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동성당

[연중 제15주일]파견 (마르 6,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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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8-07-15 ㅣ No.114

 


 

[연중 제15주일]파견 (마르 6,7-13)

 

아모스 예언자는, 주님께서는 양 떼를 몰고 가는 그를 붙잡으시어,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고 하셨다고 한다. (아모 7,12-15)
그 무렵 베텔의 사제 12 아마츠야가 아모스에게 말하였다. “선견자야, 어서 유다 땅으로 달아나, 거기에서나 예언하며 밥을 벌어먹어라.
13 다시는 베텔에서 예언을 하지 마라. 이곳은 임금님의 성소이며 왕국의 성전이다.”
14 그러자 아모스가 아마츠야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15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다고 한다. (에페 1,3-14)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4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5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6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8 하느님께서는 이 은총을 우리에게 넘치도록 베푸셨습니다. 당신의 지혜와 통찰력을 다하시어,
9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당신 선의에 따라  우리에게 당신 뜻의 신비를 알려 주셨습니다.
10 그것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
11 만물을 당신의 결정과 뜻대로 이루시는 분의 의향에 따라  미리 정해진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몫을 얻게 되었습니다.
12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13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위한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게 되었을 때, 약속된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14 우리가 하느님의 소유로서 속량될 때까지, 이 성령께서 우리가 받을 상속의 보증이 되어 주시어,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신다. (마르 6,7-13)
그때에 예수님께서 7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8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9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10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11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12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13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연중 제15주일 제1독서(아모7,12~15)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14)

 

앞선 아모스서 7장 10~13절 기록된 북부 이스라엘 아마츠야의 아모스 예언 활동에 대한 악의적 호도와 협박과 회유 이어 아모스서 7장 14절이하 17절에는 아모스의 답변 나온다.

 

아모스의 첫번째 답변은 자신이 예언자가 아니라는 내용이다.

 

그런데 본문에는 영어의 Be동사에 해당하는 '하야'(haya)동사가 기록되지 않아, 아모스가 과거의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현재의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어떤 이는 아모스가 아마츠야에게 자신은 종교적 기득권에만 연연하는 당신과 같은 직업적 종교인이 아니라고 강변하는 내용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아모스가 이런 당당한 태도를 갖는 것이 예언 행위를 자신의 생계를 위한

수단이나 직업과 관련시키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예언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이해하였다.

 

그래서 영역본 중에는 본문의 전반부를 '나는 당신같은 직업적 예언자들 중의 한 사람이 아니다'(I'm not one of your professional prophets)로 번역한 것이 있다.

 

또한 아모스는 자신이 예언자의 제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첫째, 아모스가 당시 하느님의 계시와 무관하게 혈통을 따라 세습되던 직업적 종교인이 아님을 주장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열왕기 2권 2장 3절, 4장 1절등에 제시된 예언자 학교 생도(제자) 출신이 아니라는 언급으로도 볼 수 있다.

 

셋째, 어느 특정한 예언자 단체의 회원이 아니라는 의미로 말한 것이라 볼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아모스가 생계를 위해 일하는 직업적 예언자도 아니고, 훈련에 의해 만들어진 인위적 예언자도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이런 본문의 아모스의 주장에는 자신을 강조하기 위해서만 사용되는 '나는'해당하는 '아노키'(anoki)가 두번이나 사용되었다.

 

즉 본문은 아모스가 예언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반복하여 강조하여 묘사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 자신을 다른 예언자들과 다른 특별한 존재로 부각시키기 위한 교만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전하는 예언의 신적 기원과 권위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본절 상반절에서 자신은 직업적  예언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예언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온 계시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어지는 하반절에서는 자신의 생계를 위한 직업을 소개한다.

 

즉 자신이 생계를 위해서 예언 활동을 하는 자가 아님을 분명히 하는 의도로 제시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모스는 생계를 위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예언을 하는 것이 오히려 그의 생계에 지장을 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을 전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먼저 '목자'에 해당하는 '보케르'(boker)는 구약 성경에서 본문에서만 유일하게 사용되고 있는데, 여기서 사용된 원어의 표현은 '노케드'(noked)이다.

