모성당에는 입구부터 여러 이콘이 전시되어 있었고,
성상대 (聖像臺,이코노스타시스)와 거룩한 십자가, 제대 위에는 예수님의 변모를 그린 모자이크가 있었다.
수도원 마당에는 모세의 떨기나무가 있었고 우물은 뚜겅을 덮어 놓았다. 
 
 
 

 
 
떨기 나무
 
불꽃이 이는데도 떨기가 타지 않았다고 한다. 
떨기 나무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신을 벗어야 하는데...). 
 
(탈출기3,1-15)
하느님께서 불타는 떨기 속에 나타나시다 
 1  모세는 미디안의 사제인 장인 이트로의 양 떼를 치고 있었다. 그는 양 떼를 몰고 광야를 지나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다.   2  주님의 천사가 떨기나무 한가운데로부터 솟아오르는 불꽃 속에서 그에게 나타났다. 그가 보니 떨기가 불에 타는데도, 그 떨기는 타서 없어지지 않았다.   3  모세는 ‘내가 가서 이 놀라운 광경을 보아야겠다. 저 떨기가 왜 타 버리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4  모세가 보러 오는 것을 주님께서 보시고, 떨기 한가운데에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5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6  그분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그러자 모세는 하느님을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렸다.  
 
모세가 소명을 받다 
 7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8  그래서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그 땅에서 저 좋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족과 히타이트족과 아모리족과 프리즈족과 히위족과 여부스족이 사는 곳으로 데리고 올라가려고 내려왔다.   9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나에게 다다랐다. 나는 이집트인들이 그들을 억누르는 모습도 보았다.   10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   11  그러자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까?”   12  하느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표징이 될 것이다. 네가 이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면, 너희는 이 산 위에서 하느님을 예배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당신 이름을 계시하시다 
 13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분 이름이 무엇이오?’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14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15  하느님께서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신 야훼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이것이 영원히 불릴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대대로 기릴 나의 칭호이다.”  
 
(신명33,13-17)
모세의 축복
 13  요셉을 두고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의 땅은 주님께 복 받은 땅. 하늘의 귀한 선물인 이슬과 저 아래 펼쳐진 심연으로,   14  해가 내놓는 값진 선물과 다달이 나오는 값진 선물로,   15  예로부터 있던 산에서 나는 최상품과 처음부터 있던 언덕에서 나는 값진 선물로,   16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에서 나는 값진 선물과 덤불에 사시는 분의 은총으로 복을 받아라. 이 모든 복이 요셉의 머리 위에, 형제들 가운데에서 뽑힌 그의 정수리 위에 내리리라.   17  그는 맏이로 난 소, 그에게 영예가 있어라. 그의 뿔은 들소의 뿔. 그 뿔로 민족들을 땅 끝까지 모두 들이받으리라. 에프라임의 수만 명이 그러하고 므나쎄의 수천 명이 그러하리라.”  
 
 
The Iconostasis, mdae by monks in 1612 of wood covered with gold. 
(Dr. Evangelos Papaioannou, THE MONASTERY OF ST. CATHERINE SINAI,  P.18에서)
 

Santa Caterina d’Alessandria Martire
Alessandria d’Egitto, secoli III-IV


 
시나이의 성 가타리나 수도원 마당에서
 
그런데 두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던 6세기 '구세주 그리스도' 이콘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쉽게도 직접 볼 수 없었다.

이번 성지순례에서 어쩌면 가장 보고 싶은 것 중의 하나였는데...성직자와 수도자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중요한 이콘과 성서 필사본등을 보관하는 곳은 일반인에게는 보여주지 않는다고 했다.
수도자도 수도복을 입어야 들어 갈 수 있었다. 
아마도 그곳에는 6세기의 성모자 이콘도 있을 것 입니다.
아쉬운 마음을 성카타리나 수도원의 수사님이 그리신 이콘(아마 수사님께서는 원본을 앞에 놓고 그리셨겠지요)과
사진, 엽서를 구입하는 것으로 대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성모자 이콘은 부분만을 보았었는데, 이번에 원본의 전체 모습을 사진으로나마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도원의 안내 책자를 구입하였는데 원본의 크기가 적혀 있었습니다.
 
