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동성당 게시판

찡한이야기와 짧은 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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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석 [abalone] 쪽지 캡슐

1999-12-04 ㅣ No.686

가슴 찡한 이야기와 그 글에 대하여 연평도 성당의 김대열 신부님께서 짧은 피정의 글을 올립니다.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글들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게시자: 정선아(angelra) [엔젤]가슴찡한글<한없는 사랑>

게시일: 1999-12-02 09:56:32

본문크기: 17 K bytes 번호: 1402 조회/추천: 69/10

주제어:

 

난 지금도 시장 길을 지날 때면 시장 구석진 자리에서 나물을 팔고 계시는 할머니를 보곤 한다. 예전에는 이 시장 길을 지나는 것이 고통이었다. 하지만 이젠 나에게 이곳을 지날 여유도 없다.  어쩌다 가끔씩 들려보는 이곳 시장 터. 난 이곳에서 장사를 하는 한 분의 고귀한 사랑을 받고 자랐다.

 

"엄마 시장 갔다 올 테니, 밥 꼭 챙겨먹고 학교 가거라" 난 장사를 가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도 잠을 자는 척 했다. 이 지겨운 가난. 항상 난 이 가난을 증오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벗어나고 말리라는 다짐을 굳히곤 했다.

 

내가 학교 가는 길 시장 저 귀퉁이에서 나물을 팔고 계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난 어머니가 나를 발견할까 봐 얼른 도망친다. 우리 부모님은 막노동을 하셨다고 한다. 일하는 도중 철근에 깔리신 어머니를 구하시려다 아버지는 사망하고 어머니는 한쪽 다리를 잃으셨다고 한다.

 

일을 가시지 못하시는 어머니는 나물을 캐서 팔곤 하셨다. 난 항상 들판에 절뚝거리시며 나가시는 어머니가 싫었고 밤새 다듬으시는 모습도 싫었다. 더더군다나 시장 한 귀퉁이에서 쪼그리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 비슷하게 장사를 하는 것도 맘에 들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니 퉁퉁 부은 다리 한쪽을 주무르시며 나물을 다듬고 계신다. 나를 보자 어머니는 기쁜 낮으로 3,000원을 주신다. 난 그 돈을 보자 화가 치민다.

 

"난 거지 자식이 아니란 말이야 이런 돈 필요 없어!" 그리고는 밖으로 나와 버린다.

 

다음날 아침 난 어머니가 시장 간 틈을 타 집에 가서 책가방을 들고 학교에 간다. 학교길 약수터에서 간단히 세수를 한 다음 물로 배를 채운다. 난 비록 풍요롭게 먹고 입지는 못했지만 공부는 악착같이 했다. 그래서 부잣집 자식 놈들보다 공부는 항상 잘했다. 하지만 그 자식들에게 사는 미움도 만만치 않았다.

 

그날 4교시가 끝날 무렵 아이들이 갑자기 웅성거린다. 복도를 보니 어머니가 절뚝거리시며 교실로 들어선다. 선생님 드리려고 장사하려고 다듬은 나물을 한 봉 다리 들고서.... 어머니는 내가 어제 들어오지 않자 걱정이 되셔서 학교에 오신 거란다.

 

선생님과의 면담을 끝내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이들이 한마디씩 한다. "야! 이민석 너네 엄마 병신이었냐?" 그놈은 그 잘난 부잣집 아들 현우였다. 현우는 어머니의 걸음걸이를 따라 한다. 무엇이 우스운지 반 아이들은 웃어댄다. 난 화가 나서 그놈을 정신없이 두들겨 줬다. 그리고서는 교실을 나와 버렸다.

 

저녁무렵 집에 가니 집 앞에 잘 차려 입은 여자와 현우가 어머니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니 애비 없는 자식은 이래도 되는 거야? 못 배우고 없는 티 내는 거야 뭐야. 자식교육 좀 잘 시켜, 어디 감히 우리집 귀한 자식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 놓느냔 말이야. 응. 어머니라는 작자가 병신이니 자식 정신이 온전하겠어?"

