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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하마을, '고향'에 갔다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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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요하 [jiyoha] 쪽지 캡슐

2009-07-13 ㅣ No.9995


                봉하마을, '고향'에 갔다 왔습니다





내가 노짱 서거 49재를 맞아 봉하마을을 가는 데에는 많은 망설임과 고민이 있었다. 우선은 현재 병환을 겪고 계시는 노모 곁을 4일씩이나 떠나 있게 된다는 게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9일 아침 서울 사당역 근처에서 문인들과 만나 함께 버스를 타고 가려면 나는 8일 오후 서울에 가서 일박해야 했다. 또 10일 오후 봉하마을에서 올라오면 서울에서 다시 일박하고 11일 오전에나 집에 올 수 있을 터였다.

병환 중이신 노모님께 감사하다
 
 

▲ 안장식 예행연습 / 9일 오후 군인들의 안장식 예행연습이 진행되는 곳에서는 긴박하기조차 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안장'이라는 단어가 지례 이상한 허전함과 모호한 거부감 같은 것을 안겨주는 느낌이었다.  
ⓒ 지요하  노무현 49재  

3박 4일의 여정은 아무래도 부담스럽고 벅찬 일이었다. 게다가 내 몸의 건강 상태도 좋은 편이 아니었다. 혈압과 혈당 관리는 그런 대로 잘 되고 있지만, 늘 통풍 발작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고, 계속적으로 신장 치료를 하는 중이었다. 술 한잔 마음대로 마실 수 없는 처지이고, 음식 가리는 일에 방심을 해서는 안 되는 형편이었다.

쉽게 결심을 하지 못하고 고민만 거듭하고 있을 때 아내가 내게 용기를 주었다.

"가지 않으면 얼마나 아쉽고 서운하겠어요. 평생 후회가 될지 몰라요. 추모시를 지어 추모시집에 참여했으니 노무현 대통령께도 어느 정도 체면이 서게 되었고, 우리나라 모든 문인들과 국민들 앞에 한 사람의 문인으로서 체면이 서는 일을 한 거예요. 49재에 그냥 가는 게 아니라, 추모시집을 노짱님께 헌정하러 가는 일이기도 하니 꼭 갔다오도록 하세요."  

그리고 아내는 나와 상의도 없이 서울의 딸아이를 내려오게 했다. 방학중임에도 계속 서울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딸아이에게 집에 내려와서 아빠가 안 계시는 사흘 동안만 낮에 할머니를 돌봐드릴 것을 부탁했다. 딸아이도 아빠가 봉하마을 가는 일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선뜻 내려와 주기로 했다.


▲ 노짱의 평범한 사저 / 전임 대통령의 사저치고는 소박하게 보이는 이 집을 조중동과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은 '아방궁'이라고 불렀다. 이런 정도의 집은 오늘날 농촌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다.  
ⓒ 지요하  노무현 49재

어머니께는 자세한 말씀을 드리지 않았다. 그냥 서울에서 문인들을 만날 일이 있어서라는 말씀만 드렸다. 어머니는 병환을 겪게 되면서 이상하게 신경이 예민해 지셨다. TV에서 시국관련 보도를 접할 때마다 불안해하고 괜한 걱정을 하셨다. 내가 오체투지 순례기도에 참여할 때도, 또 용산미사에 참례할 때도 찬성하고 쉽게 허락을 해주신 어머니였다. 다만 내 건강 문제만을 걱정하실 뿐이었다.

그러던 어머니가 요 근래 들어 TV 보도를 통해 이상한 상황을 접하시면서 필요 이상으로 불안해하시고 걱정을 하시니, 노짱 49재에 봉하마을을 갔다오겠다는 말씀을 드리기가 어려웠다. 아내도 어머니는 모르시게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내 노모님은 눈치가 빠르신 노인네였다. 봉하마을에서 서울로 가면서 아내에게 전화를 하니, TV에서 봉하마을 상황을 보신 어머니께서 이미 눈치를 채셨다고 했다. 하지만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다고 했다.


▲ 통절한 한탄의 벽문 / 피를 토하는 듯한 벽문 앞에서 벽문을 읽고 또 읽으며 끝내는 눈물을 흘려야 했다.  
ⓒ 지요하  노무현 49재


11일 오전 내가 집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봉하마을에 가서 모든 일을 잘하고 왔느냐"고 물으셨다. "노무현 대통령을 잘 보내드리고 왔을 테니 이제는 마음도 가라앉히고 푹 쉬라"는 말씀도 하셨다. 나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실 소파의 어머니 옆에 앉아서 추모시집을 보여 드리고, 내 시도 읽어드리고, 봉하마을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들려드렸다. 하나하나 귀담아 들으시는 어머니께 진심으로 감사하며….