 
[이콘]그리스도,  6세기경, 가장 오래된 이콘, 시나이 성 카타리나 수도원, 18" x 34.5"
 
현존하는 6세기의 비잔틴 이콘(목판성화상)은 가장 오래 된 것이며,
복음서를 왼손에 받들고 오른손의 중지와 약지를 구부려서
엄지 손가락에 붙여 축복의 형태를 나타내고 계신다. 
둥근 후광에 십자가가 장식적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후대의 것에 반드시 첨가되는
OΩN(존재하는자) IC,XC(예수그리스도)와 같은
신성을 나타내는 네개의 문자는 없고 대신에 건축물이 그려 넣어져 있다. 
엷은 오랜지 색과 백색으로 완성한 얼굴은
고귀하고 위대하지만 대단히 사실적이다.
(이콘.신비의 미에서,편저 장긍선신부)
 
시나이산을 떠나면서 오늘 시나이 성 가타리나수도원에서
이콘 구세주 그리스도를 보여 주시지 않은 것은 뜻이 있으실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인간의 신화와 역사 안으로
그리고 인간의 시간과 공간 속으로,
또한 인간의 한계성 안으로 들어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 하느님을 우리가 눈으로 볼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것...
그것이 저에게 있어  6세기 이콘 구세주 그리스도를,
현존하는 것중 가장 오래된 이콘을
두눈으로 보고 싶어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의 언어나 인간이 그린 그림,
형상 안에 같혀 계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 나는 형상과 언어에 하느님을 붙들어 두려고 하는 것일까?
 
작년 영성학교 공부 할 때도 느낀 것이지만,
이콘이 예수님과 성모님을 가깝게 느끼도록 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으나,
그러나 하느님, 성부께 대해서는 이콘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봅니다.
2년전 산타마리아마조레에서는 루가복음사가가 그렸다는 성모님 이콘을 볼 수 있었습니다만,
이번 순례여정에서 6세기 구세주 그리스도 이콘을 저에게 보여 주시길 허락하지 않으신 것에 대해
사도 바오로의 '지금은 희미하게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이라는 말씀에 희망을 갖습니다.
 
(1고린13,12)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 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공동번역)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치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새번역 성경) 
 
(요한묵시록 22,1-5)
1  그 천사는 또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나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나와,   2  도성의 거리 한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이쪽저쪽에는 열두 번 열매를 맺는 생명 나무가 있어서 다달이 열매를 내놓습니다. 그리고 그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에 쓰입니다.   3  그곳에는 더 이상 하느님의 저주를 받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도성 안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가 있어,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4  그분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는 그분의 이름이 적혀 있을 것입니다.   5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도 햇빛도 필요 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들의 빛이 되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다스릴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후  하느님께서는 베들레헴 아기예수탄생 대성당에서,
예수 탄생 동굴로 내려가는 층계 앞에 있는 기둥위에 계시는 거룩한 만딜리온을 보게 해주셨습니다.***
 
 
시나이 성 가타리나 수도원 근처에 있는 기념품점의 풍경
  
이집트와 이스라엘 국경인 타바로 향하며 현지가이드는 이스람교에 대해 이야기 해 주었다.
아마 이집트에서의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기에 이슬람교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나보다.
마호멧은 처음엔 기독교인었다고 한다.
이슬람교에서는 유일신을 믿는 이슬람교,기독교,유대교인 모두 천국을 가는 것을 인정한다고 한다.
카바신전의 검은 주춧돌은 아브라함이 이스마엘과 최초로 제사지냈던 제단이라고 한다.
이슬람교인들은 이스마엘의 장자권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없어졌지만 성모님 성상도 깨지 않았으며,
신성적인 면을 제외한 예수님을 인정하고 있다고 하며, 선지자의 한분으로 여기고 있다고 한다.
앞서 말했듯이 이집트인들은 500년대 초반, 자신들의 고대 신앙과 기독교가 분리되기 전까지는
호로스를 혼자 힘으로 낳은 이시스 여신과 성모님과 동일시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런데 정설은 아니지만, 600년대 우리나라 통일신라시대때 문수보살상
(불국사에서 발견,숭실대 기독교박물관소장)과 1954년에 발굴된 돌 십자가를 보면
초기 기독교 뿌리가 이미 통일신라시대때 당나라를 통해 기독교, 대진경교가 들어왔으며
일본에까지 전파된것으로 여긴다고 했다.
문수보살과 성모마리아...예전에 불교 탱화, 미술 전시회를 관람하며 알게 되었던 것들이 새삼 생각이 났다.  
나는 신화와 종교, 그리고 신앙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신화(神話)는 보편적이면서도 개별적인 것이다.
신화는 전승민족의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기때문에 개별적인 것이라고만 생각할 수 있다. 지리적으로 격리되어 있는 다른 민족들 사이에 동일 유형의 신화가 전승되기도 하고 주변 민족들 사이에서도 같은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의 창세신화가 바이칼 호 인근에 거주하는 몽골의 부리아드족과 일본의 오키나와, 멀리는 불가리아에서도 확인되는 것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상동적인 자연환경과 경제토대, 역사적.문화적 경험의 공유등과 같은 요인들에 의해 이른바 원신화(原神話 : Ur-Myth)를 기반으로 자기네 민족의 개별적 신화를 형성해 나가기도 하는 것이다.
(신화의 세계.박종성,강대진공저,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
  
