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재울성당 게시판

* 마지막 로맨티스트...

인쇄

이정표 [zanac] 쪽지 캡슐

1999-12-19 ㅣ No.629

 

♥ Love story -마지막 로맨티스트 ♥

 

 

< 1 >

 

 

 

" 처음 뵙겠습니다. 이 시대 마지막 로맨티스트입니다. "

 

 

친구가 그랬습니다. 자기 아는 선배중에 참 신기한 사람이 있다고.

 

전 그냥 호기심에 한번 보고싶다고 했는데, 그가 제게 처음 한 말이 바로

 

’마지막 로맨티스트’란 말이었습니다.

 

정말 이상한 사람도 다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짜고짜 로맨티스트라니...

 

아무래도 왕자병에 단단히 걸려있든지 아니면 자기 멋에 사는 시덥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참 아름답지 않습니까? 저 별들.. 저 별빛은 아마 10만년, 아니 더

 

이전에 내려온 빛일지도 모르는데.. 그 빛을 보고 있는 우리는 그만큼의

 

시간을 보고 있는 셈이 될 테니까요.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대개 아름답게 마련이죠. "

 

 

 

저건 또 무슨 책에서 읽은 대사인지.

 

전 시큰둥하게 대답했습니다.

 

 

 

" 아.. 네. 뭐... 그렇네요. "

 

 

 

" 당신도 아름답습니다. 저 별빛보다 더. "

 

 

 

뜨아... 그 말을 들었을때 처음 든 생각은 어떻게 이런 느끼한 말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솔직히 처음만나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하지만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걸........

 

 

< 2 >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게 연락이 왔습니다. 다시 만나자구요.

 

그말도 얼마나 화려하게 말을 하던지..

 

전 그렇게 끌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싫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만나러 갔었죠. 밥을 먹고, 잠시 길을 거닐며 그는 제게

 

이야기했습니다.

 

 

 

" 진정한 로맨티스트는 함부로 자신의 로맨스를 만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이라면 제 로맨스를 받아주실 수 있을 것 같네요.

 

지금 제 귓가를 스치고 간 바람도 그러던걸요.

 

이 여자, 꽉 잡으라고. "

 

 

 

아무래도.. 솔직이.. 이 남자 제비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이런 사람 직접 보셨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느끼하겠습니까.

 

 

" 저기요.. 원래 말을 그렇게 하세요? "

 

 

" 네. 왜냐하면 전 로맨티스트거든요. "

 

 

"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안그래요? "

 

 

" 뭐라고 그래도 상관 없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만 괜찮다면. "

 

 

으.. 영화에서 이런 대사 하는거 보면 참 멋지고 그랬는데 실제로

 

들으니까 진짜루 닭살 쫘악~ 이었습니다.

 

한참을 그러고 가다가 그가 제게 묻더군요.

 

어떤 영화를 보고 싶냐구..

 

그래서 그냥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했더니, 씨익 웃으면서 극장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전 같이 가면서 걱정이 됐어요. 그 영화가 하도 인기라서 예매를

 

하지 않으면 보기 힘들다고 친구가 그랬거든요.

 

하지만 그는 제가 보고 싶은 영화를 어떻게 알았는지 미리 예매를

 

해 놨더라구요. 자리도 참 좋았습니다.

 

극장이 좁긴 했지만 앞자리가 비어있어서 머리 때문에 화면이 안보이구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영화를 보다가 그가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그가 벗어놓은 옷이 떨어져서 주워올리다가 우연히 주머니를 보게

 

되었는데... 뭐가 잔뜩 들어있었습니다.

 

호기심에 살짝 봤는데.. 세상에.

 

 

 

그날 개봉된 영화가 종류별로 전부 예매되어 있었습니다.

 

그것도 4장씩. 우리 두사람 자리하고 앞자리까지

 

전부 예매를 해 놓은거였습니다.

 

 

 

나중에 집에 오면서 그에게 물어봤습니다.

 

어떻게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예매할 수 있었냐구.

 

알면서 물어본 건데..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 운이 좋았습니다. 다행스럽게도요... "

 

 

 

그 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사람 진짜 로맨티스트일지도

 

모르겠다고......

 

 

< 3 >

 

 

그 날은 제가 너무 바빠서 오랜만에 만난 날이었어요. 좀 어색한 느낌도

 

들어서 별로 말도 안하구 그냥 밥이나 같이 먹고 헤어지게 되었는데,

 

그가 그러는 겁니다.

 

 

" 지금 뭐가 제일 하고 싶어요? "

 

 

" 네? 저.. 글쎄요... "

 

 

" 아무거나 대답해 보세요. "

 

 

" 그냥 생각이 나는 건.. 놀이기구를 타고 싶긴 한데..

 

 

너무 늦어서 못 가겠죠. 1시 다 되어가니까."

 

 

" 잠깐만 실례할께요. "

 

 

" 네? 어.. 어머!! "

 

 

그는 갑자기 저를 번쩍 안더니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저희를 쳐다보았고 저는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힘이 드는지 씩씩거리면서도 계속 뛰었습니다.

 

 

" 저기.. 이제 됐으니까 내려주세요~ "

 

 

" 재미있으세요? "

 

 

" 네, 고마워요. 그러니까.. 내려주세요. "

 

 

" 알겠습니다. "

 

 

그는 땀이 송글 송글 맺힌 얼굴로 저를 내려주고는 씨익 웃었습니다.

