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창동성당 게시판

1월10일(1월28일) 로렌자나의 복자 에지디오(질스) 은수자

인쇄

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12-06-11 ㅣ No.2133

 

축일  1월10일(1월28일)
로렌자나의 복자 에지디오(질스) 은수자, 
Observant

Beato Egidio (Bernardino) Di Bello Eremita francescano
Laurenzana, 1443 - 10 gennaio 1518
Blessed Giles of Lorenzana
Also known as Egidius of Lorenzana
Born : 1443
Died : 1518 of natural causes
Beatified : 1880 (cultus confirmed)



 이탈리아 나폴리(Napoli)의 로렌자나에서 태어난 에지디우스(또는 에지디오)는 노동자 부모로부터 열심한 신앙을 물려받았으며, 그 역시 어려서부터 농장 노동자로 생활하였다. 어린 시절 작은 형제회 회원들의 영향을 받은 그는 장성한 뒤에 고독한 분위기 속에서 하느님을 섬기기로 결심하고 성모의 소경당 근교에서 은수자로서 정착하였다. 

   그는 기도에만 몰두하였고 새와 짐승들이 그의 친구였다. 그 후 그는 작은 형제회의 평수사로 들어갔지만 그전처럼 은수자로서 살았다. 그는 자주 탈혼을 경험하였고, 예언의 은혜도 받았다. 전설에 의하면 그가 죽은 지 6개월 동안 시신이 썩지 않았고, 무덤에서도 로사리오를 손에 잡고 무릎을 꿇은 자세로 있었으며, 성체조배를 하는 듯 보였다고 한다. 그는 질(Giles)로도 불린다. 그에 대한 공경은 1880년에 승인되었다.
(가톨릭홈에서)



 

참고:
*성 에지디오(질스) 아빠스 축일 : 9월1일.게시판1344번. 
*아시시의 복자 에지디오(질스) Bl.Giles of Assisi (Giles or Aegidius)+1262년 축일: 4월23일.게시판1118번.1724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Legend of St Francis: 15. Sermon to the Birds-GIOTTO di Bondone
1297-99. Fresco, 270 x 200 cm. Upper Church, San Francesco, Assisi

   프란치스코 성인이 형제들과 여행을 하던 가운데 베바나 지방에서 한 무리의 새들이 모여 들자 하느님의 피조물에 대한 남다른 열의와 온유함을 지니고  새들에게 하느님을 함께 찬양하고 사랑할 것을 설교하고 있다.

 * 참고: 토마스 첼라노 전기 제1생애에서
제 21 장 새들에게 들려 준 설교와 피조물들의 순종
  58. 이미 언급한 바와같이 많은 사람들이 형제회에 입회하고 있는 한편 지극히 복되신 사부 프란치스꼬는 스뽈레또 계곡을 여행하고 있었다. 그가 베박냐1) 근처에 이르렀을 때 그곳으로 비둘기, 까마귀 그리고 흔히 갈가마귀라고 부르는 새2) 등 온갖 날짐승들이 떼를 지어 날아들었다. 이성이 없는 하등동물들을 가엾어하는 부드러운 온정이 마구 솟아 크나큰 열정을 지니고 있는 사람인 하느님의 지극히 복되신 종 프란치스꼬는 새들을 보자 길에다 동료들을 놓아 둔 채 급히 새들에게 달려갔다. 그가 새들에게 아주 가까이 갔을 때 새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흔히 그가 하던 식으로3) 인사를 하였다. 그런데 새들이 보통 그렇듯이 날아 도망하지 않음에 적잖이 감탄한 그는 큰 기쁨에 싸여 새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 보라고 겸손히 청했다. 그가 새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였지만, 그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 “나의 새 자매들이여! 여러분은 여러분의 창조주를 마냥 찬미하고 늘 사랑해야 합니다. 그분은 여러분에게 옷을 입히시려고 깃을 주셨고, 날아다닐 수 있게 하시려고 날개를 주셨으며,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이면 무엇이나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창조물 중에서도 여러분을 귀하게 만드셨고, 맑은 대기 속에다 집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 스스로는 도무지 걱정 않고도 살 수 있도록 그분은 여러분을 지켜 주시고 보살피십니다.”4) 프란치스꼬도 말했고, 또 그와 함께 있었던 형제들도 증명했듯이, 새들은 그의 말을 듣고 그들의 본성대로 기이한 몸짓을 하면서 흥겨워하였다. 목을 늘이고, 날개를 빼며, 입을 벌려 그를 응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프란치스꼬는 그의 수도복 옷자락으로 새들의 머리와 몸을 스치며 그들의 한가운데를 오갔다. 마지막으로 그는 새들에게 십자성호를 그어 강복한 다음, 다른 곳으로 날아가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 이어서 복되신 사부님은 기쁨에 넘쳐 자기의 동료들과 함께 갈길을 떠났고, 모든 피조물들이 무릎을 꿇어 경배를 드리는 하느님께 감사를 오렸다.