"고향에 갔다 온 기분이에요"

봉하마을에서 두 번 눈물 흘린 이야기도 어머니께 들려드렸다. 봉하마을 마을회관 앞마당에 가수 정태춘씨가 설치해놓은 무대에서 우리는 9일 저녁 5시부터 추모예술제 행사를 가졌다. 열두 편의 시가 낭송되었고, 여러 곳의 춤꾼들이 와서 춤 공연과 굿을 보여주었다.

땅바닥에 신문지 깔고 앉아서 손뼉도 치고 카메라 셔터도 누르고 하며 열심히 한 마음으로 예술제 행사를 즐겼다. 그러다가 수십 명 어린이들이 무대에 오르는 것을 보게 되었다. 김해시 진영읍 3개 유치원에서 온 어린이들이라고 했다. 그 어린이들이 귀여운 몸짓으로 노래를 부를 때 나는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저 천진난만한 아이들에게는 정말로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줘야 할 텐데…. 저 아이들은 커서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갖가지 이름의 더러운 질곡들 속에서 살지 말아야 할 텐데…. 그런 생각들이 복받쳐 올라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 유치원 어린이들의 노래 / 김해시 진영읍 3개 유치원에서 온 어린이들이 추모예술제 무대를 한결 예쁘고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저 어린이들의 노래를 들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야 했다. 눈물 헤픈 나 자신을 다시 한번 자각하며...  
ⓒ 지요하  노무현 49재

10일 낮 유해 안장식이 끝나고 수많은 이들이 헌화를 할 때는 안장식장을 떠나 봉하마을의 긴 외길에 섰다. 조중동과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이 '아방궁'이라고 날조했던 전직 대통령의 소박한 사저 앞으로 난 길이었다. 그 길의 한쪽에는 수많은 벽문들이 붙어 있었다.

나는 길가의 그 수많은 벽문들을 하나하나 읽었다. 이 세상 어디에서 이렇게 절통한 벽문들을 다시 읽을 수 있을까? 이렇게도 많은 통한의 벽문들이 걸려 있는 길이 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나는 그 장엄한 길의 숱한 벽문들 앞에서 또다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눈물을 흘린 길이었다. 앞으로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오갈 길이었다. 내가 이미 두 번 밟았고, 언젠가는 다시 찾을 길이었다. 나는 문득 내가 '고향'에 와서 고향 길을 밟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고향은 봉하마을에서 먼 충청도 태안 땅인데, 고향에서 사는 사람이 고향 아닌 곳에 와서 고향 같은 정감을 가지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모호해지는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봉하마을은 내 고향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 피끓는 벽문의 길 / 수많은 사람들이 피 토하듯, 절규하듯 자기 마음을 구구절절 그려낸 벽문들을 빽빽이 붙여놓은 길은 참으로 웅대한 표현의 길이었고, 소통을 추구하는 길이었다. 저 벽문의 주인들은 이제 어디로 가서 허전함을 달랠까?  
ⓒ 지요하  노무현 49재

그렇다. 나는 노무현의 고향 봉하마을을 또 하나의 내 고향으로 삼기로 작정했다. 나는 이미 예전에 빛고을 광주를 또 하나의 내 고향으로 삼은 사람이었다. 광주를 또 하나의 내 고향으로 삼은 사람답게 살고자 했다. 이제 나에게는 또 하나의 고향이 생겼다.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봉하마을을 또 하나의 고향으로 삼은 사람답게 살 결심을 했다. 새로운 그 결심을 안고 봉하마을에서 돌아올 수 있었다.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고향에 갔다 온 기분이에요. 종종 봉하마을을 찾을 거예요. 종종 광주 금남로와 망월동과 김해 봉하마을을 찾으며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임을 확인하고 되새기며 살 거예요."

              

▲ 추모예술제 후의 행진 / 추모예술제의 마지막 순서인 '진혼굿마당'이 끝난 후 출연진과 관객 모두 함께 5월의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긴 흰 띠를 잡고 마당을 도는 형식으로 행진을 했다. 나는 실로 오랜만에 '임을 위한 행진곡'을 다시 부르며 목이 메었는데, 내 바로 앞의 나이 든 여성은 연신 눈물을 닦았다.  
ⓒ 지요하  노무현 49재


09.07.13 09:50 ㅣ최종 업데이트 09.07.13 09:50
출처 : 봉하마을, '고향'에 갔다 왔습니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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