 

어머니는 시종일관 죄송하다는 말뿐이다. 난 그러는 어머니의 모습이 싫었다. 집에 들어가도 어머니는 아무 말씀 없으시다. 난 어머니에게 한마디한다.

 

"다시는 학교에 오지마 알았어? 창피해서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 "그래 미안하다 난 민석이가 걱정이 되어서......" "난 차라리 엄마가 없었으면 좋겠어"

 

난 해서는 안될 말을 해버렸다. 슬픔을 보이시는 어머니를 못 본척하며 자는 척 했다.

 "난 꼭 성공할거야." 밤새 이렇게 외쳤다.

 

다음날 아침 수업료라며 엄마가 돈을 쥐어 주신다. 얼마나 가지고 계셨는지 너무도 꼬깃하고 지저분한 돈이었다. 학교에 가니 선생님이 부르신다. 적어도 선생님만은 내편이셨다. 어머니께 잘 해드리라는 말로 나를 위로하신다. 선생님께서 나물 맛있게 먹었다고 어머니께 전해 달란다. 난 그러마 했다. 하교 길에 길 모퉁이 배추가게 쓰레기통에서 배추 잎들을 주어 모으시는 어머니를 본다. 난 모른 척 얼른 집에 들어와 버렸다. 그날 저녁 배추 국이 밥상에 올라온다.

 

"이 배추!" 난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께선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배추가게 아저씨가 팔다 남은 거라고 버리기 아까우니 가져가서 민석이 국 끓여 주라고 하더구나" 어머니의 말에 난 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정말로 난 거지자식이 되어 버린 것만 같았다.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하는 어머니가 너무도 싫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날이 어머니 생신이셨다고 한다.