이리하여 천성이라기 보다는 은총에 의하여 어느덧 단순해진 그는 새들이 그렇게 공손한 태도로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을 보고서, 전에 새들에게 설교하지 않은 자기의 무관심에 스스로를 나무라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날부터 그는 모든 새들과 동물, 그리고 파충류에게까지, 비록 감각없는 피조물에게까지도 그들의 창조주를 찬미하고 사랑할 것을 열의를 다하여 권하였다. 이것은 그가 구세주의 이름을 부르며 권하면 그들이 이에 순종하는 것을 개인적인 체험으로 매일매일 느꼈기 때문이었다.


59. 어느 날, 그는 하느님의 말씀을 설교하려고 알비아노라고 불리는 고을에5) 당도하여, 모든 사람이 바라볼 수 있게 높은 자리에 올라가6) 조용히 할 것을 청하고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침묵에 들어가 경건하게 서 있을 때, 한 떼의 제비들이 시끄럽게 재잘거리며 그곳에다 둥우리를 틀었다. 제비들이 재잘대는 바람에 복되신 프란치스꼬가 하는 말이 사람들에게 들리지가 않자 그가 새들에게 말하였다 : “나의 제비 자매들이여! 자매들은 이미 충분히 말을 하였으니, 이제는 내가 할 시간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시오. 주님의 설교가 끝날 때까지 침묵 가운데 조용하시오.” 이리하여 그 새들은 서 있던 모든 사람들이 놀라서 의아스러워할 만큼 즉시 침묵에 들어갔고, 설교가 끝날 때까지 자기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이 기적을 보고 큰 감탄에 싸여 말하였다 : “이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성인이구나! 지존하신 분의 친구로구나!” 이어서 그들은 하느님을 찬미 찬양하며, 열렬한 믿음을 가지고 그의 옷자락을 만져 보기만이라도 하려고 급하게 서둘렀다.

어떻게 이성이 없는 이러한 동물들마저 자신들을 향한 프란치스꼬의 애정을 깨닫고 감미로운 사랑을 느끼는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60. 그가 그렉치오7) 마을에 머물러 있을 때의 일이었다. 아기 산토끼 한 마리가 덫에 걸려 잡혀 있는 것을 어느 형제가 산채로 그에게 가져왔다. 지극히 복되신 분이 그것을 보자 가엾은 생각이 들어 말하였다 : “아기 산토끼 형제여! 나에게로 오시오. 어찌 하다가 이렇게 속아 잡혔습니까?” 그 아기 산토끼는 저를 데려온 형제가 놓아 주자마자 성인에게로 도망하여, 누가 붙잡고 있지도 않았는데도 마치 가장 안전한 장소인 양 그의 품에서 고요히 쉬었다. 아기 산토끼가 성인의 품에서 얼마간 쉬고 난 다음, 거룩한 사부님은 아기 산토끼를 다정스레 쓰다듬으며 자유를 찾아 숲속으로 돌아가도록 놓아 주었다. 그 토끼는 땅에 놓여졌지만 번번히 성인의 품으로 뛰어올랐고, 끝내 성인은 형제들을 시켜 그 토끼를 근처의 숲에 데리고 가도록 하였다.

