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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성지순례[1]여정을 떠나며...아기예수피난성당,모세기념회당,성요셉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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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7-11-04 ㅣ No.2021

 
T 평화를 빕니다.
 
'이집트-이스라엘-요르단 성지순례'를 읽으시는 분들께...
 
2007년 10월12일(금)부터 23일(화)까지 10박 11일 동안,
이집트-이스라엘-요르단 성지순례의 여정을
성지에서 찍은 사진과 함께 기행문을 적어 보았습니다.
 
2년전 루르드-아시시-로마로 이어지는 순례여정을 기록하면서도 느꼈었지만
문자,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미흡한 부분들이 많고
또한 기억에는 한계가 있기에
혹시 잘못 기록한 부분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 루르드-아시시-로마 순례여정 기록은 게시판1902번-1906번에 있음) 
 
言者不知(언자부지),  知者不言(지자불언)
말하는 사람은 모른다, 아는 사람은 말이 없다...라는 말씀도 있습니다만
성지순례여정을 통해 보고 들은 것, 그리고 느낀 것을 나누고 싶어 기행문을 올려 봅니다.
성지순례에서 돌아온 후  미사 중에 독서와 복음이 선포될 때, 성서모임을 할 때,
성무일도를 바칠 때, 묵주기도를 드릴 때 ....더욱 살아있는 말씀으로 다가오며
성지의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오르고곤 합니다.
이 기행문이 아직 성지 순례를 하지 않으신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성지순례의 여정을 12칸으로 나누어 올렸습니다.
첫 날 10월12일 기록은 게시판 2021번입니다.
이스라엘 성지순례[1]번 부터 번호 순서대로 읽으시면
사진으로나마 저희 성지순례단과 함께 순례 여정을 떠나시게 되겠습니다.
그럼 성서의 땅에서 주님을 체험하는 기쁜 순례 여정이 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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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이스라엘-요르단 성지순례 기행문
2007년10월12일(금) - 23일(화)
 
성지순례단은  6월25일(월)에 1차 준비모임을 하고,
성지순례를 떠나기에 앞서 2007년 9월28일(금) 오후 3시,
정동 작은형제회 수도원 2층 성당에서 이요한신부님의 집전으로
성지순례 파견미사를 봉헌하였다.
독서는 창세기 12장1절에서 5절, 복음은 요한15장을 봉독하였다.
 
이요한신부님께서는 강론을 통하여
우리들의 성지 순례가 성경을 온몸으로 읽는 순례가 되길 희망하며
주님께 대한 최고의 봉헌이 되길 희망하신다고 하셨다.
아침,저녁기도및 기도생활을 성실히 할것과
성지순례를 통해 자신의 생활이 변화되길 희망하며
매일 해당되는 지역의 역사와 관련된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며
성지의 모습을 마음의 사진기로 담아오길 바란다고 하셨다. 
 
순례를 떠나기 전에 준비하는 마음으로 성지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고
또한 성지에 관련된 성경구절을 찾아보는 시간을 가질수 있었다.

"하느님의 개입이 분명히 드러난 지역에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둘러본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새롭게 이해하게 된다.
순례는 높은 데에서 우리를 굽어보시는 분이 아니라
동반자가 되어주신 하느님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99년 '구원 역사와 관련된 장소의 순례에 관하여'라는 교서중에서)
 
  
순례   한자  巡禮  영어  pilgrimage 
   하느님과 관련된 성스런 땅 - 예컨대 하느님이 임재하였거나 다시 나타날 것으로 기대되는 곳, 혹은 특별히 신성하다고 생각되는 곳 - 즉 성지를 방문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경신(敬紳)행위의 하나다. 순례의 기원은 뚜렷하지 않지만 유태교에서 이스라엘 남자들이 유월절(Pesah)과 오순절(Shavout) 및 초막절(Sukkot) 등 매년 3번씩 예루살렘의 성전의 가서 그들이 수확한 곡식을 바치던 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그리스도교 시대에 들어오면 순례는 신에 대한 흠숭의 의미뿐 아니라 회개하는 행위로, 혹은 성인에 대한 존경의 행위로, 혹은 영적인 은혜를 받기위한 행위로, 혹은 은혜에 감사하기 위한 행위로 인식되었다. 초대 교회에서는 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활하시던 팔레스티나로 순례하였고, 그 후에는 많은 순교자들의 피로 물들여진 로마에서의 순례도 성행하였다. 8세기 이후부터 순례는 신자들의 의무에 속한다는 관습이 생겨나 대 순례단이 조직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순례는 근대에 들어오면서 그 의의가 감소되어 차츰 활기를 잃었다. 현대에는 팔레스티나와 로마 이외에도 루르드, 파티마, 과달루페 등 성모 마리아가 발현한 곳에도 순례한다. 이러한 곳에는 매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세계 각국에서 순례를 위해 몰려든다. 
(가톨릭대사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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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차 이스라엘 성지순례단
지도신부: 이집트와 요르단: 이요한ofm / 이스라엘: 안베다ofm
가이드 : 이집트: 양선욱 / 이스라엘: 장레오ofm
T/C: 최성익요한 성 미카엘 여행사
성지순례단 40명: 이상호세라피노ofm 과 홍성진필립보 Br.과
재속프란치스코회 서울지구 엘리사벳형제회원들과 교우들.
 
제 1일
2007년 10월12일(금)
오후 9시. 인천공항에서 모임.
10월12일. 성 세라피노 축일, 간단한 축일축하.
오후 11시55분 두바이를 향해 그리고 성서의 땅, 성지를 향하여 기도하는 마음으로 출발하였다.
 
성지순례 여정에 불러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어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고 자라시고 제자들을 부르시고
수난하시고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부활하신 성지에서
예수님을 깊이 체험하는 시간이 되길 희망하오며
겸손하신 성모님, 사랑하오신 모친 성모님과
성인들의 향기를 체험할 수 있게 되길 희망합니다. 
성지에서 예수님께서 마시던 공기와 물, 햇빛을 함께 하며
예수님의 현존을 온몸으로 체험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
또 다른 성지, 또 다른 예루살렘이 되게 하시며,
이곳에서 당신의 현존을 힘있게 증언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순례자의 기도
 
태초에 빛을 있게 하시고 말씀을 보내시어
저희를 구원하신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순례의 길을 떠나면서 의탁하오니
당신 아들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저희를 인도하소서.
성서 안에서, 전례 안에서,
가르침 안에서 만났던 예수님을
이제 성지에서 새롭게 뵙고자 하오니
저희로 하여금 신앙과 사랑을 다하여
당신의 구원의지와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느끼게 해 주소서.
 