 

이는  새끼 양 십만 마리와 숫양 십만 마리의 털을 조공으로 바친 모압의 왕 메사를 언급하는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따라서 아모스는 흔히 생각하는 가난한 목자라기 보다는 상당한 재력가였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돌무화과나무'에 해당하는 '쉬케밈'(shiqemim)의 원형 '샤캄'(shaqam)팔레스티나 저지대에서 자라는 '무화과나무'(sycamore-figs)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가꾸는'에 해당하는 '볼레쓰'(boles)의 원형 '빨라스'(balas)'모으다' 혹은 '관리하다'라는 의미도 있다.

 

그러므로 아모스는 무화과 나무과 같은 식물들을 심고 가꾸어 자라게 했다기보다는 야생으로 자라는 나무에 열린 열매를 따서 파는 일을 했다고 보는 것이 좋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아모스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면서도 자신을 예언자라고 소개하지 않고, 목자와 농부로 소개하는 것하느님께서 자신을 예언자로 부르신 사실을 부인하기 위함이 아니라, 아모스서 7장 15절에 기록된 것처럼 자신이 북부 이스라엘에 전한 모든 예언이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진 말씀이라는 점을 더욱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본문은 아모스가 주님의 계시를 받아 예언 활동을 감당하는 자신과 사제직에 대한 소명은 없이 직업적 종교인으로 살아가는 아마츠야를 구별하기 위한 표현이며, 자신이 북부 이스라엘에서 예언 활동을 하는 것이 다른 무엇도 아닌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에 근거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연중 제15주일 복음(마르6,7-13)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7)

 

제자들에게 선교의 사명을 주시어 실제로 파견하여 복음 전파의 현장에서 일하게 하신 마태오 복음 6장 7절부터 13절을 기점으로 예수님의 갈릴래아 전기 활동이 끝나고 후기 갈릴래아 활동이 시작된다.

 

즉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서 배척당하신 이후에 복음 전파와 당신이 선택하신  열두 제자를 복음의 봉사자로 훈련시키기 위해 파견하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배척당하심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복음을 전하는 스승의 길이 얼마나  험난한 길인지를 느꼈을 것이다.

 

따라서 마태오 복음 6장 7-13절에 나오는 제자들에게 권한을 주시어 복음 전파자에게 필요한 교훈을 주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들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었다.

 

여기서 '부르시어'에 해당되는 '프로스칼레이타이'(proskaleitai; he called to him)원형 '프로스칼레오마이'(proskaleomai)'~을 향하여', 혹은 '~을 위하여'라는 뜻을 갖는 전치사 '프로스'(pros)와 '부르다', '초대하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칼레오'(kaleo)의 합성어로서 '~로 초대하다'  혹은 '~을 위하여 부르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여기서는 천국 복음의 봉사자로 파견하기 위하여 부르셨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파견하기 시작하셨다'로 번역된 '아포스텔레인'(apostellein; sent out)의 원형 '아포스텔로'(apostello)'~로부터'라는 뜻으로 분리를 나타내는 전치사 '아포'(apo)와 '떠나다'는 뜻이 있는 '스텔로'(stello)의 합성어로서 '~로부터 분리되어 보내다'는  문자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단어에는 '특별한 사명을 부여하여 파견한다'는 뜻을 지닌다. 그러니까 이 단어는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추종자들 가운데 열두 제자를 따로 분리하여 복음 전파의 봉사자로 파견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 단어의 명사형인 '아포스톨로스'(apostolos)가 그리스도의 사도를 의미한다는 데서도 확인된다.

 

특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에 해당하는 '뒤오 뒤오'(dyo dyo; two by two; '둘씩 둘씩')로 보내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 전파에 있어서 상호간에 도움을 주는 협력을 강조하는 것이며, 동시에 복음을 듣는 자에게 신뢰감을 주기 위한 벙법이기도 하다.

 

또한 6장 11절에서 등장하는 복음을 거절하는 자들에 대한 증거와 관련해서 증인의 최소 인원을 확보하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유다인에게 있어서 '둘'증인의 수였으며, '둘'의 증언을 거부하는 것은 확실한 거부로 여겨질 수 있었던 것이다(민수35,30; 신명17,6; 마태18,16).

 

이 둘씩 짝지어 파견되는 전통은 초대 교회 선교 여행에서도 계속하여 이어져 갔다(사도15,22).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문맥으로 보아 이 권한(권세)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을 타락시키는 악령을 내쫓고 거룩함을 회복시키는 권세를 가리킨다.