그가 뻬루지아 호수의8) 섬에 있을 때에도 길들이기 어려운 어떤 집토끼에게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61. 그는 물고기에 대해서도 그와 똑같이 감미로운 사랑으로 마음이 움직였는데, 잡힌 물고기를 물에다 놓아 줄 기회가 있으면 물고기에게 다시 잡히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일러 보내곤 하였다.9)

한 번은 리에띠 호수의10) 나루터 가까이에서 그가 배에 타고 있었는데, 어떤 어부 한 사람이 흔히 팅까라고 불리우는 큰 물고기11) 한 마리를 잡아서 정성스럽게 그에게 바쳤다. 그는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것을 받고 나서 그 물고기를 형제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그는 그것을 배 밖의 물에 놓아 주며 신심깊게 주님의 이름을 찬미하기 시작하였다. 잠시 그가 기도를 계속하는 동안에 물고기는 배 근처에서 노닐며, 놓아 준 곳에서 멀리 가지 않았다. 기도가 끝나고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이 물고기에게 떠나도 좋다는 허락을 주자 그제서야 사라졌다.

이리하여 영화로우신 사부 프란치스꼬는 순종의 길을 거닐면서 신성한 순종의 멍에를 철저히 지게 되었고, 그럼으로 해서 그는 피조물들이 그에게 복종하는 큰 위엄을 주님 앞에서 얻었다.

그가 성 우르바누스 은둔소에12) 있을 때 심한 중병에 걸렸었는데, 그를 위해서라면 물까지도 술로 변했다. 그것을 맛본 것만으로도 그는 아주 쉽게 나았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이 일을 기적으로 믿었다. 사실 그것은 기적이었다.

이렇게 피조물들이 그에게 순종하고, 자기 뜻대로 원소들을 다른 성분으로 변하게 할 수 있으니, 그는 진정 성인이다.

1) 더 옛날에는 메바니아(Mevania)로 알려져 있었다. 이 기적이 일어난 곳은 베박냐(Bevagna)와 깐나라(Cannara) 사이에 있는 삐안 다르까(Pian d'Arca)이다. 이곳은 아씨시에서 남쪽으로 3마일 가량 떨어진 곳이다.
2) 라틴어 원문에는 'monadae'로서, 어떤 사본에는 'monedula'로 되어 있다. 현대 이태리어에서는 'mulacchia', 즉 ‘갈가마귀’에 해당한다.
3)  그가 하던 식의 인사는 “주께서 여러분께 평화를 주시기를 기원합니다”이다. 제1 생애 23번 참조. 
4) 마태 6,26 ; 루가 12,24.
5)
알비아노(Alviano)는 아씨시에서 남서쪽으로 약 30마일 가량 떨어져 있다.
6) 
유딧 13,16. 
7)
 그렉치오(Greccio)는 아씨시에서 남쪽으로 약 45마일 가량 떨어져 있는 사비나(Sabina) 산맥 기슭 리에띠(Rieti) 계곡에 있다
지금의 뜨라시메네(Trasimene) 호수다. 아씨시에서 서쪽으로 약 25마일 떨어져 있다.
9)  이 문장은 일반적으로 60번 끝에 따라 붙는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볼 때 여기에 붙는 것이 합당하다.
10)  로마에서 북동쪽으로 약 37마일 떨어진 곳에 리에띠(Rieti) 읍이 있고, 이 호수는 리에띠 읍에서 북서쪽으로 약 3.5마일 떨어진 곳에 있다. 
11) 띵까(Tinca)는 이태리식 이름이다. 잉어과에 속하는 물고기이다.
12) 
 움브리아(Umbria)의 나르니(Narni)에서 북동쪽으로 약 6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은둔소이다.

  

       태양의 노래 

지극히 높으시고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주여!
찬미와 영광과 칭송과 온갖 좋은 것이 당신의 것이옵고,
호올로 당신께만 드려져야 마땅하오니 지존이시여!
사람은 누구도 당신 이름을 부르기조차 부당하여이다.

내 주여! 당신의 모든 피조물 그 중에도,
언니 햇님에게서 찬미를 받으사이다.
그로 해 낮이 되고 그로써 당신이 우리를 비추시는,
그 아름다운 몸 장엄한 광채에 번쩍거리며,
당신의 보람을 지니나이다. 지존이시여!