좋으신 아버지,
저희를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어
이 순례 동안에 항상 주님의 현존 안에 머물게 하시고
서로 사랑하게 하시며
앞으로의 모든 날이
이 순례의 은혜로 인도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말씀의 진리 안에 산느 삶이 되게 하소서.
또한 우리가 순례의 길을 가는 동안
우리 가족들에게 영육을 건강하도록 은혜를 주시고
우리의 길을 안내할 모든 이들도 축복하여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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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일
2007년 10월13일(토)
이집트 카이로: 성가정 피난성당, 모세 기념 회당, 박물관, 성요셉 성당(미사)
 
오전 9시40분, 두바이 도착(두바이 시간: 오전 4시40분)
 
두바이 (Dubayy)
아랍에미리트[United Arab Emirates]에서 가장 인구가 많으며 영토는 2번째로 크다.
언어 : 아랍어, 종교 : 이슬람교,시차 - 5시간 느림
공식 명칭 : 아랍에미리트연방(United Arab Emirates)
인구 : 4,298,000 , 면적 : 83,600 ㎢ , 수도 : 아부다비 
공식 언어 : 아랍어, 독립년월일 : 1971. 12. 2
화폐단위 : 아랍에미리트디르함(U. A. E. dirham/Dh)
 
 
두바이 시간 9시10분, 이집트 카이로로 출발하였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두바이

두바이 페르시야만에  새로 지은 건물을 내려다 보며 걸프해를 지나
온통 황토색뿐인 네푸트 사막위를 나르며
나중에 버스를 타고 지나가게 될 시나이 반도위를 날라서
카이로에 12시 45분 도착하였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카이로는 황토색 도시였다.
(아랍에미레이트Arab Emirates 항공사 승무원의 유니폼이 황토색인 이유를 알 것 같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카이로
 
이집트 아랍 공화국 Arab Republic of Egypt
위치 :  아프리카대륙 북동부, 수도 :  카이로 (Cairo),
언어 :  아랍어, 기후 :  건조기후, 지중해성기후
면적 :  99만 7690㎢, 시차  : 5시간 느림, 화폐단위 :  이집트 파운드 (£E)
 
현지가이드(양선욱)로 부터 "인샬라" 신의 뜻대로... "함들일라" 하느님 감사합니다.를 배우고
어제 저녁12시로 이스람교의 라마단(1달 동안 금식)이 끝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라마단 Ramadān: 아랍어(語)로 '더운 달'을 뜻하며,천사 가브리엘(Gabriel)이 무함마드에게
코란을 가르친 신성한 달로 여겨, 이슬람교도는 이 기간 일출에서 일몰까지 의무적으로 금식하고,
날마다 5번의 기도를 드린다.)
오늘은 이곳에서는 두번째 명절이 되는데 이슬람 신자들은 자신의 재산의 40분의 1이나 2%를
3일 안에 이슬람 사원에 헌납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에 준다고 한다.
카이로시의 시민은 1,800만에서 2,100만명으로 추정된다고 하는데
사막이나 오지에서 거주하는 사람이 많아 정확한 통계는 안나온다고 한다. 
 

 
성가정 피난성당과 모세 기념회당(벤에드라 시나고그)으로 추정되는 곳을 방문하였다. 
 
 
성가정 피난 성당 The Church of Sts. Sergius(Abu Sarga)and Bacchus-general view of th interior 
(The Illustrated Guide to the Coptic Museum and Churches of Old Cairo, p.255에서)
 
(1) 아기예수 피난 성당(The Church of Abu Serga, Old Cairo)
성가정 피난성당은 헤로데의 아기 학살을 피하여 아기 예수를 모시고 피난 오신 곳이다.
에집트로 오신날을 6월1일로 기념한다고 한다.
아기 예수께서 만약 이집트로 가셨다면 틀림없이 시나이 반도를 가로 질러 고센 땅을 통해  이집트로 가셨을 것이다. 고센지방은 나일강이 지중해로 흘러들어가는 곳에 있는 평야 지역,기름진 곳이며 삼각주지대이고,
이스라엘민족이 400년동안 살았던(유배)곳이다. 일년에 2,3모작의 벼농사를 하는 고센지방이다
오늘날 카이로 구시가지에 있는 아부사르가 교회(아기예수피난성당)는 비잔틴 시대 건립,
예수께서 머무신 동굴을 제단으로 삼았다(제단 지하에 아기예수피난 지하동굴이 있다).
 
 
아기예수 피난 지하동굴 입구
 
이슬람이 들어오기전 에집트는 400년동안 기독교 국가였다(콥트,에집트교회).
건축 당시 이 교회는 AD 303년 시리아에서 로마 황제 막시밀란(Maximilan)의 손에 순교당한 성자이자 군인인 Sergius와 Bacchus에게 바쳐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베들레헴성당 지하에는 영아의 무덤,그리고 성당,제단이 있다고 한다).
아기예수께서는 후에 나자렛으로 가서 어린시절을 보내게 된다.
 
 
성가정  피난 지하동굴(La grotte de la Sainte Famille) ...엽서를 스캔하였음.
 
(마태2,23-15)이집트로 피신하시다
13박사들이 물러 간 뒤에 주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서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어서 일어나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에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알려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하고 일러 주었다.   14요셉은 일어나 그 밤으로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에집트로 가서   15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서 살았다. 이리하여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 "내가 내 아들을 에집트에서 불러 내었다" 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마태2,19-23)
19헤로데가 죽은 뒤에 주의 천사가 에집트에 있는 요셉의 꿈에 나타나서   20"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이미 죽었으니 일어나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 가라" 하고 일러 주었다.   21요셉은 일어나서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 왔다.   22그러나 아르켈라오가 자기 아버지 헤로데를 이어 유다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리로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다시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래아 지방으로 가서   23나자렛이라는 동네에서 살았다. 이리하여 예언자를 시켜 "그를 나자렛 사람이라 부르리라" 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성가정 성당 안의 모습 - 12사도를 상징하는 12기둥 ...엽서를 스캔하였음.
 
이 성당은 콥트인이 현재도 사용하고 있으며, 일요일은 공개하지 않는다고 한다.
성당 지붕은 노아의 방주를 본따서 만들었고, 12기둥은 12사도를 상징하며
벽에는 1,400년전의 성화,이콘들이 걸려 있었으며
이콘에 사람들이 자신들의 기원을 적은 종이를 꽂아 놓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성당은 아직도 초기 콥틱 교회(이집트 원주민의 기독교 교회)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콥트인들은 자식을 낳으면 손등에 십자 표시를 문신으로 새기면서 까지 개종을 막으며,
신앙을 1,400년간이나 지켜온 것이다.

콥트 기독교인이 13%, 동방 기독교인이 6% 정도 된다고 한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콥트인들을 "내형제, 내 자식"이라고 부르셨다고 한다.
아기예수님께서 피난오신 동굴은 들어가지는 못하고 입구만 보았다.
여기 있는 사진은 엽서를 스캔한 것이다.
지성소에는 사제만 들어갈 수 있다.
성상대(이코노스타시스)에는 콥트십자가가 문양으로 새겨져 있었다.
 
