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동성당

[연중 제23주일]에파타! (마르 7,3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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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8-09-08 ㅣ No.125

 

2018.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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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23주일]에파타! (마르 7,31-37)   

 

이사야는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시리라고 한다. (이사 35,4-7ㄴ)
4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복수가 들이닥친다, 하느님의 보복이!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5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6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7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늪이 되고, 바싹 마른 땅은 샘터가 되리라.


야고보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야고  2,1-5)
1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2 가령 여러분의 모임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누추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온다고 합시다.
3 여러분이 화려한 옷을 걸친 사람을 쳐다보고서는 “선생님은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하거나 “내 발판 밑에 앉으시오.” 한다면,
4 여러분은 서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악한 생각을 가진 심판자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5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에게 “에파타!” 하시어 고쳐 주신다. (마르 7,31-37)
그때에 31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32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34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35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36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37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연중 제23주일 제1독서(이사35,4~7ㄴ)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복수가 들이닥친다. 하느님의 보복이!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4)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5)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떠뜨리리라."(6ㄱ)

 

이사야서 35장 4절핍박받는 선민을 향하여 선포해야 할 말을 직접 화법을 사용하여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사야서 35장 4절의 서두에 해당하는 본문은 그 선포할 대상이 누구인지를 밝힌다.  바로 '마음이 불안한 이들'이 그들이다.

이것은 이사야서 35장 3절의 '맥풀린 손', '꺾인 무릎'과 긴밀한 연관을 지닌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앞의 이사야서 35장 3절의 표현이 위로할 대상의 신체적인 묘사에 집중한 것이라면, 본문의 '마음이 불안한 이들'이란 표현은 내면, 곧 심적인 측면에 집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에 해당하는 원문 표현은 전치사 '레'(le)'서두르다', '두려워하다', '액체가 되다' 등의 의미를 지닌 '마하르'(mahar)수동형 분사 결합된 '레니므하레'(lenimhare)'마음'을 의미하는 '레브'(leb)가 결합된 것이다.

여러가지 핍박과 고통으로 인해 두려움에 빠져 마음이 물처럼 녹은 상태나타낸 것이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그리고 여러 불안한 사회적 정황으로 인해 어찌해야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그 마음조차 가누기 어려울 만큼 극심한 고통과 공포 속에 머물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 처한 사람들은 당장 눈에 보이는 현실만을 생각하여 마음이 압도되고, 그로 인해 철저히 절망에 빠지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내일의 희망을 가진 하느님의 백성은 그런 자들에게 다가가 절망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말해주며, 그 심령을 강하게 해 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다. 

 

한편, '굳세어져라'에 해당하는 '히제쿠'(hizequ)는 앞에서 언급한 '마하르'(mahar)와 정반대의 마음의 상태로 만들라는 명령이다.  

이 단어의 원형 '하자크'(hazaq)마음이 완고한 것을 나타낼 때에도 사용되는 단어이다.

그러나 이처럼 마음을 굳세게 하는 것은 사람의 스스로의 결단이 아니라 하느님을 의지함으로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본문의 표현은 하느님을 의지하라는 전제, 하느님을 더 견고히 붙들라는 전제가 깔려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이어지는 '두려워하지 마라'는 표현 역시 마음과 관련된 표현이다. 이것은 마음을 굳세게 한 결과 찾아오는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의지함으로 그 심지를 견고히 세우는 자를 평화로 지켜주신다.

'한결같은 심성을 지닌 그들에게 당신께서 평화를, 평화를 베푸시니,  그들이 당신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이사26,3)

어떤 어려운 상황이 닥치더라도 그에 맞닥뜨려 두려움없이 대담하게 행하고자 한다면, 하느님을 믿는 믿음을 굳게 지키는 자리에 굳게 서야 한다.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복수가 들이닥친다. 하느님의 보복이!' 

 

본문은 마음에 겁이 잘린 자, 고통스런 상황에 압도되어 무력해진 자들이 왜 다시 일어나야 하는지를 설명해 준다. 그것은 그들이 믿는 하느님께서 오실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멀리 계셔서 그들의 고통을 돌아보지 않으시기 때문이며, 혹 하느님께서 자신들의 사정을 아신다 할지라도 지금 당장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느님을 섬기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과 하느님 사이에 있는 간격이 너무나 크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들은 무력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느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자, 내일의 희망을 확신하는 자들은 그들에게 하느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오셔서 그들의 원수들에게 보복을 가하시고, 그들에게 보상을 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줌으로써 용기를 갖게 해야 한다. 