누나 달이며 별들의 찬미를 내 주여 받으소서.
빛 맑고 절며하고 어여쁜 저들을 하늘에 마련하셨음이니이다.

언니 바람과 공기와 구름과 개인 날씨 그리고
사시사철의 찬미를 내 주여 받으소서.
당신이 지으신 모든 것을 저들로써 기르심이니이다.

쓰임 많고 겸손되고 값지고도 조촐한 누나
물에게서 내 주여 찬미를 받으시옵소서

아리고 재롱 되고 힘세고 용감한 언니 불의 찬미함을
내 주여 받으옵소서.
그로써 당신은 밤을 밝혀 주시나이다.

내 주여 누나요 우리 어머니인 땅의 찬미 받으소서
그는 우리를 싣고 다스리며 울긋불긋 꽃들과
풀들과 모든 가지 과일을 낳아 줍니다.  (피조물의 노래)

당신 사랑 까닭에 남을 용서해 주며 약함과
괴로움을 견디어내는 그들에게서 내 주여 찬양 받으사이다.

평화로이 참는 자들이 복되오리니,
지존이여! 당신께 면류관을 받으리로소이다 (용서의 노래)

내 주여! 목숨 있는 어느 사람도 벗어나지 못하는
육체의 우리 죽음, 그 누나의 찬미 받으소서.

죽을 죄 짓고 죽는 저들에게 앙화인지고.
복되도다. 당신의 짝 없이 거룩한 뜻 좇는 자들이여!
두 번째 죽음이 저들을 해치지 못하리로소이다.

내 주를 기려 높이 찬양하고 그에게 감사 드릴지어다.
한껏 겸손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어다. (죽음의찬가) 
최민순 신부 역.
(작은형제회홈에서) 

 

♬Fratello sole,sorella luna-Claudio Baglioni

 

 

 

 

 

 

 

 

 

 

 

  

 

 

 

 

 

 

Beato Egidio (Bernardino) Di Bello Eremita francescano
10 gennaio 
Laurenzana, 1443 - 10 gennaio 1518

Martirologio Romano: A Laurenzana in Basilicata, beato Egidio (Bernardino) Di Bello, religioso dell’Ordine dei Frati Minori, che visse segregato in una grotta.