2차바티칸 공의회 문헌
동방 가톨릭 교회들에 관한 교령 「동방 교회들」(Orientalium Ecclesiarum)
동방 교회들의 영적 유산 보존
 
동방 교회들의 공헌
5. 동방 교회들이 보편 교회에 얼마나 많은 공헌을 하였는지는5) 역사와 전통과 수많은 교회 제도가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다. 거룩한 공의회는 이 교회의 영적 유산을 마땅히 존중하고 찬양할 뿐만 아니라 이를 온 그리스도 교회의 유산이라고 확언한다. 그러므로 동방 교회들도 서방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고유한 특수 규율에 따라 교회를 다스릴 권리와 의무가 있음을 공의회는 장엄하게 선언한다. 존경스러운 그 오랜 규율들은 동방 교회 신자들의 생활 관습에 더 잘 맞고, 그들의 선익을 돌보는 데 더욱 적합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변화는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6. 모든 동방 교회는, 자기들의 정당한 전례 예법과 규범을 언제나 보존할 수 있고 보존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또 확신하여야 한다. 오로지 적절한 유기적 발전을 위해서만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므로 동방 교회 스스로 이 모든 것을 충실히 지키며 날로 더욱 깊이 인식하고 더욱 완전히 실천하여야 한다. 만일 시대나 인간의 상황 때문에 부당하게 그 실천에서 멀어졌다면, 다시 선조들의 전통으로 되돌아가도록 힘써야 한다. 사도적 봉사나 임무 때문에 동방 교회들이나 그 신자들과 자주 교류하는 사람들은, 그 직무의 중요성에 따라, 동방 교회의 예법, 규범, 교리, 역사, 특성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교양을 갖추도록 교육을 받아야 한다.6) 동방 교회 지역이나 그 신자들 사이에서 일하는 라틴 예법의 수도회와 단체들이 사도직의 더 큰 효과를 위하여 되도록 동방 예법의 수도원이나 관구를 설정하여 주기를 간곡히 권고한다.7)
(주교회의 홈에서)
 
 
콥트 십자가가 문양이 새겨진 성상대(이코노스타시스) ... 엽서를 스캔하였음.
 
성상대 (聖像臺, 이코노스타시스) Iconostasis
동방교회 성당의 구조적인특징 중 하나는 신자들이 모여 있는 회중석과 성직자들이 전례를 집전하는 지성소를 이콘으로 장식된 칸막이로 분리하는 것이다. 이 칸막이를 성상대 (聖像臺,이코노스타시스)라고 하는데 구약에서 지성소와 성소를 분리한 성전휘장을 상징한다. 이 이콘 칸막이는 848년 성화상 파괴 논쟁에서 성화상 옹호론자가 승리를 거둔뒤 성화상의 역할에 새로운 역점이 두어져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다'(완전히 가시적이며 따라서 그의 인간적 본성으로 묘사될 수 있는 인간)는 것을 의미하며 그리스도를 그림으로 묘사함으로써, 나타나신 하느님의 가시적인 현시와 보다 완전하면서도 신비스럽고 불가시적인 글의 성만찬 임재가 암암리에 대조되었다.
그런면에서 성상대는 제단 앞의 휘장을 열고 닫을때, 거행되는 전례상의 의식과 더불어 성만찬의 신비적, 종말론적 성격, 즉 역사의 완성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콘.신비의 미,편저 장긍선신부,기쁜소식,117쪽에서)
 
콥트교회 Coptic church
이집트인의 콥트 국민교회.
639∼640년 아라비아인 지배아래 성립,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밑에 속한다.교회법은 위사도서간(僞使徒書簡), 고대 공의회문서, 비잔츠, 시리아 법률자료, 여러 주교의 지령에 따라 성립.교의상 가톨릭 교회와 구별되는 점은 그리스도론, 종말론, 교황의 통치권교도권상의 수위(首位)에 관한 점이다.전례는 콥트어를 사용. 신도수 약 85만명, 콥트인 프로테스탄트 5만명, 가톨릭 귀일교회 신도 3만명이다.(가톨릭대사전에서)
 
콥트전례(典禮)  Coptic rite 
로마 교황청과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콥트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성 치릴로(St. Cyrillus), 나치안츠의 성 그레고리오(St. Gregorius Nazianzenus), 그리고 성 바실리오(St. Basilius)의 세 가지 미사전례를 말한다. 성 치릴로의 아나포라(Anaphora) 혹은 미사전문(典文, canon)은 성 마르코의 그리스어 사본과 공통되는 부분들과 함께, 성 마르코의 것이라고도 여겨진다. 콥트어로 번역될 때 몇 가지 그리스어 형태가 남아 있었지만 콥트어의 특징을 지니게 되었다. 성 바실리오의 전례는 일요일과 평일(平日) 연미사에 쓰여지고 성 그레고리오의 전례는 특별한 축일에, 성 치릴로의 전례는 사순절과 성탄 전야에 쓰여진다.(가톨릭대사전에서)
 
 
[이콘] 그리스도와 성 메나스,  6세기, 루브르박물관, 파리. 
 
'이요한 신부의 성화이야기'에서
제 목 : 그리스도와 메나(Mena)원장
작 가 : 이집트 바오잍(Baouit) 수도원( 7세기 )
크 기 : 75X 57cm
소 재 지 : 프랑스 빠리 루브르 미술관

근래 종교 미술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우리에게는 생소하면서도 자주 대하게 되는 것이 동방교회의 이콘(Icon)이다. 박해에 시달리던 로마의 교회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대제(274- 337)가 325년 로마제국의 수도를 오늘 터키의 이스탄불로 옮겨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olis)로 부르면서 이곳은 로마 문화와 전혀 다른 비잔틴(Byzantine) 문화가 형성되었다. 교회 미술에 있어서도 로마로 대표되는 서유럽과 전혀 다른 독창적인 화풍이 형성되었고 이것이 그리스, 러시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으로 퍼지게 된다.
그중에 대종을 이루는 것이 그리스와 러시아 이콘인데, 그리스 이콘은 소박하면서도 정제된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이슬람 세력의 이웃이었던 오스만 터키에 시달리며 신앙을 지키고자 했던 민중들의 정서를 반영하는 반면, 러시아 이콘은 비잔틴 영향을 강하게 받아 부드러운 색상으로 귀족적이며 우아함을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은 이런 것과는 전혀 다른 이집트의 이콘인데, 지정학적 여건 때문에 특수한 어려움속에 살아야 했던 콥트 교회의 역사 안에서 성장한 것이다. 콥트(Copt)란 이집트가 이슬람 국가로 변하기 이전 사용되던 토속 언어로서 이집트라는 말인데, 이집트가 630년경 이슬람으로 변하면서 아랍어를 사용하자 사회 모든 분야에서 이 언어는 사라지게 되고 교회 안에만 남아 이집트의 크리스챤을 호칭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즉 콥트 교회란 이집트의 교회를 말한다.
 
