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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승천 대축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루카 24,4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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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9-06-02 ㅣ No.163

 

 

[주님 승천 대축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루카 24,46-53)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는데,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 (사도 1,1-11)
1 테오필로스 님, 첫 번째 책에서 저는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처음부터 다 다루었습니다.
2 예수님께서 당신이 뽑으신 사도들에게 성령을 통하여 분부를 내리시고 나서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다 다루었습니다.
3 그분께서는 수난을 받으신 뒤, 당신이 살아 계신 분이심을 여러 가지 증거로 사도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면서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시어,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4 예수님께서는 사도들과 함께 계실 때에 그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나에게서 들은 대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기다려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며칠 뒤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6 사도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께 물었다. “주님, 지금이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다시 나라를 일으키실 때입니까?”
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한으로 정하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
8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신 다음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는데,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
10 예수님께서 올라가시는 동안 그들이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는데,

갑자기 흰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11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다고 한다. ( 에페 1,17-23)
형제 여러분,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여러분이 그분을 알게 되고,
18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성도들 사이에서 받게 될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빕니다.
19 또 우리 믿는 이들을 위한 그분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그분의 강한 능력의 활동으로 알게 되기를 빕니다.
20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능력을 펼치시어,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
21 모든 권세와 권력과 권능과 주권 위에, 그리고 현세만이 아니라 내세에서도 불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22 또한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시고, 만물 위에 계신 그분을 교회에 머리로 주셨습니다.
2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다. (루카 24,46-5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46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47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48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49 그리고 보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
50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51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52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53 그리고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

 

 

주님 승천 대축일 제1독서 (사도1,1-11) 


예수님께서 당신이 뽑으신 사도들에게 성령을 통하여 분부를 내리시고 나서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다 다루었습니다." (2)

 

'승천하신 날 까지의'

 

'승천하다'로 번역된 '아넬렙테'(anelepthe)는 단순히 '들어 올리다' 라는 의미를 갖는 '아날람바노'(analambano)의 과거 수동형이므로, '올려졌다'(he was taken up)이라는 의미이며, 본문은 '그가 올려진 날까지'(until the day in which he was taken up)로 번역되어야 한다.

 

11절에서는 이 동사의 수동태 분사 '아날렘프테이스'(analemptheis)를 '승천하신'(올라가신)으로 번역했다. 이 동사는 물론 승천을 가리키지만, 승천이란 구체적 사건을 통하여 보여지는 예수님의 높아지심, 즉 현양의 신분도 암시하므로, '올리우신'(올리우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특히 여기서 수동형은 신적(神的) 수동태로서, 예수께서 전능하신 하느님의 능력에 의해 승천하셨으며, 이로써 본래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신분을 완전히 회복하는 현양을 이루셨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루카 복음 사가는 이미 루카 복음 24장 51-53절에서 마태오가 기록하지 않은 예수님의 승천 기사를 다루었고 사도행전의 서두에서 다시 언급함으로써, '승천 모티프'(ascension motif)를 루카복음과 사도행전의 가교로 사용하면서 동시에 예수 승천의 역사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분께서는 수난을 받으신 뒤, 당신이 살아 계신 분이심을 여러 가지 증거로  사도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면서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시어,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3)

 

본문은 십자가 수난 후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까지 40일간의 예수님의 행적을 요약하는 부분이다.

 

여기서 '수난을 받으신'에 해당하는 '파테인 아우톤'(pathein auton)은 '고통을 당하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파스코'(pasko)의 부정(不定;Indefinite) 과거 부정사와 3인칭 단수 대명사가 나란히 쓰인 형태이다.

원문 성경은 수난 받으신 주체가 아무 죄도 없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인칭 대명사를 사용했으므로, 이것을 번역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원문의 어순은 예수께서 '수난을 받으신' 것 보다 '드러내셨습니다'(파레스테센;parestesen)을 더 앞에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이 부활 후에 발현하신 일을 더 강조하려는 루카의 의도 때문이다.

만약 예수께서 부활하셨더라도, 제자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나지 않으셨다면(1코린15,6),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이 확고히 정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여러 가지 증거로'

 

예수께서 보여 주신 부활의 확실한 증거는, 과거 영적으로 우둔하고 다분히 비겁했던 예수님의 제자들을 열정적이고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복음의 전사들로 변모하게 한 원동력이다.

