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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부활 대축일]성경 말씀 (요한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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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8-04-01 ㅣ No.94

 

 

 

[예수 부활 대축일]성경 말씀 (요한 20,1-9)

 

 


베드로 사도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다고 한다. (사도10,34ㄱ.37ㄴ-43)
그 무렵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여러분은 37 요한이 세례를 선포한 이래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온 유다 지방에 걸쳐 일어난 일과,
38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신 일을 알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39 그리고 우리는 그분께서 유다 지방과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40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41 그러나 모든 백성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증인으로 선택하신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42 그분께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심판관으로 임명하셨다는 것을  백성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우리에게 분부하셨습니다.
43 이 예수님을 두고 모든 예언자가 증언합니다. 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라고 한다. (콜로 3,1-4)
형제 여러분, 1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2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3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4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달려가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았지만,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한다. (요한 20,1-9)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3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4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5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7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9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 부활 대축일 제1독서 (사도10,34ㄱ.37ㄴ-43)

 

"그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39ㄴ-40)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본문은 베드로가 이방인 백인 대장 코르넬리우스 집에서 예수님에 관하여 증언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예수님의 구속 사업의 절정인 십자가 죽음을 묘사하고 있다.

갈라디아 3장 1절에서 바오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한 묘사에 있어서 신명기 21장 23절을 인용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저주받은 몸이 되시어,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성경에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모두 저주받은 자다"  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크레마산테스 에피 크쉴루'(kremasantes epi chsylu; hanged on a tree)도 신명기 21장 23절의 문장 형태와 유사하다. 

"죽을 죄를 지어서 처형된 사람을 나무에 매달 경우,  그 주검을 밤새도록 나무에 매달아 두어서는 안된다.  반드시 그날로 묻어야 한다.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상속 재산으로  주시는 땅을 부정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신명21,22-23)


베드로는 바오로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나무에 매달리심신명기 21장 23절과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신명기에 따르면, 사람이 범죄하여 처형당할 경우에 그의 시체를 나무에 매달아 경계의 표본으로 삼았는데, 시체가 나무에 매달린 것은 그가 저주를 받았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베드로가 예수님의 죽음을 말하면서 '십자가'라는 표현이 아닌 '나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저주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가 받은 저주 장차 인간들이 당할 모든 저주에서 인간들을 건지는 대속적 저주였다.


베드로는 '나무'라는 단어를 통해 바로 이러한 의미를 전달하고 싶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2장 24절,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 에서도 예수님의 죽음을 '(십자)나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한편 '매달아'로 번역된 '크레마산테스'(kremasantes)'걸다', '~에 달려있다'를 의미하는 '크레만뉘미'(kremannymi)부정(不定) 과거 분사로서 '매단후에' 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무에 매단 이후에 죽였다는 사실이 부정 과거 분사형 단어에 나타나있다.


유대인들은 범죄자를 처형할 때 돌로 쳐서 죽였다. 때로 그들은 형을 집행하여 이미 죽은 시체를 나무에 매달아 수치스러움과 저주 받았음을 나타내고,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범죄자를 산 채로 십자가에 매달아 형을 집행하였으며, 본문의 시제는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본문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로마인들에게 십자가 처형을 요구했고,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였음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40)

사도행전 10장 40절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결코 실패가 아니었음을 보여 주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대한 언급이다. 

원문의 뉘앙스를 가지고 번역하면, '하느님께서는 일으키셨다. 그리고 그분은 공공연히 보이도록 그를 내주셨다' 가 된다. 

'일으키시어'에 해당하는 '에게이렌'(egeiren; raised up)'에게이로'(egeiro)의 부정(不定) 과거 3인칭 단수이다.

고전 희랍어에서 '에게이로'(egeiro)는 세가지 기본 개념으로 쓰였다. 첫째는 '깨우다', '자극시키다'이고,  둘째는 '일으켜 세우다', 셋째는 '죽은 자를 다시 살리다' 라는 의미이다. 본절에서는 세번째의 개념인 '죽은 자를 다시 살리다'는 의미로 쓰였다.

한편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로 번역된 '에도켄 아우톤 엠파네 게네스타이' (edoken auton emphane genesthai; caused him to be seen)에서 '엠파네'(emphane)는 '명백한', '보이는'을 뜻하는 형용사 '엠파네스'(emphanes)의 목적격이다. 