이 작품은 현존하는 목판에 그린 아이콘 중에 가장 오래 된 것이며 수도원에서 제작된 것이기에 투박하며 그 내용뿐 아니라 과정에 있어서도 인간적인 솜씨가 아닌 신앙으로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의 등장인물은 오늘날에도 콥트 교도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는 이집트 중부 지역 메나의 수도원장인데, 그리스도와 나란히 서 있는 소박하면서도 다정한 모습이다.
 
러시아나 그리스에서 볼 수 있는 성화와 달리 이 작품은 색채 처리나 모든 면에 있어 서방에 비겨 초라하리 만큼 검소한 형태인데, 이것은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야 했던 이들의 삶의 흔적이라 숙연한 마음을 들게 한다.
무슬림 교도들의 틈바구니에서 박해를 받으며 살아야 했던 이들 삶의 힘겨운 흔적이다. 원장의 얼굴은 지친 가운데서도 평온한 모습이다. 원장의 오른 손에는 조그만 두루마리가 들려져 있는데, 이것은 복음의 내용을 적은 규칙서이다.
 
이집트는 역사적으로 가장 먼저 수도생활이 시작된 곳이며, 수도생활의 시조(始祖)인 성 안토니오(251- 356)는 마태오 복음 19장 21절에 나타나고 있는 말씀 “당신이 완전해지려고 하면 가서 당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따라 모든 재산을 다 처분하고 수도생활을 시작함으로서 서방교회에 수도생활을 태동시켰다.
 
이 원장의 손에 들린 것은 복음을 기초로 만든 수도 규칙이며 주님을 따르기에 너무 부족한 자신의 처지를 대변하고 있다. 이것은 성 프란치스꼬의 유언에 나타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과 너무 어울리는 것이다.
“주님이 나에게 몇몇 형제들을 주신 후 아무도 내가 해야 할 것을 나에게 보여 주지 않았지만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친히 거룩한 복음의 양식에 따라 살아야 할 것을 나에게 계시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순간 자신의 나약하고 부족한 면을 보면서 전적으로 하느님께 의탁하는 삶을 시작한 프란치스꼬처럼 이 원장 역시 오른 손에 복음적 삶을 내용으로 한 규칙서를 들고 왼손으로는 주님을 가르치고 있다,
왼손에 쥐어진 초라한 규칙서가 자신의 부족함에서 오는 두려움의 표현이라면 주님을 가르치는 왼손은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삶의 전부”라는 자신의 신앙고백과 함께 그분이 자기를 인도해 주실 것이기에 마음 든든하다는 깊은 신뢰의 표시이다.
 
이 작품이 제작될 당시는 무슬림 교도들이 활약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박해가 시작될 때이기에, 오랜 형제들의 박해에 시달린 이들에게는 참으로 걷잡을 수 없는 실망의 시기였다. 이런 처지에 희망이 필요했고, 이 원장의 모습은 이런 상황에 꼭 필요했던 희망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원장의 오른 손에 들려 있는 초라한 규칙서와 달리 주님의 오른 손에는 장중하면서도 기품 있는 성경이 들려져 있다. 주님 손에 들린 성서의 표지는 진주와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어 원장의 손에 들린 것과 전혀 다른 값진 것이며, 이 성서를 들고 계시는 주님 역시 원장과 달리 믿음직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비록 주님을 향한 그리움에 빠져 복음적 삶을 살기로 결심한 원장이지만 자신의 허약함과 새로 시작되어 호전적 성격을 띄고 위협적인 존재로 다가오고 있는 무슬림들을 생각하면 두려움에 빠지게 되는데, 주님 손에 들린 보석으로 장식된 성경은 이 어려운 환경에서 겪어야 하는 두려움 극복에 큰 힘이 되고 있다.
 
마르코 복음 5장에 나타나고 있는 “여러분은 왜 겁을 냅니까? 아직 믿음을 갖지 못합니까?” 라는 말씀으로 거센 파도에 흔들리는 바다를 평정시키는 주님을 상기시키면서, 주님 말씀의 인도를 받을 때 어떤 경우에도 보호받는 삶을 살 수 있음을 확인시킨다. 
요한복음 8장 12절의 말씀은 주님 손에 들린 성서의 전제적 의미로 다가온다.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오히려 생명의 빛을 얻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약간 불안한 표정으로 규칙서를 쥐고 있는 원장의 어깨를 왼손으로 감싸고 계신다. 믿음이란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심을 믿는 것이기에 주님은 복음적 삶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약함과 열악한 환경 때문에 두려움에 빠져 있는 원장의 어깨에 손을 얹어 이것을 확인시키신다.
 
마태오 복음 마지막 부분에 있는 “나는 세상 종말까지 어느 날이나 항상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마태오 28: 18)의 말씀처럼 당신 제자로서의 삶을 시작하고자 하는 원장을 격려하고 계신다. 
그러나 주님과 원장은 전혀 다른 색으로 나타나고 있다. 원장의 후광은 어둠이 없는 빛이며 의복 역시 밝은 색이지만, 아름다운 성서를 쥐신 주님이 입으신 옷과 전체 색깔은 어두운 검은 빛깔이다.
 
원장의 밝은 모습과 대조적으로 주님은 어두운 머리 색깔과 함께 전체가 어둠에 싸여 있으며 마지막 구분은 주님의 후광에는 검은 십자가가 그려져 있는 것이다. 이것은 주님 제자로서 걸어야 할 결정적 미래의 모습이며 그리스도를 닮고 따르는 제자의 삶이란 십자가의 길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 누가 내 뒤를 따라 오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 사실 제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입니다.“(마태오 16: 24)의 말씀을 상기시키고 있다.
 
주님은 자기를 따르고자 하는 원장을 다정히 받아들이면서 그리스도 제자직의 핵심은 바로 십자가에 있음을 상기시키신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주님 손에 들린 말씀을 따라 생명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선 매일 주님처럼 십자가의 고통과 어려움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부활의 승리나 영광의 모습에 대한 언급은 없고 십자가의 길에 충실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요한신부의 성화이야기,작은형제회홈에서 www.ofm.or.kr)
 
*성메나스 순교자(San Menna d Egitto)축일:11월11일,게시판1464번
*이집트의 성 안토니오 아빠스 (Sant’ Antonio Abate)축일:1월17일,게시판1572번.

요한 15,11-17
11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12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13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14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15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다 알려 주었다.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그러니 너희는 세상에 나가 언제까지나 썩지 않을 열매를 맺어라.그러면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다 들어 주실 것이다.17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나의 계명이다."
 