 

~~~~~~~~~~~~17년 후~~~~~~~~~~~~~~~

 

난 의사가 되었다. 가정도 꾸리고 병원도 장모님께서 개업해 주셨다. 난 너무도 풍요로운 생활에 어머니를 잊고 살았다. 돈은 꼬박꼬박 어머니께 보내 드렸지만 찾아가 본적은 없었다. 아니 어머니라는 존재를 잊고 살려고 노력했다는 해석이 옳을지 모르겠다.

 

그런 어느날...

퇴근길에 우리집 앞에 어느 한 노인과 가정부 아주머니가 싸우고 있는걸 봤다. 다가서니 그 노인은 내가 가장 잊고자 하는 어머니였다. 전보다 더 야윈 얼굴 허름한 옷차림 그리고 여전히 절뚝거리는 다리..... 어머니는 나를 보자 기뻐하신다.

 

"민석아 많이 좋아졌구나."

난 어이 없다는 듯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난 차갑게 한마디 한다.

 

뭐가 모자라서 나에게 온단 말인가.... 그 동안 생활비로도 모자라단 말인가? 민...석....아....어머니의 떨리는 목소리.

 

"전 민석이가 아니라 최영호입니다." 난 이 한마디를 끝으로 집으로 들어가 버린다.

 

가정부가 애써 돌려 보낸 후 별 노망든 할머니가 다 있다고 푸념을 늘어놓는다. 그 후 한달 동안 난 악몽에 시달린다. 할 수 없이 난 다시는 되돌아 가기 싫은 시장이 있는 우리집으로 발길을 돌린다. 시장 한 귀퉁이에 여전히 나물을 팔며 기침을 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난 가만히 곁에 가서 지켜본다. 나물을 사려는 한 아주머니가 묻는다.

 

"할머니는 자식이 없나요?"

"아니여. 우리 아들이 서울 큰 병원 의사여. 자꾸 나보고 같이 살자고 하는디 내가 싫다 혔어. 내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자식 신세를 져. 요즘도 자꾸 올라오라는 거 뿌리치느라고 혼났구먼. 우리 아들 같은 사람 세상에 둘도 없어. 우리 아들이 효자여 효자."

 

어머니는 자식자랑에 기분이 좋았는지 나물을 많이도 넣어 드린다. 그런 어머니를 뒤로하고 난 예전의 집으로 향한다. 아직도 변한 게 없는 우리집 거의 쓰러져 가는데도 용케 버티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살았다는 게 생각에 없을 정도였다. 난 방 틈으로 돈봉투를 넣어놓고는 돌아선다.

 

1년이 지난 후 난 어머니의 사망소식을 고교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듣게 되었다. 그래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내 발길은 어머니의 집으로 향하게 되었다. 시장에는 어머니의 모습이 정말로 보이질 않았다. 도착한 곳에는 선생님이 혼자 집을 지키고 계셨다. 나를 알아보신 선생님 아무 말씀도 없으시다. 무거운 침묵.......

 

"민석아 내 옆에 와서 잠깐 앉아라." 선생님이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셨다.

 

선생님께선 낯익은 보따리를 나에게 주신다. 바로 어머니가 가지고 다니시던 나물 보따리셨다. 이 보따리에다 밤새 다듬은 나물들을 싸서 시장에 팔러 가시곤 하셨다.

 

"풀러 보거라" 선생님의 말씀대로 난 보따리를 풀었다.

 

"돈 아닙니까.?" "그래 돈이다. 네 어머니가 너에게 주시는 마지막 선물이다. 그 동안 네가 돌아올까 봐서 그리고 혹시나 네가 성공하지 못하면 다른 사업을 할 수 있도록 모아두신 돈이란다. 너 하나 믿고 무슨 미련인지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너를 기다렸다. 너에게 잘해주지 못해 항상 미안해 하셨다. 내가 가끔 네 어머니의 말 동무가 되어드렸단다. 그래서 나에게 네 어머니의 유언을 전하도록 부탁하셨다. 그리고 네가 모르고 있었던 사실들도 함께 말이다."

 

선생님의 얘기들은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선생님의 얘기는 이러했다.

 

내가 아주 어렸을 적 나를 키워주신 부모님은 퇴근길에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고 한다. 자식이 없던 터라 나를 데리고 가서 키웠다고 한다. 늦게 얻은 자식이라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고 한다. 어린 나를 집에 혼자 둘 수 없어 항상 나를 공사판에 데리고 다니셨다고 한다.

 

그런 어느날 무너지는 철근 밑에 있는 나를 보고 어머니가 뛰어드셨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도 어머니와 나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지셨다고 한다. 그 사고로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한쪽 다리를 잃으셨다고 한다. 그러니까 난 아버지의 목숨과 어머니의 다리로 살아난 운 좋은 놈이라고 한다. 혼자가 되신 어머니. 다리마저 불편하신 어머니께 주위 사람들은 나를 고아원에 보내라고 하셨단다. 하지만 어머닌 나를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셨기에 나를 버리시지 않고 키우셨다고 한다.

 

그 후 어머닌 아버지를 잊기 위해 이곳으로 옮기셔서 나물을 팔며 나를 키워 오신 거란다. 내가 대학 다닐 때 암인걸 아신 어머니는 자신의 몸보다 내 학비를 마련하기위해 병원에도 가지 않으셨다고 한다. 암 전문의로 명성을 날리는 내가 내 어머니를 암으로 돌아가시게 하다니.....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나를 한번 보고자 물어 물어 서울까지 오셨다고 한다. 그런 어머니에게 난 가슴에 못을 박고 말았다. 자신이 낳은 자식도 아닌데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셨던 어머니를 버린 나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를 조용히 내려보시는 어머니의 사진이 잔잔한 미소를 보이고 있다. 이런 자식마저도 어머니는 사랑하시나 보다. 내 어머니 사랑하는 내 어머니....

 

그 후 난 시간이 날 때마다 가끔씩 이곳을 들른다. 혹시나 어머니가 나물을 파시고 계실 것 같은 착각에 말이다...

 