Il Beato Egidio nasceva nel 1443 a Laurenzana, da genitori di umile condizione sociale, il padre agricoltore si chiamava Bello di Bello, e la madre Caradonna Personi. Al Battesimo gli fu imposto il nome di Bernardino di Bello, oltre a lui i genitori ebbero un altro fratello che si chiamava Vitale. Gli fu imposto il nome di un grande san Bernardino da Siena, il quale fu un grande protettore per il nostro amato Beato. Della sua fanciullezza non ci sono episodi espressivi, tranne che egli si fece frate ad un’età molto giovane. Egli da giovane frequentava molto le chiese, specialmente quella di S. Francesco, quale presagio per la sua vita futura. All’età circa di trent’anni entrò nel locale Convento francescano, nel quale qualche anno prima egli aveva patrocinato la costruzione (non sappiamo con quali fondi) di una piccola cappella dedicata a Sant’Antonio da Padova. Dopo la sua entrata in Convento, da subito egli manifesta una santità lontana dal comune, poiché aveva uno spiccato senso per la spiritualità ascetica e contemplativa, infatti, molte volte disturbato dai rumori dei curiosi o dei confratelli, si ritirava in una selva, dove vi era una grotta, in seguito da lui stesso convertita in cappella, per la preghiera e l’incontro ravvicinato con il Creatore. Egli fu un semplice frate laico, non diventò sacerdote, probabilmente considerava un onore troppo grande per la sua persona. Nella contemplazione egli si sollevava ad una certa altezza dal suolo della scena del mondo, tanto da entrare in una profonda ascesi, dove il confronto con il suo Creatore lo estraniava completamente dalle cose che lo circondavano. Dopo la sua professione solenne, emettendo i voti perpetui di castità, povertà ed obbedienza, prese il nome Fra Egidio, volendo imitare la semplicità evangelica del compagno di san Francesco, Fra Egidio d’Assisi. Così, ora Fra Egidio, dopo aver vissuto le prove della vita terrena, l’esperienza del lavoro dei campi, il dolore dei distacchi umani, decide di dedicare interamente la sua vita al Signore. Nella sua nuova vita da seguace di Francesco, egli ricoprì vari incarichi, ma sempre i più umili, di solito quelli che nessun frate voleva svolgere, dal cuoco al portinaio, al sacrista, fino all’ultimo di giardiniere, infatti, egli non usciva mai per la questua, se non pochissime volte per andare a trovare qualche ammalato a i suoi genitori. Egli da subito si rivelerà come un frate con qualità eccezionali, infatti, aveva una tale capacità di persuasione, dovuta alla sua semplicità e dolcezza che lasciava intravedere il dono totale di sé, quale uomo mite e caritatevole verso l’altro. Egli condusse una vita molto austera per la santità della sua vita, e per configurarsi sempre più a Cristo sofferente, non a caso erano frequenti i suoi digiuni, infatti, si dice che il suo unico pasto fosse un tozzo di pane, alle volte diviso con chi non poteva permetterselo, molto frequenti erano le sue penitenze e la disciplina che anche la regola imponeva. La sua vita si snoda tra estasi e preghiera, si legge appunto negli atti del processo di beatificazione che egli si solleva due palmi da terra, e che venivano spesso gli uccelli a mangiare nel palmo della sua mano. E detto da testimoni che giurarono per il processo di beatificazione, che egli dopo il suo mesto pasto, si sedeva nel giardino e conversava con gli uccelli, mentre dava loro molliche di pane, allo stesso modo del Serafico Padre S. Francesco, il quale conversava con gli uccelli. Il suo apostolato e speso interamente nella sua terra di Laurenzana, tranne alcune brevi parentesi di tempo in alcuni conventi del circondario, tra cui a Potenza nel Convento “Santa Maria del Sepolcro”. E da notare la sua permanenza a Potenza nel suddetto convento, poiché si rese autore di un avvenimento prodigioso, quale la guarigione del figlio del Conte di Potenza Guevara gravemente ammalato, il frate giunto al capezzale del moribondo tracciando un segno di croce sulla  sua fronte lo guarì. Oltre queste sue doti di taumaturgo, di lui si ricordano anche doti profetiche, infatti, a molti predisse il giorno della loro morte o di altri eventi, che poi si confermarono essere veri, oppure come il caso di un’altra signora che non aveva più notizie del marito che era andato in pellegrinaggio a Santiago de Compostela, il frate le disse che egli aveva perso un occhio, era stato malato, ma sarebbe ritornato tra le sue braccia a breve, è così avvenne.