성가정 성당의 기둥(12사도를 상징)에 그려진 성화
Church of Sts. Sergius and Bacchus, painted columns with saints
(The Illustrated Guide to the Coptic Museum and Churches of Old Cairo, p.256에서)
 
콥트 가톨릭 교회 Coptic Catholic Church
알렉산드리아 전례를 따르는 이집트의 동방 가톨릭 교회.
그리스도의 단일 본성만을 인정한 단성론자였던 콥트의 주교 아타나시우스가 1741년 로마 가톨릭교도가 되자 콥트 교회도 로마 가톨릭에 속하게 되었다.아타나시우스의 뒤를 이은 2명의 주교는 유럽까지 갈 수 없었고, 성직임명식을 거행할 자격이 있는 이집트 주교가 없었기 때문에 주교 임명을 받지 못했다. 1893년 이집트의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콥트 가톨릭 교회에 10개의 교회를 내주었다. 1895년 교황 레오 13세는 5,000명의 콥트 가톨릭교도들을 3개의 교구로 나누었으며, 1명의 행정관이 다스리게 했다. 4년 후 이 행정관은 알렉산드리아와 성마르코의 모든 설교지의 총대주교로 임명되어 카이로에 주재했다.(한국브리태니커 온라인에서)
 
콥트 교회 Coptic Church
이슬람권 이집트에 압도적으로 많은 주요 그리스도교 교회.
7세기 아랍인이 점령하기 이전의 이집트 민족은 그들 자신과 그들의 언어를 그리스어로 ’아이지프티오스’(아랍어로는 qibt, 콥트는 서구화된 발음임)라 불렀다.그뒤 이집트의 이슬람교도들이 ’아이지프티오이’라는 칭호를 쓰지 않자 이 용어는 소수 종교집단인 그리스도교도들만을 가리키게 되었다.5세기 이래 이 그리스도교도들은 단성론(그리스도의 단성만을 인정하는 견해) 교회에 속했으며, 스스로를 이집트 교회라 불렀다. 19, 20세기에는 콥트 정교회로 자칭하여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콥트인들 및 주로 그리스인들로 구성된 동방정교회와 스스로를 구별하기 시작했다.
4, 5세기에 이집트에서 콥트인들과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로마인들인 멜키트파(’황제의 사람들’) 사이에 단성론을 배격한 칼케돈 공의회(451)를 둘러싸고 신학 논쟁이 있었다. 7세기 아랍인들이 이집트를 정복한 뒤 콥트인들은 그리스어 사용을 중단했다. (한국브리태니커 온라인에서)
 
콥트 성가 (聖歌) Coptic chant
7세기에 이슬람이 이집트를 정복하기 전 그리스도교에 귀화한 고대 이집트 후손들의 예배음악.
아랍어 ’qibt’에서 유래한 ’콥트’라는 말은 그리스어 Aigyptios(’이집트인’ 또는 ’이집트어’)의 전와어(轉訛語)이다. 나중에 이슬람교로 개종한 후로 이집트인들은 이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고, 그리스도교를 계속 믿던 소수인들에게만 이 명칭이 적용되었다. 함셈어족인 콥트어는 997년에 아랍권에서 완전히 금지되었고 콥트의 예배용 언어로만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온다. 콥트의 종교의식은 예루살렘의 초기 그리스도교 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고, 시리아와 아랍의 영향도 강하게 나타나 있다. 어떤 학자들은 콥트의 의식이 이슬람의 종교의식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분명한 증거는 없지만 콥트인들은 풍부한 음악적 전통을 전승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음악은 근래에 와서 필사 악보와 예배서 등에 의해 정리되기 전까지는 구전으로만 전해져왔다.(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에서)
 
콥트 미술(美術)Coptic art
3~12세기경에 이집트에서 그리스어와 이집트어를 사용하며 그리스도교를 믿었던 콥트인들의 미술.
부조 석상과 목판화 및 이집트 수도원들의 벽화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종교적인 목적과 관련이 없는 콥트 직물과 같은 분야도 여기에 포함시키는 것이 상례이다.그리스도교적인 콥트 미술의 양식은 이집트의 후기 고대 미술에서 발전했다. 좀더 자유롭고 대중적인 미술 양식이 출현한 데는 경제적인 조건이 주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비기념비적인 미술을 강조하고 값비싼 재료를 쓰지 않으며 풍부한 수련을 받은 숙련된 장인이 부족한 점 등 콥트 미술의 여러 양상을 보면 광범위한 후원제도가 없었던 것이 틀림없다. 콥트 미술의 평면적인 양식은 그것이 인간의 모습과 특징 및 동물과 식물의 장식성을 자연 그대로 묘사하는 것과는 다소 동떨어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형태의 윤곽선 및 세부묘사는 단순화되었고 모티프도 제한되어 있다.(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에서)
 
콥트미술 [Coptic art] 
이집트의 그리스도교도인 콥트인의 미술. 
5∼6세기를 절정으로 12세기경까지 각지에 산재한 수도원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헬레니즘 ·비잔틴 ·시리아 ·이란 등의 제요소가 혼합되어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의 동방의 한 분파로 보인다. 건축은 수도원과 그것에 부속되는 바실리카 유적이 주된 것으로, 현존하는 것은 많이 황폐되었으나, 사카라 ·바위트 ·소하그 ·안티노에 등에 남아 있다. 대부분은 개구부(開口部)가 작고, 벽이 두꺼운 석조건축이며, 내부는 부조(浮彫)와 투조(透彫)에 의한 장식조각과 벽화로 장식되어 있다. 공예는 콥트인이 특색을 가장 발휘한 분야로, 금속기 ·도기 ·상아 조각 등이 뛰어나다. 특히 염직은 거의 대부분 분묘에서 출토된 것으로 철직(綴織) ·자수 외에도 각종 염색기법이 활용되었다. 디자인은 인물 ·조수(鳥獸) ·과일 ·꽃 ·당초(唐草)무늬 등 다양하나 그리스도교적인 주제와 그 외의 것으로 대별된다. 이 특이한 미술을 전문적으로 수집하는 미술관으로는 카이로의 콥트미술관(Coptic Museum)이 있으며, 콥트직물을 주체로 조각 ·회화 ·공예품을 전시하고 있다.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에서) 
 