엉엉엉~~~ 훌쩍~ 훌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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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자: 김대열(kdycmfrev) 정선아님의 ’가슴찡한 글’을 읽고

게시일: 1999-12-02 13:42:03

본문크기: 14 K bytes 번호: 1405 조회/추천: 64/13

주제어:

 

정선아님이 올리신 글을 읽고...

 

아침부터 마음이 저려옵니다. 읽었습니다. 한 자 한 자 읽어나갔습니다. 비록 길지 않은 글이었지만, 분노, 연민, 공감, 이해, 사랑과 같은 여러 감정의 변화를 느끼며 읽었습니다. 이럴 수도 있구나. 이것이 가능한 이야기구나. 차라리 꾸며낸 이야기였으면 했습니다. 인간의 상처, 그것이 무엇이기에 이런 아픔을 가능하게 했을까요?

 

시간 좀 주시겠습니까? 잠시 짧은 피정 하나 할까요? 시작하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창(窓)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나옵니다. 그리고 그 창은 마음에 보관되어 있지요.

 

- 마음의 창-, 그 창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물론 그 창은 하느님의 선물일 것입니다. 우리가 어머니의 자궁에 수태되었던 그 순간부터 숨을 다하는 날까지 그 창은 우리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처음 그 창은 아주 투명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기의 눈동자가 그렇게도 해맑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심지어는 갓 태어난 강아지들이나 그 밖의 다른 짐승들의 눈동자를 보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창이 깨끗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과 직접 통교가 가능할 정도로 맑고 깨끗한 창이 가능한 것이지요.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구별할 필요조차 없었던 맑은 영혼을 우리는 아기 때 가지고 있던 거지요.

 

그러다가 언제인지 기억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나를 안고 젖을 먹이는 엄마라는 존재를 의식하면서 관계를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상처를 배우게 됩니다. 엄마의 모든 것이 아기에게 전달됩니다. 웃음, 눈물, 분노, 본능 모든 것이 아이에게 전달됩니다. 그리고 아기는 상처를 배웁니다. 온갖 종류의 관계들이 달려듭니다. 대부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관계는 계속됩니다. 시간이 가고 상처에 면역이 되고 또 다른 상처를 만나고 아이는 커져 만 갑니다. 상처로 얼룩져 가는 창을 가지고 말입니다. 점점 하느님과의 직접 통교가 불가능해지기 시작합니다. 빨간 물이 든 창으로 보는 세상은 빨갛게 보일 수밖에 없고, 노란 색으로 물든 창으로 보는 세상은 노랗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진흙탕으로 얼룩진 창으로는 세상이 진흙탕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요. 우리가 지금 바라보는 세상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창으로 보는 세상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있는 그대로의 세상 보기를 원한다면,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라는 그 세상을 보고자 한다면, 정말로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형님인 태양과 누님인 달을 노래하고 날아가는 새들과 들에 피어있는 꽃들과 대화를 원한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한가지, 즉 창을 원래의 모습으로 닦아내는 것일 겝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창을 닦는 세 가지 작업을 시도하고자 합니다. 우선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과 짧은 시간에 해결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철저한 자기의지 즉 자기 싸움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믿어주십시오.

 

첫 번째 작업에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고 계십니까? 우리는 매 순간 무엇인가를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밥을 먹을까? 라면을 먹을까? 소주를 마실까? 막걸리를 마실까? 택시를 탈까? 전철을 탈까? 바다로 갈까? 산으로 갈까? 이 사람이 좋을까? 저 사람이 좋을까? 할까? 말까? 등등의 온갖 선택의 순간 속에서 무엇인가를 행동으로 옮기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분명히 자신에게 보다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것일 겝니다. 아무도 부인하지 않으시겠죠?

이러한 선택적 삶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믿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착각 속에서 살아갑니다.

여러분, 창을 닦기 위한 첫 번째 작업, 그것은 바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분명히 이기적인 사랑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일까요?