네스토리우스파교회    영어  Nestorian church  
   431년 에페소공의회에 의해 네스토리우스가 이단으로 배척된 후에도 계속 네스토리우스의 학설을 따른 그리스도교회. 이들은 에페소의 주교 이바스(Ibas), 니시비스의 주교 바르수마스(Barsumas) 등의 노력으로 완결된 형태로 발전된 네스토리우스파 신학을 받아들였고 페르시아와 소아시아 지방으로 옮겨가 많은 교회를 세웠다. 현재 아시리아 교회란 이름으로 존속하고 있다. 한편 네스토리우스파 교회는 중국 당나라에도 전래되어(635년)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교회를 세웠다.
 
경교    한자  景敎  라틴어  Nestorianismus  영어  Nestorianism 
   시리아 유프라텐시스에 있는 제르마니치아(Germanicia) 원주민인 네스토리우스(Nestorius, 또는 Nestorios, ?~451)에 의하여 창출된 교리를 신봉하는 종파.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위격적 결합(hypostatic union)이 아니라 외형적 결합(synapheia)이라 하여 그리스도에는 두 인격이 있다는 주장을 내용으로 삼고 있다.
이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교는 당(唐)나라 초기에 서역(西域)을 통하여 중국으로 전해져 경교(景敎)로 불렸고 14세기 말에 소멸되었다. 이 종파는 로마 제국 영내에서 발달한 그리스도교가 아니고 로마 제국 영역 밖에서 발달하였다.
   네스토리우스의 교의를 따르는 사람들은 페르시아를 거쳐 동방으로 그 선교지를 확장하여 나가, 아라비아, 인도, 중앙 아시아에까지 이르렀다. 이리하여 5세기 말부터 이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교는 중국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개시하여 성경의 번역은 물론, 곳곳에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교의 일파의 명칭이 왜 중국에서 경교라고 호칭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연혁에 근거를 두고 있다.
   중국에서는 최초로 이 종교를 '파사교'(波斯敎), 교회당을 '파사사'(波斯寺)라고 부르다가, 당나라 현종(玄宗)이 '파사사'를 '대진사'(大秦寺)로 개칭하여 '파사교'는 '파사경교'(波斯景敎)로 되었다가 뒤에 '대진경교'(大秦景敎)라고 부르게 되었다. '대진'이란 로마를 가리킨다. 당의 덕종(德宗)때인 781년(建中 2년)에 세워진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에는 “眞常之道 妙而難名功用昭彰 强稱景敎”라 기록되어 경교 신도를 경중(景衆) 혹은 경사(景士)로, 경교사원을 경사(景寺), 본존(本尊)인 미사가(彌師訶)를 경존(景尊)이라고 하였다. 경교 비문에 따르면, 635년(貞觀 9년) 페르시아 사람 알로펜(阿羅本, Alopen 혹은 Abraham)을 단장으로 한 경교 선교사 일행이 장안(長安)에 도착하였고, 638년에는 태종(太宗)이 장안에 대진사를 건립하여 승려 21명을 배속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경교 신자가 당나라 이전부터 중앙 아시아 일대와 만리장성 내외에 거주하였으며, 경교 선교사가 그 곳을 왕래한 사실을 알려 주는 사료들은 적지 않게 있다. 당나라 때의 경교의 주장은, ① 일신교(一神敎), ② 제왕 숭배, ③ 왕법 위본(王法僞本)주의, ④ 부모 효양(父母孝養), ⑤ 보시(布施) 장려, ⑥ 선악 이도(善惡二道, Didache)의 교회를 신봉하고 있었고, 펠리오(P. Pelliot)가 1908년 돈황(敦煌)에서 발견한 《경교삼위몽도찬》(景敎三威蒙度讚) 및 《존경》(尊經)에 의하면, ⑦ 삼위일체설의 신봉과, ⑧ 세례 및 영성체(領聖體)를 행하고, ⑨ 품급(品級)을 경교회의 전례(典禮)로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중국의 전통적인 사상과 타협하여 충효, 호국(護國)의 가르침이라는 점이 설명되었다. 그러다가 무종(武宗)이 도교(道交)를 믿게 되어 845년 다른 교를 압박한 결과, 경교는 차차 쇠퇴하여 신도들이 서역으로 쫓겨가거나 도교의 그늘에 숨어 버리거나 하였다.
   원(元)나라 때로 접어들면서 1289년 경교는 다시 그 선교활동이 허용되었고, 삼위일체를 신봉하며, 로마교황의 수위권을 승인하여 원나라의 정치적 심부름을 충실히 하였다. 그렇지만 이 시대에는 경교라고 부르지 않고, 중국측 역사문헌상에는 '타르사'(達娑, Tarsa) 또는 '에르케운'(也里可溫)으로 알려져 있으며, 원의 경교 사원인 십자사(十字寺)가 72개소나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잠시 재흥했던 중국의 경교는 원의 멸망과 더불어 그 터전을 잃고 말았다. 따라서 몽고 각지에 그 유적을 남긴 것 중에 원대 이후의 것은 거의 없다.
   한국에서의 경교는, 신라시대의 돌로 된 십자가, 동제(銅製)십자가, 마리아 관음상(觀音像) 등 경교적 흔적을 보여 주는 유물들이 1956년 경주(慶州)에서 출토됨으로써 널리 통일신라시대로 그 전래시기를 보는 측도 있지만 정설(定說)은 아니다. 일본의 경우는《속 일본서기》(續 日本書紀)에 783년 (당 開元 24년, 일본 天平 8년) 당나라 사람 황보(皇甫)가 페르시아 경교 의료선교사인 밀리스(Millis, 李密)를 동반해 와서 세이부(聖武) 천황을 만나게 한 사실이 전래의 초기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이스라엘과 중동문제가 없을 때는 유태인들도 놀러오곤 했었다는
누에바를 경유하여(한강 식당에서 한식 점심식사) 타바 국경에 도착하였다.
그동안 성지순례를 지도해주신 이요한 신부님께서는
더 나은 이집트 성지순례 지도를 위한 공부를 하시기 위해 이집트에 남으시고
며칠 후 요르단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였다.
에집트의 현지가이드로서 자세한 설명과 함께 수고해 주신 양선욱씨와도 아쉬운 이별을 하였다.
 

