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다해) 루카 9,11ㄴ-17; ’22/06/19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 시복시성 기원미사

인쇄

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2-05-12 ㅣ No.5056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다해) 루카 9,11-17; ’22/06/19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 시복시성 기원미사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루카 9,16-17)라는 기사를 전합니다.

 

이 기사에 이어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주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1코린 11,23-26)라고 전해 주십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체와 성혈의 제사를 봉헌하도록 하시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희생제사를 기억하고 우리의 생애를 통해 성체성사의 예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오늘 온몸으로 성체성사의 예를 행하신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을 기억합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순교하신 이후에, 이 땅에 방인 사제는 최양업 토마스신부님 뿐이셨습니다. 그분은 한국천주교회 역사 안에서 땀의 순교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부님은 한국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 주님의 생애와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신부님은 박해를 피해 남들이 지나가지 않는 산길을 통해 하루 종일 숨어서 교우촌을 찾아가, 밤새 고해성사를 주고 성체성사를 거행하시고는, 동트기 전 새벽녘에 다음 교우촌으로 향하기를 반복하시다가 길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지난 615일이 신부님께서 돌아가신 날입니다.

 

1777년 주어사의 천진암에서 성리학을 연구하던 조선 학자들은 당시 서학이라고 일컬어지던 천주교 서적을 연구하다가 천주교 신앙을 수용하고, 그 중에 이승훈 베드로가 1784년 중국 북경의 천주교회를 찾아가 세례를 받으면서 한국천주교회는 설립되었습니다.

 

당시 조선 사회는 새로운 문화나 종교를 이단으로 여겨 배척하였으므로, 한국 천주교회는 창설하자마자 1791년부터 박해를 받았고, 이 박해의 칼날을 피해 교인들은 산속으로 피신하여 남몰래 교우촌을 이루어 신앙생활을 계속하며, 선교사제의 입국과 종교의 자유를 꿈꾸었습니다. 18319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마침내 조선 대목구가 설정되었습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182131, 충남 청양의 다락골 인근에 있는 새터 교우촌에서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복자 이성례 마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납니다.

 

1835년 말, 박해 중에도 한국 천주교회에서 파견한 밀사들의 안내로 모방 베드로 신부님이 입국하여 전국의 신앙 공동체들을 순회하다가, 최경환의 집에서 15세의 소년 최양업 토마스를 한국의 첫 신학생으로 선발합니다. 이어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김대건 안드레아가 선발됩니다.

 

이들은 1836123일 순명을 서약하고 마카오의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에 도착하여 신학 공부를 하다가, 183711월 최방제가 열병으로 사망하고, 1839년에는 마카오의 소요로 필리핀 마닐라로 장소를 옮겨 수업을 받다가 돌아옵니다. 1842년 극동 대표부의 장상인 리브와(Libois) 나폴레옹 신부는 박해로 끊어진 한국 천주교회와의 연락을 기대하고 최양업과 김대건을 통역자로 프랑스 함대에 승선시키지만, 계획이 바뀌어, 만주의 소팔가자로 가서 조선 대목구의 페레올(Ferreol) 요한 부주교님에게 수업을 받았고, 1843년 최양업 신부님은 리브와 신부님을 통해 프랑스 파리의 무염성모성심회에 가입합니다. 그러던 중 조국에서 일어난 박해와 순교자들의 소식을 듣고 스승 르그레즈와(Legregeois) 베드로 신부님께 이런 서한을 보냅니다.

 

저는 우리 부모들과 형제들을 따라갈 공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저의 신세가 참으로 딱합니다. 그리스도의 용사들의 그처럼 장열한 전쟁에 저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말입니다. 정말 저는 부끄럽습니다! 이렇듯이 훌륭한 내 동포들이며, 이렇듯이 용감한 내 겨레인데, 저는 아직도 너무나 연약하고 미숙함 속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인자하신 하느님 아버지, 당신 종들의 피가 호소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당신의 넘치는 자비와 당신 팔의 전능을 보이소서. 언제쯤이나 저도 신부님들의 그다지도 엄청난 노고와 저의 형제들의 고난에 참여하기에 합당한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수난에 부족한 것을 채워, 구원 사업을 완성할 수 있을까요?”

 

1844년 최양업은 김대건과 함께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은 후, 김대건 부제가 사제 서품을 받고 페레올 주교님, 성 다블뤼(Daveluy) 안토니오 신부님과 함께 한국에 입국한 뒤에도 소팔가자에 남아 있으면서 매스트르(Maistre) 요셉 신부님과 함께 귀국로를 찾기 위해 노력하다가, 1846년 동료 김대건 신부님의 순교 소식을 알립니다.

 

마침내 지루했던 기나긴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저의 동포들한테 영접을 받으리라 희망하면서 크게 기쁜 마음으로 용약하며 변문(한중 국경의 성문)까지 갔습니다. 그러나 변문에 도착하여 보니 이 희망이 산산이 무너졌습니다. 너무나 비참한소식에 경악하였고, 저와 조국 전체의 가련한 처지가 위로받을 수 없을 만큼 애통하였습니다.…… 특히 저의 가장 친애하는 동료 안드레아 신부의 죽음은 신부님께서도 비통한 소식일 것입니다.”