 

한편, 본문에서 '복수가 들이닥친다'에서 '나캄'(naqam)'복수'를 의미하며 '하느님의 보복이'에서 '께물'(qemul)'보상'을 의미한다. '복수'는 두려움을 제공한 적대자에 대한 것이며, '보상'은 하느님을 섬긴 신앙에 대한 것이다.

하느님의 이러한 공의로운 보복과 보상을 확신하는 이들, 악인의 소멸을 확신하며 의로운 상급을 바라며 희망하는 자들은 현재 닥치는 어떤 어려움도 능히 믿음으로 이겨낼 수 있다.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원문은 '엘로힘 후 야보 웨요샤아켐'(elohim hu yabo weyoshakem)인데, 문자적으로 '하느님, 바로 그분이 오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를 구원하실 것이다'이다.

원문상으로는 '하느님'이 매우 강조되어 있다. 그리고 주어가 포함되어 있는 히브리어의 특징상 '그가 오실 것이다' 라는 서술어 '야보'(yabo; will come)가 있으므로, '엘로힘'(God)'후'(hu)라는 단어가 없어져도 의미가 통한다.

그러나 이사야 예언자는 이 두 단어를 문장 앞에 내세워 '하느님'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이사야 예언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누가 오시는가? 하느님 바로 그분이 오실 것이다.  누가 구원하시는가? 하느님 바로 그분이 구원하실 것이다.  어느 힘있는 인간도 아니요, 이집트와 같은 이방의 강대국도 아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 조상때부터 믿어오던 바로 그 하느님,  홍해를 마르게 하시고  이집트의 군대를 수장시키시고,  예리고 성을 무너뜨리시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바로 그 하느님께서 오시어 구원을 베푸실 것이다.  그러니 왜 두려워해야 하겠는가!'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5)

 

이사야서 35장 5절부터 7절까지는 종말에 선민 이스라엘의 땅에 넘칠 환희과 기쁨을 예고하는 이사야서 35장 1~2절에 이어 다시 하느님께서 가져오실 당신 백성들과 그들의 땅의 역동적 회복을 예언하는 부분이다. 이러한 역동적 구원은 부분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활에서 성취되었다.

 

특히 이사야서 35장 5절과 6절은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 갇힌 후, 예수께서 자신이 메시아되심을 입증하면서 답하신 말씀과 동일한 것이다(마르7,37; 루카7,22; 마태11,2~6).

즉 이것은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의해 성취된 예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본문 서두에 제시된 '그때에'에 해당하는 '아즈'(az; then)일차적으로는 메시아 시대를 나타낸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이것은 주님께서 도래케 하시는, 온전한 회복의 나라, 영원한 나라 즉 새 하늘과 새 땅을통해 이루어질 그 나라로 귀결된다.

 

한편, 하느님께서 회복케 하시는 역사(役事)가 이루어질 날에 일어나게될 사건으로 먼저 제시되는 것은 맹인의 눈이 밝아지는 것이다. 여기서 '열리고'에 해당하는 '티파카흐나'(thiphaqahna) '열다' 의미를 지닌 '파카흐'(phaqah)수동형으로서 '열릴 것이다'는 의미가 된다.

이처럼 이 단어가 수동형으로 사용된 것은 그것이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나타낸것이다. 즉 맹인의 눈이 열리는 역사가 전적으로 주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아울러 이것은 문자 그대로 맹인이 눈을 뜨고 보게 된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으며, 영적 어두움 속에서 멸망의 길을 걷던 자들이 진리의 빛을 보고 생명의 길을 가게 된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또한 이것은 하느님을 거역하던 백성에게 내려졌던 책벌이 풀리는 것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이사6,10; 29,18).

 

그들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보게 될 것이며,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참된 가치관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더 이상 무익한 이방의 강대국이나 헛된 이방의 우상이 아닌, 완전한 구원이신 주 하느님만을 의지하게 될 것이다.