 

그리고 여기서 마귀(악령)의 특징을 더럽다고 규정하는데, '더러운'으로 번역된 '아카타르톤'(akatharton; unclean)의 원형 '아카타르토스'(akathartos)는 부정 접두어 '아'(a)와 '정결하게 하다', '속죄하다'는 뜻을 가진 동사 '카타이'(kathairo)의 합성어로서 '정결하지 않은', '속죄되지 않은', ' 불순한' 이라는 뜻을 나타내며, 성경에서는 하느님의 거룩한 신성(神性)과 접할 수 없는, 우상과 관련되어 있는 것들을 뜻한다(사도10,28; 1코린7,14).

 

특히 마르코 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쫓아내야 할 '더러운 영들'은 단순히 하느님의 적대자로 존재하는 악령(마귀) 자체만이 아니라, 그러한 악령의 활동에 의해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악하고 더러운 모든 영적 현상과 인간 마음의 상태까지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주시고'에 해당하는 '에디두'(edidou; gave)는 원형 '디도미'(didomi)의 미완료 과거 시제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12제자들 뿐만 아니라 당신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에게 

세상 끝날까지 그러한 권한(권세)으르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부여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것은 제자들은 주님으로부터 일회성이 아니라, 필요할 때마다 계속해서 요청해야 하며, 또한 계속적으로 부여받아 사용해야 함을 드러낸다.



 

 

 

 

한 눈 팔지 마라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오직 당신께 의지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의지하는 만큼 주님의 사랑을 체험케 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면 실망하고 상처를 안고 살지만 주님께 의지하는 이는 하는 일마다 잘될 것입니다. 이 시간 각자에게 주어진 주님의 소명을 일깨우고 그분의 바람을 살 수 있는 힘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먼저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냥 빈손으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능력을 담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제자를 파견 하셨습니까? 사도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대로 “하늘의 온갖 영적인 축복을 주심”과 당신의 가르침, 즉 “하느님나라 건설”을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명은 열두제자에게 국한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사실 우리도 이미 주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였고 마귀를 끊어버리고 허례허식을 끊어버리겠다고 약속했으며 그 기초 위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주님의 능력을 입었고 파견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그 힘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온갖 유혹 앞에서 주님의 선택받은 사람으로서 꿋꿋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능력을 묵히고 있으니 안타깝습니다.

 

사명을 받은 사람의 처신에 대한 하나의 예를 들면, 교통법규를 잘 지키는 사람이 오히려 융통성 없는 사람취급을 받습니다. 신호위반, 속도위반, 음주운전을 하고도 단속에 걸리지 않았다고 자랑 삼아 얘기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나도 모르게 내 가치관을 흐리게 하고 잘못된 것을 합리화하게 됩니다. 적당히 타협하고 살아가는 것은 어둠의 세력이 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호하게 주님의 이름으로 기본을 바로 세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바른 생각으로 원칙을 준수하고 근본에 충실한 것이 더러운 영을 다스리는 일입니다.

 

더러운 영을 다스리는 일이 결코 먼데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장의 인간적인 유익 때문에 어둠을 선택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가 더러운 영을 다스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을 생각하면 내 것을 먼저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분 앞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당당해야 합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둘씩 짝을 지어 파견하셨습니다. 짝을 지어 파견한 것은 증언 내용에 대한 진실성을 말해주는 관례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공동체성을 상기시켜 주며 복음의 선포는 개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개인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루어져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물론 홀로 있어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연약합니다. 그래서 함께하면서 서로 부족함을 채워주고 서로의 연약한 마음을 붙들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이 함께하는 것은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가야할 길을 갈수 있도록 서로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우리도 혼자 독불장군으로 일하지 말고 협력자와 함께 일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시편에서는 “네 근심을 주님께 맡겨라. 그분께서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시편55,23) 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함께 일하되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이웃과도 함께합니다. 주님과 함께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웃과 함께하는 척할 수는 있겠지만 진심으로 함께하지는 못합니다. 먼저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제자들을 파견하기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한 눈 팔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옛 말에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마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오로지 주님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것에 대한 애착을 아예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께 의지하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먹을 것이 많고, 소유하는 것이 많으면 당연히 하느님께 가는데 소홀해지기 마련입니다.