물론 그들로 하여금 온전한 모습의 사도로 바뀌게 한 결정적 요인 가운데 하나가 사도행전 2장에서 일어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까지의 40일 동안 보여 주신 확실한 많은 증거 역시, 그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진정한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류를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로부터 구원할 분이심을 확실히 믿게 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증거'로 번역된 '테크메리오이스'(tekmeriois)는 '확실한 표적에 의해 보여 주고 입증하다' 라는 의미를 지니는 동사 '테크마이로'(tekmairo)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의심할 바가 없이 명쾌하고 확실한 표징이나 징표'라는 의미이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몸으로 나타나셔서 제자들이 보는 눈 앞에서 십자가 처형때 입으신 상흔을 보이시고(요한20,20), 그들과 함께 구운 생선을 잡수시는 등(요한21,9-14) 예수께서는 자신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사실을 제자들에게 분명한 증거로 보여 주셨으며, 루카는 이 사실을 이처럼 명확한 의미를 가진 단어로 표현했던 것이다.

 

'사십일 동안'

 

예수께서 죽으신지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까지의 날 수가 40일 이라는 기록은 신약 성경 전체에서 본문에만 있다. 이것은 역사가로서 루카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기록이다.

 

'사십'(텟세라콘다; tesserakonta)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완전수이며 많음을 상징하는 숫자였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서 산에 머문 기간과(탈출24,18 ;34,28) 예언자 엘리야가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르기 위하여 걸어간 날수(1열왕19,8) 및 예수께서 공생활 활동 기간 전 광야에서 단식하던 기간사십일이었다.(루카4,1.2)

 

이러한 날수는 물론 실제적인 기간을 가리키지만, 동시에 부족함이 없는 충만한 기간이었음을 상징한다.

본문에 있어서 루카가 사십 일이라는 기간을 굳이 밝히는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시며 자신을 보이시고 하느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신 날수가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과 함께 계실 때에 그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나에게서 들은 대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기다려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며칠 뒤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4-5)

 

'함께 계실 때에'로 번역된 '쉬날리조메노스'(synalizomenos)는 문자적 의미로 '함께 식사할 때에''함께 모였을 때에'라는 표현 모두 가능하다.

왜냐하면, 이 단어의 원형 '쉬날리조'(synalizo)는 '함께'를 뜻하는 접두어 '쉰'(syn)에 '소금'을 뜻하는 '할스'(hals) 또는 '운집함'을 뜻하는 '할레스'(hales)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단어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만약 어원적으로 볼 때, '쉬날리조'가 '쉰'과 '할스'에서 유래했다면, 이 단어는 '어느 누구와 함께 소금을 친 것, 즉 음식을 먹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 되고, '쉰'과 '할레스'에서 유래하였다면 '함께 모여들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 된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은,  반대로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려고 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것은 첫째, 제자들이 그들의 지도자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한 예루살렘의 정치 종교 지도자들이 언제 자신들까지도 잡아 들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고, 둘째 그들의 집이 갈릴래아에 있었으므로 굳이 예루살렘에 머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제자들의 속사정을 모르실리 없는 예수께서 굳이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명령하신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미 구약에서 예루살렘이 율법과 야훼의 말씀이 나오는 곳으로(이사 2,3 ; 미카4,2) 예언된 사실을 성취하기 위해서이다.

 

둘째, 예루살렘은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인간의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한 구원의 시발점이 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즉 이곳은 구원의 시발점이며, 약속하신 성령이 임할 장소로서 교회의 시발점인 동시에,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곳에서부터 온 유대아로 또한 세계 각 곳으로 복음이 퍼져 나가게 될 복음의 근원지라는 상징적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8절)

 

세째,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핍박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한 성읍인 예루살렘에 성령이 임하고 초대 교회가 세워짐은 사탄의 세력에 대한 승리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구원사적 측면에서 중요성을 지닌 예루살렘은 신학적으로 보더라도 큰 의미를 지닌다.

이곳은 예수님의 십자가상 제사의 예표요, 모형이라 할 수 있는 이사악을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번제로 바치려 했던 장소이며(창세22,2.14), 신약 교회의 모형이라고 볼 수 있는 성전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은 신도들의 영원한 처소가 될 새 예루살렘의 모형이 되기도 한다.(묵시21,1-7)

 

예수께서는 바로 이러한 예루살렘을 신약 교회의 출발지로 삼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사도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 것을 명령하신다. 루카 복음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나자렛에서 시작하여 갈릴래아와 유다를 거쳐서 예루살렘에서 마무리하였다.