 

한편, 이어지는 본절 후반부는 '눈먼 이의 눈'에서 '귀먹은 이의 귀'로 바뀌었을 뿐, 앞 부분과 동일한 의미를 전달하는 평행 대구 문장으로 풀이된다. 

여기서는 청각기관인 '귀'란 표현이 사용되어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도 않고 깨닫지도 못했던 자들이 복음의 말씀을 통해 그 귀가 열리고 진리를 깨닫게 되는 역사가 이루어 진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떠뜨리리라.' (6ㄱ)

 

예수님은 벳자타 못 가에서 서른 여덟 해나 누워있던 병자 치유하셔서 그로 하여금 걷게 하셨으며(요한 5,2~9),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의 '아름다운 문'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유해 그로 하여금 사슴처럼 뛰게 하였다(사도 3,1~9).

 

이처럼 메시아 시대가 되면, 절름발이도 건강한 다리를 갖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영적으로 해석하면, 불완전한 신앙을 가졌던 자들이 신앙을 회복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고, 죄의 굴레에 얽매여 바르게 사는 데 있어 제한을 받던 자들이 그 굴레를 떨쳐버림으로 인해 진리의 길을 마음껏 활보한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란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활 중 갈릴리 지방에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치유하셔서 그로 하여금 말을 분명하게 하신 사건(오늘 마르코 복음 7,31~37)을 연상케 한다.

이것 역시도 영적인 의미를 지니는데, 과거에는 하느님을 찬양하지 못했던 자들이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며, 하느님의 진리를 침묵하던 자들이 입을 벌려 담대히 그 진리를 증거하는 자들이 된다는 것으로 알아 들을 수 있다.

 

한편, 앞의 이사야서 35장 5절의 경우는 메시아의 활동으로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을 나타내는 동사 표현이 모두 수동형으로 사용되어 하느님의 주도적인 역사가 강조되었다. 

그러나 이사야서 35장 6절(ㄱ)의 경우, 발로 걷고 입으로 말하는 역사가 이루어진 것에 대해서는 강조 능동형과 능동형 동사 사용되었다.

 

이것은 메시아 시대의 회복의 양상이 하느님의 주도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한 자들의 적극적인 순종과 증거를 통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날 것임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가 들어있는 것이다.

 

 

 

 연중 제23주일 복음(마르7,31~37)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32~34)

 

'데카폴리스'에 해당하는 '데카폴레오스'(Dekapoleos; of Decapolis)숫자 '십'(ten)을 뜻하는 '데카'(deka)'도시'를 가리키는 '폴리스'(polis)결합된 형태로서 '열 개의 도시'라는 뜻이다.  이 도시들은 갈릴래아 호수 동쪽에 위치한 대부분 이방인들이 거주하는 헬라화된 열 개의 도시들을 말한다.

마르코 복음사가가 다른 복음사가들이 언급하지 않은 지역을 소개하는 것은 이방인에 대한 주님의 관심을 나타내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마르코 복음 7장 31~37절과 병행 단락인 마태오 복음 15장 29~31절에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말고도, 예수님께서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 여럿을 치유하신 것으로 나온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치유 행위를 광범위하게 기록한 반면에,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지역에서 행하신 치유 중에서 대표적인 한 사건만을 정선해서 그 치유 과정을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여기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는 한 사람인데, '말더듬는 이'로 번역된 '모길랄론'(mogilalon; had an impediment in his speech; could hardly talk)기본형 '모길랄로스'(mogilalos)'어렵게'라는 뜻의 부사 '모기스'(mogis)'말하다'는 뜻의 동사 '랄레오'(laleo)에서 유래하여 '말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상태'가리킨다.

 

여기서 '말더듬는 이'는 말을 한마디도 못하는 '벙어리'라는 뜻보다는, 비록 어느 정도 소리를 내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의 상태로서 말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마르코 복음 7장 35절에서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말하기 때문이다.

 

'손을 얹어 주십사고'

 

유다 사회에서는 '손을 머리에 얹어 하는 기도'를 가리키는 안수(按手)는 널리 베풀어졌다.