 

한국 천주교회 밀사들의 만류로 최양업 부제는 귀국을 포기하고, 극동 대표부가 이전해 있던 홍콩에 도착하여 한국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합니다. 18478월에는 프랑스 군함을 타고 한국 해안에 도달하였지만 밀사들을 만나지 못하여 귀국에 실패합니다.

 

상해로 옮긴 최양업 부제는 1849415일 장가루(금가항) 성당에서 마레스카(Maresca) 주교님에게 사제로 서품됩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바로 상해를 출발하여 중국 요동 지방으로 가서 성 베르뇌(Berneux) 시메온 신부님 아래서 사목 활동을 하다가, 11월 매스트르 신부님을 다시 만나 귀국을 시도하여, 123일 한국 천주교회의 밀사들을 만나 귀국하게 됩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페레올 주교님과와 다블뤼 신부님을 만난 뒤, 각처에 숨어 있는 신자들을 순방합니다. 1850년 초부터 6개월 동안 5개 도, 5천여 리를 걸어다니며 신자 3,815명을 방문합니다. 진천 배티를 중심삼아 116개월여 동안 사목활동을 하면서, 틈틈이 한문 교리서 및 기도서를 한글로 번역하였고, 선교사들의 한국 입국을 도왔으며, 신학생들을 말레이 반도에 있는 페낭(Penang) 신학교로 보냈고,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수집합니다.

 

최 신부님은 전국의 신자들을 순방하며, 마을에서 쫓겨나기도 했고, 포졸들의 습격으로 죽도록 얻어맞기도 합니다. 1860년의 경신박해 때, 최양업 신부님은 몇몇 신자들과 경상남도의 한 모퉁이에 갇혀서 대목구장 베르뇌 주교님이나 다른 선교사들과 연락이 끊긴 채, 르그레즈와 신부님에게 서한을 보내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한국 천주교회를 부탁합니다.

 

우리를 환난에서 구하소서. 엄청난 환난이 우리에게 너무도 모질게 덮쳐 왔습니다. 원수들이 우리에게 달려들고 있습니다. 당신의 보배로운 피로 속량하신 당신의 유산을 파멸시키려 덤벼들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높으신 데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을 대항하여 설 수가 없습니다. 지극히 경애하올 신부님들께서 열절한 기도로 우리를 위하여 전능하신 하느님과 성모님께로부터 도움을 얻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하는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 포교지를 여러 신부님들의 끈질긴 염려와 지칠 줄 모르는 애덕에 거듭거듭 맡깁니다.”

 

다행히 최양업 신부님은 갇혀 있던 곳을 빠져나와 경상도 남부 지방의 사목 방문을 마친 후, 베르뇌 주교님께 보고하기 위해 길을 나서지만, 과로에다 장티푸스까지 걸려 1861615일에 문경읍 또는 진천 배티 교우촌에서 40세의 일기로 주님께 돌아가십니다.

 

이 소식을 들은 베르뇌 주교님은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교 교장인 알브랑(Albrand) 신부님에게 최양업 신부님의 신심과 열심, 평소에 보여준 사제로서의 분별력을 칭송하고, 동시에 그를 잃은 아쉬움을 표시하는 서한을 보냅니다.

 

최 토마스 신부는 신심, 영혼의 구원을 위한 불과 같은 열심, 그리고 무한히 귀중한 일로는 훌륭한 분별력으로 우리에게 그렇게도 귀중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유일한 한국인 신부 최 토마스 신부가 구원의 열매를 풍성히 맺은 성사 집행 후에, 내게 자신의 업적을 보고하려고 서울에 오던 중, 지난 6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착한 신부가 처해 있는 위험에 대한 소식을 맨 처음 받은 푸르티에(Pourthie) 신부는 그에게 마지막 성사를 줄 수 있을 만큼 일찍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그 신부는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죽어가는 그의 입술에서 아직 새어나오는 말이 단지 두 마디 있었으니, 그것은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이었습니다.…… 최 신부는 12년간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성공적으로 영혼 구원에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저를 난처하게 합니다. 그가 성무를 집행하던 구역에는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는 서양 사람이 뚫고 들어가기 어려운 많은 마을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를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최양업 신부님이 배론 신학교에서 170-180리 지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그 당시 신학교에 있던 푸르티에 신부님이 이 소식을 듣고서는 즉시 최 신부님에게로 달려갔지만, 그가 들을 수 있는 말은 아주 열성적으로 부르는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뿐이었다고 합니다. 최 신부님이 선종한지 5개월이 지난 다음 베르뇌 주교님은 성대한 장례미사를 올렸고, 그 시신을 배론 신학교 뒷산에 안장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최양업 신부님의 시복을 위해 기도하며, 성인 기적 심사 통과를 위해, 최양업 신부님의 이름을 부르며 전구기도를 청하며 쾌유하시는 분들이 많이 나타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한국천주교회의 두 번째 사제이며, 땀의 순교자이신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께서 하루 빨리 시복의 영광을 누리시기를 간구하면서, 우리도 우리 생의 순간에,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성체성사를 기억하고 우리 삶으로 재현하며, 주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도록 살아갑시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코린 11,24)

 

--------------------------------------------------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꽃꽂이

https://bbs.catholic.or.kr/home/bbs_view.asp?num=7&id=186812&menu=frpeterspds2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69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