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사순 제4주일(가해) 요한 9,1-41; ’20/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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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0-03-21 ㅣ No.4186

사순 제4주일(가해) 요한 9,1-41; ’20/03/22

 

 

 

 

 

모두 모두 건강히 잘 계신지요? 요즘은 무엇을 바라보고 우리의 행동을 취해야 할지조차 모를 정도로, 우리의 한계와 범위를 확실히 넘어서는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에서, 주 하느님께서는 주님의 계명을 따르지 않아 실각한 사울 왕의 뒤를 이을 후계자를 선택하려는 사무엘에게,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 16,7)라고 하시며 가장 어리고, 부모와 형제들에게서 가족 취급도 받지 못하는 보잘 것 없고 나약해 보이는 소년 다윗을 선택하여 주님의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소경을 고쳐주십니다. 이 기사는 단순히 소경이, 눈을 떠 세상사물을 보게 되었다는 기적을 넘어, 그 기적 이후 각 사람들의 행동에서 드러난 감춰진 의도와 속셈을 확연히 보게 됨으로써, 무엇이 참이고 누가 주님인지를 깨달아 믿게 되었다는 기쁜소식을 전합니다.

 

유다인들은 일을 하지 말고 쉬어야 하는 안식일에 예수님이 고치는 일을 함으로써, 그리고 소경에게 ‘~까지 가서 씻는 일을 하게 함으로써, 죄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남을 죄짓게까지 하였다는 범죄사실을 바라봅니다. 그러므로 바리사이파들에게는 소경이 눈을 떴느냐 안 떴느냐?’하는 사실이나, 소경의 답답하고 힘에 겨운 삶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안식일 계명이 지켜지고 유지되느냐의 여부와 어떻게 하면 예수님에게서 꼬투리를 잡아 그의 표징의 효과에 흠집을 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바라보기 때문에 죄인이 어떻게 그런 표징을 일으킬 수 있겠소?”(요한 9,16) 하는 정당한 문제 제기도 무시돼 버립니다. 바리사이파들은 이 사건이 가져올 파장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이번 기적이 안식일 계명을 지키지 않은 상태에서 생겨난 것이기에 무효다!’라고 까지는 주장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 의미나 군중에게 끼칠 영향이나 효과를 충분히 감소시킬 수 있기 때문에, 거듭 그 부모와 소경에게 그가 안식일에 ‘(고치는) 을 했다고 자백하도록 유도합니다.

 

그 부모는 그가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다는 사실, 즉 기적이란 사실은 증명해 주면서도, 그 기적의 의미에 대한 논쟁에는 끼지 않으려고 침묵해 버립니다. 이러한 부모의 움츠리는 태도에서 힘(?)을 얻은 바리사이파들은 그 소경이었던 사람을 불러 사실대로 말하시오. 우리가 알기로는 그 사람은 죄인이오."(24)라고 윽박지르며, 그도 죄인이라고 동의해주기를 요구합니다. 드디어 주님을 섬기기 위한 안식일 계명으로 말미암아, 진정 주님을 섬기지 않고 있는 유다인들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 소경이었던 사람은 사람들이 눈이 멀었을 때 거지노릇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하려 했을 때, 자신의 창피함을 무릅쓰고 "내가 그 사람이오."(9) 라고 이미 명백히 밝혔습니다. 그는 이 유다인들이 이렇게 자꾸 질문을 해가면서까지 얻고자 하는 숨은 의도를 알아차리고 오히려 되묻습니다. "왜 자꾸 묻는 거요?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해 눈이 밝아져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가 어려우니까 이제는 그와 나를 죄인으로 만들기 위해?) 당신들도 (더 알아서)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까?"(27)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의 진실여부에 대해 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유다인들에게 오히려 그 기적의 정당성을 드러내는 말로써 복음을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의 청은 안 들어주시지만 하느님을 공경하고 그 뜻을 실행하는 사람의 청은 들어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도저히 하실 수가 없을 것입니다."(31.33)

 

그러나 유다인들은 격분하여 그를 회당 밖으로 쫓아냅니다.

소경은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밝혔습니다.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 그분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오."(9.33) 그리고 예수님께 "주님, 믿습니다."(38)라고 고백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냈습니다.(3)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우리도 유다인처럼 주님이 다가오시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소경이 눈을 뜨게 된 것을 함께 기뻐하지 못하고, 아니 기뻐할 수 없는 유다인들처럼 오늘 이 시대에 기쁜소식을 거부하고 축소시키고 무력화시키려는 의도를 우리의 삶과 세상 속에서 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응답합니까?

아예 그런 것을 못 봅니까?

아니면 본 것이 무서워 못 본체 합니까?

우리가 못 본 체 하며 본 그것은 계속 우리의 뇌리 속에 남아서 우리를 믿음과 회개로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진정 무엇이겠습니까?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본다는 것, 그것은 무엇을 바라보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자상 세계 교회가 불완전하고 비유적으로 말할 수 밖에 없는 절대적인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 못하고, 불변하는 최고의 진리인 하느님을 등에 엎은 부적절한 교회의 권위를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정하고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온전한 자유와 기쁨과 행복이 넘치기는 잠깐이었습니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느껴서 하느님을 거부하고 의식 속에서 없애버리고 나니, 스스로 어딘가에 기댈 데가 없어서 불안에 떨게 되었습니다. 한계 지어진 인간 조건은 어쩔 수 없이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추구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를, 그것도 합리적인 이성으로는 도달할 수 없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 줄듯한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헤매면서 신비주의와 환타지를 만들어 자신들의 허전한 마음을 달래봅니다. 그것을 바라보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영웅적 초월주의 아이돌이나 스타들을, 더군다나 영상효과에 의한 편집 구성이나 유전자의 화학적인 변이에 매달려 새로운 무엇을 기대하고 만드는 것을 보자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것들이야말로 어쩌면 더욱더 인간이 만들어내는 신에 불과합니다.