 
(2)모세 기념 회당(The Ben Ezra Synagogue)
모세 기념 회당(벤 에즈라 시나고그)자리는 고대 에집트에서 나일강물을 관리하던 곳이며,
모세가 건져진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자리에 세워졌던 최초의 회당 건설은 BC 350년경이며
당시의 이름은 예언자 예레미야 시나고그였다(성 예레미아 예언자 축일:5월1일).
예레미아 예언자가 끌려 내려온곳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예레미아 가묘를 만들어 놓았다.
이스라엘인들이 변질되어 가는 것을 걱정한 예레미아가 건설한 것으로 추정되며
회당 주춧돌에서 경전이 발견되었으며 12기둥은 12사도가 아닌 12지파를 상징한다고 한다.
인물화는 없었으며 식물문양이었다. 육각형 다윗별이 있었다.
알하킴(AD996-1021)때 파괴된 것을
AD1115년 예루살렘에서 랍비 아브라함 벤 에즈라가 방문한 이후 재건하였기 때문에 이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성 모세 예언자(San Mosè Profeta )Mosè = salvato dalle acque, dall'ebraico (축일:9월4일,게시판1647번)
모세 라틴어  Moses  영어  Moses  히브리어  Moseh 
   모세에 대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뿐이다. 나아가 성서는 모세의 전기를 기록하려는 의도에서 씌어진 것이 아니라 모세를 통해 하느님이 자신의 뜻을 펴려는 사실을 기록하려는 의도에서 씌어진 것이기 때문에 모세의 역사적 인물상을 그리기는 상당히 어렵다. 그러나 모세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이집트 땅에서 고통을 당하는 히브리인을 해방시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했고,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계약을 기초로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종교를 확립하였다.
   구약에서 모세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곳은 출애굽기에서 신명기까지 4권의 성서다. 성서를 통해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모세가 어떤 인물인가라는 사실보다 모세가 무슨 역할 수행했느냐에 있다. ① 모세는 이집트에서 고통받는 히브리인들을 해방시키는 하느님의 구원사업에서 대리자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②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의 유일신교 확립에 기여하였다. 모세는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통해 이스라엘의 신은 야훼 하느님 한 분뿐임을 선포하였다. ③ 이를 통해 모든 부족을 하나로 결속시켜 민족공동체 형성에 기여하였다.
   신명기를 비롯한 4권의 성서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유지에 관한 광대한 법전이다. 십계명, 율법, 제도 등은 모세를 통해 드러내 보이신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기억하게 하는 것임과 동시에 하느님이 바라시는 바의 공동체 생활에 필요한 생활규범이었다는 사실에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를 기억함으로써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시킨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기억하며, 그 일에 동참하게 되며, 현세적 고통과 환난을 극복할 힘을 갖게 된다. 신약성서에서 모세는 낡은 종교를 대표하며, 그의 계약과 율법이 종종 대비되긴 하지만, 그리스도에 의해서 모세율법이 폐지된 것이 아니라 성취되었다는 것이 신약의 정신이다(마태 5:18). 그리고 신약의 이러한 정신은 민족종교로서의 유태교에서 세계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로 이행과 완성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성 예레미야 예언자(San Geremia Profeta 축일:5월1일,게시판1741번)
Geremia = esaltazione del Signore, dall’ebraico
활동연도 BC 650-588년경 
그의 이름의 뜻은 “야훼께서 던지다, 급히 보내다"이다.그를 눈물의 예언자, 수난의 예언자로 부른다.
 예레미야는 힘과 물질보다는 영성적 가치를 더 중대시하였고 또한 영혼이 하느님과 맺은 내밀한 관계를 밝혔다 하여 이 예언자는 그리스도교의 새 계약을 준비한 인물로 통한다. 말씀에 대한 정열적인 사랑과 말씀 때문에 당한 그의 고통은 이사야서 53장의 야훼의 종의 모습을 예고하였으니, 예레미야는 그리스도의 형상(形象)을 앞질러 보여 준 것이다.(가톨릭대사전에서).
 
시나고가    라틴어  Synagoga  영어  Synagogue 
   그리스어로는 집회라는 의미를 갖지만, 성서에서 시나고가라고 표현할 때는 유태교의 회당을 가리킨다. 유태인들은 여기서 예배를 보며 재판을 열기도 하였다. 그 뒤에는 그리스도 교회에 대해 유태교라는 의미로 전용되었다. 
회당   한자  會堂  라틴어  Synagoga  영어  Synagogue 
   그리스어로 시나고가(synagoga)는 ‘집회’(集會)또는 ‘집회하는 곳’을 의미하며, ‘유태인이 기도하는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탈무드에서는 ‘집회를 여는 집’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신약성서에서 회당이란 말은 가르침을 베풀기 위한 유태인의 집회(마태 4:23, 마르 1:21, 루가 4:15, 요한 6:60)나 종교적 집회를 행하는 건물(마태 10:17, 루가 7:5, 사도 22:19)을 가리켰다. 그 밖에도 광의로 기도하는 장소를 가리키기도 하였다. 즉 해변, 강가, 옥외 등에서 기도하면서 여기도 역시 회당이라는 의미에 포함된다(사도 16:13 · 16). 회당은 ① 족장시대에 이미 있었다는 설(說), ② 모세시대 설(신명 31:11 · 12에 의거하여), ③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에 정착하던 때부터 있었다는 설, ④ 솔로몬왕이 신전을 건축한 이후부터라는 설(시편 74:8에 입각하여), ⑤ 바빌론 유폐에 의해 이스라엘인이 신전예배를 할 수 없게 된 이후 도시의 교회, 강가, 집 등에 모여 율법서를 읽으면서 함께 기도하다가 예루살렘에 귀국한 뒤에도 이 같은 집회를 계속한 것이 그 기원이라는 설이 있지만 ③이 가장 유력하다. 그리스도와 사도시대에는 팔레스티나 곳곳에 회당이 세워지고, 이밖에도 바빌론, 시리아, 소아시아, 마케도니아, 그리스, 이탈리아, 아프리카 등지에도 세워졌다. 회당은 장방형(長方形)으로 장축(長軸)은 예루살렘쪽을 향하도록 하고, 그 끝에 모세의 율법을 넣어두는 상자가 놓여졌다. 그 앞에는 ‘영원의 빛’(Ner Tamid)이 빛나며, 전면의 중앙에는 바닥보다 좀 높은 제단이 있고, 그 위의 책상에는 율법서와 예언서가 놓여 있다. 입구에는 물그릇이 놓여 있으며 들어오는 사람들이 손을 씻었다. 원래 회당은 성전의 보조건물이었지만 후대에는 성전 대용으로 쓰였다.(가톨릭대사전에서)
 


무덤지역을 지나가면서 보았는데 지하에는 가족 납골당이 있고, 그 위에 사람들이 집을 지어 살고 있었는데
족장법이 통용되던 곳이며 카이로시의 1/4을 차지한다고 한다. 지붕없는 건물도 많았다.
이슬람인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사원을 지어 봉헌하면 천국에 간다고 믿고 있다고 한다.
 
카이로 시내를 버스를 타고 가며 73년 이스라엘과 4차 전쟁때
시나이 반도를 되찾은 기념으로 김일성이 지어주었다는 전승기념관을 보았다.
이집트의 무바라크 대통령은  김일성 사망(94년)후 95년 4월에서야 남한과 대사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카이로시의 도로는 고급 주택지 같은 곳에는 차선이 있지만 대부분 차선이 거의 없었고
자동차들이 매우 오래된 것들이 많았다.
여자들의 활동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으며, 대부분 집안에서 지내는 것 같았다.
 

 
(3)이집트 박물관(The Egyptian Museum)을 방문하였다.
현재의 구 카이로(Old Cairo, 현지어로는 Misr al)는 이전 바빌론이었으며 아랍어로 카헤라 '승리'를 뜻한다.
투탕카멘의 황금관으로 잘 알려진 이집트 고고박물관을 방문하였다.
박물관 정면 연못에는  파피루스와 연꽃이 심어져 있으며 남과 북 이집트 전부를 상징한다.
 