 

오래 전의 일입니다. 제가 마음먹고 돈을 쓴 적이 있습니다. 사진을 찍어보겠다고 고급사진기를 사서 자동차 뒷자리에 놓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가정 방문을 하고, 봉성체를 하고 할 때 문득 문득 그 카메라가 생각났습니다. 정성으로 기도를 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할 시간에 자동차 문을 잠갔나? 누가 가져가면 어쩌지! 하고 마음은 카메라에 가 있었습니다. 고급 카메라 때문에 쓸데없는 근심거리가 생긴 것입니다. 본당신부 발령 받고 새 자동차를 이용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누가 긁어 놓으면 어쩌나……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물질은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는 주님의 말씀이 새롭게 들렸습니다.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 입니다. 주님께 의지하여 도움을 청하고 주님의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모든 것(먹을 것, 입을 것)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6,33)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당에 나오면 뭐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를 하고 왔는데 별다른 것이 없습니다. 이런저런 일에 신부님으로부터 잔소리 듣고, 시간을 투자해야 하며 거기다 돈도 내야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정직하게 살려고 하니 손해 보는 느낌입니다. 좋은 마음으로 기도하러 왔는데 왜 그리 말이 많고 설치는 사람이 많은지…..밖의 세상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도 그 길이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주님은 눈에 보이는 힘을 비울 때, 눈에 보이지 않는 힘으로 채워주십니다. 더 큰 마음의 자유와 기쁨과 평화를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분명 “두려워 마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준다”(이사41,10)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처지에서든지 하느님의 의로움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주님을 전하는 가장 큰 몫이 될 것입니다.

 

물론 의로움을 선택하다 보면 예기치 않은 어려움에 접하기도 합니다. 고지식한 사람,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라는 소리도 듣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세상의 것과 천상의 것은 서로를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 답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돌아보면 은총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당장의 결과에 얽매이지 말고 삶의 자리에서 충직하시기 바랍니다. 최선을 다하고 주님의 뜻을 기다리면 열매는 주님이 주십니다. 주님의 뜻을 행했으면 결과에 연연해 할 것이 없습니다. 그저 주님께 맡기면 됩니다. 내가 흘린 수고와 땀은 주님께서 차고 넘치도록 헤아려 주실 것입니다. 근본을 얻으면 일의 결과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따라서 농부가 온종일 땀 흘리며 고랑을 파듯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생명의 길을 파는 농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열심히 일해 어떤 좋은 결과를 이루었을지라도 가까운 이들로부터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되면 낙담과 실망에 빠져서 일할 의욕을 잃고 손을 놓아 버리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도 환영받지 못했고, 사람들은 음모를 꾸미고 심지어 죽이려고도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상황 안에서도 당신의 일을 한결같이 행하셨습니다. 우리도 누가 무어라 해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합니다.

 

사도들을 파견하신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파견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당신의 일을 우리를 통해 이루시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 것에 매이지 말고 천상 것을 추구하는 의로움을 통해 주님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정에서 주님은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기쁨을 주며 힘을 주시는 분입니까? 아니면 그렇게 만드십시오! 그분은 우리를 지켜줄 힘과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성경은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겨라.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잠언16,3).하고 선언합니다.

 

우리 가정은 하느님의 말씀과 더불어 사랑의 생활을 하는가? 아니면 출세와 물질에 치중하고 있는가? 점검하고 사랑의 삶을 증가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가? 데리고 사는가? 자문하며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하느님의 영적축복을 전하며 또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 사랑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시고,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왔으며,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살 수 없는 운명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운명이 어떻게 펼쳐질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파견되어 더러운 영을 쫓아내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자들의 병을 고칠 수 있을 때마다 그런 능력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행여 제자들이 능력에 대한 자만심에 빠질 수도 있었기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지니고 가지 말 것을 명하십니다. 제자들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도구로 쓰시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는 숙명을 사랑하도록 이끌고 계심을 먼 훗날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의 베텔에 파견된 아모스 예언자는 자신이 처음부터 예언자의 능력을 지닌 사람이 아님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자신을 붙잡으시고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고 명하셨기에, 박해와 반대가 두려웠지만 자신의 숙명을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도 살면서 숙명 같은 삶을 견디고 사랑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병든 노부모를 모시고, 장애를 지닌 자녀를 돌보며, 누군가의 잘못을 짊어져야 할 순간도 많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짊어져야 할 숙명이 지금은 무거운 십자가이겠지만, 부활의 희망으로 바뀔 날이 오지 않을까요?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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