이 단어는 '나타내다', '전시하다' 를 의미하는 '엠파니조' (emphanizo)와 관련되며 신약에 단 두번 나타난다. 본절은 의심할 바 없이 명백하게 자신을 드러내 보였다는 이다 (로마10,20참조).


베드로 사도가 이러한 단어를 사용해서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부활 이후 그를 공공연히 나타나게 하셨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코르넬리우스 집안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는 이들이 이방인들이고,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갔다는 유대인들이 퍼뜨린 헛소문(마태28,13)을 들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일으키셨다(다시 살리셨다)는 말에 이어서 분명하게 나타내 보이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부활 대축일 복음(요한20,1~9)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7)

 

여기서 '수건'으로 번역된 '수다리온'(sudarion)은 요한 복음11장 44절에서 라자로가 죽음에서 깨어나 무덤에서 나올 때 얼굴에 감싸인 채 있던 수건과 동일한 단어인 것을 볼 때, 장례때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수의의 일부분이다. 

예수님의 몸을 쌌던 아마포와 얼굴(머리)를 쌌던 수건은 약간 떨어진 동일한 위치에 있었다.

 

'아마포'(flax)에 해당하는 '오토니아'(othonia)는 '고운 베' 또는 '세마포'(linen) 라고도 하는 천으로서 이집트(1열왕10,28)나 시리아(에제27,16)로부터 수입되어 팔레스티나에서도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며, 만남의 천막 재료(탈출26,1)나 사제의 의복 재료(탈출28,5~8)로 사용되었다. 

이 아마포는 눈처럼 흰색을 가지고 있어서 장례용 수의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요한 복음 19장 40절에는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예수님의 몸을 감싸는 데 사용한 천으로 나온다. 

이것은 비싼 천이었으므로 만일에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면, 이 아마포도 당연히 가져갔을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 부활의 간접적 증거가 된다. 

또한 '개켜져'로 번역된 '엔테튈리그메논'(entetylligmenon; wrapped; was folded up)의 원형 '엔튈릿소'(entyllisso)는 우리말 '개키다'가 갖는 '잘 포개접다'의 의미가 아니고, 둥그렇게 말려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즉 수건으로 머리와 턱을 동여맸던 상태 그대로 놓여 있던 것이다.

 

이런 정황을 근거로 볼 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면서 부활하신 몸이 신비스런 방법을 통해 수의나 머리를 감싼 수건으로부터 저절로 빠져 나온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비유가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마치 매미가 허물을 벗듯이 수의를 입고 있는 상태에서 몸만 빠져 나간 것과 같은 모양이다.

그러니 만일에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면, 시신에서 아마포와 수건을 일일히 벗겨내거나, 벗겨냈다 할지라도 그것을 가지고 가지 않고 다시 개켜 놓은 뒤에 시신만 훔쳐 갔을리가 만무한 것이다.

 

교회는 이렇게 빈무덤 사화를 부활의 첫 메세지로 선포함으로써 역사의 예수님을 믿음의 그리스도, 생명의 주님,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로서 받아들이고 믿기를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4월 24일 예수 부활 대축일-요한 20,1-9

 

지금 여기서부터 부활을!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이 기쁜 날을 경축하면서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과 평화, 기쁨이 여러분 가정과 온 세상에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서로 부활축하의 인사를 나누시기 바랍니다.“부활을 축하드립니다!”

 

부활이 기쁘십니까? 왜? ‘나도 부활할 수 있기 때문이죠.’죄인인 내가 구원을 얻는다는 것, 영원생명에 대한 희망을 안겨준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사순절이 끝나서 기쁘답니다!!!!” 절제와 희생을 하는 것이 만만치 않았었나 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사랑의 삶의 결과라면 부활은 사랑의 승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실패와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를 희생과 속죄, 구원의 십자가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로 십자가를 구원 받을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힘으로 드러내 주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한 사랑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셨고 아울러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부활은 희망의 사건이고 절망을 거두는 승리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부활은 구원역사의 절정이자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부활은 우리 기쁨의 원천입니다.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죽음은 온 인류에게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하고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로 죄와 죽음의 지배는 사라지고 영원한 세계로의 희망이 열린 것입니다. 인류는 주님의 부활로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부활소식은 우리 신앙의 토대이며 기쁨의 원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부활의 생명을 마음껏 감사하고 누리시기 바랍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합니다.“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15,14).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았으면 우리의 가르침도 헛되고 믿음도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조건 없는 사랑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드러내주셨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순명의 삶이 어떤 열매를 맺어주는 지를 알게 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를 위한 십자가의 죽음이 결국 사랑의 승리였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주님의 부활은 또한 우리의 부활을 보증합니다. 당신 친히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9-40). 하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우리에게 부활이 선물로 주어졌다는 것은 더없이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여기서부터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활의 기쁨을 누리려면 먼저 ‘해묵은 내가 죽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야 합니다. 인간적인 욕심과 교만, 시기질투, 이기심에 죽고 절제와 겸손, 온유와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욕망의 무덤에서 나와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부활을 살지 못하는데 어찌 훗날의 부활을 희망할 수 있겠습니까?