Altro elemento rilevante della vita del Beato Egidio fu la sua continua lotta con il Principe di questo mondo, Satana. Mentre Egidio passa le notti in preghiera, com’era sua abitudine, poiché tra le sue penitenze vi era quella del mortificare anche il sonno, i diavoli lo assalgono e lo scuotono con violenza inaudita e lo trascinano per terra. Egli cerca sempre di nascondere questa esperienza, come ogni vero uomo di Dio fa, sapendo come essa sia un segno della volontà divina, il quale permette certe cose per provare la vera santità degli uomini, perché alle volte possono essere solo simulazione ed inganno diabolico, per cui va soggetta a corrompersi a causa dell’orgoglio e della troppa coscienza di sé, ed è un’esperienza che Dio fa alle anime più robuste.  Molti suoi confratelli testimoniarono che sentivano Fra Egidio lamentarsi e scacciare qualcuno all’interno della sua cella, però non videro mai nessuno, ma dopo frequenti lamenti e rumori non poterono più nascondere il fatto e lo riferirono al Padre guardiano, al quale dopo ripetuti interrogatori Fra Egidio non poté non confessare tutto e ammettere che il demonio lo percuoteva quasi tutte le notti. Comunque l’ultimo assalto Satana lo sferra la notte di Natale del 1517, infatti, Fra Egidio passa tutta la notte in chiesa, vegliando davanti al Santissimo Sacramento, quando ad un tratto l’ira e la stizza del demonio inizia a disturbare l’orazione del fraticello spegnendo ripetutamente la lampada ad olio posta davanti al S. Sacramento. Ad un certo punto non sopportando la sovrumana pazienza del frate gli alita il fuoco sul corpo, ustionandogli il braccio sinistro e  poi trascinandolo per terra e rovesciandogli addosso definitivamente l’olio bollente della lampada e poi scomparve. Le ustioni procurate e le sofferenze subite portarono l’ormai 75enne frate ad ammalarsi gravemente e a non alzarsi più dal letto. Nonostante le premurose cure di una nobildonna procuratrice dei frati, una certa Donna Lucrezia Trara, che gli fasciò le ferite, si spense il 10 Gennaio del 1518, passando serenamente tra le braccia del Padre, mentre la comunità salmodiava le preghiere del transito. Particolare curioso fu che al momento della sua morte, le campane suonavano pur essendo ferme, cosa che accadde anche sei anni dopo, nel giorno della sua esumazione, per collocarlo in una nuova e più dignitosa sepoltura. Subito dopo la sua morte moltitudini di popolo e numerosissimi fedeli, giunsero al Convento di Laurenzana da tutte le parti della Regione ed oltre, poiché la fama di santità che già avvolgeva la sua persona quando ancora era in vita, aumentò sempre più nel corso degli anni, raggiungendo numeri considerevoli che provenivano addirittura dalle Puglie, dalla Calabria e dalla Campania. Negli anni successivi alla sua morte furono registrati innumerevoli prodigi e guarigioni associati alla sua intercessione, tanto da far suscitare nella pietà popolare da subito la sua proclamazione a “Santo”. Nel 1593 fu l’anno del passaggio del Convento ai P. Riformati e della prima raccolta delle testimonianze sull’eroicità delle virtù di Fra Egidio da Laurenzana e mandate alla Sacra Congregazione per i Riti per attestarne l’eroicità di vita e poterne venerare le sacre spoglie; difatti ciò avvenne nel 1596 quando la Congregazione ne ratifica l’eroicità delle virtù e ne proclama il culto. Intanto i beneficiari di miracoli e di eventi prodigiosi continuano a segnalare tutto ciò alle autorità civili e religiose, i quali raccogliendo tutto il materiale, danno vita ad un comitato ad hoc per iniziare una possibile causa che lo proclami ne attesti la fama di santità per poterlo proclamare Beato. Intanto si susseguivano gli anni e generazioni di persone che ne attestavano la fama e la santità, ma il corso degli eventi socio-politici e culturali non permise un rapido corso per proclamare in terra una santità che agli occhi di Dio da sempre era evidente. A più riprese anche dai vescovi diocesani fu portata avanti la causa di beatificazione, fin quando nel 1876 l’Arcivescovo Metropolita di Acerenza Pietro Giovine fece ripartire con forza il processo, concludendo la fase diocesana, ed inviando a Roma la documentazione necessaria, la quale Congregazione per volere di Leone XIII ne approvò il culto immemorabile e lo confermò Beato in San Pietro il 24 Giugno del 1880.

Tutt’oggi il culto verso il Beato Egidio e molto vivo tra le popolazioni dell’area centro settentrionale della Basilicata e ne tiene viva la memoria di un conterraneo che ancora oggi fa rivivere il suo spirito di carità, e di santità votata all’amore per il prossimo e al grande culto per l’Eucarestia fino a donare la sua vita per il suo Sposo, né continua a segnare un sentiero sicuro e una bussola per le generazioni di questo popolo, certi che il Signore propone per noi modelli di come la santità consista nel vivere la vita con semplicità, poiché proprio l’amore ci libera e fa raggiungere le vette più alte del cielo.

Autore: Lett. Sem. Antonio Carmelo Romano
_______________________
Aggiunto il 2010-04-07

 

 

 

 

Blessed Giles of Lorenzana
Also known as
Egidius of Lorenzana


Memorial
10 January
Profile
Raised on a farm at Lorenzana, Naples. Franciscan lay brother. Lived as a hermit in the garden of the Franciscan friary at Lorenzana. Noted for a great love of animals.
Born
1443
Died
1518 of natural causes
Beatified
1880 (cultus confirmed)

 


 

 

 

 

 

 

 



1,088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