 

한편, '예루살렘'에 해당하는 '히에로솔리마'(hierosolyma)는 히브리어 '예루샬라임(jerushaleim)을 음역한 것이다. '예루샬라임'은 '기초를 놓다', '건축하다' 등의 뜻이 있으며, '도시', '도성'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 '예루'(jeru)와 '평화'란 뜻이 있는 '샬롬'(shalom)의 변형 '샬라임'(shalaim)이 합성된 것이다. 따라서 이는 '평화의 거주지' 혹은 '평화의 도성'이란 의미를 지닌다.

 

이 장소가 이러한 의미를 갖게 된 것 역시, 이곳이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거룩하신 하느님과 죄인인 인간 사이에 평화가 이루어지고, 또한 평화의 영이신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하느님과 평화를 이루는 사도들의 모임인 교회가 이곳에서 시작될 것이라는 예언적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성령 강림이 임박한 시점에 초대 교회의 구심점이 될 사도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게 함으로써, 이미 하느님의 구원 사업의 계획 가운데 있었던 예루살렘 교회의 탄생을 가능케 하신 것이다.

 

'나에게서 들은 대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기다려라'

 

본절의 예수님의 말씀에는 삼위일체 하느님이 모두 등장한다. 먼저 '나에게서'는 성자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가리키고, '아버지'성부 하느님을 가리키며, '약속하신 분'성령 하느님을 가리킨다.

 

성령은 아버지, 즉 성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영이다.(요엘2,28.29; 에제 36,26.27) 또한 예수님께서는 성령은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고 사도들에게 말씀하신 바 있다.(요한14,16.26)

예수님께서는 이 일이 이루어지도록 기도까지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요한14,16)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승천한 이후에 이 땅에 남겨질 그의 제자들이 스승없이 복음 전파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할 것을 아시고, 성령께서 제자들과 함께 해 주실 것을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신 것이었다.

 

또한 루카는 제자들의 복음 선포가 하느님의 영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사도행전의 시작을 성령의 강림과 내주에 대한 약속을 거듭 확인하는 내용으로 기록하고 있다.(4.5.8절)

 

본절은 성령 하느님께서 필연적으로 성부 하느님, 성자 하느님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함께 활동하심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는 성자 그리스도의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역사하심을 암시한다.(사도2,33)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고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을 성령께서 이어서 계속하신다는 것은, 구원사의 전개 과정에서 볼 때, 온 인류를 위한 더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승천하지 않으시고 이 땅에 계속 남아 계셨다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는 존재 방식이기는 하지만, 육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거슬러 영적인 몸으로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이 정상적이거나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고 성령이 오심으로 인하여 영적 은혜가 온 세상에 편재하게 되는 것이다.

 

'요한은 물론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며칠 뒤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본절은 멀게는 요엘서 3장 1-2절의 새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시겠다는 예언과 연결된다. 가깝게는 마르코복음 1장 8절의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고 한 세례자 요한의 예언 성취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고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세례'라는 의미의 '밥티스테세스테'(baptisthesesthe)원형  '밥티죠'(baptizo)'담그다'는 뜻과 함께 '씻다'라는 뜻을 가진다. 세례는 '죄로 오염된 옛사람이 죽고 회개하여 하느님을 향해 새 사람이 되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사도행전 2장 1-4절과 연관지어 볼 때, 우선 직접적으로 불혀같이 갈라지는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게될 것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다는 것은, 마치 물 속에 흠뻑 잠기는 것처럼, 성령의 세력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권능(특은)을 덧입어(8절)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직후 제자들에게 명령하셨던 요한 복음 20장 22절의 "성령을 받으라" 라는 말씀은 그 당시 이루어졌고, 만일 이루어졌다면, 여기에서의 성령 강림 예언과 사도행전 2장 1-4절에서의 성령 강림 사건과 어떻게 조화가 되는가?

요한 복음 20장 22절의 말씀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약속하는 상징적 행위로 보는 것이 좋고, 죄사함의 은총으로 양심의 평화를 주는 고백성사의 사죄권에 대한 말씀으로 보면 된다.