1902년 11월 15일에 개관되었으며107개의 전시실이 있고 1층에는 거대한 조각상이 있고
이층에는 소규모의 조각상과 보석류, 투탕카멘 왕의 유품, 미이라가 전시되어 있다.
소장품의 수는 10만점가량된다고한다. 투탕카멘왕의 황금마스크는 박물관에서 가장 인기있는 유물이다.
어린나이로 숨진 소년왕으로 이집트 제18왕조 제12대 왕(재위 BC 1361∼BC 1352)이었다.
투탕카멘의 관은 9겹으로 되어있었다.
 
고대 이집트인은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고, 양자의 분리는 죽음이지만,
사자(死者)는 영혼이 머무는 곳인 시체가 멸하지 않고 공물(供物)을 받을 수 있다면
죽은 자도 저승에서 계속 산다고 믿어 피라미드를 건조했다.
시체를 미라로 만든 이유라든가, 또는 사자의 영원한 집인 분묘를 정비한 이유가
모두 이러한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집트의 신학은 그리스 신학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피라밋은 무덤이기 이전에 신전이며
내부에는 가장 중요한 지성소가 있으며 파라오는 부활하여 신이 된다고 믿고있었다고 한다.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파라오는 하늘에서 땅을 지배하는 신들의 후손으로서,태양신 라(Ra)에 의해 점지되며,
신과 같은 자격으로 지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인 이집트 지역을 보호하는 것이 그의 임무라고 여겼다.
또한 이집트 고대 신화에 따르면, 파라오는 신과 여인의 결합의 산물인 빛과 같은 존재였다.
 
사도 마르코가 이집트 선교시 이집트인들은 무염시태와 부활사상을 그대로 믿고 있었으며,
예전부터 '라' 태양신의 정령(후에 룩소에서는 아몬)이 신의 능력으로 여인에게 들어가 파라오가 부활,
환생하는 것으로 믿었다고 한다.
이집트인들은 서기 500년까지 이시스라는 여신과 성모님과 동일시 하였다고 한다.
마돈나의 고대 이미지는 바로 호루스에게 젖을 먹이는 이시스라고 한다.

사도 마르코는 이집트의 토속신앙과 분리가 안되는 상황에서,
구두수선공의 묵묵히 더럽고 낮은자리에서 일하는  모습에서 교훈을 얻고 선교활동을 계속하였으며,
후에 알렉산드리아에 역병이 들었을때 기독교인들은 그자리에 남아 병구완하며 봉사하였고
그 이후 90%가 기독교로 개종하였다고 한다.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4월25일, 알렉산드리아 의 첫 주교)
 
신화(神話)는 보편적이면서도 개별적인 것이다.
신화는 전승민족의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기때문에 개별적인 것이라고만 생각할 수 있다. 지리적으로 격리되어 있는 다른 민족들 사이에 동일 유형의 신화가 전승되기도 하고 주변 민족들 사이에서도 같은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의 창세신화가 바이칼 호 인근에 거주하는 몽골의 부리아드족과 일본의 오키나와, 멀리는 불가리아에서도 확인되는 것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상동적인 자연환경과 경제토대, 역사적.문화적 경험의 공유등과 같은 요인들에 의해 이른바 원신화(原神話 : Ur-Myth)를 기반으로 자기네 민족의 개별적 신화를 형성해 나가기도 하는 것이다.
(신화의 세계.박종성,강대진공저,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
 
신화 神話  영어  myth  독일어  Mythos 
신화는 현존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긴요하다.
뿐만 아니라 존재 자체의 중심에서 삶에다 목적과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고대의 신화들, 그리고 그렇게 아득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영원히 사라지거나 지워지지 않는 신화의 껍질을 새롭게 벗겨 낼 수 있는 심성의 시적(詩的) 능력을 회복하는 일이 필요하다. 종교화의 직접적인 관련에서 볼 때 신화의 제의 수행에서 음송되든가 경전에 문자적으로 정착하든가 하면서 전승된다. 신화와 제의와의 관계는 상보적(相補的)인 것이다. 그러므로 신화의 구체적 실연(實演)이 제의인지, 제의의 실연에 대한 의미론적 해석이 신화인지를 우선순위를 기준하여 서술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의미있는 일도 아니다. 그러나 경전에 수렴되어 있든, 음송되는 것이든 간에 신화는 종교 속에서 하나의 신성사(神聖史)를 구성한다. 그리고 그 신성사는 곧 구속사(救贖史)의 내용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신화는 시간의 비롯함에서 일어난 원초적인 사건을 이야기하는데, 그러한 이야기는 곧 신비를 계시하는 일이며, 그렇게 계시된 초월적 주체의 형태는 삶의 모델이 되고, 바로 그 모델에 따라 사는 것은 원초적인 존재에의 참여이기 때문이다. 실재에의 참여, 즉 거룩한 것의 모방이나 재연, 그리고 그것의 지속 또는 끊임없는 반복이 곧 신성사의 전개이고 구속사의 실현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신화가 주장하는 것에 의거하여 사는 삶은 인간이 자기의 종교성을 표현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신화적인 방법을 통하여 궁극적인 진리를 파악하려는 태도와 종교는 거의 동일시되고 있다.
이같이 신화의 종교적 기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화가 단순한 해석 이상의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화는 그것 자체가 ‘구속의 힘’인 것이다. 그러므로 신화를 구체화하는 것, 그것은 일상적인 실존 안에 영원한 실재를 들여오는 역동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물론 신화가 그것이 계시하는 영원한 실재와 동일한 것일 수는 없다. 그러나 신화의 서술과 그 실재와의 상징적 이미지를 통한 내적 연관은 신화의 실재성을 확인해 주고 있는 것이다. (가톨릭대사전에서)
 


(4)나일강에서 돗단배를 타다.
나일강은 남쪽상류에서 북쪽으로 흐르며 공식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긴강이라고 한다.
기원전 4000년경에 나일강 유역에서 발생한 나일강 문명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농경 문명으로 메소포타미아, 인더스,황하문명과 더불어 세계 4대문명이라 일컬어진다.
 
이집트를 가리켜 "나일강이 준 선물"이라한다.
나일강가에는 세계 유수의 호텔들이 있었고 나일강에서 돗단배를 타보았다.
사공은 흥이 아주 많은 사람이었는데 이집트 음악을 틀어놓고 같이 춤을 추길 권하곤 하였다.
 

 
(5)성요셉성당의 소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였다.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성지관구에 속하는수도원 성당이다. 
성당 마당에 사부 성프란치스코의 성상이 있어서 참 반가웠다.
이요한신부님과 이세라피노신부님의 공동집전으로 미사를 봉헌하였다(연중 제27주간 토요일 미사).
이 성당은 이 지역에 사는 로만가톨릭 교우들이 미사를 봉헌하는 성당이기도 하다.
 