 

또는 눈에 보이는 현상들을 통해 그 뒤에서 조종하는 배후의 손길을 바라보라는 말인가? 고단수의 행위와 협잡 및 탐욕의 손아귀를 바라보라는 말에 국한된 것도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인간을 더욱 더 인간답게 하고, 인격자로 성숙시켜 나가는 인간존재의 의미와 그 의미를 살찌우고 더욱더 인간이게 하는 본질과 그 본질과 연관된 관계자들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순간적인 무제한의 자유와 책임을 지지 않는 자유를 철부지처럼 부르짖을 것이 아니라,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 없는 절제된 자유와 인간 사회와 대자연의 한 구성 요소로서의 인간 사회의 규정과 규제 안에서 누리를 수 있는 진정한 자유를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마치 현세에서 이루지도 못하는 이상을 사람에게 짊어지게 해 놓고, 그 이상이 이루어지는 시기와 장소를 인간 세계에서 도달할 수 없는 하늘나라로 미뤄놓기만 하는 것으로 비칠지라도,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진정 이 시대 이 자리에서 추구하고 누릴 수 있는 인간 삶의 본질과 그 내연을 그려내야 할 것입니다. 변하는 세계 안에서 변하지 않는 진리들과 그 가치들를, 이룰 수 없어 보이는 이상과 꿈을 우리가 살아 있는 이 인류 사회 안에서 어느 정도 그리고 한계적으로나마 그 이상과 꿈의 열매들을 체험하고 이루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교회의 역사는 하늘 나라를 꿈꾸고 그 나라를 이루려고 하는 사람들의 꿈이요 건설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주 예수님께서 선포하실 때부터 시작했던 하느님 나라를 바라봅니다. 그것이 이 땅에서는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마지막 날 그 날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그 꿈과 이상을 실현해 왔습니다. 늘 좋은 쪽으로만, 늘 성숙의 단계로만 넘어오지 않았어도, 꾸준하고 나름대로 추구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마지막 날 하늘 나라에 올라 주 하느님과 온전히 누리게 될 그 기쁨과 평화의 순간을 지금 여기서 조금이나마 그리고 순간적으로나 앞 당겨 느끼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주 하느님께 기도할 때마다,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께 주 예수님이 세우셨던 희생제사인 미사를 봉헌할 때마다, 그리고 일상에서 기도와 미사에만 머물지 않고 일상에서 주 예수님의 말씀을 실현할 때마다, 주 예수님 사랑의 정신으로 우리가 형제자매들을 위해 희생봉사할 때마다 우리는 하늘 나라의 영광을 미리 앞당겨 지금 여기서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매번 시대가 바뀔 때마다, 인간 세계는 예수님이나 또 다른 이상의 성인들이 나타나 우리에게 복음의 하느님 나라를 증거하고 돌아가시기를 기대하고, 그렇게 하면 믿고 따르리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 누가 나를 대신해서 증명하고 죽어주기만을 기다리는 것과도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 보여준다고 해서 내가 또 지금의 나를 변혁시키고 따르리라는 것도 장담할 수도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영화를 감상하고 감탄하고 말 듯이, ‘나는 그저 보통 인간일 뿐이고, 그것은 성인들의 일이고, 그분들의 영역이야!’ 라고 하면서 전혀 시도조차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그 누가 나를 대신해서 이루어준다고 해서 내가 대신 누리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진정 주 예수님과 하나 되고 그분이 일러주신 하느님 나라의 기쁨과 평화를 누리며 살기를 원한다면, 이제는 내가 직접 그 일을 이룰 때입니다. 내가 믿고 추구하는 주 예수님과 그분이 일러주신 하느님 나라를 누가 대신 만들어 주고 나는 가만히 앉아 있어도 나를 업고 들어가기를 기다리는 어린아이 시절의 신앙이 아니라, 이제 성숙한 신앙인으로서 스스로 믿고 추구하는 그 하느님 나라의 이상과 꿈을 내 몸으로 실현함으로써 이루어내고 드러냅시다.

 

잠시 이 순간에 멈춰 서서 우리 인생 역사를 되돌아봅시다. 그리고 주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하시면서, 나를 어떻게 이끌어 오시고 지켜주셨는지를 바라봅시다. 내 인생 역사 안에서 주님께서 내게 이루신 놀라운 업적을 발견해 봅시다. 그리고 이제 나의 삶 속에서, 사도 성 바오로께서 일러주신 대로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내십시오.”(에페 5,8-10)

 

그리고 그대로 실현하십시오. 물론 우리의 생각과 다짐과 노력만으로는 다 이룰 수 없으므로, 성령께 의탁하고 성령의 도우심에 의지하여 오늘 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한 걸음 한 걸음씩 하늘 나라를 이루고 만들어 나갑시다. 내가 이루는 만큼 내가 만드는 만큼 주 예수님께서 펼쳐주시는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임을 기대하고, 오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인간조건과 모든 한계상황을 이겨냅시다. 모두 모두 주님 사랑 안에서 건강하시고 행복하십시오.

 

잠자는 사람아, 깨어나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어 주시리라.”(에페 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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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4주일 꽃꽂이

http://bbs.catholic.or.kr/home/bbs_view.asp?num=133&id=162590&Page=14&menu=frpeterspds2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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