 

우주 비행사 ‘가가린’이 지구에 돌아와 “아무리 우주를 돌아보아도 하느님은 안 보이더라”하였습니다. 그러자 한 신부님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보지 못하면 아무리 우주를 많이 돌더라도 하느님은 볼 수 없다.”라고 하였답니다. 부활의 기쁨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시작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위대한 진리는 우리가 죽은 뒤에 새롭게 사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부활의 능력으로 지금 여기서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사는 것보다 우리가 영원히 살아야 하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고귀하게 살아야 하고, 또 살 수 있는 것이 부활의 큰 진리입니다”(미국 필립스 브룩스주교).

 

성경을 보면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라아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습니다. 돌이 치워져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거기 계시지 않았습니다. 무덤이 비었기 때문에 부활한 것이 아니라 부활하셨기 때문에 무덤이 비었습니다. 죄와 죽음의 힘도, 무덤을 막았던 육중한 돌도,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도 주님의 부활을 막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좌절과 절망을 가져왔지만 부활로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무덤의 삶에서 나와야 합니다. 어둡고 침침한 부정적인 생각에서, 미움과 분노에서 맑고 밝은 긍정적인 생각, 희생과 봉사, 사랑의 삶으로 나와야 합니다. 과거의 어두운 기억에서 나와서 영원한 천상행복의 약속된 미래를 보고 오늘을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수난은 현세 생활의 수고와 고통과 죽음의 운명을 가리킵니다만, 주님의 부활과 그 영광은 우리가 받을 영원한 생명”(성 아우구스티노)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하느님께서는 지금 나를 도구삼아 이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나의 허물과 잘못, 죄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통해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기억하며 아들 예수님처럼 끝까지 아버지 하느님 안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께서 약속한 영원한 생명을 ‘오늘 여기서’, 지금서부터 살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시길 기원하며 다시 한 번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라파엘신부


4월16일(예수부활대축일) 요한 20,1-9<'주간첫날 이른아침>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생명의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생명은 선물이고 은총이지만, 동시에 언젠가 멈추고 마는 운명의 굴레이기도 합니다. 살면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에게 생명은 애착이고 미련이지만, 살면서 이미 죽음과 같은 고통과 좌절을 맛보고 다시 일어선 사람은 죽음 너머의 희망을 봅니다.
오늘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인류와 모든 생명체가 운명처럼 맞게 될 죄와 고통, 죽음이라는 무덤의 바위를 열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선포되는 희망의 복음입니다.
빈 무덤을 발견한 마리아 막달레나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지켜본 슬픔에 가득 찼고, 베드로는 스승을 배신한 죄책감을 안고 빈 무덤으로 달려갔으며, 가장 사랑받은 제자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함으로 빈 무덤에 먼저 다다랐습니다.
이들의 마음이 곧 부활을 맞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사순 시기 동안 진정한 회개와 희생, 보속의 삶으로 죄와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갈망하며 예수님의 부활을 맞이한 사람에게, 부활은 축제이며 기쁨이고 희망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이 하느님께서 악의 굴레에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이루신 영광스러운 사건이라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의 기쁨을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 한다는 확신 속에 부활의 증인이 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부활 신앙은 우리의 생명이 하느님의 생명과 결합되어 있음을 믿는 것이기에, 더 이상 땅의 세력에 지배되지 않고 하늘의 생명을 추구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이제 ‘알렐루야’를 외칩시다. 아무리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둡고, 지치고, 힘들어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죽음의 권세에서 일으키시어 희망의 사람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아멘.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2008.3.23 예수 부활 대축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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