먼저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하십시오. "내가 너를 미워한 적이 너무 많다"고, "니가 내가 아니기를 바란 적이 많다"고, "너를 용서하기가 너무 힘들었다"고 깊이 용서를 청하십시오. "너를 너무 소홀히 했고 무시했던 적이 많았다"고 용서를 청하십시오.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인정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자신을 사랑하는 시작입니다. 과거란 디딤돌일 때 아름다운 것이니까요.

 

두 번째 작업입니다. 우리는 오장육부와 두뇌에서 나오는 오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눈을 뜨자마자 아니 꿈속에서도 안하고는 못 베기는 어떤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예, 그것은 바로 ’비교’입니다. 우리는 늘 비교를 하며 삽니다. 여기에서 참으로 많은 고통이 창조됩니다.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습니다. 단 우리는 그것을 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는 ’Short-다리’로 태어나고 싶어서 Short-다리로 태어 낳겠습니까? 누구는 좋은 조건의 가정에서 태어나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태어 낳겠습니까?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하느님께 감사 드리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우리가 흔히 열등감이라고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반대의 뜻을 가진 우월감이라는 단어도 있지요. 분명히 말합니다. 두 가지 모두 완전한 정신병입니다. 열등감이나 우월감은 같은 종류의 두 가지 얼굴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오늘 날, 우리 사회, 특히 자본주의 사회의 경쟁논리의 무기는 비교분석해서 상대방의 위에 서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놓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이 논리는 늘 배고픈 논리입니다. 늘 행복할 수 없는 논리입니다. 늘 쫓기는 논리입니다. 즉 상대적 빈곤을 만드는 논리이며, 언제나 나보다 난 놈이 나타나는 논리입니다. 벗어나야 합니다. 이런 비교논리에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할 수밖에 없는 비교라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비교란 반성이란 차원에서만 제대로 그 기능을 다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일에 실패를 맛보았을 때, 성공한 친구와 비교하십시오. "아, 이러한 점이 나를 실패하게 했구나." 하는 깨달음을 가능하게 하는 비교라면 그것은 건강한 비교가 될 것입니다. 그 이외의 비교란 타인에게 아픔을 준다기 보다 먼저 내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작업입니다. 이 작업이 가능하다면 앞에서 말한 두 가지 작업도 필요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작업은 소위 신앙을 가졌다는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설 수 있는 유리한 고지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잠시 우리 성서를 묵상해볼까요? 교회 존립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탄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이라는 것을 알고 계실 겁니다. 그 엄청난 사건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분의 말씀과 행동이 진실이었다는 것을 믿게 되었고, 2천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희망의 지평은 늘 열려왔습니다. 이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당신은 진실을 반기신다는 것.

 

하여간 부활이라는 사건은 엄청난 사건이었음을 우리 모두는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대단한 사건을 처음 본 이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우리의 천상의 모후 성모님도 아니었습니다. 교회의 반석이라고 하는 베드로 사도나 그 밖의 제자들도 아니었습니다. 성서를 보면 그 당시 철저한 남성중심의 율법사회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 그것은 바로 마리아 막달래나라는 한 여인에게 당신의 부활사건을 드러내셨다는 것입니다. 막달래나는 무엇하던 여인이었지요? 성서 학자들은 조심스럽게 창녀 출신이었던 여인이 바로 막달래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 아름답고 거창하고 교회의 존재이유가 되는 부활사건을 남자도 아닌 한 여인네에게 그것도 온갖 손가락질을 받던 창녀출신 마리아 막달래나에게 보여주셨을까요? 여기서 우리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펼쳐봅시다. 한 여인이 조심스럽게 은밀히 몸을 팔고 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짐작이 가능한 것은 몸을 판다는 것은 그 당사자가 결코 좋은 환경에서 자라난 여인은 아닐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주 사연이 많았겠지요. 몸은 자랐고 목에 풀칠을 해야겠고, 배운 것은 없고 흘러가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습니다. 늘 하던 대로 외간남자에 몸을 맡기고 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웬 일입니까? 조심한다고 했건만 두 사람의 현장이 소위 잘 산다는 인간들에게 들통나고 말았습니다. 머리채를 잡힌 체 개 끌리듯이 끌려 나옵니다. 