 

'손을 얹어'에 해당하는 '에피테 아우토 텐 케이라'(epithe auto ten cheira; put his hand upon him; place his hand on him; lay on by hands)상속권 수여(창세48,14~20), 직책 수여(민수27,18.23), 축복(마태19,13.15) 등을 위해서도 베풀어졌지만, 여기서는 특별히 건강 회복을 위한 안수(마태9,18; 사도9,12.17)를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머리에 손을 얹어 기도하는 단순한 안수가 아니라, 마르코 복음 7장 33절나오는 데로 행동을 통해 그 병을 즉각적으로 완전하게 고쳐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당신을 온전히 의지하는 자에게 요구하는 것보다 더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신다.

여기서 '따로'에 해당하는 '카트 이디안'(kat' idian; aside)'사적으로'라는 뜻의 관용어로서 비밀리에 행한 것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비밀리에 그를 고쳐 주시려고 한 것에 대해 학자들마다 의견이 많다.

 

환자과 개인적으로 인격적인 관계를 나누기를 원하셨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고, 예수님의 치유 기적을 보고 군중이 흥분해서 또 다른 기적을 요구하는 것과 같은 부작용을 막기 위해서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그리고 자신의 메시야되심을 숨기기 위해서, 또한 군중 가운데서 호기심만을 추구하는 이들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예수님께서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의 딸을 치유하실 때에는 말씀으로만 하셨는데(마르7,29.30), 여기서는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당시 사람들에게 침은 치료의 효능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고, 그리고 아픈 부위에 손을 대는 것도 흔히 행하던 방법이었다.

 

예수님께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을 때, 그리고 침을 발라 혀에 손을 대셨을 때 이 병자는 예수님의 극진한 자상함을 느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병자에게 말씀하신 당신 치유의 손길을 직접 느끼게 하셔서 치유된 후에도 당신 사랑과 축복의 생생함을 깊이 간직하며 살아가도록 배려하신 것이다.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여기서 '한숨을 내쉬신'에 해당하는 '에스테낙센'(estenaksen; he sighed; with a deep sigh)기본형 '스테나조'(stenazo)'좁은'이라는 뜻의 형용사 '스테노스'(stenos)에서 유래했다. 

그러니까 '스테나조'(stenazo) 동사는 '매우 답답한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이 동사는 사람의 심정을 답답하게 하는 외적 요소에 의해 심적으로 몹시 압박감을 받는 상태(로마8,23)를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의 '귀먹고 말더듬는 것'에 대해 심적으로 압박감을 느끼셨다는 말인데, 그만큼 큰 사랑과 관심을 갖고 계셨다는 뜻이다. 이러한 매우 답답한 상태는 마르코 복음 7장 34절 후반부'열려라'는 말과 대조를 이룬다.

'에파타'(aphphatha)는 문자적으로 '완전히 열리다'는 뜻의 아람어(예수님의 모국어) 음역이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방인 독자를 위해 희랍어 동사 '디아노이크테티'(dianoichtheti;

be opened)로 풀어 주고 있다. '디아노이크테티'(dianoichtheti)'열다'(루카24,45)는 뜻의 동사 '디아노이고' (dianoigo)의 수동태 명령법으로서 '너는 열려져라'는 뜻이다.

 

물론 여기서 귀가 먼저 열려지고, 그 다음으로 혀의 묶인 것이 풀리는 것을 뜻하지만, 앞의 예수님의 마음이 답답한 상태를 가리키는 '한숨을 내쉬신'대조된다는 점에서 '열려라'의 의미는 예수님의 마음을 답답하게 하는, 병자의 전체적인 상황이 풀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듣지도 못하고 말도 더듬는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시지만, 널리 알려져 사람들이 놀라워하지 않습니까?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이러한 군중의 외침은 오늘 제1독서와 연결됩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자기 자신만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남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합니다. 자기는 많이 알고 있고, 남의 말을 듣기보다는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도취라는 굴레에 빠진 상태이지요. 이런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참된 해방이 주어진다면 지금까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을 보고 듣고 즐기게 되지 않을까요? 아울러 다른 이들의 눈과 귀를 열어 주는 그런 놀라운 일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베푸신 치유 행위는 우리에게 더 넓은 것을 생각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무엇보다도 마음의 귀를 생각하게 하지요. 하느님의 목소리, 세상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마음의 귀가 열려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주님과 이웃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정신적 귀먹음이 세상의 많은 비극의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끊임없이 들어야 하며, 신앙적으로 귀먹은 상태에 있다면 주님께서 “에파타!” 하시며 치유해 주시기를 간절히 청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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