 
이스라엘에 들어서서도 버스 양옆의 모습은 계속 광야가 이어졌다..
광야에서 푸른나무를 보면 참 반가웠다.
 
타바 국경의 통과하여 이스라엘 땅, 에일랏 Eilat으로 들어오니
이스라엘에서 성지순례를 지도해 주실 안베다 신부님과 장레오 수사님께서 마중을 나와 계셨다.
안베다 신부님께서는 예루살렘에 30년을 사셨다고 한다. 올해 여든넷이신데 나이에 비해 정정하셨다.
그리고 장레오수사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박사과정 공부를 하고 계시는데,
지난 6월 정동에서 1차 성지순례 예비모임때 성지순례를 위한 준비를 시켜 주셨었다.
두분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버스를 갈아타고 북쪽으로 출발하였다(오후5시).
바오로 사도께서 이스라엘인이 예수님을 알게 되면 전 세계가 복음화되리라고 하신 바로 그 이스라엘이다.
 
에일랏, 이스라엘에서도 계속 버스 양옆의 모습은 광야였다.
광야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나무는 아카시아 나무라고 한다.
탈출기에 나오는 성막을 짓는데 쓰인 나무도 아카시아나무라고 한다.
그리고 사해는 바닷물의 8배의 짠맛을 가지고 있으며 화학공장이 들어서 있었다.
사해 근처에 소돔과 고모라의 땅이 있으며 유황, 구린내가 난다.
사해가 소금농도가 높은 이유는 양옆 언덕의 지질이 유황성분과 소금기가 많은데
빗물에 녹아 사해로 흘러들어가기 때문이며,
사해는 해표에서 400미터 이하라서 물이 흘러가지 않고 고여 있다고 한다.

광야의 오아시스인 엔게디(염소,산양들의 샘)에는 아르고 골짜기와 다윗골짜기가 있는데
이곳은 다윗이 동굴에서 사울을 즉일수 있었지만 옷자락만 베어 놓았다는 곳이다(1사무 24장).
10월은 건기의 끝인데도 물이 많다고 한다.
엔게디 근처의 사해(남쪽은 얕은 사해, 북쪽은 깊은 사해)에는 사해 화학공장(공업원료추출)이 들어서 있는데
그곳을 지나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 예리고에서 숙박하였다.(예리고 인터콘티넨탈호텔 숙박)
 
예리고, 자캐오의 나무, 그리고 유혹의 산...
 
 
 
 
 
 
 
 
 
 


1,059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