 

'주님, 지금이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다시 나라를 일으키실 때입니까?' (7)

 

'다시~일으키실'(회복하심) 이에 해당하는 '아포카티스타네이스'(apokathistaneis)'이전의 상태로 되돌려주다' 라는 의미를 지닌 '아포카티스테미'(apokathistemi)의 직설법 현재 동사이다. 이 동사는 미래적 의미를 지님에도 불구하고, 현재형으로 기록된 것이다.

이것은 루카가 제자들이 정치적 의미의 하느님 나라의 회복을 매우 임박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나타내기 위하여, 명백한 미래적 사건을 묘사하는 데도 현재형으로 기록한 것이다.

 

본문에서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성령 세례를 베푸시는 시점이, 자신들이 희구하고 있던 로마의 정치적 속박으로부터 자기 민족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때인가를 물은 것이다. 이것은 제자들의 영적 무지를 여실히 드러내는 질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신 다음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는데,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 예수님께서 올라가시는 동안 그들이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는데, 갑자기 흰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9-11)

 

9절에서 11절까지는 예수의 승천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강생하신 후,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명하신 구속사업을 완전히 마치신 후 다시 하늘 보좌로 돌아가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심판주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하늘 보좌에서 계속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신다.

 

여기서 '보는 앞에서'로 번역된 '블레폰톤'(bleponton)은 현재 능동 분사로서 '보고 있을 때' 라는 뜻이다. 예수님의 승천이 제자들이 보고 있을 때 이루어졌다는 것은, 승천이 꾸며 낸 일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임을 보여준다.

 

또한 '오르셨는데'에 해당하는 '에페르테'(eperthe ; he was taken up)는 2절의 '승천하신'에 해당하는 '아넬렙테'(anelepthe)처럼 신적(神的) 수동태이다. 예수님의 승천은 바로 예수님의 지상의 모든 활동을 기쁘게 여기신 성부 하느님의 장엄한 역사적 행위였다.

 

예수께서 구름에 싸여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을 하느님이신 예수께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인간이 되어 탄생하신 사실 만큼이나 신비한 일이었다.(루카 2,5-7)  이 세상에 신비하게 오신 예수께서는 신비하게 이 세상을 떠나가셨고, 또한 재림 때에도 천군 천사와 함께 심판주로서 신비하게 오실 것이다.

 

한편, 루카복음 24장 50,51절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손을 들어 제자들을 축복하셨다. 루카 복음은 예수님을 제자들을 축복하는 대사제의 모습으로, 제자들은 예수님을 예배하는 모습으로 승천 기사를 다루었다.

본장의 승천 기사가 역사적 측면을 강조했다면, 루카 24장은 예배적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

 

직역하면, '구름이 그들의 눈(시야)으로부터 그를 붙잡아 데려갔다' 이다. 성경에서 '구름'은 예수님의 신적 권세를 나타내는 데 자주 사용된다. 예수님께서 타볼산에서의 변화(마르 9,7 ; 루카 9,34.35), 올리브산에서의 승천과 재림에 대한 말씀(마태26,64 ;마르13,26) 이라는 중요한 사건들에 있어서, 구름과 함께 등장하시는 모습은, 과거 하느님께서 모세의 만남의 천막에 영광으로 임재하셨던 일을 상기시킨다.(탈출40,35)

 

'그들이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는데'

 

본문에서 '하늘'은 물론 공중을 의미하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늘은 반드시 장소적 개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라논'(uranon)원형 '우라노스'(uranos)신약 성경에서 272회나 사용된 단어로서, 다양한 용례로 사용되었다.

천사들과(마태18,10 ; 에페3,15) 하느님의 보좌(묵시11,13)가 있는 곳이며,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곳이며(마르1,11 ;히브12,25) 성령이 내려오는 곳이며(사도2,2 ; 마태3,16), 진노와 심판이 내려오는 곳이기도 하다.(루카17,29) 히브리서에서는 예수께서 주권을 행사하시는 곳이다.(히브8,1)

 

이처럼 성경에서 '하늘'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신성과 관련된 신학적 개념으로 자주 등장한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하늘로 오르셨다는 승천의 의미는, 장소적 이동의 개념을 넘어서 인간이 받는 제약이 없는 세계, 물리적 법칙이나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차원(세계)에로의 이동을 말한다.