 

갑자기 그러는 법이 어디 있냐구 핀잔이라도 주려고 했는데 그의 얼굴을

 

보니 차마 그 말도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휴지를 꺼내 그의 얼굴을

 

닦아주며 생각했습니다.

 

아무래도 이 사람을 좋아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고 말이에요.

 

 

< 4 >

 

 

제 생일날, 처음으로 약속시간에 늦은 그는 얼굴이 말이 아니었어요.

 

보기 좋던 그의 뺨이 움푹 들어가있었고, 손은 상처 투성이었습니다.

 

 

" 어머. 왜..왜 이렇게 됐어요? "

 

 

" 좀.. 그럴 일이 있었습니다. 괜찮으면 어디 좀 같이 가실까요? "

 

 

" 네? ...네. "

 

 

그러더니, 그는 저의 손을 잡고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거에요.

 

전 이해할 수 없었죠. 왜 이 사람이 이러는지..

 

워낙 다른 사람하고 다르기는 했지만

 

그 날은 정말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차를 타고 한참을 가서 내린 곳은

 

강원도에 있는 이름모를 어느 산이었습니다.

 

 

 

전 아무 말 없이 제 손을 잡고 앞으로 가는 그의 등을 보며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왠지 그냥 따라가야 할 것 같아

 

힘든 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날은 벌써 어두워져서 아무것도 안보이는데 그는 많이 와 본 길인듯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돌아 산 중턱에 닿자,

 

그는 제게 이야기했습니다.

 

 

 

" 이제 다 왔어요. "

 

 

" 여긴 왜 온 거에요? "

 

 

" 그 이유는.. 내일 아침 해가 뜨면 알 수 있을 겁니다. "

 

 

" 어머. 잠깐요. 그럼 오늘 여기서 밤을 새야 되요? "

 

 

" 네. "

 

 

" 저.. 안되겠어요. 집에 가야 해요. "

 

 

" 절 믿어주시고.. 여기 앉아서 아침 해를 바라봐 주실 수 없으세요?

 

  제발.. 부탁드릴께요. "

 

 

 

솔직이.. 로맨티스트인 이 사람이 제 생일에 무얼 선물할지 내심

 

기대했었는데,이건 실망도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산 속에서 같이 밤을 새자니.

 

하지만 차도 끊겼고.. 설마 이 사람이 나쁜 짓 할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고.. 어쩔 수 있나요. 밤을 새는 수 밖에.

 

그리고 바위 위에 우두커니 앉아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전 그의

 

어깨를 베고 잠이 들었어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함께 그가 제 귀에 살며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 시간 됐어요. 이제 일어나서 앞을 보세요. "

 

 

전 부시시 눈을 뜨고 앞을 보았어요.

 

그리고 전....

 

입을 다물수 없었습니다.

 

 

 

아침 해가 은은히 비추는 산 중턱에는, 전부 장미로 가득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건 모두 장미, 그것도 빨갛게 핀 장미가 아침 햇빛을

 

담은 이슬을 머금고 있는 모습이라는 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풍경보다도 더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 세.. 세상에...이 장미들이 어떻게 여기에.. . "

 

 

" 우리나라에 단 한 곳뿐인 야생 장미 집단 서식처에요. 전에 무슨

 

  책에선가 본 기억이 있어서.... 당신에게 꼭 보여주고 싶어서 데리고

  

  왔는데..

 

  꺾여진 100송이 장미보다 피어있는 1000송이 장미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아 참, 벌써 하루 늦어버렸지만, 생일 축하해요. "

 

 

 

여길 찾으려고 이 근처 산을 다 헤메느라고 얼굴이랑 손이랑 엉망이

 

되어버렸다며 쑥스럽게 웃는 그를 보며...

 

이젠 그의 말이 느끼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좋았습니다.

 

 

그리고 저도 느끼한 말 한마디 했습니다.

 

 

" 어쩔 수 없이 사랑하게 만들어 버리는군요, 당신이란 사람은.... "

 

 

< 5 >

 

 

 

영원한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이고

 

슬픈 사랑만이 영원할 수 있다면서.. ...

 

......................................

 

 

이제야 진정한 로맨티스트가 될 수 있겠다고 그는

 

파리해진 얼굴로 이야기했습니다.

 

50년을 사랑해 주었으면서도

 

더 사랑해 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

 

먼저 죽게되어 미안하다며..........

 

..................................

 

 

 

주름진 제 손을 쓰다듬으며 미안하다고...

 

.......................................

 

오랜 세월 함께 해주어 고맙다는 말을 하며

 

당신보다 먼저 그 곳에 가서

 

장미밭을 만들고 있을테니 나중에..

 

.................................

 

천천히 오라며....................

 

.................................

 

그는 눈을 감았습니다.

 

까맣게 검버섯이 피어있는 그의 얼굴에서

 

아주 오래전 그 날 아침,

 

장미보다 더 아름답던 당신의 얼굴을 떠올리며..

 

.............................................    

 

 

 

당신을 사랑합니다.

 

영원히.......................................

 

 

 

나의 마지막 로맨티스트를.....................

 

 

 

 



45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