성 프란치스코의 찬미송
지극히 거룩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로 세상을 구속하셨기에,
저희는 여기와 온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에서
주님을 흠숭하며 찬양하나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7-28
27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28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성요셉 성당의 제대 뒤에 아기예수님을 안고 계시는 주보성인 성 요셉
 
"우리 순례여정의 인도자이신 성 요셉,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 성탄 팔일축제 내 주일,혹은12월30일,게시판1543번.
*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3월19일.게시판1669번.
* 노동자인 성 요셉 축일:5월1일.게시판1740번.
 

 
성요셉 성당 제의방에 계시는 성 프란치스코와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성상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게시판1403번, 오상 축일:9월17일,게시판1369번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축일:6월13일,게시판 1813번.
 
 
 
이집트 술탄과 성 프란치스코의 만남
-성프란치스코는 이슬람교인들과의 새로운 대화 방법을 실현하였다.
 
성지의 프란치스칸 현존 
 많은 사람들이 "우리 예수님의 땅"에 있는 성지들이 지금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알고 싶어하고,
그 관심 또한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 프란치스코의 아들들이 지난 8세기 동안 교회의 이름으로
성지에서 봉사해 왔다는 것입니다.
이 특별한 사명을 이미 오래 전 부터 '성지 수호 사명'(Custody of the Holy Land)이라고 일컬었습니다.
작은형제(프란치스칸)들은 오늘날에도 충실한 선교사들이자 가톨릭 교회의 교계를 옹호하는 자들로서
자신들의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성지보호관구(Custody of the Holy Land)의 간략한 역사적배경
성지에서의 프란치스칸 현존은 작은형제회(Ordo of Friars Minor)가 시작할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성프란치스코에 의해 1209년 창설된 수도히는 곧바로 해외 선교를 시작하였다.
1217년 총회의 결정으로 수도회는 관구(the Province of the Holy Land)가 탄생하였다.
십자군의 확장으로 인해 성지 관구의 사도직은 지중해 남동부 연안, 곧 이집트에서부터 시작해서
그리스  저 너머 지역까지 관할하게 되었다.
 
성지관구는 자연스럽게,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던 땅과 우리의 구원이 성취된 장소로 이루어졌다.
이런 이유로 성지관구는 '모든 관구들의 진주(眞珠)'로 간주되었고,
수도회가 선교를 전 세계적으로 넓혔을 때는 '모든 선교의 진주(眞珠)'로 간주되었다.
이 칭호는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이 지역은 성프란치스코가 직접 방문하였던 곳이다.
그는 1219년에서 1220년 사이 몇개월 동안 이집트,시리아 그리고 팔레스타인으로 여행을 하였다.
이 시기가 바로 성 프란치스코와 '멜렉 엘 카멜'(Melek-el-Kamel) 이집트 술탄의
그 유명한 만남이 이루어진 때였다.
이 놀라운 사건은 오랜 세기 동안 동방의 프란치스칸 선교 사도직 안에 깊이 스며 들었다.
이들은 '비신자들'이든 '갈라진 형제들'이든 상관없이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갖고 일했다.
 
야코의 성 요한 지역이 이슬람교인들의 손에 넘어감에 따라(1291년) 이스람교의 팔레스타인 지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당시 동방 관구 본부가 있었던 사이프러스로 피해 있던 프란치스칸들은예루살렘 뿐 아니라
팔레스타인 지역에 있는 성지들에서의 현존을 확장해 나가기 위해 모든 가능한 계획들을 세우고 실천해 갔다.
그리스도교인들은 공식적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에 들어오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던 상황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은 그곳에서 계속 현존했고 가능한 많은 일을 했다.
예를들어 1322년부터 1327년 까지 형제들이 주님의 거룩한 무덤 성지에서 봉사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1333년에 작은 형제들은 최후의 만찬 성지를 확보하고 거기에 수도원을 세웠다.
같은 시기에 이슬람교 당국자들은 형제들을 주님의 거룩한 무덤성지의 '공식거주자들'로 인정해 주었다.
교황 클레멘스 6세는 1342년에 <Gratias Agimus>와 <Nuper Carissimae>라는 칙서를 통해,
형제들에게 성지(the Holy Land)를 맡아줄 것을 공적으로 명하였다.
성지에서 봉사소임은 작은형제회 어떤 관구출신 형제라도 받을 수 있었으며,
봉사를 하는 동안에는 '예루살렘의 시온산 수오원 원장(Guardian-수호자)'의 법적 권한 하에 있었다.
성지에서의 프란치스칸들의 계속적인 현존과 더불어 그들이 해 온 복음화의 투신과
그리스도교적 가치의 향상은 지역 교회가 그 틀을 갖추고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이것은 1847년에 라틴 총대주교좌의 회복을 이루게 한 동기가 되었다.
그후 성지 보호관구는 교회로부터 받은 명령에 기초를 둔 특별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 역할이란 교회에 순종하고 교회와 일치하는 정신 안에서 교회 사목자들과 협력하고,예루살렘 뿐 아니라
성지보호 관구가 일하고 있는 모든 나라의 성직자들과 신자들에게 협조하고 봉사하는 것이었다. 
현재 성지보호 관구는 실질적으로 작은형제회의 자치관구이다.
 
클레멘스 6세 교황의 칙서 반포 650주년(1992년 11월21일)을 기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작은형제회 총봉사자 헤르만 샬뤽(Hermann Schaluck)형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성지가 우리 형제회에 맡겨진 역사적 사건을 상기시키며,
성청에 의해 주어진 사명을 계속적으로 따르고 그 사명에 항구할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므로 형제들은 성청의 뜻으로 권한을 부여받음으로써 성지들을 '보호한 자들'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성지보호 관구의 현재
이 관구에는 32개국으로 부터 300여명의 수도자들이 와 있는데,
이들은 서로 다른 수녀회 소속의 130명의 수녀들과 함께
이스라엘, 요르단,이집트,시리아,레바논,사이프러스 그리고 로도스 섬에서 일하고 있다.
주님의 거룩한 무덤성지와 베들레헴 성지, 그리고 나자렛과 같은 주요 대성전들 이외에도
성지보호 관구는 74개의 중요 성지들을 돌보고 있다.
(성지보호관구 관구봉사자 쥬세뻬 나짜로(Giuseppe Nazzaro)ofm 엮음,성지의 프란치스칸 현존, 
번역:호명환가롤로ofm,정장표레오ofm, 편집:김창재다미아노ofm, 프란치스코출판사,2005년,7쪽-11쪽에서)
 
 
 
 
저녁식사는 점심식사를 했던 암몬식당에서 한식으로 했으며
이집트 카이로 Hotel Heliopolis 에서 숙박하였다. 
 
 
 
 
참고:
기행문중에 축일 게시판 번호는 인창동성당게시판 번호입니다.
*의정부교구 2지구 인창동성당 게시판 바로 가기 
*의정부교구 홈페이지  http://u.catholi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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