 

'그들이 ~유심히 바라보고' 로 번역된 '아테니존테스'(atenizontes)는 '~에 눈을 고정시키다', '응시하다'라는 뜻을 지닌 '아테니조'(atenizo)의 현재 능동태 분사 복수형으로서, '있는데'로 번역된 미완료 동사 '에산'(esan)과 더불어 '그들이 계속 응시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즉 본문은 제자들이 예수께서 하늘로 올리워지고 구름 사이로 들어가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기까지, 잠시라도 그들의 눈을 떼지 못한 채로 보고 있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흰 옷을 입은 두 사람'

 

'사람'이란 표현을 사용했지만, 그 가리키는 대상은 분명히 천사들이다. 사실 흰 옷 차림은 천사들의 상징히기도 하다.(마태28,3; 요한20,12) '흰'으로 번역된 '류카이스'(leukais)는 성경에서는 빛이 날 만큼 흰 상태나 광채가 나는 상태(마르9,3)를 나타내며, 주로 하느님이나 천사들의 신비스런 모습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마태17,2 ; 묵시1,14)

 천사들은 예수님의 승천과 함께 재림에 관한 사실까지 제자들에게 선포했다. 이처럼 루카는 예수님의 사적을 역사적 관점에서 철저히 기록함과 동시에, 예수님의 하느님의 아들되심을 보다 설득력있게 전하기 위하여 천사와 관련된 사건도 매우 자세하게 기록에 남겼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천사들이 제자들을 향해 부른 이 호칭은 그들의 신분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즉 제자들이 복음 전파의 사명을 망각하면, 갈릴래아의 일개 평범한 사람에 불과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요한 복음 7장 52절을 보면,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날 수 없다고 단정할 정도로 그곳은 영적으로 소외된 지역이고, 보잘것 없는 지방에 불과했다. 천사들은 앞으로 성령을 받아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땅끝까지 용감한 복음의 증인이 될 것을 독려하고 있는 것이다.

별볼일 없는 갈릴래아 촌 사람으로 남아 있을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의 복음의 능력자가 될 것인가?

 

'왜 하늘만 쳐다보며 서 있느냐?'

 

'쳐다보며'로 번역된 '엠블레폰테스'(emblepontes)는 현재분사로서 진행적 의미를 나타낸다. 이런 뉘앙스를 살려 번역하면, '어찌하여 너희는 계속해서 서서 하늘을 향해 쳐다보고만 있느냐?' 이다. 즉 그들은 예수께서 사라지고 없는 하늘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초대 교회의 현실을 염두에 두고, 루카가 천사의 말을 소개하고 있는 거이다. 초대 교회 신도들 가운데서는 그리스도의 재림만 기다리며, 현실적인 이 땅에서의 하느님의 일과 사명을 소홀히 하는 자들도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육체를 입은 몸으로 구름과 함께 영광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셨듯이 그대로(ho tropon ; 호 트로폰 ; in like manner) 육체를 입은 몸으로 큰 영광가운데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가시적으로 재림하실 것을 가리킨다.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충격으로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음을,

십자가 사건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며,

패배가 아니라 온전한 승리였음을 확인시켜 주신 뒤에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그렇다고 이 승천 사건이 예수님의 생애를 다룬 영화에 나오는 승천 장면이나,

성지에서 만나는 주님 발현이나 승천 장소에 남아 있는 발자국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구름을 뚫고 떠나버리셨음을 뜻하지 않습니다.

승천의 근본적인 의미는 공생활을 통하여 당신에게 맡겨진 일을 모두 완수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본디 자리,

하느님 아버지의 오른쪽,

곧 하느님 차원으로 올라가셨음을 뜻합니다.

성경에서 하늘은 우리가 보는 물리적인 공간일 뿐 아니라 하느님의 초월성,

하느님의 영역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마르코와 마태오 복음서에서와 달리 오늘 읽은 루카 복음서에서 주님의 승천을 겪은 제자들은,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에서 기도하며 지냅니다.

예루살렘이 제자들에게는 시련과 아픔의 도시였음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부인, 그리고 십자가의 처절함과 그에 대한 두려움에 도망치는 제자들의 모습을 간직한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겪은 그 모든 것이 실패와 패배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승천을 통해서, 당신께서 보여 주신 그 모든 일이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따른 것이며,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간 구원이 결정적으로 실현되었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승리와 영광 속에 개선하시는 주님을 찬미합시다.

 (이성근 사바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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