이 때 이 여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 정말 나는 죽을 죄인이다. 드디어 벌을 받는구나." 아닐 겁니다. "정말 재수 없구나. 오늘이 바로 황천 가는 길이구나. 이 죽일 놈의 세상! 될 대로 되라." 아마 모르긴 해도 이와 같은 생각이었을 겁니다. 죄의식이 존재할 이유가 없었지요. 세상이 자신을 이 지경까지 끌고 왔는데 말입니다. 계속 장면은 전개됩니다.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이 여인을 빌미 삼아 한 젊고 건방진 하지만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사람에게 덫을 놓으려고 합니다. 젊은 남자가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무엇인가를 하고 있었습니다. 무척 초라한 행색하고는 상관없이 범접할 수 없는 기풍이 흐릅니다. 고상한 늙은이들이 젊은이한테 말을 던집니다. "이 보게, 젊은이. 자네의 의견을 듣고 싶네. 우리의 율법에 의하면, 다시 말해 하느님의 뜻에 의하면 간음하다 걸린 여자는 돌로 쳐죽이라고 하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무거운 침묵이 흐릅니다. 젊은이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말았는지, 그냥 무엇인가를 땅바닥에 나뭇가지로 적고 있었습니다. 초조하게 사람들은 그를 지켜봅니다.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던지시오."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웬 일입니까? 나이든 사람부터 한 사람씩 한 사람씩 그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젊은이는 여인에게 말합니다. "여인아, 너에게 죄를 묻던 사람들은 다 어디 있느냐?" "예, 선생님, 모두들 떠났습니다." 떨리는 목소리였습니다. 사람들에게 끌려올 때도 이렇게 떨리지는 않았는데,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이기에 그녀를 떨게 하는 것입니까? 다시 젊은이는 입을 엽니다. "여인아, 나도 죄를 묻지 않겠다.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하여라."

여러분, 바로 이 만남이었습니다. 이 여인의 전존재를 뒤흔들고 만 이 짧은 만남, 한 번도 한 인간으로서, 한 여인으로서 대접을 받지 못했던 이 가련한 여인의 마음에 처음으로 자신을 한 인간 한 여인으로 대접해준 이 젊은이. "이 분은 도대체 누구실까?" 마리아 막달래나는 그 젊은이가 그리스도라는 것도 몰랐습니다. 아니 알았다고 해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을 겝니다. 이 만남은 그녀의 모든 삶을 바꿔놓고 맙니다. 모든 것을 청산하고 그를 모든 것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어디라도 당신을 따라가겠습니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아니 때가 왔습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잔을 마시기 위해 예루살렘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가십니다. 그리고 골고타를 향해 무거운 십자가를 들고 인류의 모든 업을 지고 힘겹게 힘겹게 올라가십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앞에서 온 몸이 벗겨진 채 무능하게 죽어 가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맙니다. 어디까지 따르겠다고 큰 소리 치던 사내대장부들은 전혀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렇게 그렇게 그리스도는 조용히 세상을 마감하고 맙니다.

사흘이 지나갈 무렵입니다. 이 비보가 어떤 연유인지 막달래나에게 이제서야 전달됩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솟구칩니다. 아무 생각도 없습니다. 순간 온통 눈물 범벅이 됩니다. 말 그대로 미친년처럼 머리를 풀어헤치고 그분이 묻히셨다는 산으로 달려갑니다. 남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습니다. "누구 내 주인님 보신 분 없나요?" 절규에 가까운 소리를 되뇌며 산 속을 헤맵니다. 아마도 이 순간에도 11명의 사내대장부들은 두려움에 어디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을 것입니다.

 

밀알 여러분, 어떻게 이런 여인에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요. 그분은 당신의 부활사건을 이 진정한 사랑에 드러내시지 않고 못 견디셨을 겁니다.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었던 말씀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상처로 얼룩진 마음의 창을 닦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 체험이 아닐까요?

 

신앙이란 바로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다.’ ’하느님은 무엇이다.’ 이런 말들 사실 의미가 없습니다. 나와 연결되지 않은, 내가 체험하지 않는 그런 말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용서 받은 사람만이 용서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사랑 받은 사람만이 사랑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우리의 이 작업은 아마도 죽는 순간까지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운 냅시다. 누구 말대로 가장 큰 하늘이 우리의 등뒤에 있잖아요!

 

말로 하던 것을 글로 옮기려니 매끄럽지가 못하군요. 좋은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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